I Became a Dark Fantasy Villain RAW novel - Chapter 477
477화
디아나가 야트막한 모래 언덕의 정상에 발을 들였다.
사아아아아-
건조하고 서늘한 바람이 그녀의 전신을 훑고 지나간 건 바로 그 직후였다. 모래가 잔뜩 섞여 있다는 건, 이제는 새삼스럽지도 않은 일이었다.
가면 너머의 눈매를 찌푸린 그녀가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
훨씬 더 완만한 곡선들을 그리는 검은 사막이 펼쳐졌다. 곳곳에 모래를 머금은 바람이 아지랑이처럼 일렁여서, 기름으로 뒤덮인 찰랑대는 바다처럼 보이기도 했다.
모래 폭풍이 새롭게 빚어낸 사막의 풍경.
동시에, 죽음의 사막으로 이어지는 길목이기도 했다.
“내가 미쳤지….”
탄식하듯 읊조린 디아나가, 완만하게 이어진 내리막으로 터덜터덜 걸음을 옮겼다. 이건 그녀가 선택한 경로였기 때문이다.
언제 벗어날지도 알 수 없는 사막을 무수한 마물들과 싸우며 종단하는 것보단 이쪽이 살아남을 확률이 조금이나마 더 높을 것 같았으니까.
어쨌건 그들은 이미 대마족을 하나 토벌했으며, 이안은 단신으로도 마족을 여럿 쳐죽인 전과까지 있지 않던가.
‘…내 대답을 이미 예상하고 물은 걸지도.’
물론 그렇다 해도 암담하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니 받아들이고 적응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디아나 역시, 이 마경에서 끈질기게 버텨온 생존자가 아니던가.
콰직-
이어진 소리에 상념에서 깨어난 디아나가 앞을 바라보았다.
선두에서 걸음을 옮기던 세렌이 소검을 땅에 내리찍고 있었다. 삐죽한 칼날은 작은 강아지만 한 검은 전갈의 등판을 꿰뚫은 채였다.
이안의 말대로 길이 열려있긴 했지만. 전갈이나 지네, 갑각 벌레 따위의 작은 위협들은 여전히 남아있었다.
모래 폭풍과 유충들에게서 살아남은, 그러나 야나르 타쉬의 권속이 되기에는 부족한 것들.
“세렌 경. 잠깐.”
꿈틀대는 전갈을 짓밟아 으깨버리려던 세렌이 멈칫했다. 그녀가 뒤로 물러나자, 발소리도 내지 않고 달려온 디아나가 전갈의 곁을 스쳐 지나갔다. 그녀의 손에 들린 소검이 날카로운 호선을 그렸다.
서걱-
전갈의 바짝 치솟은 꼬리가 잘려나갔다. 그 위, 열매처럼 묵직하게 솟은 독침이 허공을 돌았다. 미끄러지듯 멈춰서며 낚아챈 디아나가 턱을 까딱였다.
“이제 됐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며 앞으로 나선 세렌이 전갈의 몸통에 박힌 소검의 자루 끝을 다시 짓밟았다. 꽈드득, 칼날에 짓눌린 전갈의 몸통이 완전히 짓이겨졌다.
까드득….
그사이, 디아나는 어린아이의 주먹만 한 독침의 갑피 한복판에 소검의 칼날을 천천히 찔러넣었다.
이윽고 칼날이 반대편 갑피에 닿자, 그녀는 칼을 천천히 바로 세웠다. 칼날을 타고 끈적한 독액이 천천히 흘러내렸다.
디아나가 신중하게 손목을 움직이는 사이.
“세렌 경.”
뒤편에서 루시아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녀는 뒤따라 언덕을 내려오는 모로의 안장 앞에 앉아 있었다. 고삐를 쥔 그녀의 왼팔에는 식량 꾸러미와 가죽 수통이 매달려 있었다.
“이리 올라오세요. 이제 제가 앞으로 갈 테니까.”
그녀가 코와 입을 가리는 철 가면을 덮어쓰며 덧붙였다.
소검의 칼날을 모래에 문질러 닦던 세렌이 고개를 저었다.
“괜찮습니다. 사제님.”
“아직 한 번도 안 쉬었잖아요. 혹시, 이안 님과 같은 말에 타는 게 부담스러워서 그런 건가요?”
안장에는 이안이 앉아 있었다.
허리만 펴고 있을 뿐, 온몸을 이완시키고 눈을 감은 채였다.
깊은 명상에 잠긴 것이다. 벌써 몇 시간 째였다.
일행 모두가 강권한 결과였다.
모래 폭풍 속에서 홀로 마족과 싸운 건 물론이고, 야나르 타쉬와의 전투도 앞두고 있지 않던가.
다른 사람은 몰라도, 이안만큼은 가능한 한 최상의 상태여야 했다.
지금 일행이 모로를 호위하듯 나아가고 있는 것도 그래서였다.
‘저 흔들리는 안장 위에서 어떻게 저럴 수 있는 건진 모르겠지만….’
생각하면서도, 디아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소검 끝의 독침을 툭 털어냈다. 불길하게 번들대는 칼날을 차근히 눈에 담는 채였다.
“그건 아닙….”
대답하다 멈칫한 세렌이, 이윽고 머쓱한 미소를 입가에 걸었다.
“…사실, 조금은 그렇습니다.”
“그래도 올라오시오.”
이안의 목소리가 번진 건 바로 그 직후였다. 세렌의 어깨가 순간 들썩대고, 디아나도 홱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여전히 눈을 감은 이안을 잠시 올려다본 세렌이, 이윽고 한층 더 어색한 미소를 입가에 걸었다.
“깨어… 계셨습니까?”
“좀 전부터. 이쪽으로 오시오.”
이안이 천천히 눈을 뜨며 덧붙였다.
“어차피 할 말도 있었으니까.”
여전히 지저분한 몰골이긴 했지만. 디아나를 돌아보는 그의 눈빛은 아주 맑고 고요해져 있었다.
디아나가 고개를 끄덕이자 마주 고개를 까딱인 그가 기지개를 켰다. 절그럭대는 소리와 함께 전신에서 모래 먼지가 흩날렸다.
“그러시다면… 실례… 하겠습니다….”
소검을 검집에 되돌린 세렌이 걸음을 옮겼다. 그사이 루시아가 이안에게 수통과 식량 꾸러미를 내밀었다.
“피로는 좀 풀리셨나요?”
“아주 말끔하게. 별 일은 없었나 보네.”
“아직은 전혀요. 명령하신 대로, 모로도 계속 일직선으로 걸었고요. 귀찮은 녀석들이 있긴 하지만, 신경쓰지 않으셔도 돼요.”
덧붙인 그녀가 훌쩍 옆으로 뛰어내렸다. 교대하듯 세렌을 지나친 그녀가 디아나 쪽으로 멀어졌다.
몸을 숙인 이안이 세렌에게 왼손을 내민 건 바로 그 직후였다.
“…감사합니다, 성자 대행.”
양손으로 아주 정중하게 붙잡은 세렌이 훌쩍 그의 뒤로 올라탔다.
본래도 깍듯하던 그녀는 한층 더 공손해져 있었다.
“드시오.”
이안이 그녀의 품에 수통과 식량 꾸러미를 안기듯 건넸다.
남은 보존 식량이 많지 않았지만, 지금은 아껴 먹을 때가 아니었다.
“예… 감사히….”
세렌이 고개를 숙이는 사이, 이안은 다시 앞을 바라보았다.
목을 풀듯 이리저리 돌리는 채였다. 물론 그 와중에도 불길하게 휘몰아치는 적갈색의 하늘과 검은 아지랑이가 일렁이는 사막을 차례로 눈에 담는 채였다.
언덕을 내려가고 있어 시야가 그리 넓지는 않았지만, 어쨌건 적어도 아직은 별다른 이상은 없어 보였다.
‘아니….’
이안의 눈매가 설핏 가늘어진 건, 다시 정면을 바라보았을 때였다.
‘…아예 없진 않네.’
저 먼 하늘이 불길하게 일렁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안은 죽음의 사막이 생각보다 훨씬 더 가까워졌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의식을 집중하는 것만으로도 야나르 타쉬의 존재감이 느껴졌다. 전보다 더 선명해진 건, 놈의 혼돈을 흡수했기 때문일 터였다.
…이제 길어야 한나절 정도인가.
내심 읊조리는 이안의 눈매가 가늘어지는 사이.
“그… 성자 대행의 비밀은….”
뒤에서 세렌의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이어졌다. 이안이 고개를 살짝 돌리자, 씹고 있던 육포를 꿀꺽 삼킨 그녀가 덧붙였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전하께선 명예를 아는 분이십니다. 결코 성자 대행의 동의 없이 발설하거나 볼모로 삼지 않으실 겁니다.”
갑자기 웬 뜬금없는 소리인가 했더니. 옅은 실소를 흘린 이안이 입을 열었다.
“전하가 그런 분이라는 건 이미 알고 있소. 어쩌면 내가 마법사라는 것도 이미 눈치채고 계실지도 모르고. 내가 경에게 하려던 말은 그런 게 아니오.”
“그럼… 달리 어떤 말씀을….”
세렌이 날카롭고 긴 눈을 깜빡이며 되물었다. 이안이 턱을 살짝 까딱였다.
“야나르와 싸우면서 알게 된 건데, 경의 성흔에 스며든 내 혼돈이 조금씩 빠져나가고 있소.”
“……!”
“당장은 아니겠지만, 머지않아 다시 성흔의 통제력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오.”
“잠시, 확인해 봐도 되겠습니까?”
눈을 동그랗게 떴던 세렌이 되물었다. 이안이 어깨를 으쓱였다.
“관조만 할 거라면.”
“물론입니다. 성자 대행.”
세렌이 눈을 감았다. 혼돈의 정수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는 걸 보면, 이번에는 정말 허튼 짓은 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성자 대행의 말씀대로군요.”
이윽고 다시 눈을 뜨며 세렌이 내뱉었다. 입가에 번지는 미소를 감추지 못한 채였다. 거무스름한 입술 사이로 날카로운 이빨들이 설핏 드러났다.
“성흔에 뒤엉킨 혼돈의 크기가 줄어들었습니다. 물론 아직은 여전히 섣불리 건드릴 수 없는 상태인 것 같긴 합니다만….”
“그러니까 야나르 타쉬와 조우하더라도 괜한 짓은 하지 마시오. 이게 내가 하려던 말이오.”
히케드에게 생존을 알릴 수만 있어도 귀찮은 과정들을 여럿 생략할 수 있게 되지 않겠는가. 물론, 그녀가 권속이 될 걱정을 할 필요도 없어질 터였다.
“사려 깊은 조언 감사드립니다. 성자 대행.”
깍듯하게 고개를 숙이며 말한 세렌이, 이내 공손하게 덧붙였다.
“하지만 성자 대행을 비롯한 다른 분들이 목숨을 걸고 싸우시는 동안 저만 손을 놓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이안은 딱히 놀라지 않았다. 이미 어느 정도는 예상하던 반응이었다.
“그럼 뭐, 고기 방패라도 하시면 되겠군.”
“고기… 방패요?”
그가 덧붙인 말에, 세렌이 어리둥절하게 눈을 끔뻑였다.
“루시아가 디아나가 위험에 빠지면 몸을 던져서라도 지키란 말이오. 아니면 뭐, 반대로 둘을 던져 버리시던가.”
태연하게 내뱉은 이안이 세렌의 눈을 바라보며 한쪽 어깨를 으쓱였다.
“그건 충분히 명예롭잖소?”
“그런 역할이라면…. 예. 기꺼이 하겠습니다.”
세렌이 고개를 끄덕였다. 빈말은 아닐 터였다. 그녀는 이미 히케드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내던지려 한 전적이 있지 않았다.
“외람된… 질문입니다만….”
고개를 끄덕인 이안이 시선을 돌릴 찰나, 세렌의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이어졌다. 이안이 또 뭐냐는 듯 바라보자, 그녀가 슬며시 목소리를 낮추며 덧붙였다.
“야나르 타쉬는… 어떻게 상대하실 생각이십니까? 아무리 성자 대행께서 위대한 초인이시라 해도… 쉽지 않은 싸움이 되실 텐데요.”
“글쎄….”
나지막이 읊조린 이안이, 이내 어깨를 으쓱였다.
“가진 걸 총동원해 봐야겠지. 부족하면, 더 투자해야겠고.”
“……?”
“경은 경의 역할에만 충실하시오. 나도 그럴 거니까. 그거면 됐잖소?”
“…예. 주제넘은 질문을 드렸군요.”
“그렇다고 또 사과하진 마시고.”
고개를 숙이는 세렌에게 덧붙인 이안이 다시 앞을 돌아보았다.
슬며시 입맛을 다시는 채였다. 사실 명확한 답이 없는 건 그도 마찬가지였다.
상대는 드넓은 모래의 바다를 헤엄쳐 다니며, 심지어 고대 마법까지 사용하는 거대 괴수가 아닌가.
직접 부딪쳐 보기 전까지는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었다. 그저, 게임에도 존재하던 보스이니 공략법이 반드시 존재하리라 추측할 뿐이었다.
물론, 살아남기 위해서는 반드시 적응해야 할 막연함이기도 했다.
앞으로 마주칠 거의 모든 보스전은 이런 식으로 치르게 될 테니까.
‘비벼 볼 언덕이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이안의 시선이 슬며시 오른손으로 향하는 그때.
“물러나!”
디아나의 짧은 외침과 함께 파공음이 번졌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린 이안의 눈에 화들짝 몸을 날리는 루시아와 팔을 내뻗은 디아나. 그리고 그녀가 내던진 비수와 달려드는 마수가 동시에 들어왔다. 길쭉한 갑각 다리를 활짝 펼친, 변이된 대게처럼 보이는 놈이었다.
콰직-
강판처럼 뾰족한 돌기가 잔뜩 돋아난 몸통 한복판에 비수가 틀어박혔다. 추진력을 잃고 추락하는 마수에게 달려든 디아나가 그대로 발을 치켜들어 힘껏 짓밟았다.
“…고마워요, 디아나.”
바닥을 구른 루시아가 몸을 탁탁 털며 일어섰다.
“민망하네요. 기척을 전혀 못 느꼈어요.”
“당연한 거야. 나도 직전에야 간신히 느꼈으니까. 인간인 네가 느낄 수 있을리가 없지.”
으깨진 시신에서 비수를 회수한 디아나가 칼날을 탁 털며 혀를 찼다.
“귀찮네. 이렇게 계속 신경을 곤두세우고 이동하다간, 도착하기도 전에 녹초가 되겠어.”
비수를 허리춤의 가죽띠에 회수하며, 그녀가 슬며시 이안을 돌아보았다.
“…그 뱀 새끼가 있다면 훨씬 더 편해질 텐데 말야.”
뇌리로 킥킥대는 웃음소리가 번진 건 그때였다.
-아쉽네. 벌써 나한테 적응해 버리다니.
디아나가 멈칫했다.
이안도 슬쩍 미간을 좁히며 손목을 내려다보았다.
…이 새낀 또 언제부터 깨어 있었지.
-그래도 뭐, 마냥 나쁘진 않네. 어쨌든 나를 기다리게 됐다는 거잖아?
능청스럽게 덧붙이며, 요그가 이안의 팔목 보호대 틈으로 기어 나왔다.
모로조차 전신이 모래투성이가 된 상태인데도, 녀석의 비늘은 티끌 하나 없이 매끄러웠다.
유독 윤기가 흐르는 것처럼 보이는 건, 혼돈을 양껏 섭취한 덕분이리라.
-그래서. 이 사막을 벗어나기로 한 거야, 친구?
이안의 팔뚝을 천천히 기어 올라가며 요그가 물었다. 이안이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그 반대야. 야나르 타쉬의 권역으로 가고 있어.”
-그래…? 잘됐네. 그러길 바랐거든.
뇌리를 간지럽히듯 키득댄 요그가, 문득 이안을 올려다보며 보랏빛 혀를 날름댔다.
-내 새로운 재주를 선보일 기회가 생길테니 말야.
새로운 스킬을 말하는 것이리라. 이안이 내심 생각하던 비빌 언덕이기도 했다. 내색하지 않고 어깨를 으쓱이며, 이안이 덧붙였다.
“당장도 필요해. 네 그 초감각을 발휘해 보라고.”
기분 좋게 혀를 날름댄 요그가 다시 이안의 팔뚝을 기어 올라갔다.
-기꺼이 그러지, 친구.
서로를 돌아본 루시아와 디아나가 슬며시 고개를 끄덕이는 가운데, 이안의 견갑 위에 자리를 잡은 요그가 연신 혀를 날름댔다.
-흠… 예상보다 더 재미있는 걸.
이윽고 녀석의 은근한 속삭임이 일행들의 뇌리로 파고들었다.
-냄새가 나긴 하는데, 방향도 숫자도 가늠할 수가 없거든. 아무래도… 너무 많아서 그런 것 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