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Dark Fantasy Villain RAW novel - Chapter 48
048화
“루시아를, 그 먼 곳까지?”
“그래. 그래서 네게 부탁하는 것이다, 이안.”
이안은 잠시 침음했다.
가 불가를 떠나, 루시아와 화로의 사원 사이에 아무런 연관성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야만 하는 이유가 있소?”
“여러 이유가 있지. 그래… 긴 이야기가 될지도 모르는데, 괜찮겠느냐.”
“가장 중요한 것부터 시작하신다면.”
이안이 탁자에 올려져 있던 술병을 들었다.
무려 포도주였다.
“경도 한잔하시겠소?”
“그래. 그게 좋겠군.”
확실히 보통 일은 아니군.
이안은 잔에 술을 따라 건넸다.
메브가 술잔을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얼마 후면, 루시아는 제국으로 보내지게 될 것이다. 네가 전에 예언했듯, 폐하께서 전쟁을 포기하지 않으셨으니까.”
“제국으로 말이오…?”
“그래. 표면적으로는 입양이지만… 사실상 조공이다. 볼모라고 할 수도 있겠군.”
“제국은 아겔 란에 관심도 없을 텐데.”
“네 말대로다. 하지만 전쟁은, 이야기가 다를 수도 있지. 물론 지금까지처럼 방관할 수도 있겠지만. 저들이 개입할 충분한 명분이 될 테니까.”
“흐음…”
이안은 게임일 때를 떠올렸다.
제국은 변방의 왕국들에 관심이 없었다. 조공을 바치지 않는다거나 반기를 들지만 않는다면, 그들이 뭘 하건 아예 신경도 쓰지 않는 수준이었다.
그들의 관심은 오로지 검은 벽과 그 너머에 있을 뿐이었다.
왕국간의 전쟁도 마찬가지였다.
제국은 전혀 개입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그게 조공 때문인지, 늘 그랬듯 관심이 없어서인지는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이참에 아예 왕국들을 정벌해 버릴지도 모르지. 그래서 폐하는, 제국의 유력한 제후 가문에 따로 조공을 바치기로 하셨다.”
“…언제 그렇게 결정한 거요?”
“내가 돌아오기 전부터. 전쟁을 준비하기 시작하면서, 제국 내부에서 아겔 란을 비호해 줄 우방이 필요하다 여기셨겠지.”
전쟁에 어지간히 진심인 새끼군.
코웃음 친 이안이 내뱉었다.
“하지만 왜 하필 루시아지?”
“그건….”
술을 한 모금 마신 메브가 이안을 바라보았다.
“루시아의 핏줄에 왕가의 피가 흐르기 때문이다. 친모가 폐하의 여동생이셨지.”
아, 정략결혼이군.
놀랍지도 않은 일이었다.
결속을 단단히 하는 데에 피를 섞는 것만큼 확실한 방법은 많지 않으니까.
“공녀께선 루시아를 낳고 돌아가셨지. 숙부는… 그 후 몇 년 뒤에 돌아가셨고. 폐하께선 루시아를 조카로 여기지 않으셨다. 누이의 목숨을 앗아간 원수이자 눈엣가시라 생각하셨지.”
“흐음….”
미워하던 조카를 팔아 넘긴다라.
이해는 가는 이유였지만.
“루시아는 리우렐가의 사람이기도 하니, 충분히 거절할 수 있으셨을 것 같소만.”
“폐하께서 청하셨다면 그랬겠지. 하지만 저쪽에서 루시아를 원했다. 해서, 달리 선택권이 없었지.”
“루시아여야만 하는 이유가 더 있는 모양이군.”
“루시아는… 축복받은 아이다.”
“축복?”
“가문 어른들의 말씀에 따르면, 루 엔테르의 은총을 받았다고 하더군.”
“……!”
의아해하던 이안의 얼굴에 비로소 놀람이 번졌다.
마력을 다루는 재능을 타고난 이들이 신의 권능을 흉내 내기 시작한 것이, 이 세계 마법사의 기원.
그런 주제에, 그중에서도 특별한 재능을 타고난 자들은 신의 은총을 받았다고 여겼다.
루 엔테르는 열정과 광기의 신.
그의 은총을 받았다는 건, 적색 마법을 다루는 재능을 타고났다는 뜻이었다.
아마 원소 친화력 특성과 비슷한 부분이 있을 터였다.
해당 속성의 마법을 사용할 때, 마력 소모량은 줄여 주고 성능은 높여 주는 특성이었으니까.
정확한 차이는 직접 경험해 보지 못해서 알 수 없었지만.
“불을 다루는 걸, 직접 보셨소?”
“그래. 두 살쯤인가, 허공에 불을 피우더군. 물론 아무도 그 아이에게 마법을 가르쳐 주지 않았다. 그게 어떤 의미인지는, 이안 네가 더 잘 알겠지.”
잘 알지. 개 부럽네, 진짜.
헛웃음을 지은 이안이 말했다.
“…정말 대단한 가문이오. 성기사에 마법사까지 배출하다니.”
“이건 왕가의 영향이다. 초대 국왕께서도 그랬고. 그 후로도 대를 건너 은총을 받은 자손들이 나왔다고 하더군.”
이안의 헛웃음이 짙어졌다.
특별한 능력과 재능을 가진 자들이 실존하는 세상인 만큼, 혈통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애초에 귀족이라 불리는 자들의 핏줄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시조가 무언가 특별한 능력을 타고났던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왕위에 올랐다. …마력의 황혼기가 오기 전까지는 말이야.”
아, 이젠 이 말까지 나오는군.
이안은 술을 한 모금 마셨다.
이 암흑시대를 관통하는 말 중 하나인 마력의 황혼기는, 말 그대로 마력의 시대가 저물어 가고 있음을 의미했다.
저 검은 벽이 대륙을 가른 이후, 마력이 옅어지기 시작했으니까.
마법사들은 전처럼 마법을 남용할 수 없게 됐고, 자연스럽게 입지도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이 세계의 마법사들이 유독 많이 타락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마법적인 재능을 타고나는 이들의 숫자도, 당연히 줄어들었으리라.
“루시아는 자신의 재능에 대해 정확하게 알지 못해. 가문의 모두가 언급하지 않았지. 불경하게 비춰질 수도 있으니까. 물론, 루시아를 지키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왕께선 재능이 없으신 모양이오.”
“그래. 선대께서도 그랬지. 그러니 더더욱 루시아를 없는 사람 취급하신 건지도 모르겠군.”
“제국으로 치워 버리고 나면 속이 후련해지시겠군. …그래서, 그 꼴은 보고 싶지 않으신 거요?”
부정할 줄 알았건만.
술을 한 모금 더 마신 메브가 쓴웃음을 지었다.
“아예 그런 마음이 없다고는 하지 못하겠군. 루시아는 내게 남은 마지막 혈육이니까. …하지만 단지, 그래서만은 아니다.”
메브의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버논도 루시아가 걱정되었던 모양이야. 제후 가문에 대해 조사해 놓은 문서가 있더군. 그걸 읽고 나니, 루시아를 보내지 말아야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흐음.”
“마법에 조예가 깊은 가문이었어. 재능을 타고난 아이들과 인재들을 자주 영입한다더군. 회색 마탑과도 긴밀한 관계인 것으로 보이고. 하지만 그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그들이 무슨 연구를 하는 건지는 알려진 바가 없다더군. 가문 내부의 일을 모두 불문에 부치는 거야.”
이안의 눈썹이 꿈틀댔다.
“그 가문의 이름이 혹시… 라르무트요?”
“그걸 어떻게… 하긴. 제국에서도 가장 강대한 가문 중 하나이니, 너라면 알 수도 있겠군.”
“이런….”
이안은 저도 모르게 탄식했다.
술병이 절로 입으로 향했다.
“…루시아도 예외는 아니겠지. 아마 그곳으로 보내진다면 더는 연락을 할 수도, 어떻게 지내는지도 알 수 없게 될 거야.”
실제론 그보다 최악이오.
이안은 한숨을 삼켰다.
아직은 먼 훗날의 일이긴 하지만.
라르무트가는 가문의 본거지가 통째로 마경이 될 운명이었다.
마법사의 악몽. 회색 마탑의 타락이 밝혀지는 계기가 되는 공간이기도 했다.
그 안의 끔찍한 실험체들을 떠올린 이안이, 포도주를 한 모금 더 들이켰다.
술의 맛이 느껴지지 않았다.
루시아가 그곳으로 가게 되다면, 그녀도 그 실험체들 중 하나가 될 게 분명했으니까.
어쩌면 이미, 게임을 통해 만난 적이 있을지도 몰랐다.
“그러니 차라리, 화로의 사원으로 보내려는 것이다. 루 엔테르의 은총을 받은 아이이니, 사제들도 극진히 보살피겠지. 그들의 가르침을 받을 것이고. 타고난 재능을 만개할 기회를 손에 넣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해서….”
메브가 이안을 바라보았다.
“네게 부탁할 수밖에 없었다. 이안.”
“사정은 알겠소만….”
침음한 이안이, 이윽고 그녀를 마주 보았다.
“북부는 여기서 아주 먼 곳이오. 여정이 순탄할 리 없지. 물론 고되기도 할 것이오. 여자아이에겐 특히. 물론 나도 마찬가지고.”
“…그렇겠지.”
“나는 그렇다 치고, 루시아 본인도 그걸 감당할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할 것이오.”
징징거리는 애를 달래가며 그 먼 길을 가는 건, 사실상 불가능했다.
“그 부분은, 내가 직접 대답을 듣겠다.”
“여정 자체도 문제요. 나는 사원으로 가는 가장 빠르고 안전한 길이 무엇인지 모르오. 여정이 지나치게 길어지거나, 자칫하면 아예 잘못된 길로 가게 될 수도 있소.”
“으음….”
생각지 못한 부분인 듯 잠시 침음한 메브가, 이윽고 말했다.
“아는 북부 출신의 길잡이가 있긴 하다. 내키지는 않지만.”
“그게 누구요?”
“미구엘.”
“……!”
이안의 표정이 순간 묘해졌다.
아겔 란에 정착하리라던 미구엘의 말이 떠올라서였다.
메브가 말을 이었다.
“북부 산맥 출신이라더군. 거기서 반평생을 살았다고 했어. 또다시 어려운 부탁을 하는 건 면목이 없으나… 네가 그렇듯, 미구엘 만큼 믿을 수 있는 길잡이는 또 없을 것 같군.”
“…하.”
이안이 짧은 웃음을 흘렸다.
이 얘기를 들은 미구엘이 어떤 표정을 짓게 될지 궁금했다.
“그럼, 그것도 경이 확답을 받아 주시오.”
“그리하겠다. …또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느냐?”
“있소. 바로 경이오.”
이안이 메브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우린 떠나면 그뿐이지만, 뒷감당은 경이 하게 되실 텐데. 괜찮으시겠소?”
메브가 일말의 머뭇거림도 없이 대답했다.
“나는 더 잃을 것이 없다, 이안. 루시아라도 평온한 삶을 살게 할 수 있다면, 그걸로 족해.”
“틈만 나면 목숨을 버리려 드시는군.”
이안은 술병을 손가락으로 툭툭 두드리며 생각에 잠겼다.
이윽고 그가 메브를 바라보았다.
“그럼 이렇게 합시다. 만약 내가 의뢰를 받는다면 말이오.”
“……?”
“나와 미구엘이 경에게 추가적인 보수를 요구한 거요. 이를테면, 이 저택이라든가.”
“원한다면 줄 수 있다만.”
“말이 그렇다는 얘기요. 경은 당연히 거절하셨고….”
이안이 어깨를 까딱였다.
“나와 미구엘이 루시아를 납치해 떠난 거요. 그 아이의 재능을 알고 있으니, 팔아 넘기기 위해서. 용병이라면 충분히 할 법한 행동이지.”
“……!”
그제야 이안의 속셈을 눈치챈 듯, 메브가 눈을 치켜떴다.
이안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그러면 경도 피해자가 되시는 거잖소. 나와 미구엘이야 뭐, 다신 아겔 란에 발을 들이지 않으면 그만이고. 경은 이제 단죄의 사도도 아니니, 이 정도 거짓말은 괜찮으시잖소?”
슬쩍 입술 끝을 말아 올린 이안이 덧붙였다.
“오히려 여신께서도 기꺼워하실 거요. 옳은 선택을 했다고.”
“…이안, 너는 정말이지.”
입을 몇 차례 달싹이던 메브가, 불현듯 다가와 그를 감싸 안았다.
지금 자신이 느끼는 감사의 마음을 표현할 방법이 이것밖에는 없다는 듯이.
깜짝이야.
순간 커진 이안의 눈앞에, 퀘스트 창이 이어졌다.
화로의 불씨.
창을 닫으면서, 이안이 속삭였다.
“아직 할 말이 남았소만.”
“…아.”
메브가 그제야 굳어졌다.
귀가 붉게 달아오른 그녀가, 어색하게 팔을 풀며 물러났다.
피식한 이안이 덧붙였다.
“가장 중요한 부분을 아직 얘기하지 않았잖소.”
“……? 아, 그래. 보수를 정하지 않았군.”
“거기다 저번 의뢰의 보수도, 아직 받지 않았소.”
국왕이 포상을 내리긴 했지만, 그건 일종의 보너스였다.
메브의 눈빛이 결연해졌다.
“내가 줄 수 있는 거라면 무엇이든 주마. 무엇을 원하느냐?”
“어쩌면 지금 경에게는 가장 가치 없는 것일지도 모르겠소만…….”
그렇게 운을 뗀 이안이, 원하는 것을 말했다.
그건 메브의 큰 눈을 더 커지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잠시 굳어 있던 그녀가, 이윽고 내뱉었다.
“…진심으로 하는 말이냐?”
“받아들이시겠소?”
“네가 원하는 것이 그것이라면… 그래. 네게 주겠다. 반드시.”
이안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맺혔다.
“계약은 성립되었소.”
***
다음 날.
느지막이 일어난 이안은, 방을 나서자마자 메브가 이미 미구엘에게 이야기를 했다는 걸 알게 됐다.
빗자루질을 하는 그의 얼굴이, 말 그대로 죽상이었기 때문이다.
“일어나셨소.”
이안을 발견한 미구엘이 한숨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피식한 이안이 물었다.
“어쩌기로 했냐?”
“어쩌긴. 나 아니면 누가 그 먼 길을 안내하겠소? 염병할. 이제야 좀 뿌리내리고 살아보나 했는데. 다른 곳도 아니고 북부로 돌아가게 생기다니. 아무래도 나는 길바닥이나 떠돌다가 객사할 운명인 모양-”
미구엘의 한탄이 이어졌다.
코웃음 친 이안이 말을 잘랐다.
“헛소리할 시간이 떠날 채비나 제대로 해 둬라. 네가 해줘야 할 게 많아.”
“형씨가 완치되셔야지 준비든 뭐든…. …설마, 벌써 다 나으셨소?”
이안이 붕대가 칭칭 감긴 팔과 다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움직였다.
“그래. 아닌 척하고 있을 뿐이지.”
“말도 안 돼…. 의원이 몇 달은 요양해야 할 부상이라고 했소. 내가 보기에도 그랬고. 그런데, 벌써 다 나으셨다고?”
“내가 회복력이 좀 좋거든. 거기다 나만 다 나은 것도 아니고.”
“아니, 나리는 신의 사도시잖소. …혹시, 형씨도 내가 모르는 사이에 그렇게 되신 거요?”
“말 같지도 않은 소릴.”
진짜라는 걸 알게 된 미구엘이 땅이 꺼질 듯 한숨을 내쉬었다.
적어도 한동안은 더 이곳에 머물 줄 알았던 게 틀림없었다.
“하루 반 주지. 떠날 채비를 확실하게 해 둬라.”
“염병할… 알겠소. 그리고 루시 아가씨가 나리의 방에서 기다리고 계시오. 한 시간쯤 됐을 거요.”
“그럼 좀 더 기다리게 두지 뭐. 난 지금 꼭 아침을 먹어야겠거든.”
며칠만 지나도, 여기서 먹은 음식들이 사무치게 그리워질 테니까.
식사를 마친 이안은 느긋하게 메브의 방으로 향했다.
메브와 루시아는 물론, 필립까지 그를 맞이했다.
복잡한 감정이 담긴 필립의 시선을 무시한 채, 이안이 말했다.
“대화는 잘 끝내셨소?”
“그래. 루시아도 원한다는군.”
이안은 의자에 가만히 앉은 루시아를 돌아보았다.
무표정한 얼굴의 그녀는, 장인이 공들여 빚어낸 도자기 인형 같아 보이기까지 했다.
요 녀석이 천재 마법사란 말이지.
생각하며, 이안이 입을 열었다.
“고될 거다. 네가 어리다고 배려받을 수도 없을 거고. 죽음을 보게 될 일도 많을 거야. 돌이킬 수도 없다. 중간에 다시 돌아오게 되는 일은, 절대로 없을 테니까.”
잠시 루시아의 눈을 헤집듯 응시한 이안이 덧붙였다.
“그런데도 정말, 가고 싶으냐?”
“…제국으로 간다고 해서, 크게 다를 것 같지는 않아요.”
특유의 고저 없는 목소리로 대답한 루시아가, 메브를 돌아보았다.
“화로의 신전으로 간다면, 적어도 제 이름은 지킬 수 있겠죠. 저는 리우렐로 살고 싶어요. 라르무트가 아니라.”
메브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거참 애 어른다운 발언이군.
고개를 끄덕인 이안이, 이윽고 루시아의 길고 붉은 머리를 가볍게 쓸어내렸다.
“그렇다면 먼저, 이 머리부터 잘라야겠군. 아주 짧게.”
루시아의 고개가 홱, 그에게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