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Dark Fantasy Villain RAW novel - Chapter 487
487화
일대에 불던 바람이 비명에 휩쓸리듯 사방으로 밀려났다.
“……!”
풍압에 루시아의 상반신이 한순간 휘청댔다. 그녀의 전신을 감싼 불사자의 두건 망토가 흐릿한 마력을 머금고 넘실대는 가운데.
부오오- 오오오-
꿈틀대던 야나르 타쉬가 힘없이 고개를 치켜들며 울음을 토해냈다.
비명을 멈춘 이안의 고개가 옆으로 홱 돌아간 건 거의 동시였다.
네 개의 안광이 일순간 가늘어졌다가, 뒤이어 맹렬하게 타올랐다. 축 늘어져 있던 그의 몸이 활짝 펼쳐졌다.
“—–!”
대기를 찢어발기는 듯한 포효가 뒤를 이었다. 소용돌이치며 번지던 서로 다른 색의 혼돈이 두꺼운 동심원을 그리며 번져 나갔다.
쿠웅- 우지직…!
옆으로 간신히 치켜들었던 야나르 타쉬의 머리가 다시 짓눌리듯 땅에 처박혔다. 터져 나간 몸통 역시, 주위가 허물어지듯 더 부서져 내리고 있었다.
콰아아아-
그 와중에도 이안의 몸을 지탱하는 두 가닥의 촉수는 여전히 야나르 타쉬의 내부로 이어져 있었다.
오히려 이안의 몸을 더 위로 밀어 올리고 있기까지 했다. 이제는 하늘을 향해 포효하는 그의 등 뒤로 여러 가닥의 촉수들이 날개처럼 일렁였다.
쿠득… 쿠드득…
뒤이어 부서진 야나르 타쉬의 몸통 사이로 균열 같은 보랏빛이 번지기 시작했다. 루시아의 눈에는 보라색 뿌리가 번지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고오오오…
변화는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이안의 머리 위. 잿빛으로 넘실대던 하늘 한복판이 짙은 보라색으로 물들기 시작한 것이다.
이안의 포효 사이로 세렌과 모로의 고통스러운 비명이 흐릿하게 뒤섞였다.
“이안 님… 정말로…?”
하지만 마력이 일렁이는 망토를 두른 루시아의 시선은, 이안에게 못 박힌 것처럼 고정되어 있었다.
그녀의 눈에 비친 이안은 지금, 야나르 타쉬의 권역을 침탈하는 것처럼 보였으니까. 심지어 놈의 혼돈을 이용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야나르 타쉬를 죽이지 않은 건, 놈의 혼돈이 흩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인 것이다.
“—-!”
그리고 그건, 이안이 완전히 혼돈에 삼켜졌다는 증거로도 충분했다.
본래의 그라면 대마족을 산채로 제물로 삼는 끔찍한 짓은 절대 벌이지 않을 테니까.
이 의식이 끝나면, 죽음의 사막이 새로운 대마족의 권역으로 거듭나게 되리라는 뜻이기도 했다.
물론, 그렇게 되도록 지켜보기만 할 수는 없었다.
“기다리세요… 이안 님…!”
이윽고 나지막이 읊조리며, 루시아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이안을 중심으로 혼돈 섞인 광풍이 매섭게 휘몰아치고 있었지만, 그녀는 간신히 균형을 잡고 땅을 딛고 일어섰다.
“제가 어떻게든….”
이를 악문 채 씹어 뱉으며, 루시아가 걸음을 내디뎠다.
휘청댄 건 잠깐이었다. 그녀는 망토의 앞섬을 단단히 여미며, 시선을 대마족에게 고정한 채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루시아에게는 당연한 선택이었다.
북부의 초인이자 백금룡의 대행자라 불리던 저 새로운 대마족은, 동시에 그녀가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 중 하나였으니까.
“—-!”
그리고 그는 여전히, 허공에 부유하듯 떠오른 채로 울부짖는 중이었다. 야나르 타쉬의 몸에 번진 보랏빛 균열도 점점 더 넓어지고 있었고, 그건 하늘을 물들이는 보랏빛 소용돌이 역시 마찬가지였다.
“루시페르! 안 돼!”
디아나의 흐릿한 비명이 귓가를 스쳤지만, 루시아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아갔다.
지금 그녀의 머릿속에는 어떻게 해야 이안의 정신을 다시 일깨울 수 있을 지에 대한 생각만으로 가득했다.
대가가 필요하다면 그 무엇이라도 치를 각오가 되어 있었다. 그것이 자신의 목숨이라고 해도.
타타탓- 쿠확-
하지만 그녀는 얼마 지나지 않아 바닥을 나뒹굴어야 했다. 뒤에서 달려온 누군가가 그녀를 낚아채듯 끌어안으며 함께 땅을 굴렀기 때문이었다.
“미쳤어? 죽으려고 환장한 거야, 루시페르?”
디아나였다. 루시아를 땅에 짓누르듯 붙잡은 그녀가, 가면 너머의 눈을 부릅뜬 채 소리쳤다. 루시아가 그녀의 몸을 밀어내려 애쓰며 내뱉었다.
“놔요, 디아나…! 가야 돼요! 저 안에는 아직 이안 님의 영혼이 그대로 남아 있을 거라고요!”
“미친 소리 하지 마! 저걸 보고도 그런 말이 나와?”
디아나가 온몸에 힘을 주며 악을 썼다.
“우리가 알던 이안 호프는 없어! 저건, 저건 그저 혼돈의 화신이자 새로운 대마족일 뿐이라고!”
“아니에요…! 디아나는 몰라요. 이안 님의 영혼은 특별하다고요! 그러니까…!”
버둥대며 내뱉던 루시아가 뒤통수를 땅에 내려놓았다.
몸 상태가 온전하지 못한 지금은 디아나를 완력으로 떨쳐낼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서였다.
디아나의 찌푸린 눈을 올려다보며, 루시아가 한결 차분해진 목소리로 덧붙였다.
“…그러니까, 그냥 날 두고 도망쳐요. 디아나. 내가 성공한다면 알 수 있을 거예요. 그럼 다시 돌아와요. 아니면, 멈추지 말고요.”
“그럴 순 없어. 이안은 너를 나한테 부탁했으니까.”
팔에 힘을 풀지 않은 채 내뱉은 디아나가, 슬쩍 고개를 들어 이안 쪽을 일별했다.
“어쩌면 언젠가 저런 꼴이 될 걸 알고 있었던 걸지도 모르지. 어쨌든….”
그녀가 다시 루시아의 눈을 마주 보았다.
“넌 이제 내 책임이야, 루시페르. 그러니까 미친 짓은 용납 못 해. 일단은 여길 떠나야 돼.”
“그러니까, 미친 짓이 아니-”
“네 말대로 이안의 영혼이 그렇게 특별하다면, 혼자서도 제정신으로 돌아올 수 있을 거야. 요그도 함께 있을 테고.”
“하지만 뭔가… 계기가 필요할지도 모른다고요…! 외부의 충격이라도요!”
고개를 가로저으며 내뱉은 루시아가, 간청하듯 디아나의 눈을 올려다보았다.
“디아나, 제발…!”
“제가… 해보겠습니다….”
저 뒤편에서 억눌린 목소리가 번진 건 그때였다. 그리 크지 않았지만, 혼돈이 섞인 탓에 루시아와 디아나의 귀에 선명하게 파고들었다. 웅크린 채 비명을 내지르던 세렌이었다.
“성자 대행의 의식을… 일깨워야 한다면….”
지금도 고통을 간신히 억누르는 듯, 그녀의 목소리는 형편없이 떨리고 있었다. 전신에 맺힌 보라색 아지랑이 역시 불안정하게 일렁였다.
“어떻게든… 제가….”
철퇴를 지팡이 삼아 간신히 상반신을 일으킨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보랏빛 안광이 일렁이는 눈 아래로는 피눈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입가도 피로 번들댔다.
숨을 몰아쉬며 디아나와 루시아를 눈에 담은 그녀가, 와락 인상을 구겼다.
“그러니까, 두 분은 가십시오! 당장…!”
세렌이 이안에게 대적하는 건 불가능했다. 그녀는 이미 이안의 권속이 아니던가. 이 상황에서도 의식을 유지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대단하다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역시 바람 앞의 촛불에 불과할 터였다. 그녀는 그저 이안의 의지만으로도 무릎 꿇게 될 테니까. 루시아가 고개를 가로저은 것도 그래서였다.
“아니, 안 돼요. 세렌 경. 경은 절대로-”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이어진 디아나의 목소리에, 눈을 부릅뜬 루시아가 고개를 돌렸다.
“부탁이라니요? 의미 없다는 걸 디아나도- 잠깐만. 디아나. 디아나…?!”
이어진 말을 무시한 채 망토 아래로 팔을 밀어 넣은 디아나가, 루시아를 어깨에 훌쩍 들쳐 메며 일어섰다. 그대로 몸을 돌린 그녀가 달리기 시작했다.
“디아나! 놔요…! 제발!”
루시아는 온 힘을 다해 버둥댔다. 하지만 몸을 감싼 디아나의 팔은 물론이고, 몸에 칭칭 감긴 망토조차 떨쳐내지 못했다.
타타탓-
디아나는 루시아의 애원에 대꾸조차 하지 않고 내달렸다. 이안을 완전히 등진 채였다.
덕분에 오히려 루시아의 눈에는 그의 모습이 정면에서 보였다.
멀어지는 이안의 모습을 바라보던 루시아의 몸에 이윽고 힘이 풀렸다.
“…….”
어느새 이안의 포효가 가라앉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발아래 뿌리내린 보라색 혼돈은 야나르 타쉬의 전신을 뒤덮은 상태였다. 널브러진 사막의 대마족은 더 이상 꿈틀대지조차 않았다. 이안의 혼돈에 완벽하게 제압되어 권역의 제물로 전락한 것이리라.
고오오오…
이안의 포효가 잦아들고서도, 하늘의 보랏빛 소용돌이가 계속해서 커지고 있는 것만 봐도 분명했다.
그 아래, 촉수들을 날개처럼 펼친 이안의 몸은 한결 평온해 보였다.
주위로 보랏빛의 혼돈이 안개처럼 스멀스멀 번지고 있기까지 했다. 그리고 그 한복판에 일렁이는 네 개의 안광은 저 앞, 자신을 올려다보며 일어서는 흑기사에게로 향하고 있었다.
“존귀하신… 전하를- 위하여-!”
철퇴를 치켜들며 소리치는 세렌의 뒷모습과 휘청대며 일어서는 모로가 만들어내는 보랏빛이, 이어진 잿빛 모래바람에 가려졌다.
남은 건 이안이 뿜어내는 흐릿한 보랏빛뿐이었다.
“…이안 님.”
보랏빛 흉성이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루시아가, 이윽고 나지막이 탄식했다.
이제는 늦어버린 걸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생각이 뒤를 이었다. 하지만 당장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타타탓-
디아나는 여전히 멈추지 않고 달리고 있었고, 자신은 그녀의 어깨에 단단히 붙잡힌 상태였으니까.
디아나는 말 그대로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그저 가면 너머로 거친 숨을 몰아쉬며, 모래바람이 휘날리는 잿빛 사막 위를 경주마처럼 내달렸다.
하지만 그녀의 질주는 그리 오래 이어지지 못했다.
“안 돼… 안 돼…! 시발…!”
내달리는 그녀의 발이 땅속으로 파고드는 것 같더니, 뒤이어 급속도로 걸음이 느려지기 시작한 것이다. 디아나는 이를 악문 채 욕설을 토해냈지만, 내딛는 걸음이 느려지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철퍽- 철퍽…
모래가 단단하게 엉겨 붙으며 그녀의 발목을 빨아들이기 시작해서였다. 유사에 발을 들인 것이다.
디아나의 두 발이 모두 땅에 박힌 것처럼 붙잡힌 건 몇 초 지나지 않아서였다.
“이런 시발… 젠장…!”
발을 빼내려 애쓰던 디아나가, 결국 숨을 몰아쉬며 욕지거리를 토해냈다.
유사에 발을 들이고도 더 나아간 것만으로도 대단하다 할 수 있겠지만, 그런 사실은 그녀에게 아무런 위안도 되지 못했다.
“몇 걸음만… 더 갔어도….”
본모습을 드러낸 유사의 가장자리는 불과 몇 미터 앞에 있었기 때문이다. 나지막이 중얼대는 와중에도, 디아나는 자유로운 왼손으로 다리를 뽑아내려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하지만 물론 다리를 꺼내긴커녕, 모래 속으로 조금씩 파고드는 것조차 멈추지 못했다.
“…저기, 디아나.”
축 늘어져 있던 루시아가 입을 연 건 그때였다. 디아나 쪽으로 고개를 숙인 그녀가 말을 이었다.
“내가 도와줄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수작 부리지 마. 루시페르.”
혀를 차며 내뱉은 디아나가 낑낑대며 덧붙였다.
“널 밖으로 던지면 그대로 이안에게 돌아갈 거잖아.”
“…그러고 싶은 생각이 없는 건 아니지만, 안 그럴 거예요.”
루시아가 낮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디아나가 멈칫하는 가운데, 그녀가 조곤조곤 말을 이었다.
“그랬다가 내가 죽어버리면 디아나를 꺼내 줄 사람이 없어지는 거잖아요. 이렇게 된 것 자체가 나 때문인 것 같기도 하고요. 디아나 혼자였다면, 충분히 지나갈 수 있었을지도 모르잖아요.”
“그건… 그렇지만….”
디아나가 낮은 침음을 흘렸다.
틀린 말이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어차피 그녀 혼자서는 여기서 빠져나갈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어느새 종아리까지 모래 속으로 파고 들어가지 않았는가.
“다른 방법이 없잖아요. 밖으로 던져 줘요, 디아나. 망토 자락을 건네줄 테니까, 붙잡고요.”
“그럼 어쩔 수 없이….”
낮은 한숨을 내쉬며 대답하던 디아나의 목소리가 문득 잦아들었다.
가면 옆으로 드러난 귀가 쫑긋댄 것도 잠시, 홱 상반신을 돌린 그녀가 뒤를 바라보았다. 디아나의 전신이 딱딱하게 얼어붙은 건 바로 그 직후였다.
“설마…?”
뒤늦게 고개를 돌린 루시아 역시 눈을 치켜떴다.
모래바람을 뚫고 엄청난 속도로 가까워지고 있는 보랏빛 궤적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역시나, 세렌은 제대로 된 저항조차 하지 못한 게 분명했다. 간신히 눈을 깜빡인 루시아가 내뱉었다.
“서둘러야 돼요! 디아나…!”
하지만 디아나는 평소처럼 곧바로 움직이지 않았다.
“느낌이 안 좋더라니… 시발….”
오히려 몸을 축 늘어뜨린 채, 눈을 질끈 감으며 탄식할 뿐이었다.
루시아가 몸을 바둥댔다.
“한탄할 때가 아니에요! 이안 님이, 이안 님이 오신다고요…!”
“이미 늦었어, 루시페르.”
“…뭐라고요?”
이어진 목소리는 뜻밖에도 차분했다. 루시아가 뒤늦게 멈칫하는 가운데, 다시 눈을 뜬 디아나가 다시 허리를 본래대로 되돌리며 덧붙였다.
“날 빼낼 때쯤엔 이미 저 괴물이 여기 도착해 있을 거야, 그러니까….”
작게 한숨 쉰 디아나가, 그대로 루시아를 힘껏 내던졌다.
망토 자락을 나풀대며 날아간 루시아가 모래 위를 나뒹구는 사이, 그녀가 말을 이었다.
“너라도 도망가. 내가 시간을 벌어볼 테니까.”
“뭐라고요…?!”
망토 자락 사이로 팔을 내뻗은 루시아가 상반신을 벌떡 일으켰다.
어느새 양손에 투척용 비수를 뽑아 든 디아나가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딴 걸로 될지는 모르겠지만.”
죽음을 앞둔 순간에만 발휘되는, 이안을 놀라게 했던 그 모습이기도 했다.
물론 차분한 말투와 달리, 그녀의 눈은 두려움으로 떨리고 있었다.
그리고 루시아의 눈빛을 결연하게 만들기에도 충분했다.
“…내가 디아나를 버리고 가는 일은 없어요.”
내뱉은 루시아가 마저 몸을 일으켰다. 디아나의 눈매가 꿈틀대는 가운데, 그녀가 망토 자락을 활짝 펼치며 말을 이었다.
“이안 님의 영혼은 아직 저 안에 있을 거예요. 같이 일깨워 보자고요. 아니면….”
불그스름하게 마력이 감돌기 시작한 눈으로 디아나를 바라본 루시아가,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덧붙였다.
“같이 죽던가요.”
“루시페르… 넌… 정말이지….”
처한 상황을 잊은 듯 헛웃음을 흘린 디아나가 고개를 살살 가로저었다. 물론 그녀는 곧 다시 숨을 멈췄다. 루시아도 마찬가지였다.
쉬에엑-
뒤편에서 보랏빛이 삽시에 선명해졌기 때문이다. 비수를 으스러질 듯 움켜쥔 디아나가 상반신을 홱 돌렸다.
“……!”
비수를 치켜든 것도 잠시, 눈을 부릅뜬 그녀가 얼어붙었다.
허공을 가르며 엄청난 속도로 가까워지고 있는 대마족의 모습이 시야를 가득 채웠기 때문이었다.
치솟은 뿔들과 일렁이는 네 개의 안광. 그 아래를 가득 채운 이빨들. 더 크고 단단해진 상반신.
쿠확-!
이안이 촉수들을 날개처럼 활짝 펼친 건 바로 그 직후였다.
디아나와 루시아의 눈에는 한순간 그가 위로 훅 솟구치는 것처럼 보였다.
휘몰아친 돌풍이 둘의 전신을 휩쓸고 지나가는 가운데, 가장 긴 두 가닥의 촉수가 땅으로 사선을 그리며 뻗어 나왔다.
콰드득-!
이안의 몸이 허공에 붙잡혔다.
뒤이어, 불길한 보라색 안개에 휩싸인 거대한 대마족이 천천히 아래로 하강했다.
디아나의 불과 몇 미터 앞이었다.
그녀를 내려다보는 네 개의 안광은, 뜻밖에도 전혀 이글거리지 않았다. 아주 고요해 보였다.
“이… 안….”
하지만 그를 올려다보는 디아나의 눈에는 공포가 가득 번지고 있었다. 저 평온함은 그저, 다 잡은 먹잇감을 눈앞에 둔 포식자의 여유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깨달아서였다.
하지만 그 사실이 투쟁심이나 생존 본능을 불러일으키지는 않았다. 그저 완전히 압도되어 전의를 상실하게 할 뿐이었다.
팔을 축 늘어뜨린 그녀의 손에서 비수가 맥없이 떨어졌다.
“이안 님…!”
루시아의 다급한 외침이 터져 나온 건 그때였다. 한 손을 천천히 치켜들던 이안이 멈칫했다. 그의 시선이 디아나의 머리 너머로 향하는 사이.
“제발 정신을 차리세요…! 우리예요! 우리라고요…! 거기 계시잖아요! 그러니까 제발…!”
눈이 붉게 물든 루시아가 애원하듯 소리쳤다. 너풀대는 망토 아래로 양손을 활짝 펼친 채였다.
“…….”
이안이 치켜들고 있던 손을 내렸다. 루시아를 바라보는 네 개의 눈이 설핏 가늘어졌다. 흉악한 이빨이 잔뜩 돋아난 입꼬리가 부드럽게 말려 올라간 다음 순간.
쒸악- 콰직-!
아무런 예고도 없이 뻗어 나온 촉수 한 가닥이, 디아나의 옆구리를 그대로 꿰뚫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