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Dark Fantasy Villain RAW novel - Chapter 494
494화
“…예. 성자 대행.”
당황한 듯 눈을 끔뻑인 세렌이, 이내 고개를 숙였다. 이안이 한쪽 어깨를 까딱였다.
“그래도 뾰족한 수가 없다면, 다른 걸 고민해 봅시다.”
“…아닙니다. 이미 충분히 도움이 되었으니까요.”
하여간 기사들이란.
생각한 것과 달리, 이안은 어깨만 으쓱였다.
어차피 세렌은 계속 그의 권속으로 남을 것 같지 않던가.
중간에 목숨을 잃지만 않는다면, 어떤 식으로든 다시 엮일 일이 있을 터였다. 빚을 갚을 마땅한 순간 역시 있으리라.
“안전한 모양이에요.”
루시아가 끼어든 건 그때였다.
이안은 다시 저 앞으로 시선을 돌렸다. 길게 이어진 능선 위에 디아나가 서 있었다. 이쪽을 돌아보며, 양팔로 머리 위에 커다란 원을 그리는 채였다.
“잘됐네. 슬슬 출출했는데.”
대답하며, 이안이 고비를 가볍게 흔들었다. 모로가 기다렸다는 듯 속도를 높였다.
“이번 식사는, 디아나가 준비하게 하는 게 어때요?”
이안의 품에 등을 기댄 루시아가 넌지시 덧붙인 건 그때였다.
“주문을 연습할 기회를 주고 싶어서요. 이론은 이제 충분해졌거든요.”
“뭐 상관은 없다만… 굳이? 그래 봐야 하위 주문인데.”
이안이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루시아가 어깨를 으쓱였다.
“디아나는 저나 이안 님처럼 타고난 마법사가 아니니까요. 심지어 며칠 전까진 주문 이론의 기초도 잡혀 있지 않았다고요.”
“아하… 기초도 없이 마법을 쓴 거군.”
나랑 똑같았네.
이안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읊조리자, 루시아가 새삼스러운 눈빛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저희끼리 나누는 대화를, 전혀 귀담아듣지 않으셨군요.”
“뭐, 나도 할 게 있었으니까. 알잖아?”
이안이 선선히 대꾸했다. 그 역시 특훈에 몰두하지 않았던가.
훈련이 끝나고 나서도 한동안은 주위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머릿속에 쥐가 나는 것 같아, 반드시 명상을 해줘야 했으니까. 마력 탈진만큼 여파가 크고 길지는 않지만, 어쨌건 회복할 시간은 필요했다.
“디아나가 배운 건 요정에 맞게 개량하고 간소화한, 일종의 간이 주문이에요.”
고개를 끄덕인 루시아가 입을 열었다.
“기초가 부족해도 빠르게 익힐 수 있게 만든 거겠죠. 주문이 유출될 걱정도 덜고요.”
“주문 쟁이 다운 짓이네.”
“요정들이 익히는 주문은 거의 다 그런 식이라더군요. 주문을 배우려면 마탑과 계약해, 돈도 지불해야 하고요.”
“…그것도 주문 쟁이 답고.”
콧방귀를 뀌며 읊조린 이안이 이내 덧붙였다.
“어쨌든 의외네. 요정들은 마법에 일가견이 있는 줄 알았더니.”
“그건 옛날얘기죠. 요정들의 주문은 이미 오래전에 전부 제국의 소유가 되었어요. 디아나의 말에 따르면, 마탑들이 나눠 가지고 처음부터 자신들의 것인 양 행세한다더군요. 숨겨둔 전승 주문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뭐…”
루시아가 태연하게 어깨를 으쓱였다.
“그래 봐야 원로 요정들만이 은밀하게 알고 있겠죠. 어차피 제대로 마법을 다룰 수 있는 건 그들뿐이니까요. 마탑과 정식으로 계약해 이름을 올려야 하는 건 마찬가지겠지만요.”
“마법으로 목줄을 채운 거네. 하긴… 제국이라고 귀쟁이들을 믿진 않겠지.”
이안이 놀랍지도 않다는 듯 내뱉었다. 루시아가 풀썩 웃음 지었다.
“아마도요. 디아나도 거기까진 모르는 눈치였지만, 아마 추가적인 마력의 서약도 맺었을 거예요.”
그럼 그 녀석도 지금쯤 마탑과 계약을 맺었으려나.
모로가 불현듯 방향을 틀며 머리를 휘두른 건, 이안이 내심 은발의 원로 요정을 떠올리던 순간이었다.
콰직-
달려들던 모래 거미 한 마리가 녀석의 칼날 뿔에 그대로 썰려 나갔다. 땅에 떨어진 토막 하나를 냉큼 잎에 넣은 모로가, 턱을 움직이며 다시 몸을 틀었다.
녀석의 목덜미를 기특하다는 듯 토닥인 루시아가 덧붙였다.
“어쨌든, 디아나는 이제 걸음마를 떼는 수준이에요. 게다가 아시다시피 회색과 적색은, 마력을 다루는 방식에서부터 차이가 있잖아요.”
전혀 모르는데. 속으로만 읊조리며 어깨를 으쓱인 이안이, 이내 대답했다.
“뭐, 알아서 해. 태워 먹지만 않게 신경 써 줘.”
“걱정 마세요. 덜 익는 거면 모를까, 탈 일은 없을 것 같으니까.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구덩이는 평소처럼 파 주세요. 세렌 경.”
“예. 그러겠습니다.”
루시아가 뒤를 돌아보며 덧붙인 말에, 세렌이 고개를 끄덕였다. 슬쩍 혀로 뾰족한 이빨을 핥은 그녀가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작은 부탁을 드리자면… 덜 익은 걸 먹을 일은 없게 해 주십시오.”
“그것도 걱정마세요. 능숙한 마법사가 둘이나 더 있으니까요.”
루시아가 피식 웃으며 대답하는 사이, 안장이 뒤로 기울어졌다. 가볍게 달리던 모로가 어느새 모래 언덕으로 접어든 것이다.
짠내 섞인 바람이 얼굴을 스치고 지나가자, 이안의 미간이 슬며시 좁아졌다.
‘…젓갈 파는 시장 골목에서 이런 냄새가 났던 것 같은데.’
이제 해안선을 따라 걸을 테니, 이 냄새를 계속 맡아야 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빨리 코가 적응하길 바랄 뿐이었다.
“무슨 얘기를 나누면서 온 거야?”
언덕 아래를 내려다보며 기다리던 디아나가, 슬며시 옆으로 비켜서며 물었다. 이안이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네 얘기.”
“엥…?”
디아나가 고개를 갸웃하는 가운데, 모로의 걸음이 느려졌다. 안장의 기울기가 완만해지면서 언덕 너머의 풍경이 드러나고 있었다.
“이곳이… 고립된 바다로군요….”
루시아가 탄식하듯 읊조렸다.
언덕에서 이어진 모래사장 너머. 음산하고 이질적인 적막으로 가득한 남색의 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어둠과 뒤엉킨 듯한 수평선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호수라고 해도 믿겠는데.”
훌쩍 뛰어내린 이안이 읊조렸다.
이질적인 느낌이 드는 이유이기도 했다. 어둠 너머까지 펼쳐진 남색 수면 어디에도, 바다라면 응당 존재해야 할 파도를 찾아볼 수 없었으니까.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이지만, 해안 가로는 내려가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
옆에 선 디아나가 말했다.
이안이 고개를 끄덕이는 사이, 그녀가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그런데, 새삼스럽게 무슨 내 얘길 한 건데?”
“네가 이번 요리사라는 얘기.”
“요리사…?”
가면 너머의 눈매를 설핏 찌푸린 디아나가 시선을 돌렸다.
모로가 땅에 배를 깔고 주저앉는 가운데, 녀석에서 내린 루시아가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실전 연습을 해 봐야죠. 디아나.”
디아나와 눈이 마주친 녀석이 고개를 까딱였다.
“화염 방사 주문, 익혔잖아요?”
“암기만 한 거긴 한데….”
멈칫한 디아나가 웅얼댔다. 루시아 뒤편의 세렌을 슬며시 일별하는 채였다. 축 늘어진 전갈의 꼬리를 움켜쥔 그녀는, 한 발로 모래를 파내고 있었다.
디아나의 곁에 선 루시아가 미소 지었다.
“부담가지지 말아요. 실패하면 다시 시도해 보면 그만이니까.”
“그래 뭐… 그렇긴 하지.”
디아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와중에도 양손을 쥐락펴락하고 있었다. 내심 긴장할 때의 버릇이었다.
스킬 포인트만으로도 마법을 익히고 사용할 수 있는 이안은 평생 알 수 없는 기분일 터였다.
“준비됐습니다.”
세렌이 뒤로 몇 걸음 물러나며 말한 건 그때였다. 그녀가 만든 원형 구덩이 한복판에는, 전갈이 배를 드러낸 채 놓여 있었다.
“후….”
디아나가 숨을 고르며 그 앞으로 다가섰다. 조용히 뒤따른 루시아가 그녀의 곁에 섰다. 곧 디아나의 전신에 흐릿한 마력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녀의 손바닥에는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괜찮아요. 천천히 해요. 안 되면, 다시 시도하면 돼요.”
루시아가 격려하듯 속삭였다. 고개를 끄덕인 디아나가 다시 한번 숨을 골랐다.
…한세월 걸리겠네.
내심 혀를 차면서도, 이안은 세렌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마침, 기다리는 동안 해결할 적당한 궁금증이 있지 않던가.
“혹시, 전함을 보유 중인 거점도 있소?”
다가온 이안의 물음에, 세렌의 눈매가 슬며시 가늘어졌다.
“설마, 다음은 부키키아를 토벌하실 생각이신 겁니까?”
“뭐, 전하와 합의가 된다면.”
“정말… 모든 대마족을 토벌할 때까지 멈추지 않으시려는 거군요.”
감탄하듯 읊조린 세렌이, 잠시 턱을 어루만지고는 말을 이었다.
“완성된 배는 없는 것으로 압니다. 하지만 바다 가까이 위치한 거점인 발트엔에 조선공들이 여럿 있으며, 언제든 건조할 수 있도록 재료를 준비해 두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이안의 눈을 마주 본 그녀가 어깨를 으쓱이며 덧붙였다.
“모든 재료를 육로로 운반하여, 해안 인근에서 건조를 끝마쳐야 하겠지만 말입니다.”
이안이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야 그렇겠지. 어쨌든 전하께서 안배를 해두셨다니 다행이오.”
“아마, 함선을 몇 척은 건조할 수 있을 정도의 재료가 준비되어 있을 겁니다. 정확한 정보는 전하와 말씀 나누시면 아시게 되겠지만, 아마 배 자체는 그리 큰 문제가 아닐 겁니다.”
덧붙인 세렌의 시선이, 적막한 바다로 돌아갔다.
“진짜 문제는, 저 바다 그 자체겠지요.”
이안은 고개를 끄덕여 동의했다.
어떤 의미에서는 그들이 지나온 사막보다도 더 위험한 환경이 아닌가. 배에 목숨이 걸려 있다는 부분이 특히 그랬다.
부키키아를 육지로 끌어낼 방법이 존재하는 게 아닌 이상, 아마도 가장 위험하고 까다로운 전투가 될 터였다.
‘…뭐, 이젠 새삼스럽지도 않긴 하지만.’
이안의 시야 한쪽이 밝아진 건 그때였다. 앞으로 내뻗은 디아나의 손아귀에서 불길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됐다…!”
불그스름하게 일렁이는 눈으로, 디아나가 나지막한 탄성을 흘렸다.
화염 방사를 제대로 펼친 것이다. 물론 이안이나 루시아의 그것에 비하면 귀여운 수준이었지만, 디아나 본인조차 그만한 불길을 기대하지는 않았을 터였다.
‘뭐, 전갈을 익히는 용도로는 저쪽이 차라리….’
생각하던 이안의 눈매가 순간 꿈틀댔다. 그의 눈빛이 삽시에 우묵해졌다. 그동안 애써 외면해 온 조바심과 불안함이 불현듯 선명해졌기 때문이었다.
“……?”
미간을 좁힌 그가 오소소 소름이 돋는 목덜미로 손을 가져가는 사이.
“이만하면 충분한 것 같아요. 아주 훌륭해요, 디아나!”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채 지켜보던 루시아가 말했다. 불길이 잦아드는 가운데, 숨결이 조금 거칠어진 디아나가 내뱉었다.
“훌륭하다고 할 정도는 아닌 것 같은데. 아직 실전에 써먹을 수준도 아니고. 그래도….”
말과 달리 뿌듯한 눈빛으로 손을 탁탁 털며, 디아나가 구워진 전갈을 내려다보았다.
“느낌은 알겠어. 이제 화염구 정도는 어렵지 않게 만들어 낼 수 있을 것 같아.”
“그 느낌이 중요한 거예요. 이제 금방 능숙해지겠어요. 안 그래요, 이안 님?”
싱긋 미소 지으며 덧붙인 루시아가, 이내 시선을 돌렸다. 이안의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목에 손을 얹은 채 미간을 찌푸린 그의 모습을 확인한 루시아의 미소가, 비로소 설핏 굳어졌다.
“…뭔가, 문제라도 있나요?”
“글쎄. 나도 아직 확실히는….”
나지막이 내뱉던 이안의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자신의 눈에만 보이는 무언가를 응시하듯 허공을 노려본 것도 잠시.
“이런… 시발….”
나지막한 탄식과 함께, 그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옆에서 불현듯 빛이 번쩍인 건 바로 그 직후였다. 이안의 고개가 좌측으로 홱 돌아갔다.
쿠르릉…!
한 박자 늦게 굉음이 이어졌다. 아주 먼 곳에서 천둥이 친 듯한 소리였다. 구운 전갈 주위로 모여 앉던 디아나와 세렌이 멈칫하는 가운데.
“……!?”
이안과 같은 방향을 돌아본 루시아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여명이 밝아오듯, 지평선 저 너머가 황금빛으로 물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콰르르르릉-!
대기를 뒤흔드는 듯한 굉음이 일행을 휩쓸고 지나간 건 그때였다.
반사적으로 자세를 낮춘 디아나가, 비로소 와락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시발, 갑자기 또 무슨, …맙소사.”
이내 그녀의 눈이 멍하니 커졌다. 그건 옆에 주저앉은 세렌도 마찬가지였다. 둘 다 서쪽 하늘을 물들이며 장벽처럼 번져 나가는 황금빛에 삽시에 넋을 빼앗겼다.
물론 모두가 그런 건 아니었다.
“이안 님… 이건… 설마…?”
화들짝 정신을 차린 듯 눈을 깜빡인 루시아가, 더듬대며 고개를 돌렸다. 이안의 표정을 확인한 그녀의 미간이 좁아졌다.
“하지만… 이렇게나 빨리요…? 우리 예상까지는 아직도… 맙소사.”
무언가 깨달은 듯 눈을 치켜뜬 루시아가, 이내 입술을 달싹였다.
“설마, 균열에서…?”
“…그래.”
비로소 나지막이 대답한 이안이, 루시아를 돌아보았다.
“균열 안에서 보낸 시간이, 우리 예상보다 훨씬 더 길었던 거야.”
그동안 그가 느낀 조바심과 이질감의 정체이기도 할 터였다.
검은 벽의 안과 밖이 그렇듯. 균열의 내부와 외부의 시간 역시 전혀 다른 속도로 흐른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더듬대던 루시아가 얼어붙었다.
콰과과과광-!
머리 위가 눈부시게 밝아지더니,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듯한 폭음이 터져 나왔기 때문이었다.
황금빛의 뇌전이 하늘을 굵직하게 가로지르며 빛나고 있었다.
시작에 불과하다는 걸 알게 된 건 바로 그 직후였다.
콰과과광-! 콰과광-!
연달아 이어지는 폭음과 함께, 샛노란 뇌전 줄기들이 하늘 곳곳을 가르며 뻗어 나갔다.
거대한 균열이 새겨진 것처럼 사라지지 않고 일렁이는 채였다.
“미친 시발…! 뭔데?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냐고…!”
땅에 납작 엎드린 디아나가 비명을 지르듯 소리쳤다.
“…무너지고 있는 거예요.”
입술을 달싹인 건, 하늘을 홀린 듯 응시하던 루시아였다. 디아나의 눈매가 어리둥절하게 일그러졌다.
“뭐? 뭐가 무너…. …설마.”
되묻던 그녀가 순간 굳어졌다. 과거, 이안과 나누었던 대화가 그제야 뇌리를 스친 것이리라.
“마경이…?”
“…맞아요.”
비로소 고개를 숙여 그녀를 내려다본 루시아가, 눈빛만큼이나 떨리는 목소리로 덧붙였다.
“백금룡께서, 검은 벽을 무너뜨리고 계신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