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Dark Fantasy Villain RAW novel - Chapter 498
498화
일행은 점점 북쪽으로 휘어지는 해안선을 벗어나, 서쪽으로 이어진 검은 사막을 가로질렀다.
“잠깐… 여긴… 설마…?”
소검을 움켜쥔 채 앞장서 걷던 디아나가 문득 읊조린 건, 이틀 째의 오후였다. 뒤편에서 루시아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아마 맞을 거예요.”
그녀는 다시 안장 앞으로 자리를 옮긴 채였다. 모로의 목덜미를 안는 게 익숙하기 때문만이 아니라, 디아나와 대화를 나누기에도 더 편해서였다.
“제가 보기에도 우린 지금, 검은 벽 근처를 지나고 있는 것 같거든요.”
주위를 차근히 눈에 담으며, 루시아가 덧붙였다. 일대의 모래가 빛이 바랜 것처럼 잿빛으로 물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역시….”
디아나가 낮게 탄식하며 고개를 돌렸다.
가죽 수통을 품에 안은 루시아와 명상하듯 눈을 감은 이안을 바라본 그녀가, 이윽고 내뱉었다.
“아쉽네. 그놈의 검은 벽이라는 걸, 꼭 한 번은 직접 보고 싶었는데.”
검은 땅의 가장 오래된 주민 중 하나인 디아나는, 정작 검은 벽을 직접 보지 못했다. 내부에서 본 마경의 경계는, 그저 그림자처럼 넘실대는 어둠만이 가득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자욱한 어둠은 물론, 검은 벽의 흔적 역시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루시아가 묘한 미소를 입가에 머금었다.
“의외네요. 다시 제국 땅에 발을 들인 순간에 느낀 기분이, 아쉬움이라니.”
“…그러게.”
낮게 웃으며 대답한 디아나가, 멀어지는 검은 물결을 돌아보았다.
“감격적 일 줄 알았는데. 막상 그다지 감흥이 없네. 아직 크게 다른 게 없어서 그런가.”
“하긴… 그럴 수도 있겠네요.”
고개를 주억거린 루시아가 잿빛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마경이 무너졌어도, 검은 사막에는 여전히 마수들이 돌아다녔다.
하늘을 뒤덮은 먹구름 역시 조금도 옅어지지 않았다. 덕분에 일행들은 아직 떠오르는 태양은커녕, 푸른 하늘조차 보지 못했다.
물론 사막을 횡단하는 입장에선 마냥 나쁜 일만은 아니었다.
덕분에 낮에도 적당히 미지근한 온도가 유지되고 있었으니까.
쌀쌀한 밤공기는, 이미 마경의 날씨에 익숙한 일행에게는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았다.
“…그럼, 너희는?”
디아나가 툭 내뱉은 건 그때였다.
잠시 머뭇거린 그녀가 말을 이었다.
“이미 돌아오게 될 걸 알고 있었으면서도, 막상 그렇게 되고 나니 전혀 기뻐 보이지 않아서 말이야.”
이안과 루시아가 종종 나누는 대화를 들은 척도 하지 않던 그녀가, 처음으로 질문을 던진 순간이었다.
여전히 명상에 잠긴 이안과 달리, 루시아는 코로 긴 한숨을 내쉬며 선선히 대답했다.
“아예 기쁘지 않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걱정이 많은 것도 사실이에요.”
잠시 말을 멈춘 루시아가 입맛을 다셨다. 이안과 똑 닮은 버릇이었다.
“몇 년이 훌쩍 지나버렸을 테니까요. 이젠 디아나도 알겠지만, 대륙의 상황은 그다지 좋지 않거든요. 몇 년은, 많은 게 달라지기에 아주 충분한 시간이죠.”
이동하는 동안, 루시아는 디아나에게 벽 바깥의 이야기들을 여럿 해 주었다. 때때로 이안도 몇 마디씩을 거들었다.
디아나가 느끼게 될 괴리감을 조금이라도 줄여 주기 위한 배려였다.
“그래… 바깥세상도 만만치 않게 개판이긴 한 것 같더군. 시간이 지날수록 더.”
디아나가 고개를 주억거리는 가운데, 루시아가 말을 이었다.
“사실… 세상은 아무래도 좋아요. 그저 제가 아끼는 사람들에게 별일이 없었길 바랄 뿐이에요. 이기적이게도.”
“사람은 누구나 그래.”
디아나가 담담하게 내뱉으며 루시아를 올려다보았다.
“넌 무사히 다시 북부로 돌아가게 될 거야, 루시페르. 지금 내가 그렇듯이.”
조금 놀란 듯 눈을 깜빡인 루시아가, 이윽고 빙긋 미소 지었다.
“제 입으로 대답하진 않을게요. 부정 탈 수도 있거든요. 하지만 그렇게 말해줘서 고마워요. 디아나.”
“별 말씀을.”
디아나가 고개만 까딱였다. 조금 더 짙게 미소 지은 루시아가 뒤를 돌아보았다.
“이안 님은요?”
디아나의 시선 역시 명상 중인 이안에게로 돌아가는 가운데, 루시아가 덧붙였다.
“듣고 계신 거 다 알아요.”
“…나는 뭐, 나쁘지 않아.”
이윽고 이안의 입술이 달싹였다. 감고 있던 눈을 천천히 뜨면서, 그가 고개를 숙였다.
“이딴 걸 먹을 날도, 이제 며칠 안 남았으니까.”
모로의 안장 좌우에는 사막 전갈을 비롯한 마수들의 시체가 여럿 매달려 있었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사냥한, 남부 전선에 도착할 때까지 먹을 예비 식량들이었다. 황금 사막을 지나는 동안은 식량을 구하기 어려울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그게 끝이야?”
디아나가 한쪽 눈을 찌푸리며 물었다. 이안이 무성의하게 어깨만 으쓱이자, 루시아가 풀썩 웃음을 터뜨렸다.
“뭐, 저도 공감은 가네요. 디아나 앞에서 할 말은 아니지만, 저도 제대로 된 음식이 어떤 맛이었는지 잘 떠오르지 않을 정도거든요.”
“음식이라… 그래… 너희는 운이 좋네. 남부는 제국에서도 가장 먹을 게 많은 동네니까.”
이윽고 디아나가 나지막이 덧붙였다. 아주 먼 과거를 회상하는 듯한 눈빛이 된 채였다.
그녀를 돌아본 루시아가, 이내 고개를 주억거렸다.
“하긴… 남부는 다양한 환경이 공존하는 지역이죠. 바다와 경작지. 밀림. 심지어 사막까지.”
“사막은 빼도 돼. 오크들의 음식은 끔찍하니까. 지금 먹는 것과 별반 다를 것도 없을걸.”
“…오히려 그러니까 더 궁금해지는걸요.”
이어진 둘의 대화를 한 귀로 흘리며, 이안은 시선을 돌렸다.
어두워지는 잿빛 사막을 응시하는 그의 눈빛이 칙칙해졌다.
걱정이 많은 건 사실 그 역시 마찬가지였다. 굳이 언급하지 않은 건, 어차피 당장은 진위를 확인하거나 해결할 수 없어서였다.
그저 일행들에게 근심을 전염시킬 뿐이리라.
물론, 모든 게 마냥 불확실한 건 아니었다. 반대로 명확해진 부분들도 있었다.
어젯밤 꺼내서 확인했던. 지금은 그의 흉갑 안쪽에 보관 중인 황녀의 마법 전서나, 왼손 중지에 끼워진 성물 반지가 그렇듯이.
‘이 녀석은 조금 걱정했었지만….’
이안은 왼손 엄지로 슬며시 중지를 어루만졌다.
다시 신성이 서리기 시작한 성 다미엘의 반지는, 가진 능력을 전부 되찾은 상태였다.
마경에 떨어진 이후로 비활성화되어 있던 의무의 부름 스킬 역시 다시 사용 가능한 상태가 되었다.
그건 그에게 충성을 맹세한 성기사가 죽지도 타락하지도 않은 건 물론, 성흔을 박탈당하지도 않았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하긴. 혼자가 아니었으니까.’
필립에게는 황녀라는 뒷배와 학자이자 마법사인 난쟁이 조력자가 있지 않던가. 그들이 필립을 잘 다독였다는 건, 마법 전서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어쩌면 오히려, 대교회에서는 기회라 여겼을지도 몰랐다. 주군을 잃은 성기사가 의탁할 곳은, 결국 교단밖에 없을 테니까.
멍청한 녀석은 아니니, 그런 기회를 놓치지는 않았을 터였다.
‘지금쯤 꽤 그럴듯한 성기사가 됐겠네.’
물론, 당장 녀석을 불러들일 생각은 없었다.
의무의 부름이 어떤 식으로 작용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어쨌건 필립을 곧장 그의 곁으로 소환해 주지 않으리라는 건 분명했으니까.
그 녀석이 내해를 건너게 하는 건, 위험 부담이 너무 컸다.
‘…애초에, 전부 내팽개치고 달려오게 할 이유도 없고.’
녀석은 제도와 교단 내부의 정보가 필요해지는 순간에 불러도 늦지 않았다. 그전까지는 계속, 교단의 충실한 성기사로 남겨두는 편이 여러모로 나을 터였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고 계세요, 이안 님?”
루시아가 물은 건 그때였다.
녀석은 어느새 다시 그를 돌아보고 있었다. 디아나가 남부의 음식에 관해 이야기하는 데도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는 게 의아한 모양이었다.
상념에서 깨어난 이안이, 태연하게 내뱉었다.
“어쩌면 우리가 검은 벽의 첫 귀환자들이 아닐까 하는 생각.”
“그런 생각을 해 본 적은… 없었는데….”
읊조리며 새삼스러운 눈으로 이안을 올려다 본 디아나가, 이윽고 나지막이 혀를 찼다.
“…틀린 말이 아니네. 예상보다 더 귀찮아질지도 모르겠어. 주목도 많이 받게 되겠고 말이야. 조용히 돌아가고 싶은데….”
“뭐… 번거로움이 따르는 건 어쩔 수 없는 부분이겠죠.”
루시아가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어느 정도는 협조를 해 줘야, 우리에게 필요한 정보를 얻어낼 수도 있을 테고요. 안 그래요, 이안 님?”
“…….”
아무런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루시아가 울상을 지으며 뒤를 돌아보았다.
“제발 그러지 마세요. 이젠 대답을 해 주지 않으시면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다고요.”
“걱정 마. 뭔가 문제가 있어서 그런 게 아니니까.”
입가에 헛웃음을 머금으며 대답한 이안이, 그녀의 눈을 마주 보았다.
“디아나가 바라는 대로 덜 귀찮고 조용히 들어갈 방법이 없을까 생각한 것뿐이야.”
“아하… 하지만 전선을 통과하는 것부터가 조용할 수 없을 텐데요. 어떻게 해야 할지, 이미 생각도 다 해 뒀고요.”
…또 뭔가 시나리오를 써둔 건가.
내심 헛웃음을 지으면서도, 이안이 태연하게 어깨를 으쓱였다.
“그건 피할 수 없을 테니까. 잘 이용해 봐야지. 언제 귀찮고 난처한 상황에 놓이게 될지 모르잖아. 안 그래?”
“하긴… 그건, 그래요… 불필요한 피가 흐르는 일은… 피하는 게 좋겠죠.”
멈칫한 루시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디아나는 왜 피가 흐르게 되는 거냐고 묻지 않았다. 그저 아무것도 듣지 못한 척 이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역시 어렵네요. 이안 님의 신분을 떠나서… 우린 벽 너머에서 귀환한 거니까요.”
잠시 턱을 어루만지던 루시아가,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시끌벅적한 건 쉽겠지만 그 반대는 오히려-”
“고민할 필요 없어. 이미 어느 정도 결론을 내렸으니까.”
이안이 말을 잘랐다. 루시아가 눈을 깜빡였다.
“벌써요…? 어떻게요?”
“황명을 들이밀지 뭐.”
“네…?”
“……!?”
대수롭지 않은 대답이었지만, 루시아와 디아나의 눈이 커지게 만들기에는 충분했다.
어깨를 까딱인 이안이 덧붙였다.
“내가 알아서 해 볼 테니까. 너희는 그냥 구경만 해.”
“네. 알았어요. 눈치껏 장단만 맞출게요.”
루시아가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맛있는 간식을 아껴 두는 듯한 눈빛이었다.
…가만 보면 이 녀석도 스릴 중독이라니까. 내심 읊조리면서도, 이안이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든든하네.”
마주 미소 짓는 루시아를 올려다보던 디아나가, 이윽고 고개를 가로저으며 시선을 돌렸다. 루시아가 그녀를 내려다본 건 바로 그 직후였다.
“그럼 이제… 다시 본론으로 돌아갈까요, 디아나?”
“…본론?”
“음식 말고, 다른 남부의 이야기를 해 줘요. 책에서나 몇 줄 읽었지, 저도 진짜 남부에 대해선 아는 게 거의 없거든요.”
옆으로 고개를 까딱인 그녀가 덧붙였다.
“이안 님도 마찬가지이실 테고요. 우리 중에 진짜 남부를 아는 건, 디아나뿐이에요.”
“그야 그렇겠지만… 너희와 달리, 내 얘기는 별 도움이 안 될 거야.”
슬쩍 가면 아래의 턱을 긁적인 디아나가, 시선을 돌리며 덧붙였다.
“너희 기준으로는 수십 년도 전의 모습만 기억하고 있을 테니까. 지금이랑은, 여러모로 다를걸.”
“상관없어요. 솔직히 그래서 더 궁금하기도 하고요. 제가 태어나기도 전의 이야기잖아요. 게다가, 시간이 지나도 변치 않는 것들도 있잖아요?”
낮게 침음한 것도 잠시.
“그래서, 어떤 것부터 듣고 싶은데?”
디아나가 나지막이 물었다.
이미 루시아와 이안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잔뜩 듣지 않았던가. 이번에는 자신의 차례라 생각하기로 한 것이리라.
“일단 디아나의 가문에 대해서 이야기 해주는 게 어때요?”
루시아가 곧바로 내뱉었다. 사실 진작부터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리라.
“당장 우리 여정의 목적지잖아요. 에레노스가 어떤 숲에 사는지도 궁금하고요. 요정들은 숲속에서 산다면서요.”
“숲이라….”
나지막이 읊조린 디아나가, 이윽고 짧은 웃음을 흘렸다.
그녀가 고개를 또 한 번 가로저으며 말을 이었다.
“확실히, 시간이 지나도 달라지지 않은 게 있네. 요정들이 정말 숲속에 살 거라는 편견 말이야.”
“…그럼, 아닌가요?”
“물론 우리는 숲에 살지. 하지만 이건 관용적인 표현이기도 해. 우리는 숲에서 왔지만, 지금은 문명인이니까. 숲에 문명을 건설한 게 아니라… 반대로 문명 속에 숲을 들였다고 할 수 있지.”
조금은 자조적인 웃음을 지은 디아나가 덧붙였다.
“생명수를 중심으로 얼마나 크고 잘 정돈된 숲을 가꾸고 있는지는, 가문의 명예와 직결되는 부분이야. 물론, 부와 권력도.”
“그러니까….”
입을 연 건 이안이었다. 디아나의 시선을 받은 그가 심드렁하게 말을 이었다.
“울타리 안에 너희 취향의 식물을 잔뜩 심어두고 숲에 산다고 우긴다는 얘기군.”
디아나가 어깨를 으쓱였다.
“우기는 건 아니지. 나무가 많으면, 그게 숲이니까.”
그러시겠지. 이안은 낮게 코웃음을 흘렸다.
요정들에게 숲은 어우러져야 할 터전이 아니라, 통제하고 과시하기 위한 도구인 것이다. 그야말로 귀쟁이답다고 할 수 있었다.
“…물론 중앙에 자리를 잡으면, 숲의 크기는 중요하지 않아 지지. 그쪽의 요정들은 오히려 극도의 절제미를 추구한다더라고.”
태연하게 덧붙인 디아나가 루시아를 돌아보았다.
“그런 의미에서 루시페르, 네가 말한 것 같은 숲에 사는 건 최악의 경우라고 할 수 있어. 원시적이고 야만적이니까. 사실상 수인이나 다를 바 없지.”
“내가 듣기론, 너희 가문은 거의 망하기 직전이라던데.”
이안이 덧붙인 말에, 디아나가 슬며시 눈매를 꿈틀대며 말을 이었다.
“…그렇다고 숲으로 쫓겨날 정도라는 건 아니야. 그저 중앙으로 진출하지 못한, 그저 그런 남부의 요정 가문 중 하나일 뿐이지.”
묘한 씁쓸함이 묻어 나오는 말투였다. 어쩌면 그녀가 전장으로 향한 건, 중앙으로 진출할 교두보를 마련하기 위해서였는지도 몰랐다.
전쟁에서 공을 세우는 것만큼 가문의 위상을 빠르게 드높일 방법은 많지 않을 테니까.
“지금은 좀 다를지도 모르지. 새로운 원로가 탄생했으니까.”
이안이 덧붙였다. 상념에서 깨어난 디아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지. 원로는 그저 단순한 고위 요정 하나가 아니니까. 권력 구도를 바꿔놓기에도 충분할 거야.”
“그럼… 우리는 결국, 숲이 아니라 도시로 가고 있었던 거군요.”
루시아가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말투와 달리 눈은 몹시 반짝이고 있었다. 하긴. 이건 책에서도 접하기 힘든 이야기일 터였다. 요정 사회는 극도로 폐쇄적이라지 않던가.
“그래. 우리는 타헤나로 갈 거야. 중앙으로 진출한 게 아니라면, 여전히 그곳에 있을 테니까.”
“타헤나….”
“사막과 꽤 멀리 떨어져 있고 내해에서도 그리 멀지 않은 곳이야. 일 년 내내 적당히 따뜻해서 살기 좋은 도시지. 그때는 따분하다고 여겼지만… 지금은 그게 얼마나 소중한 건지 알아.”
디아나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막상 말문이 트이자, 그녀는 루시아가 묻지 않은 말들까지 주절주절 떠들어 댔다.
-필멸자들이란… 정말 별 것 아닌 것들에 집착한다니까.
밤이 되면서 잠에서 깬 요그도, 때때로 추임새를 얹었다.
밤하늘이 한순간 번쩍인 건, 그녀가 남부의 다른 요정 가문들에 대해서 떠들어대던 때였다.
쿠릉-!
뒤이어 천둥소리가 요란하게 번졌다. 하지만 디아나가 말을 멈춘 건, 그저 갑작스러운 마른천둥 때문만이 아니었다.
“…내가 잘못 본 건가?”
눈을 가늘게 뜬 채 하늘을 올려다보던 그녀가 이윽고 읊조렸다.
누군가 대답하기도 전에, 저 먼 밤하늘이 또 한 번 번뜩였다.
콰르릉-!
천둥소리가 이어지는 가운데, 디아나의 눈매가 완전히 일그러졌다.
“시발… 잘못 본 게 아니었네….”
먹구름이 한순간 자줏빛으로 물들었었기 때문이다. 마경의 하늘에서 흔히 보던, 바로 그 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