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Dark Fantasy Villain RAW novel - Chapter 5
005화
이안이 미간을 좁히는 사이.
청년과 기사가 장내로 완전히 들어섰다.
탁. 문이 닫히고, 순간적으로 불편한 적막이 내려앉았다.
“크흠. 변명하고 싶진 않지만. 그래도 상황 설명은 해야 할 것 같소.”
적막을 깬 건 주점 주인이었다.
“처음엔 기사 나리께서 숙소를 찾으시는 줄 알고, 안내만 할 생각이었소. 한데 종자께서 인근에 특별한 문제는 없냐 물으시더군. 해서, 나는 우리 마을에는 훌륭한 해결사가 있어서-.”
“요점만 말해. 간단하게.”
이안이 말을 잘랐다.
주인장이 머쓱하게 헛기침했다.
“댁과 대화를 나누길 원하셨소. 원칙대로 정중하게 거절했소만. 소란을 피우지 않으리라 약조하시기에 일단 모시고는 온 거요.”
“그렇군.”
날 찾은 이유는 모른단 거지.
이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주인장의 걱정과 달리, 이안은 그를 탓할 생각이 없었다.
이 세계의 기사는 언제든 합법적인 살인마로 돌변할 수 있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기사의 살인은 적당한 이유만 붙이면 무죄가 됐다.
그래서 기사는 대부분 오만하고 냉정할 수밖에 없었다.
엄격한 규율과 예의범절, 기사도는 어디까지나 그들이 인정하는 상대 앞에서만 통용되는 얘기였다.
그러니 주점 주인이 일단 거절하는 시늉이라도 했다는 건, 나름의 의리를 지킨 셈이었다.
그보단, 기사의 정체에 대한 궁금증이 이안의 머릿속을 간질였다.
분명히 게임에서 본 것 같은데.
이안이 기억을 다시 헤집는 그때.
“정식으로 소개하겠습니다.”
종자가 앞으로 나섰다.
목을 가다듬으며 한쪽 무릎을 가볍게 굽힌 그가 입을 열었다.
“이분은 루 솔라의 신도이자 티르 엔의 사도. 남부 국경의 집행자이며 아겔 란의 보검. 메브 리우렐 경입니다.”
양손으로 기사를 떠받들듯 말한 종자가 자세를 바로 하고는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저는 경을 모시는 종자, 필립입니다. 나리를 대신해 인사를 전합니다. 반갑습니다. 해결사.”
시대극을 방불케 하는 과장된 인사였지만, 이안은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대신 가라앉은 눈으로 메브를 뚫어질 듯 응시했다.
‘제기랄. 정말이군.’
비로소 기억해냈기 때문이었다.
이 기사를 어디서 보았었는지.
‘메브. 피 흘리는 복수자.’
그는 아퀼로니아의 첫 번째 챕터에서 가장 어려웠던 중간 보스였다.
‘원래 이런 모습이었을 줄이야. 그러니 바로 못 알아볼 수밖에.’
다만 이안이 기억하는 메브는, 지금의 고귀하고 위엄 있는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다.
온통 찌그러지고 균열이 간 갑옷은 붉게 물들었고, 그 사이로 피를 줄줄 흘리고 있었다.
당연한 결과였다.
그는 아겔 란의 국왕을 죽이기 위해, 단신으로 왕성의 전 병력을 상대했으니까.
심지어 그들을 거의 몰살 직전까지 몰아넣었다.
암살 시도가 성공하기 전에 그의 앞을 막아선 건, 그때까지만 해도 게임 캐릭터였던 이안이었다.
메브는 엄청나게 강했다.
첫 번째 챕터의 보스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검에 의지하지 않으면 제대로 서 있지도 못했음에도 공격 한 번 한 번이 치명적이고 패턴도 다양했다.
이안이 이길 수 있었던 건, 시간이 그의 편이었던 덕분이었다.
앞서 말했듯, 메브는 이미 빈사 상태에 가까웠으니까.
시작부터 반 이하였던 그의 생명력은, 이안이 공격하지 않아도 계속해서 줄어들었다.
검을 휘두를 때는 더 빠르게.
이안은 그의 공격을 피하는 데 주력했고, 끝내 메브는 쓰러졌다.
거의 들리지도 않는 외마디 속삭임만을 남긴 채.
하지만 지금 눈앞의 메브는 그때처럼 타락하지도, 치명상을 입지도 않은 말끔한 상태였다.
게다가 벌써 만나게 되다니.
‘상황이 게임과 다르게 돌아가는 건가. 그건 좋지 않은데.’
다만 이안은 놀랐을지언정 긴장하지는 않았다.
자신 역시 그때의 저레벨 마법사가 아니었고, 상대는 그가 마법사라는 사실조차 모를 테니까.
설사 싸우게 되더라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물론, 전투는 상대의 의도를 파악한 후에 해도 늦지 않았다.
이안은 비로소 필립을 바라보았다.
“이안 호프다. 보다시피 용병이고.”
“호프 나리시군요.”
필립이 조금은 감탄한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눈도 깜빡하지 않는 이안의 배포에 놀란 모양이었다.
높은 정신력은 이런 순간에도 표정 관리와 냉정한 사고를 동시에 가능하게 만들어 줬다.
“그래서. 내겐 무슨 용무시지?”
이안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그것이….”
필립이 주점 주인장과 여급 쪽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들과 눈을 마주친 이안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위에 올라가 있겠소.”
그제야 주인장이 여급을 이끌고 계단을 올랐다.
불안한 듯, 이안을 힐끔대면서.
발소리가 사라지자 필립이 말했다.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알았으니 용무부터 말해.”
“나리께 여쭙고 싶은 것이 있어 찾아왔습니다.”
필립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듣자 하니 홀로 코볼트 산채를 전멸시키셨다던데, 사실입니까?”
이안은 대답 대신 손을 들어 주점의 한쪽 벽면을 가리켰다.
박제된 코볼트 족장의 머리와 갑옷, 도끼가 걸려 있었다.
“믿고 말고는 네 자유다.”
“…대단하시군요. 국경의 최정예 병사들조차 단신으로는 산채에 발을 들이려 하지 않을 텐데요.”
필립이 다시 한번 진심으로 감탄한 표정을 보였다.
아부가 자연스러운 놈이군.
이안은 입맛을 다시고는 말했다.
“그게 묻고 싶었던 질문인가? 내가 정말 코볼트 산채를 쓸어 버린 건지가?”
“물론 아닙니다. 올바른 분께 질문을 드리는지 확인할 필요가 있었을 뿐. 본론으로 넘어가겠습니다. 혹시….”
필립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코볼트 산채에서 어떤 특이점을 발견하지는 못하셨습니까?”
“특이점?”
“보통의 코볼트에게선 볼 수 없는 것을 말씀드리는 겁니다. 이를테면 흑마법의 징후라거나. 혹은 그와 비슷한 불온한 것들 말이지요.”
이안의 한쪽 눈썹이 꿈틀댔다.
메브가 흑마법사를 찾고 있다니.
또다시 예상외의 전개였다.
게임에선 연관성을 눈치채지 못했으니까.
‘상황이 바뀐 게 아니라, 내가 놓친 서브 퀘스트가 있는 건가?’
의구심이 드는 와중에도, 한 가지 사실만큼은 확실해졌다.
“글쎄….”
대화의 키는 그가 쥐고 있다는 것.
이안은 담담하게 대꾸했다.
“뭔가 있었다 하더라도, 내가 그런 정보를 넘겨줘야 할 이유를 모르겠군.”
처음으로 필립의 미소가 굳어졌다.
“왕국의 안위가 걸린 문제입니다. 협조해 주시죠.”
“나는 아겔 란의 주민이 아니야. 용병이지. 용병은 대가 없는 부탁은 받지 않는다.”
필립의 미간이 좁아졌다.
“지금, 왕국의 안위를 두고 거래를 하시려는 겁니까?”
“내가 가진 걸 두고 거래를 제안하는 거지. 이왕이면.”
태연하게 대꾸한 이안이 메브를 돌아보았다.
“결정권 있는 기사 나리와 직접. 종자와의 계약으론 아무런 보증도 받지 못할 테니까.”
“이런 무례한…!”
필립이 화를 내려는 찰나, 메브가 한쪽 팔을 들어 그를 저지했다.
투구 너머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틀린 말은 아니다, 필립.”
이안의 눈썹이 다시 꿈틀댔다.
‘목소리가…?’
“종자의 무례를 대신 사과하지. 용병.”
메브가 앞으로 나서며 쓰고 있던 투구를 벗었다.
그 아래로 붉은 머리칼이 어깨 언저리까지 흘러내렸다.
녹색 눈이 이안을 마주 보았다.
“나는 처음 보는 이 앞에선 말을 아끼는 편이다. 해서 필립이 대신 말하고 있었을 뿐, 다른 의도는 없었다.”
“…그러셨군. 이해했소.”
이안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반응은 무덤덤했지만, 실제로 그는 꽤 놀란 상태였다.
‘정말 여자였다니.’
목소리를 듣기 전까진, 메브가 여성일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잘 벼려진 칼처럼 날카로운 느낌이 드는 미인이었다.
턱에 패인 흉터조차 잘 어울리는.
물론 게임에 여기사가 없었던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들은 몸의 굴곡이 아예 드러나지 않는 중갑옷은 입지 않았었다.
생각해보면 메브의 목소리를 제대로 들은 적도 없었다.
기억나는 건 지친 숨소리와 마지막 속삭임뿐.
그리고 그 후의….
“그럼 본론으로 넘어가지.”
이안의 상념을 깨며, 식탁 위에 투구를 내려놓은 메브가 건너편에 앉았다.
“거래를 제안한다는 건, 네가 뭔가를 알고 있다고 봐도 되겠지?”
진지한 눈으로 이안을 마주 보며 메브가 물었다.
이안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정보뿐만 아니라 물증도 가지고 있지.”
“물증…?”
이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잠시 그의 눈을 응시하던 메브가 고개를 끄덕였다.
“정보에 대한 값은 치르지.”
그녀가 필립을 돌아보았다.
필립이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품에서 돈주머니를 꺼냈다.
받아든 메브가 망설임 없이 금화 하나를 꺼내 식탁에 놓았다.
심지어 가장 가치가 높은 제국 금화였다.
‘다짜고짜 제국 금화라.’
이안이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
“코볼트 산채를 의도적으로 키우려는 자가 있었소. 저 족장은 그자의 마력을 받아먹고 성장한 것이지.”
메브의 시선이 족장의 머리로 향했다.
“마력을 받아먹었다?”
“그렇소. 가슴팍에 오염된 마력이 담긴 정수를 품고 있었거든.”
이안은 주머니에 손을 넣으며 아공간에서 정수를 꺼냈다.
족장의 가슴에 박혀 있던 진짜 상급 정수가 아닌, 마을 머저리들이 빼돌렸던 작은 정수였다.
“바로 이거요. 흑마법사의 단말.”
“……!”
메브의 눈이 커졌다.
정수를 뚫어질 듯 바라보며, 메브가 말했다.
“확실히 불길함이 느껴지는군. 하지만 그게 흑마법사의 단말이라 어떻게 확신하는 거지?”
“내가 그놈을 만났으니까. 놈은 이 단말로 촌놈 하나를 꼭두각시로 만들었지.”
메브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런 물건을 맨손으로 쥐고 있다니. 배포가 상당하군.”
이안은 한쪽 어깨를 으쓱였다.
“그깟 마법에 당할 만큼 약하지 않으니까.”
진위를 판단하듯 이안을 응시하던 메브가 이윽고 읊조렸다.
“버논의 말이 사실이었군. 믿을 수 없었는데. 정말 왕국에 어둠의 씨앗이 자라고 있었다니….”
이안은 그녀의 에메랄드 같은 눈에 일렁이는 불안함을 눈치챘다.
메브가 덧붙였다.
“더 아는 사실이 있나? 놈을 만났다면, 단서를 남겼을 텐데.”
“나를 반드시 찾아내 죽일 거라더군. 내가 놈의 계획을 다 망쳐 놓은 데다 모욕까지 했으니까.”
사실은 놈의 은신처가 어디인지도 대충은 기억하고 있었지만.
금화 한 닢에 팔아먹기엔 귀한 정보였다.
어차피 전리품을 나눌 생각도 없었고.
“그런가. 큰 도움이 됐다. 처음으로 실체를 확인했으니. 이제 추적할 일만 남았군.”
“시간이 여유롭진 않습니다, 나리.”
뒤에 선 필립이 조심스레 말했다.
“정해진 일자에 왕성에 도착하려면, 최대로 잡아도 일주일 이상 수색할 수는 없을 겁니다.”
“그래도 단서가 생겼으니 최선은 다해 봐야지. 정 안 되면 도착한 후에 재상께 청을 올릴 생각이다. 이제는 증거도 증인도 있으니.”
단호한 목소리로 말한 메브가 다시 이안을 마주 보았다.
“부탁을 더 하고 싶은데.”
“말씀하시오.”
“그 단말을 내게 줄 수 있겠나?”
“합당한 가격을 제시한다면야. 알다시피, 이건 마력을 정화하면 비싸게 팔 수 있는 보물이오.”
이안의 방식이 익숙해진 듯, 메브가 돈주머니를 식탁 위에 놓았다.
“지금 내가 가진 돈 전부다. 다 합치면 제국 금화 열 개 정도 되겠지. 이만하면 값은 될 것 같은데.”
상당한 거금이었다.
어차피 이안에겐 같은 정수와 상급 정수가 하나씩 더 있으니, 하나 정도는 돈으로 바꿔도 상관없었다.
“나쁘진 않군. 알겠소.”
이안이 돈주머니를 들었다.
정수를 받아 든 메브의 미간이 슬쩍 좁아졌다.
“생각보다 훨씬 불길하군.”
금화만 아공간에 옮긴 이안이 빈 주머니를 내밀었다.
“조심하시오. 그놈이 당신의 눈을 통해 엿볼 수도 있으니.”
“환영할 일이다. 내가 반대로 놈의 은신처를 알아낼 것이니.”
정수를 주머니에 넣으며 덤덤하게 말한 메브가, 다시 이안과 눈을 마주쳤다.
“하나 더. 가능하다면, 너도 나와 함께 가 주었으면 좋겠다.”
“나도…?”
그 순간 이안의 눈앞에 반투명한 창이 떠올랐다.
서브 퀘스트 창이었다.
이안은 빠르게 내용을 훑었다.
목표는 간단했다.
메브와 동행하며 흑마법사를 죽이는 것.
물론 제약도 있었다.
기한은 그녀가 왕성에 입성하기 전까지.
보상은 무려 스킬 포인트 한 개.
추측대로 이안이 놓친 서브 퀘스트였던 것이다.
‘게임에선 내가 늦었었던 거군. 관심도 없었거나.’
메브의 발언으로 미루어 볼 때, 그녀는 왕성으로 향하는 동안 홀로 계속 조사를 이어갔을 터였다.
이 퀘스트는 그사이에 그녀와 마주쳐야 얻을 수 있었으리라.
이안이 퀘스트를 수락하는 사이.
“현재로선 네가 유일한 증인이다.”
메브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다른 목격자가 있을지 모르나, 단신으로 코볼트 산채를 무찌른 실력 있는 용병의 말이 더 신뢰를 받겠지.”
이안이 냉정하게 덧붙였다.
“흑마법사의 원한을 샀으니, 놈이 날 죽이기 위해 모습을 드러내는 걸 기대할 수도 있겠고.”
메브가 고개를 끄덕였다.
“부정하진 않겠다.”
“솔직하시군. 하지만….”
이안은 표정을 유지하며 양손을 깍지 끼었다.
“말했다시피, 나는 용병이오. 나와 동행하려면 계약을 맺어야 하지.”
퀘스트와는 별개로, 무료 봉사를 할 생각은 없었다.
“널 고용하란 말이냐?”
“그렇소.”
필립이 질렸다는 듯 탄식했다.
“루 솔라 맙소사. 왜 흑마법사의 원한을 샀는지 알 것 같군요. 이미 두둑하게 챙기고 또 돈 얘기라니.”
“넌 공정한 거래라는 걸 해 본 적이 없는 것 같군. 필립. 게다가.”
핀잔을 준 이안이 의미심장하게 메브를 마주 보았다.
“날 고용하면 놈을 찾는 것을 도와줄 수도 있소. 물론 성공 시의 추가 보수를 걸어야겠지만.”
“흑마법사를…? 혹시, 놈의 은신처를 알고 있는 건가?”
“그렇지는 않소만. 알아낼 수 있을 거요. 그게 내 직업이니까.”
이안의 장담에 메브의 미간이 미미하게 좁아졌다.
“마을의 해결사라더니…. 자신감이 대단하군.”
“일주일쯤 여유가 있으시댔지. 그 시간 내에 흑마법사 놈의 은신처를 찾아내면 추가 보수를 받겠소.”
“찾아내지 못한다면?”
“조용히 왕성까지 동행하지. 그땐 나를 고용한 보수만 받겠소. 나리가 손해 볼 일은 없는 계약이지. 둘보단 셋이 낫지 않겠소?”
“흐음….”
메브가 침음했다.
필립이 조마조마한 표정으로 그녀의 뒤통수를 주목했다.
“왕성에 도착해 증언하면, 오늘과 같은 양의 금화를 더 주지.”
이어진 대답에 필립이 얼굴을 감싸 쥐었다.
그를 바라보며 피식한 이안이 덧붙였다.
“흑마법사를 찾는다면?”
“어떤 추가 보수를 원하지?”
“글쎄…. 좋아. 나리께서 양보하셨으니, 나도 하나 양보하지.”
이안은 느긋하게 덧붙였다.
“추가 보수는 놈의 목숨이 끊어진 후에 제안하겠소. 합리적으로.”
“…네 합리성은 자신에게 상당히 관대한 것 같던데.”
물론 그랬다.
이안은 메브에겐 흑마법사의 시체만 양보하고, 전리품은 전부 요구할 생각이었다.
제안을 거절하고 계약을 파기한다면, 여기사와 종자의 소지품도 전리품이 되게 만들면 그만이었다.
어차피 적이 될 자였고.
그땐 퀘스트도 완료되었을 테니까.
이안의 미소가 더 짙어졌다.
“걱정하시는 걸 보니, 나리께서도 내가 놈을 찾아내리라 생각하시는 것 같군.”
그는 할 말을 다 했다는 듯 의자 등받이에 기대앉았다.
“…좋아. 받아들이지. 용병, 이안 호프. 그대를 고용하겠다. 계약은 나, 메브 리우렐의 이름으로 보증하지.”
일어선 메브가 손을 내밀었다.
이안은 그녀의 장갑을 맞잡았다.
“계약은 성립되었소.”
“자신감만큼 실력도 있길 바란다. 물론, 신의도.”
덧붙인 메브가 손을 놓았다.
이안은 어깨를 으쓱이고는 몸을 돌렸다.
“준비하고 오겠소. 식사라도 하고 계시오. 여급을 내려보낼 테니.”
그가 계단으로 향하자, 필립이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나리. 저자를 믿으십니까? 걱정되시는 마음은 이해하지만, 이건-.”
“버논 때문이 아니야. 가능성을 높이고 싶을 뿐이지. 정수가 단단히 오염되어 있었어. 이런 걸 만들어 낼 흑마법사라면 분명 왕국에 심대한 피해를 줄 거다. 전쟁을 앞둔 지금, 그런 위험 요소까지 남겨둘 순 없지.”
대단한 충신 나셨군.
계단을 오르며, 이안은 문득 메브의 옆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지금의 그녀에게선, 왕을 죽이려 성을 피바다로 만든 복수자의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뭐, 이유가 있겠지. 모든 타락이 그렇듯이.’
이안은 이내 상념을 털어냈다.
지금은 퀘스트에 집중해야 할 때였으니까.
호언장담하긴 했지만, 일주일은 그리 넉넉한 시간은 아니었다.
그러니까 일에 들어가기에 앞서, 밑 작업을 해 둘 필요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