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Dark Fantasy Villain RAW novel - Chapter 503
#503화
-울라프 대공은 진위를 파악 중이라는 보고만 올릴 뿐입니다. 정말 검은 벽을 넘기라도 하신 건가요, 성자 대행?
세라스는 그가 실종된 후로도 계속해서 편지를 남겼다. 심지어 글씨가 훨씬 더 작아진 채였다. 황녀는 말을 줄이는 대신 글자의 크기를 줄이는 쪽을 택한 것이다.
-필립 경을 만났어요. 전선으로 보내 달라 청하더군요. 물론, 잘 타일러서 돌려보냈습니다. 성자 대행께서 살아 계시다고 믿는다면, 그분의 명을 계속 따르는 게 순리라고요. 곧바로 수긍하더군요. 정말 성자 대행이 살아 계시리라 믿는 겁니다. 놀라운 건, 사실 저 역시 그렇다는…
이안의 눈이 깨알 같은 글자들을 빠르게 훑고 지나갔다. 전서를 얼굴 앞으로 펼친 터라 음영이 지고 있었지만, 읽는 데 아무런 방해도 되지 않았다.
-꿈에서 유추한 것과 비슷한 상황이 이어지고 있어요. 저는 아직도 고민 중이예요. 어떤 선택이 최선….
-엘리야를 만났어요. 슬퍼 보이지는 않더군요. 오히려 집념과 의지가 느껴졌습니다. 반드시 벽을 무너뜨릴 방법을 찾겠다는….
이미 한 번 훑어본 문장들을 다시 읽는 건, 혹시나 놓친 게 있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물론 다른 이유도 있었다. 아직 놓친 부분도, 다른 특이 사항도 발견할 수 없었지만.
-오라버니는 중앙에 남기로 했어요. 형제들에게 겁쟁이처럼 보일 거라며 펄쩍 뛰었지만, 간신히 설득했죠. 이렇게 결정한 근거는 생략할게요. 지면이 많이 남지 않았거든요. 사실 이 순간에도 아깝게만….
-제가 청혼했던 것을 기억하시나요, 성자 대행? 우스운 일이죠. 성자 대행과 헤어진 뒤로 그 날을 떠올린 적은 많지 않았는데. 이렇게 사라지시고 난 뒤에 오히려….
-북부 내부의 사정은 여전히 많이 알려지지 않았어요. 대공이 고의로 정보를 은폐 중이라는 게 정론이죠. 영원히 그럴 수는….
어쨌든, 다시 봐도 영양가 있는 내용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이럴 거면 글자 크기는 왜 줄인 건지.’
황궁과 제도, 그녀의 직접적인 관심사와 사담이 대부분이었다. 게다가 문장을 완성하지 않으면 죽는 병이라도 걸린 것 같았다.
-필립 경을 다시 만났습니다. 수련에 매진 중인 것 같더군요. 주교들이 접근해 오기 시작했다고 해요. 안전한 길과 위험한 길 중에 고민 중이더군요. 저는 전자를 추천했지만, 필립 경은 아마도….
-아버님과 독대했어요. 오라버니를 왜 중앙에 남게 했는지 물으시더군요. 제가 종용한 것도 알고 계셨어요. 제 선택이 옳았던 것 같아요. 역시 아버님의 관심은 오직….
물론, 황녀의 병은 뒤로 갈수록 서서히 치료됐다. 갈수록 문장이 짧고 간결해졌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지면이 줄어드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을 터였다.
-어제 또 다른 갈림길을 봤어요. 믿을 수도 발설할 수도 없는.
아끼고 아끼다 작성한 것으로 보이는, 정확한 시일을 알 수 없는 문장이 마지막이었다.
이안의 입가에 옅은 실소가 스쳤다.
‘내가 답장할 공간을 한 줄은 남겨 줬어야 할 거 아니냐고….’
그에게 주어진 빈 공간은 귀퉁이의 아주 작은 공백이 전부였기 때문이다. 만에 하나라도 그가 돌아올 때를 대비한 최후의 보루였으리라.
어쩌면 더 많은 공간이 있었지만, 마지막 편지로 써버린 걸지도.
어쨌건, 지금은 그 공간도 글자로 채워져 있었다.
-남부.
보관함 구석에 굴러다니던 깃털 펜으로, 이안이 남긴 답신이었다.
공간이 부족해서 그가 남긴 건 저 단어가 전부였다.
물론 지면이 더 남아있었더라도 그다지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을 터였다.
“답장은, 왔나요?”
루시아의 목소리가 전서 너머에서 이어졌다. 전서를 반으로 접으며, 이안이 고개를 저었다.
“혹시나 했는데, 아니.”
전서를 다시 확인한 또 다른 이유였다. 하지만 이미 글자가 새겨진 위에 덧칠하는 식으로 답장하는 건 불가능한 모양이었다.
루시아가 양피지에서 시선을 돌리지 않은 채 어깨를 까딱였다.
“아쉽네요.”
전혀 그렇지 않은 말투였다.
이안도 마찬가지였다. 어차피 생존과 위치를 알리는 게 목적이었으니까. 그가 남긴 한 단어로도 두 목적을 모두 달성할 수 있으리라.
게다가 황녀의 성격상, 그의 답신을 진작 확인했을 터였다. 필립과 엘리야에게도 소식을 전하겠지.
‘그거면, 뭐.’
생각하며, 이안은 한 번 더 접은 전서를 옆에 내려놓았다.
촛불이 곳곳에 일렁이는 가운데, 건너편 벽면에 작게 난 창문 너머로 흐릿한 어둠이 일렁였다. 나무 판자를 비스듬하게 걸쳐 열어 둔 채였다. 성에 창문이 거의 없고 그마저도 작은 건, 사막이 가깝기 때문일 터였다.
“그 소식지인가 뭔가에 쓸만한 내용은 있고?”
비스듬하게 기대고 있던 상반신을 바로 하며 이안이 물었다. 그 와중에도 아공간에 오른손을 밀어 넣는 채였다.
-친구, 나는 언제….
흐릿하게 번지던 요그의 속삭임이 가차 없이 끊어졌다. 이안은 아공간에서 꺼낸 소형 보관함을 옆에 내려놓았다.
“아직까지는 없어요. 이 소식지는 침식 이후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 같아요.”
대답하려다 순간 멈칫했던 루시아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말을 이었다.
“각 전선의 상황을 공유하기 위해서요. 그 외의 정보들은, 곁가지에 불과하네요.”
어깨를 으쓱인 녀석이 덧붙였다.
“확실한 건 전부 읽어 봐야 알 수 있겠지만요. 중요한 정보가 있다면 알려 드릴게요. 짧고 간결하게.”
읽을 게 생겨서 즐거운 듯한 말투였다. 이안이 듣기에도 흡족한 결론이었다.
“그래. 부탁할게.”
보관함의 뚜껑을 열며 대답한 이안이, 안에 잘 접은 마법 전서를 집어넣었다.
정작 루시아는 이 편지를 끝까지 읽지 않았다. 첫 부분을 조금 읽고는 이안에게 돌려준 것이다.
그에게만 털어놓은 내밀한 속내를 타인이 자세히 알게 되는 건, 황녀에게 씻을 수 없는 수치로 남게 되리라는 이유에서였다.
그래서 이안은 그녀에게 전서의 내용을 구술로 알려줘야 했다.
물론, 짧고 간결하게.
‘이 세계에도 세줄 요약 문화가 정착되어야 할 텐데.’
생각하며, 보관함 안에서 말린 나무껍질처럼 거무튀튀한 부적을 꺼냈다.
오늘 밤에 가장 필요한 물건이었다. 부적을 손에 쥔 그가 그 옆으로 손가락을 움직일 찰나.
“시종이 오는 것 같아.”
한쪽 다리를 구부리고 반대쪽 다리를 그 위에 얹은 채 침상에 누워 있던 디아나가, 걸친 발끝을 까딱대며 내뱉었다.
이안도 곧 조용히 가까워지는 발소리를 들었다. 보관함을 아공간에 휙 던져 넣은 그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디아나. 받아.”
그가 오른손을 휙 저었다. 반사적으로 손을 뻗어 날아드는 포물선을 받아 든 디아나의 눈이 커졌다.
“주는 거야?!”
이안이 던진 건 궐련이었기 때문이다. 뚜껑을 닫은 은제 궐련함을 흉갑 사이에 밀어 넣으며, 이안이 고개를 까딱였다.
“빌려주는 거야. 어차피 너희 가문에 도착하면 받아낼 수 있으니까.”
“물론이지…! 이자까지 쳐서 갚을게!”
디아나가 번쩍이는 눈으로 궐련을 내려다보며 내뱉었다. 물론 이안도 그럴 생각이었다.
똑똑, 문 두드리는 소리가 이어지는 가운데 이안이 몸을 돌리며 덧붙였다.
“절대로 루시아는 피게 하지 마. 가능하면, 연기는 창밖으로 뿜고.”
“걱정마. 반 모금도 안 줄 거니까.”
디아나가 대답하는 가운데, 루시아가 슬며시 입술을 비죽댔다.
역시 한 모금 얻어 피워 볼 생각이었군.
입꼬리를 말아 올린 이안이 문으로 손을 가져갔다.
“사고 치지 말고 조용히들 있어.”
문을 열자, 예의 그 까무잡잡한 소년 시종이 서 있었다. 한 손에 촛불 두 개가 일렁이는 촛대를 든 채였다. 공손하게 무릎을 굽혀 인사한 녀석이 몸을 돌렸다.
“모시겠습니다. 성자 대행.”
“이번엔 앞서갈 필요 없어.”
이안이 녀석의 뒤로 따라붙으며 말했다. 시종이 냉큼 그와 보폭을 맞췄다. 녀석을 따라 복도를 걸으며, 이안이 물었다.
“모로, 아니, 내 말은?”
“말씀하신 대로 생고기를 가져다줬습니다. 정말… 잘 먹던데요.”
살짝 고개를 숙이며 대답한 시종이, 이내 덧붙였다.
“마구를 혼자 쓰고 있어서, 아주 편하게 쉬고 있을 겁니다.”
“빌리언 경은, 정말 세심하시군.”
“그게….”
잠시 머뭇거린 시종이, 이내 어깨를 으쓱이고는 말했다.
“다른 말들이 잔뜩 겁에 질려서 난동을 피웠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별 수 없이 마련한 모양입니다.”
“…그 녀석이 다른 말들을 위협한 건 아니고?”
이안이 슬쩍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시종이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닌 것 같았습니다. 제가 다가갈 때도 아무런 위협도 하지 않았고요. 물론, 손도 대지 못하게 하긴 했지만요. 마구간지기 말로는, 신의 축복을 받은 명마일 거라더군요.”
정확히 그 반대인데. 생각하면서도, 이안은 모른 척 고개를 주억거리며 계단을 내려갔다.
“경께 우리가 떠난다는 말씀은 전했고?”
“예. 며칠만 더 머물러 주실 수는 없으신지 여쭤보라고 하시더군요.”
그럴 줄 알았다고 내심 읊조리며, 이안이 고개를 저었다.
“융숭한 대접에 감사드리지만, 예정대로 떠나겠다고 전해줘. 이건 통보라고도.”
“예. …새벽에, 성자 대행의 말을 미리 준비해 둘까요?”
또 다른 복도로 접어들며, 시종이 문득 목소리를 낮춰 덧붙였다.
야반도주를 한다면 협조하겠다는 듯한 태도였다. 피식 웃은 이안이 녀석을 돌아보았다.
“고맙지만 날이 밝은 뒤에 준비해 줘. 네 지휘관은 날 막을 권한이 없어. 물론, 배짱도.”
“…예. 성자 대행.”
시종이 살짝 고개를 숙였다. 약간 민망한 것 같기도, 재미있어하는 것 같기도 하는 옅은 미소를 입가에 머금은 채였다.
그 와중에도 녀석의 걸음은 거침없이 이어졌다.
이안은 시종이 그를 내성 옆에 이어진, 일종의 별관으로 인도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이쪽에는 둘씩 같은 종족끼리 짝을 지은 병사들이 곳곳에 서 있었다.
“…성자 대행.”
“영광 있으라….”
그들은 이안을 발견하면 득달같이 좌우로 물러나 고개를 숙였다.
인간. 요정. 심지어 오크들도 그랬다.
“영광 있으라….”
“타 쟈카르….”
복도를 지나쳐 아래로 이어진 계단으로 접어든 이안의 한쪽 눈매가 슬쩍 가늘어졌다.
오크 병사 하나가 읊조린 말은 다른 병사들과 달랐기 때문이었다.
“타쉬 자카흐…?”
특유의 숨소리 때문에 정확한 발음을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이안이 읊조리자, 바로 앞에서 계단을 내려가던 시종이 곧바로 대답했다.
“타 쟈카르. 옛 사막의 언어일 겁니다. 사막의 구원자, 신의 구원자. 뭐 그런 뜻일 거예요. 저도 정확히는 모르지만요.”
“…내가 딱히 사막을 구원하지는 않았는데.”
루시아가 이 말을 듣지 못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이안이 대답했다.
계단을 내려가던 시종이 그를 돌아본 건 그때였다.
“저희들의 옛 신을 구원하셨으니까요. 죽음으로, 마침내 안식을 주신 겁니다.”
“야나르 타쉬를 말하는 거군.”
“…예. 사막 출신 중에는, 아직도 죄책감을 가지고 있는 이들이 있습니다. 신을 버렸을 뿐만 아니라, 타락하게 만들기까지 했다고요.”
“너도 그런 사람 중 하나냐?”
“제 아버지가요. 할아버지도. 저는 찬란한 여신을 섬깁니다, 성자 대행. 물론 부모님도요.”
촛불의 불빛이 빙긋 미소 짓는 소년의 얼굴과 이빨을 비췄다.
이안을 올려다보며, 녀석이 다시 한번 살짝 고개를 숙였다.
“그래도 감사드립니다. 부모님께 이 소식을 전하면 아주 기뻐하실 겁니다.”
“…감사받으려고 한 건 아니지만.”
대답하며, 이안은 저도 모르게 턱을 긁적였다.
야나르 타쉬의 최후는 사실, 안식이라는 말과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다. 그의 권역을 위한 산 제물이 되지 않았던가.
“…저 앞이 기도실입니다. 성자 대행.”
그사이 계단을 내려와 복도로 접어든 시종이 걸음을 늦추며 말했다. 이안은 다소 짧은 복도 너머를 바라보았다.
일렁이는 횃불 사이, 굳게 닫힌 나무 문이 보였다. 한복판에 루 솔라의 문양이 음각되어 있었다.
걸음을 멈춘 시종이 말했다.
“용무가 끝나실 때까지 기다리겠습니다.”
“이름이 뭐지?”
“…아민입니다. 성자 대행.”
이안이 불쑥 묻자, 시종이 조금 당황한 듯 멈칫하고는 물었다.
멈춰선 이안이 시종, 아민을 돌아보며 미소 지었다.
“그래. 아민. 돌아가는 길은 외워 뒀으니까, 가서 쉬어. 내일 오전에 우릴 데리러 와 주고. 그전까진 귀찮게 할 일 없을 거다.”
정확한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은 아민이, 깍듯하게 무릎을 굽혔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성자 대행.”
고개를 까딱인 이안은 더 덧붙이는 말 없이 몸을 돌렸다.
문으로 다가가는 그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맺혔다가, 문을 연 순간 씻은 듯이 사라졌다.
안으로 들어선 이안이 장내를 훑었다.
‘이만하면, 그냥 교회나 사원이라고 불러도 될 것 같은데.’
내부는 꽤 넓었다. 1층의 남은 공간 전부를 기도실로 사용하는 것이다.
나무 의자도 여럿 놓여 있었고, 기도실 끝의 제단에는 루 솔라의 상징인 황금 고리가 솟아 있었다. 주위로 여러 개의 촛불을 켜 둔 채였다.
잘 관리되고 있는 게 분명했지만, 어쨌든 당장은 아무런 방해꾼도 없었다.
‘이만하면 충분하겠네.’
걸음을 옮기며 주위에 아무런 인기척도 없다는 것을 확인한 이안이, 비로소 제단 앞에 멈춰 섰다.
그가 가슴 앞으로 들어올린 오른손을 활짝 펼쳤다. 눈동자에 불그스름한 마력이 일렁인 것도 잠시.
화륵-
손아귀에서 작은 불꽃이 피어올랐다. 삽시에 모여드는 불길을 잠시 응시한 이안이 왼손을 위로 치켜들었다. 내내 쥐고 있던 부적이 불꽃으로 떨어졌다.
화르륵-
불꽃이 삽시에 부적을 삼켰다. 불길 내부에서 번지기 시작한 황금빛이 삽시에 밝아졌다.
“……?”
이안의 미간이 좁아진 건 몇 초 지나지 않아서였다.
불길에서 황금빛 마력이 사방으로 뿜어져 나오지도, 허공에 진언이 새겨지며 통로가 열리지도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안의 미간에 파인 골이 더 깊어질 찰나.
퍼석-!
금빛이 섞인 불길이 산산이 흩어졌다. 황금빛 마력을 머금은 부적이, 멀쩡한 모습으로 그의 손바닥에 떨어졌다.
“…….”
동시에 떠오른 퀘스트 창을 응시하며, 이안은 한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백금룡은, 부름에 응하지 않았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