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Dark Fantasy Villain RAW novel - Chapter 504
#504화
침상에 비스듬하게 기대앉아 술을 홀짝대던 루시아가, 이안을 미소로 맞이했다.
“생각보다 일찍 오셨네요. 늦으실 줄 알았는데.”
“뭐…. 그렇게 됐어.”
이안이 방을 가로지르며 대답했다. 루시아의 미소가 옅어졌다.
평소처럼 덤덤한 얼굴이긴 했지만, 그의 기분이 그다지 좋지 않다는 사실을 눈치챈 것이다.
“그 문서들은 다 읽었나 보네.”
식탁 앞에 선 이안이 덧붙였다.
음식 쟁반 옆, 나무 가면에 기대 놓은 궐련을 집어 드는 채였다. 디아나가 반쯤 남긴 궐련이었다.
루시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알아 두셔야 할 만한 내용은, 그다지 많지 않았지만요.”
잠에서 깬 디아나가 맞은편 침대에서 부스스 몸을 일으키는 가운데, 잠시 말을 멈췄던 루시아가 덧붙였다.
“뭔가, 문제가 있으셨던 거군요.”
“가장 본질적인 문제가 생겼지.”
창가의 촛대를 들며 대답한 이안이, 입에 문 궐련 끝에 다시 불을 붙이며 덧붙였다.
“그 양반이 아예 나타나지도 않았거든.”
“뭐라고요…?”
루시아의 눈이 대번에 커졌다. 그녀의 입술이 곧이어 달싹였다.
“하지만, 이안 님의 부름에는 반드시 응해주시는 거 아니었나요?”
“나도 그런 줄 알았어. 지금까진.”
대답하며 다시 촛대를 창가에 내려놓은 이안이, 식탁 옆의 의자에 털썩 걸터앉았다. 그가 들이마셨던 연기를 길게 뿜어내는 사이.
“주무시는 거겠지….”
디아나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내뱉었다. 다소 나른한 눈으로 이안이 입에 문 궐련을 바라보면서, 그녀가 말을 이었다.
“그 거대한 마경을 무너뜨리는 게 쉽지는 않으셨을 테니까. 제아무리 위대한 백금룡이라도 녹초가 되셨을 거야. 용은 한 번에 몇 년씩도 잔다던데.”
“뭐, 그럴지도 모르지.”
이안이 덤덤하게 대답했다.
타락용 타후므리트와 싸우고 나서도 요양에 들어가지 않았던가.
게다가 이제는 단말로 삼을 용의 아이도 없었으니, 잠에서 깨지 않고는 만나러 올 방법이 없었는지도 몰랐다.
“…그랬으면 좋겠고.”
벽면에 뒤통수를 기대며, 이안이 덧붙였다. 그게 그나마 예상 가능한 최선의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백금룡이 저지른 짓을 신들이 좋게 볼 리 없지 않던가. 천벌을 받고 있다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벽을 무너뜨리는 과정에서 뭔가 부상을 입었을 가능성도 충분했다.
혼돈과 광기에 직접 적으로 노출되었으리라는 사실은,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는 부분이었다. 그 외에도 예상하지 못한 부작용이 더 있을 가능성 역시 충분했다.
당사자에게 직접 정확한 이야기를 듣고, 문제가 있다면 해결할 방법을 찾아보려 했건만.
“어쨌든, 놀라운 일은 아니지. 언제나 돌발 상황은 일어나는 법이니까.”
환영에서 보았던 안광을 떠올리던 이안이, 이윽고 나지막이 읊조렸다.
루시아는 물론, 디아나 역시 한동안 선뜻 뭐라 입을 열지 못했다.
디아나가 뭐라도 말해 보라는 듯 눈짓을 보내는 가운데.
“그럼… 본토로 돌아가면 그분의 둥지를 직접 찾아가실 건가요?”
이윽고 침대 옆에 놓인 술병을 집어 든 루시아가, 자신의 잔을 채우며 물었다.
이안은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아니. 그냥 기다릴 거야.”
“아무것도… 하지 않으시고요?”
술병을 내려놓는 루시아의 미간이 절로 좁아졌다.
“그래.”
대답하며, 이안은 자신의 오른손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손아귀에는 여전히 소환 부적이 들려 있었다.
“달리 방법도 없어. 그분의 둥지가 어디에 있는지는 전혀 알지 못하니까. 때가 되면, 모습을 드러내시리라 믿을 수밖에.”
물론 그냥 무책임하게 내린 결론은 아니었다. 소환에 실패한 순간 퀘스트가 생기지 않았던가.
대행자의 기다림. 백금룡의 부름을 받을 때까지 부적을 지니고 있으라는 게 내용의 전부였다.
지금 그가 쥔 부적은, 그 뒤로 아공간에 넣을 수도 없게 됐다.
하지만 어쨌건 이게 게임에서도 존재하던 상황이며, 백금룡이 모습을 드러내게 되리라는 것만큼은 분명해졌다.
“…에레노스 가문에 도착하면, 협조를 요청해 볼게요.”
그런 속내까지 알 리 없는 루시아의 얼굴에는 걱정이 가득해졌다.
평소보다 감정이 더 선명하게 드러나는 건, 술을 마셔서일 터였다.
“가문의 서고가 있을 테니까요. 용과 요정은 고대부터 각별한 관계였으니, 어쩌면 단서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몰라요.”
“뭐… 그러던가.”
이안이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루시아는 뭔가에 몰두하면서 걱정을 다스리는 부류가 아니던가.
게다가 어쩌면 정말 뭔가 단서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만약을 대비한 보험이 되어주리라.
“부적을 보관할 방법도 찾아야겠어. 이왕이면, 목걸이 같은 게 좋겠는데.”
손아귀를 내려다보며 이안이 덧붙였다. 디아나의 목소리가 이어진 건 바로 그 직후였다.
“일단은 이걸 써.”
겨드랑이 아래쪽을 더듬댄 그녀가, 겉으로 거의 드러나지 않던 사슬 띠의 고리를 풀었다. 뒤이어 흉갑 안쪽에 감춰져 있던 손바닥만 한 가죽 주머니가 밖으로 나왔다.
입구도 사슬 고리로 단단하게 여민 주머니였다. 대각선 가장자리에 고정된 얇은 금속 사슬이 치렁치렁하게 늘어졌다.
“난 이제 별로 필요 없으니까.”
주머니의 입구를 열며 덧붙인 디아나가, 안에 든 나무 병들을 침대 위에 우르르 쏟아 버렸다.
송진을 바른 것처럼 겉이 반질반질한 저 작은 병들에는 그녀가 수집한 극독이 담겨 있었다.
“…고맙네. 잘 쓸게.”
요정의 자발적인 선물을 다 받다니. 오래 살고 볼 일이라고 내심 읊조리며, 이안이 선선히 주머니를 받아 들었다.
“사슬은 목덜미와 반대쪽 겨드랑이로 감는 걸 추천해.”
그가 주머니 안에 부적을 넣는 사이, 디아나가 말을 이었다.
“기름 먹인 마수 가죽에 난쟁이 장인들이 만든 사슬이니까. 갑옷째로 뜯겨 나가지 않는 이상, 끊어질 일은 없을 거야.”
고개를 주억거리며, 이안은 주머니를 흉갑 안쪽으로 밀어 넣었다. 그가 사슬을 목덜미 쪽으로 더듬더듬 꺼내는 사이.
“만약에… 아주 만약에 말이에요.”
심란한 얼굴로 술을 홀짝대던 루시아가, 조금 헝클어진 목소리로 내뱉었다. 사슬을 목덜미에 두른 이안이 반대편 겨드랑이 아래를 더듬대며 녀석을 바라보았다. 잠시 머뭇거린 루시아가 덧붙였다.
“만약 백금룡께서 광기에 물드신다면… 이안 님은 어떻게 하실 건가요?”
“……!”
디아나가 미간을 찌푸리며 홱 그녀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정작 이안의 표정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이미 진작 생각해 본 문제였기 때문이다.
손을 멈추지 않은 채, 그가 입을 열었다.
“글쎄. 그분이 한순간에 돌아버리실 것 같진 않은데. 광기에 완전히 먹히기 전에, 내게 경고하거나 도움을 청하시겠지.”
디아나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루시아는 여전히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도 끝내 타락하고 마신다면요?”
“루시페르…!”
디아나가 가슴이 철렁 내려앉은 듯한 눈빛으로 루시아를 돌아보았다. 이안의 심기를 거스르고 싶지 않은 것인지, 그를 걱정하는 건지는 모를 노릇이었다.
물론, 이번에도 이안의 표정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루시아의 눈빛과 목소리에 섞인 걱정을 읽어서였다.
아마도 그렇게 된다면 더는 백금룡의 뜻을 대행하지 않을 것이라는 대답을 듣고 싶을 터였다.
어떻게든 그를 되돌리고자 노력하며 오명을 함께 뒤집어쓰는 것이 아니라.
“만약 그렇다면….”
마침내 고리를 고정한 이안이, 오른쪽 어깨를 가볍게 돌리며 입을 열었다. 사슬 주머니는 그의 몸에 거의 딱 붙어 있었다.
적당한 불편함이 오히려 마음에 들었다. 혹시나 문제가 생긴다면 곧바로 알아차릴 수 있을 테니까.
“내가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그다지 중요해지지 않을 거야. 황제와 흑태자의 집안 싸움도.”
다시 벽면에 등을 기댄 그가 말을 이었다.
“전 대륙의 운명이 걸린 문제가 될 테니까.”
“…….”
루시아의 눈매가 가늘어지는 가운데, 디아나가 고개를 갸웃했다.
“아무리 위대한 백금룡이라고 해도… 홀로 제국 전체를 상대할 수는 없으실 텐데…?”
“글쎄. 내 생각은 조금 다르지만, 네 말이 맞을 수도 있지.”
선선히 고개를 끄덕인 이안이 디아나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어쨌건, 그다음을 상대할 여력까진 남지 않게 될 거야.”
“다음…?”
디아나의 표정이 조금 더 의아해졌다. 대답 대신 궐련의 연기를 들이마신 이안의 눈빛이 순간 일렁였다.
다음 순간 미끄러지듯 그의 입을 떠난 궐련이, 반 바퀴를 빙글 돌며 디아나의 입술 사이로 날아들었다.
“……?”
반사적으로 궐련을 입에 물면서도, 디아나의 눈매가 구겨졌다. 마음의 준비를 하라는 것처럼 느껴져서일 터였다. 연기를 한 모금 들이마신 그녀가 이내 입을 열었다.
“아니야. 더는 말하지 않아도-”
“역천룡….”
그녀의 말이 끝나는 것보다, 옆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번지는 게 더 빨랐다. 파르르 떨리는 손으로 술잔을 입에 가져가는 루시아였다.
멈칫한 디아나가 황당한 소리를 들은 듯 돌아보는 가운데, 술잔을 내린 루시아가 탄식하듯 덧붙였다.
“역천룡이 다시 풀려나게 되리라고 생각하시는 거군요.”
“이 얘기는 또 들었나 보네.”
이안이 한쪽 입꼬리만 슬쩍 말아 올리며 물었다. 루시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잠재적인 재앙이니 알고는 있어야 한다고 했어요.”
“놈의 봉인에는 이미 균열이 생긴 상태야. 백금룡께선 침식이나 광기의 영향이리라 추측하셨지. 정말 그렇다면, 벽이 무너진 여파가 균열을 더 키웠을 거야.”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한 이안이, 루시아의 떨리는 눈을 마주 보았다.
“여기서 유일한 간수이자 감시자인 그분마저 사라진다면, 더는 거칠 게 없어지겠지. 신들의 영향력도 예전 같지 않을 테고.”
“루 엔테르 맙소사….”
루시아가 탄식했다. 이안이 어깨를 으쓱였다.
“어디까지나. 최악의 상황을 가정한 것뿐이야.”
말과 달리, 그는 내심 확신하고 있었다. 게임에서의 역천룡은 선택지에 따라 엔딩 이후에 등장하는 히든 보스가 되지 않던가.
백금룡이 광기에 물들지 않더라도, 머잖아 자신을 가두고 있는 봉인을 깨뜨릴 터였다.
어쩌면 제국과 흑태자의 대립이 붕괴를 가속화 할지도 몰랐다.
심지어 놈은 서부에서 중앙으로 이어지는, 내해를 가로막은 산맥 어딘가의 지하에 있지 않던가.
제국인들은 중앙과 그렇게 가까운 곳에 전설 속의 악룡이 봉인되어 있으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할 터였다.
어쩌면 이제는, 대교회조차도.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궐련의 연기만 멍하니 내뿜으며 둘을 돌아보던 디아나가, 비로소 얼빠진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천 년도 더 전에 죽은 악룡 이야기가 왜 자꾸 나와…?”
“들었다시피, 놈은 안 죽었어. 디아나.”
이안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멍하니 그의 눈을 바라보던 디아나의 얼굴이, 이윽고 허물어지듯 일그러졌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나중에 너희 가문의 원로에게도 물어보던가. 그 녀석도 알고 있는 사실이니까.”
“…….”
디아나의 입이 멍하니 벌어지면서, 입술 사이에 아슬아슬하게 걸쳐 있던 궐련이 떨어졌다.
바닥에 닿지는 않았다. 그전에 허공에 우뚝 멈춰 방향을 틀더니, 이안의 입술 사이로 미끄러지듯 빨려 들어간 것이다.
연기를 한 모금 들이마신 이안이 말했다.
“이런 식으로 가정하면 한도 끝도 없어. 확실해지기 전까지는 사서 고민하지 말자고. 그저 잠드신 걸 수도, 신들에게 벌을 받고 계실 가능성도 차고 넘치니까.”
“…네. 그럴게요.”
힘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루시아가 침대 옆에서 다시 술병을 집어 들었다. 어느새 그녀의 잔은 텅 비어 있었다. 술병에 남은 술도 채 반이 되지 않았다.
그녀가 술잔을 채우길 기다린 이안이, 이윽고 시선을 돌렸다.
“……!”
술잔을 쥔 루시아의 손이 앞으로 휙 뻗어 나왔다. 반사적으로 손아귀에 힘을 준 그녀가 이안을 돌아보았다. 이안이 옆으로 고개를 까딱였다.
“벌써 술꾼이 될 필요도 없고. 이미 많이 마셨어, 루시. 발음이 새고 있다고.”
“…….”
입술을 살짝 비죽이면서도, 루시아가 순순히 술잔을 놓았다. 이안이 가까워지는 술잔을 움켜쥐는 가운데.
“이제 이런 끔찍한 비밀 같은 건 그만 알고 싶어….”
디아나의 나지막한 탄식이 이어졌다. 그녀는 눈을 질끈 감은 채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어내리고 있었다.
“누군가 그냥 내 기억을 전부 지워 졌으면 좋겠어. 그게 차라리 속이 편할 것 같아….”
“너희 원로 앞에서 그 말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낮게 실소하며 덧붙인 이안이 술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그 녀석도 지금쯤 기억을 되찾았을까 하는 궁금증이 뒤를 이었다. 머잖아 해답을 알게 될 의문이었다. 말끔히 잔을 비운 이안이 입을 열었다.
“소식지의 내용에 대해선, 내일 천천히 이야기하자. 어차피 시간은 많으니까.”
“그게 좋겠어요. 이안님 말씀대로, 조금 취한 것 같거든요.”
루시아가 다소 나른하게 대답하는 가운데, 잔을 내려놓은 이안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침 일찍 떠날 거야. 다들 푹 쉬어 둬.”
거의 다 탄 궐련을 디아나에게 내민 그가 덧붙였다.
“난 이 개밥은 안 먹을 거니까, 괜히 남겨 두지 말고.”
“이게 어딜 봐서…. …그래. 알았어.”
디아나가 떨떠름하게 중얼댔다. 그사이 자신의 침대로 걸어간 이안이 그대로 몸을 누였다.
입가의 미소는 이미 씻은 듯이 사라진 뒤였다.
‘…내 앞에서 미쳐 날뛰는 추태를 보이지는 않으시리라 믿겠소.’
그래야 역천룡도 함께 죽이지.
내심 덧붙이며, 이안은 명상을 활성화했다. 그러지 않는다면 잠들 수 없는 밤이 될 게 분명했으니까.
일행은 예정대로, 다음 날 아침 일찍 요새를 떠났다.
“제국의 영웅께 영광 있으라-!”
“영광 있으라!”
빌리언이 주도한 게 분명한, 열렬한 배웅을 받으면서.
물론, 일행 중 그 누구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