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Dark Fantasy Villain RAW novel - Chapter 512
#512화
이안이 대답하기 위해 그녀를 바라보았을 때, 테사이아는 이미 몸을 돌려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의자 좌우에 선 경호원들이 자연스럽게 그녀의 뒤를 따랐다.
테사이아가 멈춘 건 바로 그 직후였다. 고개만 살짝 돌려 그들을 돌아본 그녀가, 연기 섞인 목소리로 내뱉었다.
“따라 올 필요 없어.”
“하지만….”
반사적으로 입을 열던 경호원이 멈칫했다. 테사이아의 눈매가 슬며시 꿈틀대서였다.
하지만 그녀는 디아나에게 그랬듯 서늘한 살의나 분노를 표출하지 않았다. 여전히 왼손에 쥔 이안의 증명서를 들어 살짝 까딱댔을 뿐이었다.
“저분이 누구인지 알 텐데. 소문대로라면 지금 어디서 돌아오신 걸지도.”
“…….”
“조용히 물러나 있어. 건방 떨지 말고.”
“…예.”
경호병들이 고개를 숙였다. 짧게 혀를 찬 테사이아의 시선이, 지켜보던 이안에게로 돌아왔다.
“가요.”
그녀는 이번에도 이안의 대답을 듣지 않고 곧바로 걸음을 옮겼다. 입에 문 궐련 대를 천천히 까딱댈 뿐이었다.
…전부 연기는 아닌 것 같은데.
내심 읊조리면서도 선선히 몸을 돌린 이안은, 다니엘을 따라왔던 길을 되돌아가는 디아나의 뒷모습을 일별했다.
그녀를 노려보던 테사이아의 눈빛을 다시 한번 떠올리는 채였다. 적어도 그건, 확실히 꾸며낸 게 아니었다.
‘평화로운 은퇴는 물 건너간 건지도….’
짧게 입맛을 다시며, 이안은 다시 정면을 돌아보았다.
앞서 걷는 테사이아는 정원 가장자리에서 기다리던 금발 요정의 곁을 지나치고 있었다.
“모셔.”
그녀의 한마디에 곧바로 고개를 끄덕인 금발 요정이, 뒤따라 다가오는 이안을 돌아보았다.
그녀는 공손하게 무릎을 굽혀 인사하고는, 길을 안내하듯 같은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어차피 뒷모습이 뻔히 보이는데, 굳이.’
생각하면서도, 이안은 선선히 숲으로 접어들었다. 궐련의 연기를 꼬리처럼 남기며 나아가는 테사이아는, 단 한 번도 주위를 두리번대거나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파슥- 파사삭-
심지어 길을 따라 걷고 있지도 않았다. 잘 정돈된 풀숲과 잔디가 그녀의 맨발에 아무렇지도 않게 짓밟혔다. 치맛자락에 걸리는 화초를 툭툭 쳐내고, 궐련의 재도 개의치 않고 털어대는 채였다.
‘무법자가 따로 없네.’
그 위풍당당한 뒷모습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이안이 옅은 헛웃음을 흘렸다. 물론, 이 상황이 유쾌한 건 그뿐일 터였다.
“…….”
바로 앞에서 걷고 있는 금발 요정은,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테사이아를 바라보고 있었으니까.
자신과 이안도 숲을 짓밟으며 나아가고 있다는 건 전혀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물론, 테사이아를 따라가고 있어서이긴 했지만.
자박- 파삭-
하지만 어쨌든, 그들은 길을 따라 빙 돌아 나가는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빠르게 숲을 벗어나고 있었다. 나뭇가지 너머로 벌써 저택의 복도가 보였다.
“……!”
“가, 가주…!”
성큼성큼 숲을 빠져나오는 테사이아를 발견한 요정들이, 호랑이라도 마주친 것처럼 얼어붙으며 고개를 숙였다. 물론, 테사이아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비켜.”
그저 멈추지 않고 그들을 지나쳐, 벽면 안쪽으로 뚫린 위층으로 이어지는 계단으로 쑥 들어가 버렸을 뿐이었다.
그 와중에도 오른팔을 휙 휘둘러, 거의 다 탄 궐련의 심지를 복도 바닥에 털어버리는 채였다.
“…휴.”
이안과 함께 숲을 빠져나온 금발 요정이, 낮은 한숨을 내쉬며 후다닥 앞서 나갔다.
그녀는 땅에 떨어진 궐련의 심지를 주워 들고는 자연스럽게 계단 쪽으로 몸을 돌렸다. 모든 게 아주 익숙해 보였다.
‘…뒤치다꺼리 전문인 거군.’
또 한 번 낮게 웃음 지으며, 이안도 계단에 발을 들였다.
앞서 올라가는 테사이아는, 물론 그를 기다려 주지 않았다. 이안이 세 번째 층으로 이어지는 계단에 발을 들였을 때 그녀는 이미 복도 너머로 사라져 보이지도 않았다.
물론 문제 될 건 없었다.
“…….”
궐련의 심지를 손에 쥔 시종 요정이 여전히 그의 앞을 인도하고 있었으니까. 그녀는 3층 복도에 들어서고서야 성큼성큼 앞서 나갔다.
‘확실히 규모가 작진 않네….’
이안은 상대적으로 느긋하게 그 뒤를 따랐다. 허리 아래까지 오는 난간과 그 너머로 펼쳐진 에레노스의 숲. 그리고 반대편의 벽면을 따라 이어진 나무 문들을 차근히 돌아보는 채였다.
‘그 녀석이, 가주란 말이지.’
새삼스럽게 곱씹으며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린 이안이 다시 앞을 바라보았다.
시종 요정은 복도 끝, 살짝 열린 문 앞에서 그를 돌아보며 기다리고 있었다. 직각으로 꺾이는 코너에서도 조금 더 움푹 들어간, 가장 끝 방이었다.
그녀는 이안이 가까워지자 비로소 한 손으로 문을 활짝 열며 입을 열었다.
“성자 대행께서 도착하셨습니다.”
…벙어리는 아니었네. 내심 읊조리며, 이안은 열린 문 앞에 섰다.
장내의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좌측 벽면에는 푹신해 보이는 기다란 소파가. 우측 벽면에는 널찍한 침대가 놓인 제법 넓은 방이었다. 중앙에는 원탁이 놓여 있었는데, 무화과와 포도를 비롯한 과일이 쌓인 접시와 주석 술병. 그리고 술잔 두 개가 마련되어 있었다.
아마 이 요정 시종이 준비해 둔 것이리라.
“들어와요.”
내뱉는 테사이아는 정면, 담벼락을 바라보게 뚫린 작은 창문을 등지고 서 있었다.
원탁 한쪽에 증명서와 궐련 대를 내려놓고, 목걸이를 벗으려는 듯 양손으로 목덜미를 어루만지는 채였다.
“실례하겠소.”
비로소 이안이 장내로 발을 들였다. 시종 요정이 자연스럽게 문을 닫으며 따라 들어오는 가운데, 식탁 위에 생명의 영약을 툭 내려놓은 테사이아가 내뱉었다.
“너는 물러나 있어. 피비.”
뒤이어 의자를 밖으로 뺀 그녀가, 그 위에 왼발을 얹으며 덧붙였다.
“당분간 근처로는 아무도 오지 못하게 하고.”
“…아무도요?”
방 한복판에 멈춰선 이안이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시종 요정, 피비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고 있었다.
역시, 이 요정은 다른 요정들처럼 테사이아를 마냥 두려워하지 않았다. 화를 내지 않은 건 테사이아도 마찬가지였다.
“그래.”
시큰둥하게 대답하며, 허벅지 안쪽에 고정된 가죽끈의 고리로 손을 가져갈 뿐이었다.
맨다리를 훤히 드러낸 그녀를 잠시 못마땅한 듯 바라본 피비가 덧붙였다.
“하지만 가주. 성자 대행과 단둘이 오랜 시간을 보내신다면 불필요한 오해를-”
“내가 그딴 걸 신경 쓸 것 같아?”
테사이아가 싸늘하게 코웃음 치며 말을 잘랐다. 고리를 푼 가죽끈을 그대로 쥐어 드는 채였다.
“나가. 피비. 두세 시간쯤에 식사할 수 있게 준비해 두고.”
가죽끈 안쪽에는 낯익은 단검이 검집에 담긴 채 고정되어 있었다. 과거 이안이 선물해 주었던 요정의 비수였다.
영약 병 옆에 단검을 툭 내려놓으며, 그녀가 덧붙였다.
“물론, 식사도 경과 둘이서만 할 거야.”
“…알겠습니다.”
비로소 낮게 한숨 쉬며 대답한 시종, 피비가 몸을 돌렸다.
이안과 눈이 마주치자 살짝 무릎을 굽혀 인사하는 것도 잊지 않은 채였다. 살짝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이안은 문을 나서는 그녀의 뒷모습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아무래도 편하게 대화를 나누려면, 저 시종이 멀어져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타탓-
옅은 발소리와 바람 소리가 귓가를 스친 건 바로 그 직후였다.
반사적으로 앞을 돌아본 이안의 눈매가 순간 구겨졌다.
“이안…!”
테사이아가 어느새 코앞으로 달려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치맛자락을 펄럭이며, 날다람쥐처럼 팔다리를 활짝 펼친 채였다.
콰직-
뭔가 반응할 틈도 없이 그대로 충돌한 그녀가, 이안의 목을 와락 끌어안았다. 순간 휘청댄 이안이 하반신에 힘을 주며 넘어지지 않고 버티는 사이.
“왜 이렇게 늦었어…! 그동안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테사이아가 그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으며 내뱉었다. 양다리로도 그의 허리를 감싸 안아서, 껴안은 게 아니라 붙잡고 매달려 있는 것에 가까웠다.
“…….”
미간을 찌푸린 채 자세를 바로 한 이안이, 그녀의 은발을 내려다 보며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아직, 시종이 복도에 있는데.”
“알게 뭐야… 들을 거면 들으라고 해….”
물론 테사이아는 내려가지 않았다. 무책임하게 내뱉으며, 오히려 이안의 목에 두른 팔을 더 깊이 끌어안았다.
“보자마자 냅다 달려들고 싶은 걸 겨우 참았단 말야…. 게다가 지금 내려가면, 다신 못 안게 할 거잖아….”
중얼대는 그녀의 말투와 목소리는 조금 전까지와는 전혀 달랐다.
차갑고 오만한 원로 요정이 아니라, 맨발로 마차 바닥을 굴러다니던 흡혈 요정의 말투였다.
저도 모르게 입꼬리를 말아 올린 이안이 내뱉었다.
“잘 아네. 그럼 이제 내려가야 된다는 것도 알겠지.”
물론, 테사이아는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럴 줄 알았다고 속으로 읊조린 이안의 눈동자에, 뒤이어 흐릿한 파장이 일렁였다. 의념의 손아귀로 테사이아를 움켜쥐려던 그가, 이내 멈칫했다.
“…….”
목덜미를 타고 훌쩍대는 숨소리가 번져서였다. 목을 감싸 안은 가느다란 팔과 앙상한 어깨도 가늘게 들썩이고 있었다.
“그동안 너무 많은 일이 있었어….”
꾹 억눌린 목소리가 목덜미를 간지럽혔다. 이안을 끌어안은 그녀의 팔다리에 더 힘이 들어갔다.
“힘들었어… 나 너무 힘들고 외로웠어… 이안….”
이안은 떨떠름하게 입맛을 다셨다. 의념의 손아귀를 흩어버리는 채였다. 대신, 테사이아의 뒤통수에 자신의 진짜 손바닥을 얹었다.
“…그래. 그래 보이네.”
읊조리는 그의 목덜미는, 어느새 축축하게 젖어 들고 있었다.
***
어깨를 들썩이며 한참을 대성통곡한 테사이아의 숨결이, 비로소 조금씩 안정을 되찾았다.
“…다 개 같아. 망할 놈의 에레노스. 아니, 망할 귀쟁이들….”
발음이 다 뭉개진 채 주문처럼 웅얼대던 목소리도, 그나마 알아들을 수 있는 수준이 됐다. 목덜미에 얼굴을 비비며, 그녀가 푹 젖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이안은 이해하지?”
“…방금 말한 부분만.”
우두커니 선 채 그녀의 뒷머리만 쓰다듬던 이안이 대답했다.
떨떠름한 얼굴인 건, 목덜미가 말 그대로 흥건했기 때문이었다. 그저 눈물만 묻은 건 아닐 터였다.
“귀쟁이들은 죄다 이기적인 개자식들이야…. 여긴 그런 놈들만 모인 쓰레기통이고… 난 쓰레기들의 우두머리지….”
이어진 읊조림에, 이안이 풀썩 헛웃음을 흘렸다.
“못 본 사이에 연기만 늘어난 게 아니네. 자학도 확실히 늘었어.”
“자학이 아니야. 저것들을 다스리는 가장 좋은 방식이 뭔지 알아, 이안?”
읊조린 테사이아가 비로소 홱 고개를 들어 이안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그녀의 얼굴은 눈물과 콧물로 엉망진창이었다.
물론, 이안의 목덜미도 그랬다.
“영혼에 공포를 심어주는 거야. 감히 거역하거나 잔머리를 굴릴 생각도 할 수 없을 만큼 깊숙하게. 다른 방식은, 별로 도움이 안 돼.”
그녀가 눈을 빤히 마주보며 내뱉은 말에, 이안의 입꼬리가 조금 더 말려 올라갔다.
“아주 훌륭한 폭군도 되셨고.”
“…이것도 많이 참는 거야. 정말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했다면, 이 저택의 귀쟁이 절반은 이미 땅속에 묻혀 있을 거라고.”
“그럼 훌륭한 가주라고 해야겠네. 어쨌든….”
무성의하게 덧붙인 이안이 살짝 고개를 까딱였다.
“이제 다 운 거지?”
“…응. 일단은.”
테사이아가 한 번 더 콧물을 삼키며 대답했다. 이안의 눈동자가 흐릿하게 일렁인 건 거의 동시였다.
“그럼 이제 내려 가.”
“어, 어어…?”
테사이아의 눈이 커졌다. 무언가가 그녀의 몸을 끌어당기고 있어서일 터였다. 순순히 딸려 간 그녀가, 팔다리를 축 늘어뜨린 채 허공으로 둥둥 떠올랐다.
“우와…! 이게 뭐야? 어떻게 한 거야, 이안?”
“잘.”
축축한 목덜미를 손바닥으로 문지르며 대답한 이안이 식탁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안은 여전히 대단하네…. 이게 무슨 마법인 건지 전혀 모르겠어.”
허공에 떠오른 채로 미끄러지듯 끌려가면서, 테사이아가 자신의 몸을 이리저리 내려다보았다. 언제 울었었냐는 듯이 반짝이는 눈빛이었다.
“아까 내 친구는 왜 그렇게 노려본 거야? 보아하니, 기억은 여전히 돌아오지 않은 것 같던데.”
“…어떻게 알았어?”
그를 홱 돌아본 테사이아가 물었다. 어깨를 으쓱인 이안이 의자 하나를 밖으로 빼며 말을 이었다.
“디아나는 옛날의 너를 안다고 했었거든. 하지만 너는 그 녀석이 이름을 밝히기 전까진 전혀 알아보지 못한 것 같아서.”
그사이 테사이아는 스르륵 허공을 움직여, 아까 발을 얹었던 의자 위에 자연스럽게 착지했다.
물론, 테사이아는 더 이상 신경도 쓰지 않았다.
“아하… 그랬구나… 예전의 날 알았단 말이지…? 하긴, 그 마귀할멈의 장손녀일 테니까….”
한쪽 입꼬리를 서늘하게 말아 올린 그녀가 혼잣말처럼 읊조렸다.
그사이 그녀의 옆자리에 앉은 이안이, 식탁에 놓인 술병을 들며 물었다.
“역시. 가주 자리를 평화적으로 물려받은 건 아닌 모양이네.”
“당연하지. 그건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이었어.”
대답한 테사이아가, 술잔을 들어 앞으로 내밀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 늙은이가 내 원수였거든.”
이안을 멈칫하게 만들기에도 충분한 말이었다. 테사이아의 가라앉은 눈을 잠시 마주 본 그가 읊조렸다.
“설마….”
“맞아. 난 그냥 납치되었던 게 아니야, 이안. 사비나, 그 악마 같은 년이 팔아넘긴 거지.”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