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Dark Fantasy Villain RAW novel - Chapter 517
#517화
“…역시.”
이안을 잠시 마주 본 테사이아의 입꼬리가 슬며시 말려 올라갔다.
“내가 이 얘기를 꺼내면, 이안이 그렇게 말할 것 같았어. 원래도 야옹이를 만나러 갈 생각이었지?”
“그래. 확인도 하고, 할 말도 있으니까.”
이안이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부스스 상반신을 일으켜 앉으며, 테사이아가 읊조렸다.
“그래서 오늘 얘기하고 싶지 않았던 거야. 이안도 고생을 많이 한 것 같아서, 며칠은 쉬게 해 주고 싶었거든.”
술병을 집어 드는 이안의 입가에 옅은 쓴웃음이 스쳤다.
“제국에 들어서자마자 목욕부터 한 보람이 없네.”
“네 얼굴은 물론 깔끔했지, 이안. 늘 그랬듯이. 하지만 목욕을 한다고, 네 갑옷에 새겨진 그 많은 흠집까지 사라지는 건 아니잖아.”
“…못 본 사이에, 눈썰미가 많이 좋아졌네.”
입꼬리를 더 말아 올린 이안이 술을 따르며 읊조렸다.
테사이아가 어깨를 으쓱였다.
“어떻게 모르겠어? 심지어 디아나는 아예 갑옷에 구멍도 뚫려 있던데. 너희 둘 다, 무슨 지옥에서 살다 온 것 같은 몰골이라구.”
그건 사실 내가 만든 거다만….
술병을 식탁에 내려놓으며 내심 덧붙인 이안이, 자연스럽게 술잔을 쥐어 들었다.
“그래서, 여기서 마로 텔까지는 얼마나 걸리지?”
“조금 돌아가도 일주일쯤이면 충분히 경계선까지 도착할 거야.”
“나쁘지 않네. 서둘러 움직이면, 보름 안에도 돌아올 수 있겠어.”
어차피 루시아 일행이 돌아오려면 일주일은 걸릴 터였다. 중간에 뭔가 일이 생겨서 며칠 더 늦어진다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느긋하게 여독을 풀면서 그를 기다리면 되리라.
생각을 정리하며 술을 한 모금 마신 이안이 덧붙였다.
“길 잘 아는 귀쟁이 하나만 붙여 줘. 경계에 도착하면 돌려보낼 테니까, 염려 말고.”
“다른 길잡이가 왜 필요해?”
곧바로 이어진 목소리에 이안의 눈매가 꿈틀댔다.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를 머금은 테사이아가 그의 옆얼굴을 바라보며 덧붙였다.
“내가 있는데.”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코웃음과 함께 내뱉은 이안이 술잔을 내려놓았다.
“검은 벽이 무너진 게 불과 얼마 전이야. 가주는 자리를 지켜야지.”
테사이아의 미간이 좁아졌다.
“하지만, 이안-”
“게다가 네가 아무리 폭군이라도, 마로 텔로 간다고 하면 귀쟁이들이 난리가 날 거야.”
단호하게 말을 자른 이안이, 고개를 돌려 그녀의 눈을 마주 보았다.
“설마, 샬롯과의 관계를 밝힌 건 아니겠지.”
“…물론 그건 아니지. 피비. 피비만 알고 있어.”
멈칫한 테사이아가 읊조렸다. 하지만 여전히 이안의 눈을 똑바로 마주 보는 채였다.
“네 걱정은 이해해, 테사.”
그녀가 뭔가 덧붙이기도 전에, 이안이 다시 말을 이었다. 어느새 오른손을 아공간에 밀어 넣은 채였다.
“하지만 아직 그 녀석은 무사해.”
덧붙이며, 이안이 오른손을 밖으로 꺼냈다. 그의 손아귀에는 금속 갑주가 덧씌워진 길고 검은 꼬리가 들려 있었다. 샬롯의 꼬리였다.
축 늘어진 꼬리를 테사이아 쪽으로 들어 보이며, 그가 고개를 까딱였다.
“여전히 털에 윤기가 흐르잖아.”
물론 대충 지어낸 거짓말이었다. 이안이 확신하는 건, 꼬리의 능력치 옵션이 그대로여서였다. 지금까지의 경험상, 샬롯이 죽었다면 비활성화되었을 터였다. 정보 자체를 확인할 수 없게 되었다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
그런 사실까지는 알 리 없는 테사이아는, 그저 샬롯의 꼬리를 뚫어질 듯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다. 더 기다려 주지 않고 꼬리를 아공간에 넣어버린 이안이 말을 이었다.
“그 녀석의 소식을 들고 돌아올 테니까, 기다리고 있어. 나머지 일행들이 도착하면 상황이나 잘 전해 주고.”
“…고마워, 이안. 마음이 조금 놓이네.”
이윽고 살짝 고개를 숙인 테사이아가 읊조렸다. 빈말이 아닌 듯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채였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너만 보낼 수는 없어.”
그녀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이어진 건, 고개를 주억거린 이안이 다시 술잔을 집어 든 찰나였다.
“…….”
이안이 미간을 좁힌 채 돌아보는 가운데, 자세를 바로 한 테사이아가 입을 열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야옹이 일이잖아. 그 녀석은 내 목숨의 은인이라고. 이안, 네가 그렇듯이.”
“…그 녀석은 네 입장을 충분히 이해할 텐데.”
“내가 못 견디겠다는 얘기야…. 네가 실종됐다는 걸 알았을 때도 그랬어. 하루하루가 불안과 걱정, 갈등의 연속이었지. 빨강 머리가 몇 주만 늦었어도, 못 견디고 검은 벽을 넘으러 갔을지도 몰라.”
그때의 감정이 되살아난 듯 잠시 입술을 꾹 앙다물었던 테사이아가, 이윽고 다시 말을 이었다.
“그리고 지금도 그래…. 요정 사회나 에레노스는, 사실 내게 아무런 의미도 없어. 전 가주가 날 팔아먹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을 때부터 그렇게 됐지. 내가 여길 지킨 건 그저, 네가 돌아올 거라고 믿어서야. 이안. 백금룡의 전언대로, 언제든 널 돕기 위해서.”
숨을 고르듯 한차례 긴 한숨을 토해낸 그녀가, 뒤이어 눈에 힘을 주며 이안을 마주 보았다.
“널 다시 만난 이상, 이제 귀쟁이들이 뭐라 떠들 건 상관없어졌어. 수인들이 날 죽이려 든다 해도 마찬가지야. 난 샬롯이 무사한 걸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해야겠어. 지금 이안, 너처럼. …그러고 싶어.”
테사이아의 얼굴이 결국 허물어지듯 일그러졌다.
“그럴 수 있게 해줘, 이안….”
“…….”
이안은 대답 대신 술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천천히 잔을 기울이는 그를 울상이 된 채 바라보며, 테사이아가 웅얼댔다.
“내가 짐이 되진 않을 거야. 난 원래도 약하지 않았잖아. 심지어 이제는 꽤 쓸만한 주문 쟁이까지-”
“…어떤 핑계를 대야 할지 고민 중인 거야.”
“응…?”
이윽고 이안이 툭 덧붙이자, 멈칫한 테사이아가 눈을 깜빡였다.
말끔하게 비운 술잔을 내려놓은 이안이 그녀를 돌아보았다.
“루시 일행이 여기로 올 거라니까. 나도 결국 다시 돌아올 텐데, 너랑 마로 텔로 간다고 할 순 없잖아. 같이 나갈 명분이 있어야 할 거 아냐.”
테사이아의 얼굴에 삽시에 화색이 돌았다.
“그딴 건 걱정 마, 이안…! 내가, 어떻게든 할 테니까.”
“어떻게 할 건데.”
“글쎄. 그건 이제 생각해 봐야지.”
“…아무 생각 없단 거군.”
“어쩔 수 없잖아. 사실, 처음에는 디아나를 원로회에 데리고 간다는 핑계로 가문을 떠나려고 했거든.”
언제 울먹였냐는 듯 입술을 말아 올리며, 테사이아가 속삭였다.
“원로들 모두 벽 너머에 대해 궁금해할 테니까. 먹잇감으로 던져 주고, 나는 너와 함께 마로 텔로 향할 생각이었지.”
“…돌아오는 길에 너덜너덜해진 녀석을 빼 와서, 그대로 중앙으로 보내버리고?”
이안이 입가에 실소를 머금은 채 물었다. 선선히 고개를 끄덕인 테사이아가 내뱉었다.
“하지만 이제는 상황이 바뀌었으니까 그럴 수는 없겠고…. 다른 방식으로 써먹지 뭐. 그것만으로는 조금 부족하긴 하니까… 억지를 부리긴 해야 하겠지만 말이야.”
“…그럼 우리 관계에 대한 오해도 써먹던가.”
이안이 넌지시 첨언 하자, 테사이아의 눈이 순간 반짝였다. 그의 말에 담긴 속뜻을 곧바로 눈치챈 것이리라.
“정말? 그래도 돼?”
“어차피 억지를 부릴 거면, 가져다 붙일 수 있는 건 다 붙여야지. 물론… 뒷수습은 네 몫이지만.”
“상관없어. 어차피 내 입으로 노골적으로 말할 생각은 없거든. 그건 진짜 거짓말이니까. 그냥 그렇게 오해할 만한 상황을 만들어 볼게. 지금처럼.”
귀쟁이다운 음험한 미소를 입가에 머금은 테사이아가, 한쪽 눈을 장난스럽게 깜빡였다.
“어차피 내일 가문 회의를 소집해 뒀으니까, 내가 알아서 할게. 이안은 그냥 무게 잡고 내 옆에 서 있기만 해. 위협적으로. 잘하는 거잖아?”
“결국, 그냥 억지로 밀어붙이겠단 얘기군….”
“급진적이라고 하자. 직계 귀쟁이들이 나한테 자주 쓰는 단어거든.”
그러시겠지….
풀썩 웃음 지은 이안이 고개를 살살 가로저었다. 아랑곳하지 않고 어깨를 으쓱인 테사이아가, 비로소 다시 긴 한숨을 내쉬며 대자로 벌렁 드러누웠다.
“이제야 좀 마음이 놓이네…. 하루도 마음 편하게 자 본 날이 없었는데. 오늘은 아닐 것 같아.”
뒤이어 슬며시 옆으로 반 바퀴 굴러 이안 쪽으로 누운 그녀가, 팔을 구부려 손바닥에 옆얼굴을 기댔다.
“게다가 오늘은 같이 잘 거잖아? 예전처럼.”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를 머금은 채였다. 귀쟁이들의 오해를 이용하려면 필요한 과정이기도 했다.
“그런 거면 네가 바닥으로 내려가야 할 것 같은데.”
“응…?”
이안이 술잔을 내려놓으며 내뱉은 말에, 테사이아가 멈칫했다.
눈동자만 움직여, 아무렇지도 않게 일어서 몸을 돌리는 이안을 올려다 보는 채였다. 침대로 다가오며, 이안이 고개를 까딱였다.
“아니면 알아서 구석으로 가던가.”
테사이아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옆으로 데굴데굴 굴러갔다. 침대 가장자리에 떨어질 듯 웅크린 그녀가 덧붙였다.
“이 정도면 충분해, 이안? 아니면, 더 붙을까?”
“…충분해.”
대체 왜 굳이 이렇게까지.
내심 헛웃음을 흘리면서도, 이안은 내색하지 않고 침대에 드러누웠다.
적당히 단단하고 푹신한, 훌륭한 침대였다. 역시, 요정들은 어디에 사치를 부려야 하는지를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네 억지를 받아주는 건 이번까지 만이야. 가문을 버리는 건 안 돼.”
도톰한 베개에 뒤통수를 얹은 이안이 넌지시 말을 이었다.
“그리고 날 돕는 건 좋지만, 절대 공식적으로 입장을 드러내지도 마. 황실과 교단에는 특히.”
“가문을 끝까지 지키란 거네…. 거추장스러운데….”
테사이아가 한숨 섞인 목소리로 읊조렸다. 그녀는 어느새 이안 쪽으로 돌아누운 채였다.
이안이 어깨만 으쓱였다.
“굳이 기록에 남는 위험을 감수할 필요는 없단 얘기야. 교단이나 황실이 내게 현상금을 걸더라도, 어차피 그리 오래가지 않을 테니까.”
고개만 돌려 테사이아를 마주 본 그가, 의미심장하게 덧붙였다.
“저 너머에, 전 황태자가 살아 있거든. 그의 세력도.”
“…….”
테사이아의 눈이 설핏 커졌다. 그녀가 뭔가 덧붙이는 것보다, 창밖이 한차례 눈부시게 번쩍이는 게 더 빨랐다.
쿠르릉-
천둥소리가 한 박자 늦게 장내를 울리는 가운데, 비로소 테사이아가 입술을 달싹였다.
“그게… 왜? 전 황태자가 살아 있으면, 좋은 거 아니야?”
“…….”
이안의 눈썹이 슬며시 치켜 올라가게 만들기에도 충분했다.
테사이아의 어리둥절한 얼굴을 잠시 바라본 그가, 이윽고 풀썩 헛웃음을 흘렸다.
“제국의 역사는 전혀 공부하지 않았나 보네.”
과거 라클리프에서 크랄렌 공작이 떠들던 소리 역시, 전혀 귀담아듣지 않았던 게 분명했다.
“응. 관심 없으니까.”
당당하게 대답한 테사이아가, 옆얼굴 아래에 양손을 베개처럼 겹치며 덧붙였다.
“하지만 네 반응으로 보자면… 전혀 좋지 않은 일인 모양이네. 뭐, 제국이랑 전쟁이라도 벌인대?”
“아마도. 어느 쪽이 먼저 시작할지는 알 수 없지만. 정말 네 도움이 필요한 건, 그때일지도 몰라.”
대답하며 다시 고개를 앞으로 돌린 이안이, 눈을 감으며 덧붙였다.
“자세한 건 나중에 디아나나 루시아에게 들어. 둘 다, 친절하고 상세하게 알려줄 테니까.”
“그냥 이안이 알려주면 안 돼? 아니….”
눈을 가늘게 뜬 채 이안의 옆얼굴을 바라보던 테사이아가, 속삭이듯 목소리를 낮췄다.
“그냥 처음부터 전부 이야기해 줘, 이안. 벽을 넘어간 뒤에, 어떤 일들을 겪은 건지 말이야.”
“여기서 하기엔 너무 길다니까.”
눈도 뜨지 않은 채 내뱉은 이안이, 잠깐의 침묵 끝에 넌지시 옆을 돌아보며 덧붙였다.
“그보다 지금은, 무슨 억지를 어떻게 부릴 건지나 정확하게….”
그의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어느새 옆에 누운 테사이아가 눈을 감은 채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잠깐 사이에 잠들다니….’
기절하듯 잠든 테사이아를 헛웃음을 흘리며 바라본 것도 잠시.
“…….”
이안은 그녀의 웅크린 몸 위에 얇은 이불을 덮어줬다. 여러모로, 옛날 생각이 나는 밤이었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