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Dark Fantasy Villain RAW novel - Chapter 519
#519화
철그럭…
나지막한 금속음이 번졌다.
다음 순간 이안의 시야가 일렁이며 밝아졌다. 묘하게 좁고 답답한 느낌이었지만, 그 너머로 펼쳐진 풍경만큼은 삽시에 또렷해졌다.
버석버석한 검은 흙과 변이되어 말라비틀어진 풀들.
‘검은 땅…?’
물론 지금 이건 환영이었다.
하늘의 먹구름이 보랏빛으로 번뜩인 순간, 천둥소리와 함께 공명한 혼돈의 정수가 그의 의식을 집어삼킨 것이다.
“성자 대행…?”
혼잣말 같은 속삭임이 번진 건 그때였다. 귀가 아니라 몸을 울리는 목소리.
이안은 비로소 자신이 누구의 눈을 통해 환영을 보고 있는 것인지를 깨달았다.
그의 권속이 된 흑기사, 세렌.
그리고 그녀 역시, 이안의 의식이 자신에게 깃들었다는 사실을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왜 그러시오, 세렌 경?”
옆에서 이어진 목소리에, 세렌이 상반신을 돌렸다. 안면 가리개의 눈구멍 너머로, 익숙한 전신 판금 갑옷 차림의 흑기사가 보였다.
과거 이안과 동행했던 흑사자, 발텐이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가시죠.”
나지막이 대답한 세렌이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갑옷의 관절이 덜그럭대는 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절그럭- 절그럭-
별다른 의심 없이 몸을 돌린 발텐이 앞서 걸음을 옮겼다.
지금 세렌과 발텐은 완만한 오르막을 걷고 있었다. 그들만 걷고 있는 건 아니었다.
저 위, 죽 늘어서 언덕을 오르는 다른 흑사자들을 차근히 훑던 세렌의 시선이 이윽고 그 한복판에서 멈춰 섰다.
백발을 훤히 드러낸 뒷모습.
이안은 곧바로 정체를 깨달았다.
‘…히케드.’
흑태자. 언덕 능선의 정상에 가장 먼저 다다른 것도 그였다.
히케드가 멈춰서는 가운데, 그의 좌우로 날개처럼 뒤따르던 흑사자들이 차례로 능선 위에 올라섰다. 좌측 날개의 가장 끝인 세렌 역시, 발텐에 이어 눈앞의 능선 위에 올라섰다.
고-오오오오오-
언덕 반대편의 전경이 훤히 드러났다. 완만한 내리막 너머는 흙먼지가 날리는 새카만 황무지였다.
끝없이 펼쳐진 잿빛 하늘 아래, 돌과 흙만이 뒤덮인 삭막한 평야.
세렌의 시선이 언덕 바로 아래로 되돌아온 건 바로 그 직후였다.
‘…주문쟁이들?’
두건 망토를 눌러 쓴 자들이 적당한 간격을 두고 죽 늘어서 있었다. 하나 같이 히케드를 등지고 황무지 쪽을 바라보는 채였다.
“…….”
중앙의 마법사 하나가 언덕 위쪽을 돌아본 건 그때였다.
깊이 눌러쓴 두건 아래로, 푸석한 수염과 검은 핏줄이 맺힌 야윈 턱이 드러났다. 그 위로, 금빛에 가까운 연갈색으로 일렁이는 안광도.
철컥…
안면 가리개를 위로 올리며, 세렌이 고개를 돌렸다. 시야가 탁 트이는 가운데, 능선의 가장 높은 곳에 선 히케드의 옆얼굴이 보였다.
흩날리는 백발과 붉은 눈. 평소보다 굳은 얼굴로 언덕 아래를 내려다 보던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세렌이 다시 좌측으로 시선을 돌릴 찰나.
슈화아악-!
터져 나온 마력의 파장이 그녀의 전신을 돌풍처럼 훑고 지나갔다.
언덕 아래에 선 마법사들이 저마다 손에 든 지팡이와 마법 봉, 보주를 내뻗고 있었다. 저들이 일제히 펼친 주문이 만들어낸 파장이었다.
쿠… 구구구구구-
뒤이어 황무지 너머에서 번진 지진이 언덕을 훑고 지나갔다.
세렌은 순간 비틀대면서도 넘어지지 않고 균형을 잡았다.
그 와중에도 그녀의 시선은 드넓게 펼쳐진 황무지에 고정되어 있었다.
쩍- 쩌저적- 쩌적-
정확히는 그 한복판, 기다랗게 갈라지기 시작한 균열에. 그저 단순히 땅이 갈라지고 있기만 한 게 아니었다. 조각난 지표면이 위로 말려 올라가면서, 상처가 벌어지듯이 크기를 키워나가고 있었다.
‘대체 몇 가지 주문이 겹쳐진 거지…?’
이안의 뇌리로 마법사다운 의문이 스쳐 지나갔다. 물론 확인할 방법 따윈 없는 의문이었다.
쿠구구구구구-
그 와중에도 시야를 뒤흔드는 지진은 점점 더 선명해지고 있었다. 황무지 한복판의 균열은 어느새 원형으로 변해 있었다. 지표면이 꽃이 피듯 위로 솟구쳐 오르고, 그 아래에 감춰져 있던 공동이 훤히 드러났다.
벌어진 틈 사이에서 일부가 허물어진 첨탑이 비죽 솟아오른 건 바로 그 직후였다.
‘왜 이런 짓을 벌이는 건가 했더니….’
이안은 내심 헛웃음을 삼켰다.
지금 언덕 아래에 늘어선 마법사들은, 파묻혀 있던 지하 도시를 다시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리고 있는 것이다.
쩍- 쩌적- 콰과과과-
그 와중에도 지표면에 뚫린 구멍은 점점 더 빠른 속도로 커지고 있었다. 파도처럼 휘어진 지표면이 사방으로 밀려나고, 그 아래에 감춰져 있던 높다란 내성. 그리고 성을 감싼 도시가 지상으로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허….”
세렌의 나지막한 탄성이 번지는 가운데, 이안은 도시의 전경을 차근히 눈에 담았다.
첨탑과 내성은 곳곳이 허물어진 상태였다. 도시의 건물들 역시 잔해만 남거나 어설프게 새로 지은 것들투성이였다.
하지만 저것만으로도 본래는 중앙의 대도시 못지않은 규모였으리라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상당 부분이 폐허가 된 지금도 충분히 대도시라 부를 수 있을 터였다.
‘그래서… 대체 여긴 어디지?’
이안이 내심 읊조렸다.
이곳이 앞으로 흑태자의 주요 근거지가 되리라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정확한 이름만 알 수 있다면 어렵지 않게 위치를 특정할 수 있을 터였다. 환영에서 튕겨나가기 전에 알 수 있길 바랄 뿐이었다.
쿠구구구… 쿠득… 쿠드득….
그사이, 거대한 도시는 땅 위에 온전하게 자리를 잡았다. 도시를 감싼 성벽은 찾아볼 수 없었지만, 문제가 될 것 같지는 않았다.
돌돌 말린 것처럼 솟아오른 지표면이 도시 주위를 완전히 감싸고 있었으니까. 천연 성벽이라고 불러도 될 만한 광경이었다.
누더기 같은 도시의 전경과도 묘한 조화를 이뤘다.
쿠구구구구….
지진이 잦아드는 가운데, 세렌의 시선이 비탈길 아래로 내려갔다.
온전히 서 있는 마법사는 몇 명 되지 않았다. 나머지는 바닥에 주저앉아 새카만 피를 토하고 있거나, 이미 정신을 잃고 쓰러진 상태였다.
‘저 정도 숫자로도 도시를 통째로 들어 올리는 건 어려운 거군….’
세렌의 시선이 그들에게 머문 건 말 그대로 잠깐이었다. 그녀는 곧이어 완전히 땅 위에 자리를 잡은 도시와 언덕보다도 높이 솟은 내성을 차례로 눈에 담았다.
“아직도… 보고 계십니까…?”
나지막한 혼잣말이 이어졌다. 이안에게 건네는 말이라는 사실은, 물론 의심의 여지도 없었다.
그래. 아주 잘 보고 있다.
이안이 내심 읊조릴 찰나, 세렌이 덧붙였다.
“전하의 곁에 서 주십시오… 성자 대행….”
무슨 소릴 하려는 건가 했더니.
이안이 코웃음을 흘렸다.
보아하니 그녀가 의도한 환영은 아닌 것 같았지만. 어쨌든 자신의 뜻을 전할 기회를 놓치지 않은 것이다.
“지금 전하께서는….”
“기나긴 고통과 인내의 시간을 견뎌낸 나의 자랑스러운 백성들이여! 보라-!”
쩌렁쩌렁한 외침이 대기를 울린 건 그때였다. 뭔가 덧붙이려던 세렌의 시선이 옆으로 돌아갔다.
어느새 도시를 등지고 선 히케드가 언덕 아래를 바라보고 있었다.
“루 바일이 이렇게 다시 본래의 모습을 되찾았으니!”
허리춤에서 단숨에 검을 뽑아 든 그가 머리 위로 치켜들었다.
백발이 나부끼고, 전신에서 검푸른 혼돈이 피어오른 건 바로 그 직후였다.
“나의 가호가 도시의 만물을 수호하리라!”
검푸른 어둠은 삽시에 들불처럼 흑사자들에게 번져 나갔다.
스릉-! 철크럭-!
전신에 검푸른 혼돈을 두른 흑사자들이 저마다의 무기를 하늘을 향해 치켜들었다. 움직이지 않은 건, 이안의 권속인 세렌 뿐이었다.
그녀가 대열의 가장 끝에 선 이유이기도 하리라.
낮은 침음을 흘리며 히케드와 흑사자들을 바라보던 세렌의 시선이 문득 하늘로 향했다.
고- 오오오오…
어느새 먹구름이 거대한 소용돌이를 그리고 있었다. 세렌의 시선이 그 중심부로 이어졌다.
도시 중앙의 내성 바로 위가 소용돌이의 눈이었다. 그 사이에서 넘실대며 번진 검푸른 혼돈이, 먹구름을 물들이며 도시에 내리쬈다.
“또한, 이 땅은 여전히 제국의 영토이며.”
히케드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더 이상 포효하듯 소리치지 않았지만, 오히려 메아리치듯 전신을 울리며 더 또렷하게 전해지고 있었다.
“읏….”
또 한 번 낮은 침음을 흘리며, 세렌이 히케드를 돌아보았다.
검푸른 어둠을 전신에 두른 채 검을 치켜든 백발의 흑태자는, 더없이 불길한 동시에 모순적이게도 성스러워 보였다.
“그대들 역시 여전히 제국의 백성들이니.”
언덕 아래를 한차례 돌아본 그가, 치켜들고 있던 검을 자신의 가슴 앞으로 내렸다.
“맹세하노라. 우리는 머잖아 반드시,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리라.”
동시에 대기를 뒤흔드는 함성이 터져 나왔다. 세렌은 비로소 언덕 아래를 돌아보았다.
병사와 백성들로 이루어진 인파의 물결이 드넓게 펼쳐졌다. 그들이 내지르는 뜨거운 함성도.
“……!”
세렌의 시선이 불현듯 옆으로 돌아갔다. 검을 늘어뜨린 히케드가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검푸른 눈동자를 마주 본 순간, 이안은 그가 자신의 존재를 눈치챈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히케드의 얼굴에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가 번진 다음 순간, 다시 시야가 벌컥 뒤집혔다.
“…….”
이안은 화들짝 눈을 깜빡였다. 모든 감각이 한순간에 되돌아오고, 걸음을 옮기는 말의 뒤통수와 그 너머의 푸른 녹음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현실이었다.
‘인근의 생존자들을 죄다 불러 모은 건가…?’
하지만 이안은 여전히 방금 본 환영을 곱씹고 있었다.
루 바일이 대도시인 건 사실이었지만, 하나의 거점에서 모였다기엔 지나치게 많은 이들이 모여 있지 않았던가. 흩어져 있던 거점의 생존자들을 한 곳으로 집결시킨 게 분명했다.
어쩌면 집결지 역할을 하게 되는 도시는 루 바일 하나가 전부가 아닐지도 몰랐다. 만약 그가 흑태자였다면, 만약을 대비해 몇 개의 집결지를 더 만들었을 테니까.
‘권역을 여러 개 형성하는 게 가능한지는 모르겠지만….’
고삐를 움켜쥐며 생각하던 이안이, 문득 미간을 꿈틀댔다.
그의 고개가 옆으로 돌아갔다. 회색 두건을 눌러쓴 은발의 요정이, 녹색 눈동자를 빛내며 바라보고 있었다.
“드디어 깨어났네. 이안.”
그와 눈이 마주친 테사이아가 속삭이듯 말했다. 나란히 안장에 앉은 그녀를 잠시 바라본 이안이, 이윽고 입을 열었다.
“내가 얼마나 이렇게 있었지?”
“글쎄. 한 이십 분쯤…?”
어깨를 으쓱인 테사이아가 말을 이었다.
“천둥이 치고 나서 갑자기 가슴을 부여잡아서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심장에 문제라도 생긴 줄 알았다구. 물론 눈이 보라색이 된 것도, 놀랍긴 마찬가지였지만.”
이안의 입꼬리가 슬며시 말려 올라갔다.
“그런데도 용케 요란을 떨지 않았네. 바닥에 눕혀 두지도 않았고.”
“잊었어? 나도 주문쟁인 거.”
테사이아가 왼손을 얼굴 앞으로 들어 살짝 까딱였다. 가죽 장갑을 낀 손바닥에 여러 개의 사슬로 고정된 보주가 흔들렸다.
“뭔가 중요한 걸 보는 것 같아서, 그냥 놔둔 거야. 그대로 둬도 딱히 떨어질 것 같지도 않았고.”
“그것까지 정확하게 맞추다니. 기특한데.”
“그래…? 그럼 이제 나한테도 알려 줘.”
의미심장하게 입꼬리를 말아 올린 테사이아가 속삭였다.
“뭘 본 거야, 이안?”
“루 바일.”
“루 바일…? 그게 뭔데?”
“도시 이름이야. 보아하니 너도 모르나 보네.”
혹시나 했는데. 내심 혀를 찬 이안이 말을 이었다.
“흑태자, 그리고 그의 병력과 백성들이 그곳에 있어.”
“뭐…?! 그 자를 봤다고?”
테사이아의 눈이 커졌다.
타헤나를 떠난 지 벌써 엿새째였다. 그리고 여정은, 이안이 검은 벽 너머에서 겪은 일들을 차근차근 털어놓기에 충분할 만큼 평화로웠다.
“공교롭네…. 어떻게 본 거야? 뭔가 의식이 이어질 접점이라도 있었어?”
그리고 테사이아는 마침 오늘, 히케드를 만난 부분까지 들은 참이었다. 고작 여기까지밖에 이야기가 진행되지 못한 건, 그녀가 자질구레한 질문이나 주제에서 벗어난 이야기를 잔뜩 떠들어댄 탓이었다.
물론 딴짓을 잔뜩 해대서이기도 했다. 테사이아는 언제 샬롯을 걱정했냐는 듯, 오랜만의 외출을 만끽하고 있었다.
“히케드가 아니라, 세렌이야.”
이안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아공간에서 은제 궐련함을 꺼내 드는 채였다. 안에는 잘 말린 궐련이 열 개도 넘게 들어 있었다.
테사이아가 다시 채워준 궐련들이었다. 한 대를 꺼내 입에 문 이안이, 손가락을 튕겨 불꽃을 만들어내며 덧붙였다.
“아직 거기까지 말하지 않았지만. 어쩌다 보니 내 권속이 됐거든.”
“그 흑사자가 네 하수인이라고…? 어쩐지. 그래서 굳이 그 쓸데없는 이름을 알려준 거구나! 맙소사, 너무 멋져. 진짜 타락자 같아…!”
궐련의 연기를 들이마시는 이안을 바라보며 연신 탄성을 터뜨린 테사이아가, 이내 덧붙였다.
“그럼 계속 그쪽을 엿볼 수 있는 거야?”
이안이 연기를 뿜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방금이 첫 경험이야. 당연히, 의도한 것도 아니고.”
물론 모로나 요그가 그렇듯, 의식을 집중하면 세렌의 존재를 느낄 수는 있었다. 그동안 그가 세렌의 안위를 전혀 걱정하지 않았던 이유이기도 했지만, 그게 전부였다.
그 외에 그가 세렌에게 간섭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테사이아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래…? 그럼 어쩌면 아까 그 천둥 때문만이 아니라, 다른 외부적인 요인의 영향을 받은 걸지도 모르겠네.”
유독 가깝게 느껴지는 하늘의 먹구름을 올려다보던 이안의 시선이, 다시 아래로 내려왔다.
뿌옇게 흩어지는 연기 너머로, 이국적인 분위기의 숲이 선명해졌다.
그의 옆얼굴을 빤히 바라보던 테사이아가 덧붙였다.
“이를테면, 마경같은.”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