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Dark Fantasy Villain RAW novel - Chapter 520
#520화
“뭐… 그럴지도.”
이안이 심드렁하게 읊조렸다. 더 덧붙이는 말 없이 곧바로 다시 환영에서 본 것들을 곱씹기 시작하는 채였다.
“…뭐야, 그게 전부야?”
테사이아가 슬며시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이안이 눈길도 주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물론 점점 더 울창해지던 풀과 나무들은, 그가 환영에 빠진 사이에 훨씬 더 빽빽해지긴 했다.
이대로 계속 나아가다 보면 곧 밀림이라 부르기에도 손색이 없어질지도 몰랐다. 오래 방치된 것처럼 울퉁불퉁한 관도 너머도 그늘이 짙게 드리워 어두웠다.
‘루 바일이 전선에서 멀지 않다면….’
하지만 그뿐이었다. 반쯤 마경 전문가가 된 그가 보기에, 특별한 이상 징후 같은 건 느껴지지 않았다.
관도 너머가 유독 어두운 건 날이 흐린 데다, 잎이 빽빽한 나무들이 많아서일 뿐이었다.
차라리 방금 본 환영의 내용이 더 불길했다.
“…시시하네. 음산하고 불길해서, 곧 뭐라도 나올 줄 알았더니.”
생각에 잠긴 이안을 미련이 남은 듯 바라보던 테사이아가, 이윽고 입맛을 다시고는 덧붙였다.
“정말 아무 느낌도 안 들어? 아까 벼락도 저 너머에 떨어졌는데.”
“애석하게도, 아직은 전혀.”
나오길 바라는 거야, 뭐야. 짧게 코웃음을 흘린 이안이 물었다.
“그래서, 이제 마로 텔에 접어든 건가?”
눈을 가늘게 뜬 테사이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 숲을 지나고부터가 마로 텔일걸. 의도적으로 주위를 감싼 숲을 남겨 뒀다고 들었어. 일종의 울타리처럼, 실수로 외부인들이 발을 들여도 돌아갈 기회를 주려고.”
“…실수로 여기까지 들어오긴 쉽지 않을 것 같은데.”
이안이 읊조렸다. 어제부터 종종 마주친 이정표들을 떠올리는 채였다.
짐승의 두개골을 나무 막대기에 고정해 매달아 두거나, 검붉은 십자 표시가 그려진 표지판 따위가 길가에 솟아 있지 않던가.
어느 쪽이건 더 이상 진입하지 말라는 뜻을 전달하기엔 충분했다.
하긴. 애초에 숲을 통과한 외부인들이 있었기 때문에 만들어진 것들이긴 하겠지만.
“그건 그래. 여긴 애초에 누가 굳이 찾아 들어올 동네는 아니니까.”
전혀 다른 의미로 받아들인 듯, 테사이아가 대답했다.
이안은 별 대꾸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녀의 말도 아예 틀린 것 같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남부는 북부가 그렇듯, 제국 본토 못지않게 넓어 보였다. 하지만 날씨와 지형이 살기 좋게 균형을 이루는 지역은, 내해의 해안선을 따라 이어진 북쪽 일부와 타헤나가 포함된 남부 중앙 정도가 전부 같았다.
동남쪽으로는 사막과 황무지가. 서쪽과 서남쪽에는 밀림과 늪지대, 그리고 탁자산을 필두로 한 변덕스러운 산악 지대가 형성되어 있다지 않던가.
애초에 수인들에게 여길 준 건, 사람이 살기에 적합하지 않은 지역이기 때문이었을 터였다.
“…그래도 오늘 밤은 좀 재미있으면 좋겠네. 옛날처럼.”
이윽고테사이아가 넌지시 덧붙였다.
…미련이 진짜 많이 남나 보네. 낮게 실소를 흘린 이안이 내뱉었다.
“싸울 때마다 살려 달라고 울던 건 벌써 다 잊었나 보네.”
“물론 기억하지. 하지만 돌이켜 보면, 그때가 가장 살아 있다는 실감이 났어. 이안.”
테사이아의 입가에 맺힌 미소가 문득 씁쓸해졌다.
“모든 게 더 단순하기도 했고.”
“막상 또 죽을 위기를 넘기면 생각이 달라질걸.”
그때도 너만 그랬던 것 같고.
이안이 속으로만 덧붙이는 사이, 테사이아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런가…? 하긴. 이안 앞에서 할 말은 아니었네. 계속 생사를 넘나들면서 여기까지 온 거니까.”
슬며시 이안을 돌아보며 미소 지은 그녀가, 망토 자락을 펄럭이며 거둔 건 바로 그 직후였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엔 어지간한 건 나한테 맡겨. 이안. 딱 봐서 알겠지만, 만반의 준비를 갖췄다고.”
“글쎄….”
이안의 시선이 아래로 내려갔다.
테사이아는 지금 몸에 딱 맞는 가죽 방어구들을 빈틈없이 착용한 상태였다. 두건 망토도 그렇듯, 화려함보다는 실용성을 강조한 형태였다.
“나쁘진 않지만… 만반의 준비라기엔 조금 부족한 것 같은데.”
“…으응?”
그녀의 왼쪽 허벅지에는 과거 이안이 선물했던 비수가. 허리춤에는 가문에서 챙겨 온 소검이 묶여 있었다. 하지만 진짜 주 무장이라 할 수 있는 건 왼손 손바닥의 보주. 그리고 안장 옆에 가죽 화살통과 함께 고정해 둔 작은 각궁일 터였다.
“이거면 충분해. 말했잖아. 나는 이제 청색 주문쟁이라니까.”
미간을 슬쩍 좁힌 테사이아가 덧붙였다.
“나한테 주문을 가르쳐 준 마법사가 말하길, 내 마법은 보편적인 경우보다 훨씬 더 공격적이랬어. 아마 흡혈귀일 때의 영향인 거겠지.”
“흠….”
그보단 그냥 네가 마법적인 재능을 타고난 것 같은데.
생각하며 낮게 침음한 이안이, 이내 고개를 까딱이고는 말했다.
“진작 말하려고 했는데. 마법을 배우는 건 좋지만, 그 주문쟁이랑은 너무 가까이 지내지 마. 청색 마탑은, 이미 타락했어.”
“걱정 마. 별로 친하게 지내고 싶은 부류는 아니었으니까. 자꾸 나한테서 혼돈의 잔재가 느껴진다나.”
짧게 코웃음을 흘린 테사이아가 덧붙였다.
“그걸 느끼는 것부터가 일반적이진 않지. 흑마법을 가까이한 경험이 있는 게 아니면, 어떻게 알겠어? 아. 맞아.”
문득 생각난 듯 눈을 빛낸 그녀가 이안을 바라보았다. 주제에서 벗어난 얘기를 꺼낼 때 늘상 보여 주는 반응이기도 했다.
“청색 마탑이 남부에 있는 거, 알고 있었어?”
이번에는 이안도 조금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남부에 있다고?”
“의외지? 이 따듯한 남부에 청색이라니.”
이안의 반응이 만족스러운 듯 슬쩍 거드름을 피운 테사이아가 덧붙였다.
“아마 그런 맹점을 노린 것 같아. 어쩌면 적색은 북부에 있을지도 몰라. 화로의 사원처럼 말이야.”
“…정확한 위치도 알고 있어?”
“거기까진 몰라. 그냥 남부 어딘가에 있다는 것만, 엄청 선심 쓰듯이 알려 주더라고. 언젠가 더 신뢰가 쌓이면 초대하겠다고.”
“아하… 어쩌면 너도 흑마법을 익혔다고 오해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네.”
이안이 비로소 알겠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했다. 테사이아가 콧방귀를 뀌었다.
“걱정 마. 따라갈 일은 절대 없을 테니까. 내가 미치광이들에게 무슨 일을 겪었었는지, 이안도 잘 알잖아?”
“잘 알지. 적어도 그 부분은 안심이야.”
이안의 시선이 테사이아의 허리춤 뒤편으로 향했다.
“적어도 살아남을 준비는 확실하게 한 것 같아서.”
그녀의 오른쪽 등허리에는, 생명의 영약이 묶여 있었다. 빛 한 줌 새어 나오지 않도록 딱 맞게 제작한 가죽 주머니에 담긴 채였다. 심지어 주머니 위로 얇은 사슬을 그물망처럼 덧대기까지 했다. 그물망의 끝부분은 허리띠에 여러 개로 나뉘어 고정되어 있었다.
이안에게는 절대로 분실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발현처럼 보였다.
여분의 목숨이나 다름없으니 당연할 터였다.
“이건 이안도 가지고 있잖아.”
테사이아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이안은 대답 대신 반도 남지 않은 궐련을 다시 입에 물었다.
그제야 테사이아의 눈매가 슬며시 일그러졌다.
“설마, 이미 써 버린 거야?”
“…그래.”
비로소 고개를 끄덕인 이안이, 조금은 씁쓸하게 궐련의 연기를 뿜으며 덧붙였다.
“내가 아니라 디아나에게 쓴 거지만.”
“뭐라고…?!”
테사이아의 눈매에 더 힘이 들어갔다.
“이 귀한 걸, 그 계집애한테? 왜?”
“내가 그 녀석을 죽일 뻔했거든.”
“아, 그래? 그럼 그럴 만도 했네.”
어쩔 수 없다는 듯 입맛을 다시며 대답한 테사이아가, 슬며시 이안을 바라보았다.
“어쩌다 그렇게 된 건지 알려 주면 안 돼?”
“…그럼 중간을 많이 건너뛰어야 하는데.”
“괜찮아. 결말을 알고 들어도 재미있을 테니까.”
아. 그래. 또 시작이군.
내심 읊조리며 입맛을 다신 이안이, 이윽고 궐련의 연기를 깊이 들이마시고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
다각- 다각-
어느새 이른 새벽이었다.
관도는 아예 오솔길처럼 변해서, 이안과 테사이아는 일렬로 나아가야 했다. 길이 아예 좁지는 않았지만, 나란히 걸을 만큼은 아니었다.
앞으로 나선 건 테사이아였다. 본인이 경계를 서겠다는 이유였다.
물론 그녀는 채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용케도 안 떨어지네.’
이제는 아예 축 처져 미동도 하지 않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이안은 또 한 번 헛웃음을 삼켰다.
물론 굳이 깨울 생각은 없었다.
그가 테사이아를 앞으로 보낸 건, 사실 그저 시야 안에 두기 위해서일 뿐이었으니까.
“…….”
지친 듯 숨소리를 내는 말의 목덜미를 쓰다듬던 이안의 손길이, 한순간 멈칫했다.
측면에서 불현듯 기척이 느껴져서였다. 먹이를 노리는 포식자처럼 아주 은밀하게 다가오는 기척들이었다.
‘생각보다 빠른데….’
그가 기다리던 자들이 분명했다.
내심 웃음을 삼키며, 이안은 모른척 말의 목덜미를 어루만졌다.
다가오는 자들을 안심시키기 위해서였다. 그래야 경계하거나 도망치지 않고 달려들 테니까.
쉬학-
지금처럼.
풀벌레 울음소리와 겹쳐진 파공음이 귓가를 스친 순간, 이안은 비로소 튕겨 오르듯 몸을 들었다.
나뭇가지를 박차고 달려드는 형체가 선명해졌다. 뾰족한 손톱이 돋아난 커다란 손아귀가 어느새 이안의 코앞에 있었다. 그 너머로 짐승의 그것 같은 주황색 안광이 긴 잔상을 남기며 일렁였다.
쒸악-! 콰직!
수인의 손아귀는 가까워지던 것만큼이나 빠르게 멀어졌다. 보이지 않는 손이 후려친 것처럼 그대로 땅에 처박힌 것이다.
“……!”
하지만 이안은 이미 놈을 보고 있지도 않았다. 거의 동시에 나무 둥치 사이에서 튀어나온 또 다른 수인 전사가 테사이아에게도 달려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숯을 바른 것처럼 새카만 가죽 갑옷을 걸친 수인 전사였다.
쒸에엑-
내뻗은 왼손이 테사이아의 두건에 닿기 직전이었다. 오른손에는 소검을 손날 방향으로 움켜쥔 채였다. 그대로 덮쳐서 목에 겨누기라도 하려는 모양이었다. 혹은 비명을 지를 수 없게 입을 막고 찌르려는 것이거나.
어느 쪽인지 확인할 방법은 없었다.
콰직!
그의 몸 역시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내리찍은 것처럼 땅에 처박혔으니까. 이안이 안장을 박차며 몸을 날린 건 거의 동시였다.
쒸에엑-
그가 만들어낸 황금빛 궤적이, 낙법조차 하지 못하고 처박힌 수인 전사의 등으로 화살처럼 내리꽂혔다.
꽈드득-!
이안의 무릎이 등판 한복판에 처박혔다. 수인 전사의 몸이 한순간 활처럼 휘어졌다. 그가 고통으로 일그러진 얼굴을 돌릴 찰나.
콰직-!
그의 목덜미 바로 옆으로, 육각형을 그리는 황금빛의 방패 날이 칼날처럼 틀어박혔다.
“가만히 있어.”
억눌린 목소리로 내뱉으며, 이안이 뒤를 돌아보았다.
“너도.”
땅에 처박혔다 튕겨 오르던 수인 전사가 그대로 다시 땅에 짓눌리듯 널브러졌다.
“크륵…?!”
수인 전사의 입에서 고통과 의문이 뒤섞인 침음이 터져나올 찰나.
“으악?!”
비로소 정신을 차린 테사이아가 화들짝 고삐를 끌어당겼다. 다행히 지칠 대로 지친 말들은 몸을 들썩일 뿐 소란을 부리지 않았다.
사실 모든 일이 눈 깜빡할 사이에 일어나서, 제대로 놀랄 틈도 없었을 터였다.
“…어머.”
눈을 깜빡이며 아래를 내려다본 테사이아가 입을 달싹였다.
“이게 다 뭐야?”
“뭐긴 뭐야.”
이를 악문 채 내뱉은 이안이 고개를 까딱였다.
“빨리 가서 저 녀석이나 눌러.”
수인 전사가 의념의 손아귀를 떨쳐내려 버둥대고 있었기 때문이다. 벌써 머릿속이 뻐근해지고 있었다. 이대로는 몇 초도 버티지 못할 터였다.
“어? 응…!”
다행히 테사이아는 냉큼 몸을 날렸다. 그대로 이안처럼 수인 전사의 등판을 무릎으로 찍으며 착지한 그녀가, 어느새 뽑아 든 요정의 비수를 목덜미에 드리웠다.
“얌전히 있어, 점박아. 착하지?”
“…귀쟁이? 귀쟁이라고?”
테사이아가 속삭이자, 그녀에게 짓눌린 수인 전사가 인상을 찌푸렸다.
“간이 배 밖으로 나왔구나. 귀쟁아,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안 착하네. 그러다 꼬리를 잘리는 수가- 어머. 미안. 이미 없구나?”
뒤에서 이어지는 소리를 한 귀로 흘리며, 이안이 자신의 무릎 아래에 짓눌려 있는 수인 전사를 내려다보았다. 뜻밖에도 그는 그다지 저항하지 않았다.
“…….”
그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자신의 목 바로 옆에 박힌 금빛 방패를 바라보고 있었다. 오른손을 아공간에 넣으며, 이안이 내뱉었다.
“친구를 만나러 왔는데. 안내 좀 해 줄 수 있을까?”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