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Dark Fantasy Villain RAW novel - Chapter 523
#523화
“열심히 싸워서.”
이어진 이안의 짧은 대답에, 이드리스의 걸음이 순간 휘청댔다.
물론 테사이아는 표정조차 변하지 않았다. 여전히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채, 그녀가 덧붙였다.
“얼룩이가 듣고 있어서 그래? 얼룩아, 이안에게 들은 말을 떠벌리고 다닐 거야?”
“절대 아닙니다.”
잠깐의 틈도 없이 즉답한 이드리스가 말을 이었다.
“태초의 야성과 찬란한 여신께 맹세코. 용살자께 들은 모든 이야기를 무덤까지 가지고 가겠습니다.”
“그렇다는데. 그냥 조금 더 자세히 이야기해 주면 안 될까?”
여전히 이안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테사이아가 고개를 옆으로 까딱였다.
…크룩시카랑 루 솔라를 같이 걸어도 되는 건가.
내심 생각하면서도, 이안은 못 이긴 척 입을 열었다.
“흑태자가 날 부른 이유가 그놈이었어. 그래서 함께 토벌했지.”
“아하…? 이안 혼자서 죽인 게 아니었구나.”
“그랬으면 아마, 내가 죽었을걸.”
이안의 뇌리로 이나스 커글과의 전투가 스쳐 지나갔다.
지금까지 겪은 여러 보스전이 그렇듯, 많은 부분이 꿈처럼 비현실적으로 느껴지긴 했지만.
놈을 상대할 때 느끼던 위기감만큼은 낙인처럼 선명했다.
“정말…? 하긴. 그러니까 대마족이라 불린 거겠지.”
탄성을 흘리며 읊조린 테사이아가, 귀를 쫑긋 곤두세운 채 걷고 있는 이드리스의 뒤통수를 바라보았다.
“어쨌든, 너희 대족장은 안타깝게 됐네. 이안이 아니었다면, 다시 아버지를 볼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말이야.”
물론 전혀 안타깝지 않은 말투였다. 멈칫한 이드리스가, 곧이어 가라앉은 목소리로 내뱉었다.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긴 합니다. 필연적인 어둠이 찾아오고 검은 벽이 대륙을 전부 집어삼킨다면, 이나스 커글께서 다시 일족의 곁으로 돌아오실 거라고요.”
원탁은 검은 벽이 대륙을 전부 집어삼키길 바란 건가.
내심 읊조리며 이안이 고개를 끄덕이는 사이, 낮은 웃음을 흘린 테사이아가 말했다.
“뭐, 그 마음은 나도 잘 알지.”
슬쩍 이안을 일별하는 채였다. 앞을 가로막는 풀숲을 베어낸 이드리스가 뒤를 돌아본 건 바로 그 직후였다.
“…그분은, 전사에 걸맞은 최후를 맞이하셨습니까?”
“아니.”
이안이 고개를 저었다. 이드리스의 미간이 순간 꿈틀대는 가운데, 그가 말을 이었다.
“이나스 커글은 혼돈과 광기에 잡아 먹힌 상태였어. 죽기 직전엔, 수인이 아니라 공허의 괴물 같은 모습이었지.”
“…….”
“그럼… 어차피 수인들의 곁으로 돌아오는 일 같은 건 없었겠네?”
테사이아가 넌지시 덧붙였다. 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그렇군요.”
이드리스의 귀가 슬며시 꺾였다. 그가 다시 앞을 돌아보며 읊조렸다.
“크룩시카께서 슬퍼하시겠습니다. 아끼던 후손을 잃으셨으니.”
“오히려 고마워하던데.”
“……?!”
태연하게 이어진 대답에, 그의 고개가 다시 뒤로 홱 돌아왔다. 눈을 찢어질 듯 치켜뜨는 채였다.
“태초의 야성을… 만나셨습니까?”
“그래. 잠깐이긴 하지만.”
이안이 고개를 끄덕이자, 이드리스의 입이 멍하니 벌어졌다.
“인간이 어떻게….”
“글쎄. 그건 내가 대답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닌 것 같은데.”
이안이 어깨를 으쓱였다. 입가에 묘한 미소를 머금은 테사이아가 끼어들었다.
“믿기 어렵겠지만 사실일 거야, 얼룩아.”
“…다른 계시는, 없으셨습니까?”
이윽고 간신히 놀란 표정을 추스른 이드리스가 덧붙였다.
이안이 턱을 긁적였다.
“언어로 대화한 건 아니라서. 뭐, 어쨌든 너희가 자기를 섬기는 걸 그다지 달가워하지는 않는 것 같더군.”
그가 가늘게 떨리는 이드리스의 주황색 눈을 마주 보았다.
“아마 너희를 아끼기 때문이겠지. 결국은 다들 이나스 커글과 비슷한 결말을 맞이하게 되리란 걸 알고 있을 테니까.”
“…….”
“이제 어느 족장이 옳았는지 알겠네, 얼룩아.”
테사이아가 덧붙였다.
그녀의 눈빛은 어느새 다시 서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녀의 눈을 잠시 마주 본 이드리스가, 숨소리 섞인 낮은 침음을 흘리며 앞으로 고개를 돌렸다.
“…더 서둘러 보겠습니다.”
잡념을 떨치기라도 하려는 듯, 손에 쥔 송곳니 검을 힘차게 휘두르는 채였다.
“이나스 커글과 어떻게 싸웠는지 더 자세히 알려주면 안 돼, 이안?”
테사이아의 느긋한 목소리가 이어진 건 몇 분 지나지 않아서였다.
“어차피 가는 동안 할 일도 없잖아. 조용하면, 계속 안 좋은 생각만 든단 말이야.”
“…….”
진짜 손 많이 가는 녀석이라니까.
코로 긴 한숨을 내쉰 이안이, 이윽고 입을 열었다.
“처음에는….”
***
끝없이 이어질 것 같던 밀림은, 어느새 다시 적당히 우거진 숲으로 되돌아가고 있었다.
“혹시, 저게 탁자산이야?”
완만하게 이어진 오르막을 나아가던 테사이아가 문득 물었다. 나뭇가지 사이로 드러난 광경을 올려다보는 채였다.
그녀와 같은 방향을 돌아본 이안의 입가에 옅은 실소가 번졌다.
‘진짜 탁자 같은 거였네….’
푸르고 완만한 언덕 능선 너머, 거뭇한 바위 절벽처럼 보이는 산이 말 그대로 불쑥 솟아있었기 때문이다.
탁자가 아니라 상자나 병풍처럼 보이기도 했다. 가파른 절벽 위로는 다시 녹음이 푸르렀다.
저 부분만 누군가 마법으로 들어 올린 것이라고 해도 충분히 믿었을 터였다.
“예.”
앞서 걸음을 옮기던 이드리스가 대답했다. 그는 이미 진작 송곳니 검을 허리춤에 되돌린 상태였다.
“엘 카람입니다. 아마도, 몇 시간 전부터요.”
산봉우리는 하나가 전부가 아니었다.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이어지는 능선 저 멀리에도 불쑥불쑥 솟아 있었다.
“열국 야옹이들의 습격은 없었네. 이안의 예상대로.”
테사이아가 넌지시 덧붙였다. 이안은 대답 대신 고개만 끄덕였다.
수인 전사들의 추격만 없었던 게 아니었다. 일행은 마경에 발을 들이지도, 밀림의 마수와 마주치지도 않았다.
때때로 불길한 기척이나 시선이 느껴지곤 했지만, 일정 거리 이상 다가오지 않거나 오히려 쏜살같이 멀어지기 일쑤였다.
이드리스의 말에 따르면 밀림의 포식자들은 신중하고 교활해서, 자신보다 강해 보이는 상대를 먼저 습격하는 일은 없다고 했다.
물론, 모든 게 순조롭기만 한 건 아니었다.
“…이 녀석들이, 도착할 때까지 버틸 수 있을까?”
전마를 돌아본 테사이아가 읊조렸다. 녀석은 고개를 푹 떨군 채 숨을 헐떡이며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상태가 좋지 않은 건 이안의 전마도 마찬가지였다. 야윈 건 둘째치고, 이제는 걸을 때마다 다리가 후들대는 게 눈으로도 보일 정도였다.
비단, 길이 오르막으로 변했기 때문만은 아닐 터였다.
“글쎄… 버텨도 살아남을 수 있을지 모르겠는데.”
이안이 씁쓸하게 대꾸했다.
적게 먹고 많이 움직이고 있으니 별 수 없는 결과일 터였다.
그렇다고 말들을 배려해 계속 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테사이아와 이드리스에게는 굳이 말하지 않았지만. 네하트가 이 순간에도 가까워지고 있는 것 같았으니까.
가능하면 그보다 샬롯을 먼저 만나 상태를 확인하고 싶었다.
“중독된 걸지도 모릅니다. 밀림에는 독을 품은 것들이 아주 많으니까요.”
이드리스가 덧붙였다. 뒤이어 새삼스럽게 이안과 테사이아를 돌아본 그가 말을 이었다.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만. 두분은 놀랍도록 멀쩡하시군요. 다른 종족이 밀림에 발을 들이면, 한동안 적지 않게 고생을 하게 된다고 들었습니다만.”
“일부러 안 알려준 거 아니야? 우리가 앓아눕기를 바라면서?”
테사이아가 슬며시 눈을 흘기며 덧붙였다. 수인 특유의 날카로운 얼굴로 되돌아온 이드리스가 그녀를 돌아보았다.
“절대로 그런 의도는-”
“없었겠지. 알아.”
말을 자른 테사이아가 키득댔다. 놀리는 보람이 있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어쨌건 적어도, 첫날 같은 악의는 더이상 담겨있지 않았다.
미간을 좁히는 이드리스를 바라보며, 그녀가 슬쩍 턱을 치켜 들었다.
“당연한 거잖아. 나 같은 원로 요정이 숲에서 고생할 리가 있겠어?”
반 이상은 그 망토 덕분인 것 같은데.
생각하며 낮은 코웃음을 흘리던 이안이, 이어진 이드리스의 시선에 내뱉었다.
“난 면역력이 좋은 편이야.”
“…그러시군요.”
무성의한 대답이었지만, 이드리스가 이제는 놀랍지도 않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이안의 범상치 않은 체력을 확인하고 있지 않던가. 물론 그렇다 해도, 이안이 어지간한 독은 물 대신 마실 수 있는 수준이라는 사실까지는 알지 못할 터였다.
“어머…?”
뒤이어 짧은 탄성을 흘린 테사이아가 휙 앞으로 달려 나갔다. 어느새 완만하게 이어지던 오르막이 끝나고, 언덕 능선의 반대편이 드러나고 있었기 때문일 터였다.
이드리스까지 앞질러 달려간 그녀가 이윽고 멈춰서서는 주위를 두리번댔다.
“저긴가? 저기야, 얼룩아?”
곧 뒤를 돌아본 그녀가 언덕 너머 한 쪽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전마의 보폭을 맞춰 걸음을 옮긴 이드리스가, 이윽고 같은 방향을 돌아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저기가 유배지입니다. 달리, 무덤이라고도 부르죠.”
“무덤…?”
인상을 찌푸린 테사이아가 고개를 돌리는 가운데, 비로소 이안도 언덕 너머의 풍경을 눈에 담았다.
비교적 나무가 듬성듬성해지면서, 저 너머로 펼쳐진 숲이 훤히 내려다보였다.
굽이진 능선 사이로 마로 텔에서 이어져 내려온 강이 숲을 관통하며 이어지고, 기슭 한구석에서 흐릿한 연기가 번지고 있었다.
조악한 목책의 윗부분과 나무 지붕들도 설핏 모습을 드러냈다.
“무덤이라니….”
읊조리는 테사이아의 얼굴에서는 미소가 사라지고 있었다. 그동안 미뤄뒀던 걱정이 봇물 터지듯 밀려드는 듯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걱정은 그리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철푸덕-
내리막으로 들어선 지 몇 분 지나지 않아, 이드리스가 끌고 가던 전마가 맥없이 주저앉아 옆으로 쓰러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게 신호라도 된 것처럼, 이안의 뒤를 따르던 녀석까지 옆으로 목석처럼 널브러졌다. 벌어진 입 사이로 기다란 혀를 축 늘어뜨린 채였다.
“…….”
“…….”
낮게 경련하듯 꿈틀대는 전마를 내려다 보던 이안과 이드리스가, 자연스럽게 서로를 돌아보았다.
마찬가지로 멍하니 쓰러진 말들을 바라보던 것도 잠시.
“…조, 좋게 생각하자.”
퍼뜩 정신을 차린 듯 눈을 깜빡인 테사이아가, 억지로 지른 게 분명한 미소를 머금으며 덧붙였다.
“더 빨리 움직일 수 있게 됐잖아?”
이안은 물론 이드리스도 웃지 않았다. 이윽고 낮게 한숨 쉰 이안이, 쓰러진 말 쪽으로 허리를 숙였다.
“가방이나 챙기자.”
“…….”
***
지대가 완만하게 낮아졌다. 미지근한 공기는 눅눅했고, 땅에 깔린 흙도 물기를 머금어 질척댔다.
곳곳의 바위 틈과 나무 둥치 아래로 이끼가 가득했다.
조금만 더 내려가면 늪지대가 펼쳐져 있으리란 사실을 유추하는 건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제국이 아니라 변방이라고 해도 믿을 것 같지 않아, 이안?”
테사이아가 문득 내뱉었다. 꾸며낸 것처럼 쾌활한 목소리였다.
그녀의 미소 역시 평소보다 어색했지만, 이안은 모른 척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실제로도 변방 외곽을 떠올리게 하는 풍경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이 세계에서 처음 눈을 떴던 늪지대와 그 인근을.
‘…본토로 돌아가면 바로 그쪽으로 가야겠지.’
자연스러운 생각이 뒤를 이었다.
백마법사의 유산과 관련된 퀘스트를 완료해야 하지 않던가.
현재로선 구명줄이나 다름없는 퀘스트였다. 가능하다면 제국과 흑태자의 전쟁이 궤도에 오르기 전에 완료하고 싶었다.
‘물론, 역천룡과 싸우기 전에도.’
뒤이어 떠오른 붉은 머리 성기사의 얼굴을 애써 밀어내며, 이안은 시선을 돌렸다.
“…….”
“…….”
낯선 시선들이 느껴져서였다.
손에 도끼 따위를 든 처량한 행색의 수인들 몇몇이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늙고 야윈 건 물론이고, 신체 일부가 결손된 자들이 태반이었다.
그들은 모두 하던 일을 멈춘 채, 자신들 근처로 가까워지는 일행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수인들은, 늙은이들을 버려?”
그들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테사이아가 입술만 달싹여 말했다.
앞서 걷던 이드리스가 혀를 날름댔다.
“죽을 때가 가까워지면, 스스로 마로 텔을 떠나는 겁니다. 후손들에게 짐이 되기 전에요. …물론, 죄를 지은 자들도 섞여 있긴 합니다.”
무덤이라 부르는 이유가 있었네.
이안은 슬며시 입맛을 다셨다. 어쩌면 이런 풍습 때문에, 수인 전사들이 싸우다 죽기를 바라는 것인지도 몰랐다. 스스로 무덤에 들어가 서서히 죽어가는 것을 원하는 전사는 없을 테니까.
“…….”
“크르르….”
수인들은 자신들을 지나치는 이방인들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시선에서 옅은 살의가 느껴지는 건, 아마도 요정이 섞여 있어서일 터였다. 그런데도 덤벼들지 않는 건 이드리스 덕분이리라.
이안과 테사이아는 곧 그들에게서 시선을 완전히 돌렸다. 저만치 앞에 어설픈 목책을 두른 유배지가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었다.
“너희는….”
판자촌을 방불케하는 광경을 바라보며, 테사이아가 읊조렸다.
“이따위로 사는 거야…?”
“…물론 아닙니다. 여긴 유배지라 그렇습니다. 마로 텔은, 이보다 훨씬 크고 깨끗합니다.”
“너희가 때가 되면 고향을 떠나는 이유가 있었네.”
이안이 헛웃음을 흘리며 읊조렸다. 애초에 비교 대상이 이 무덤 마을인 시점에서 탈락이나 다름없었다. 여긴 변방의 시골 마을보다도 허름하고 지저분하지 않은가.
고블린 부락이라면 차라리 납득했을 터였다. 벌써 코끝으로 악취가 파고들고 있었다.
마을 내부도 외부에서 보이던 것과 그다지 다르지 않았다.
정돈된 길 같은 건 찾아볼 수도 없었고, 통나무와 판자를 얼기설기 엮어 만든 움막들이 어지럽게 펼쳐져 있었다. 그마저도 반 이상은 비어있는 것 같았다.
“이딴 돼지우리 같은 곳에서… 내 야옹이가….”
터덜터덜 걸음을 옮기는 테사이아의 얼굴이 결국 완전히 일그러졌다. 더는 평정심을 유지하기 어려운 모양이었다. 물론 그저 코를 찌르는 악취 때문일지도 몰랐다.
“…전 대족장께선, 아마도 안쪽에 계실 겁니다.”
움막 사이를 앞질러 걸어가며, 이드리스가 읊조렸다. 미간을 찌푸린 채 그의 뒤를 따르던 것도 잠시.
“……!”
“……!”
이안과 테사이아의 눈이 거의 동시에 커졌다. 나무판자를 빼곡하게 덧댄 움막 옆. 정체 모를 죽이 끓고 있는 냄비 옆에 걸터앉은 수인의 옆얼굴이 낯이 익었기 때문이었다.
“…얼룩아.”
테사이아가 나지막이 읊조렸다. 이드리스를 부른 게 아니었다.
귀를 쫑긋댄 냄비 앞의 수인이 일행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성자 대행…?!”
곧 찢어질 듯 눈을 부릅뜬 그가 튕겨 오르듯 일어섰다.
“…팔메르.”
수인의 이름을 읊조리는 이안의 미간은, 반대로 더 일그러지고 있었다. 그건 그의 옆에 선 테사이아도 마찬가지였다.
일행을 돌아본 팔메르의 오른쪽 눈에는 조잡한 가죽 안대가 덧씌워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 아래로 안대에 다 가려지지 않을 만큼 큰 흉터가 설핏 드러났다.
“정말… 돌아오셨군요… 대족장의 말씀처럼….”
다가오는 이안과 테사이아를 멍하니 바라보던 팔메르가, 이윽고 간신히 내뱉었다.
“그래. 돌아왔지.”
담담하게 대답하며, 이안은 그의 앞에 멈춰 섰다. 지금의 팔메르에게서 제국 서부의 지배자를 섬기던 수인 기사의 위엄은 찾아볼 수 없었다. 윤기가 흐르던 털은 푸석했고, 우람하던 근육 역시 볼품 없이 야윈 채였다.
“어떻게 여기까지….”
“나중에. 이야기를 나눌 시간은 충분할 것 같으니까. 당장은….”
이어진 말을 자른 이안이, 팔메르의 하나 남은 눈을 마주 보았다.
“샬롯을 만나고 싶은데.”
“…….”
그르렁대는 숨소리를 내며 입을 꾹 다물었던 팔메르가, 이윽고 뒤편의 움막을 돌아보았다.
“안에 계십니다.”
“야옹아…!”
테사이아가 튀어 나간 건 거의 동시였다.
하지만 그녀가 달린 건 불과 몇 걸음에 불과했다. 움막의 반쯤 열린 문 앞에 다다르자 덜컥 멈춰선 것이다.
“…….”
열린 문 사이로 파리들이 날아다니고 있어서인지, 시체에서나 날 법한 죽음의 냄새가 번지고 있기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이, 이안….”
못 박힌 듯 서 있던 테사이아가 다가오는 이안을 돌아보았다. 늪색 눈동자에 두려움이 가득했다.
“천천히 와. 괜찮으니까.”
나지막이 내뱉으며 그녀를 지나친 이안이, 그대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축사에서나 날 법한 악취. 장내에는 가구라 부르기도 민망한 보관대와 식탁. 그리고 침상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철퍽- 철퍽-
그 한복판을 가로지르는 이안의 시선은, 침상 위에 누운 형체에 고정되어 있었다.
빛이 거의 들지 않아 어두웠지만, 윤기를 잃고 듬성듬성해진 털가죽과 골격이 드러날 정도로 야윈 얼굴선만큼은 또렷했다.
이안은 눈도 뜨지 못한 채 쌕쌕대는 숨소리만 흘리는 수인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
야윈데다 못 보던 흉터도 잔뜩 새겨져 있었지만, 틀림 없는 샬롯이었다.
침대 옆에 멈춰 선 이안은, 우묵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시선이 거적때기나 다름없는 이불을 걸친 그녀의 몸쪽으로 천천히 돌아갈 찰나.
“……?”
샬롯의 눈꺼풀이 느릿느릿 벌어졌다. 탈진한 것처럼 맥이 풀린 주황색 눈동자가, 옆에 선 이안을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이안….”
갈라진 목소리로 읊조리는 그녀의 표정은, 뜻밖에도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아직 꿈을 꾸고 있거나 환각을 보는 것이라 여기는 모양이었다. 어쩌면 그를 본 것이 처음이 아닐지도 몰랐다.
그녀의 탁한 눈을 잠시 마주 내려다보던 이안이, 이윽고 입술만 당겨 미소 지었다.
“꼴이 아주 엉망이네. 샬롯.”
“그렇….”
읊조리던 샬롯의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찢어질 듯 눈을 치켜뜬 그녀의 동공이, 비로소 뾰족해졌다.
“…이안?!”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