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Dark Fantasy Villain RAW novel - Chapter 526
#526화
“샬롯……?!”
네하트의 눈에 경악이 번졌다.
비단 그녀를 바라보는 샬롯의 눈동자가 황금색으로 빛나고 있어서만은 아니었다.
다시는 검을 쥘 수 없도록 잘라버렸던 오른팔이 다시 멀쩡하게 붙어 있었던 것이다. 온전히 회복될 수 없는 상태였던 다른 부상들도 씻은 듯이 사라진 것 같았다.
“오랜만이오. 대족장.”
이안 일행이 길을 만들듯 좌우로 둘씩 갈라지는 가운데, 그 한복판으로 걸음을 옮기며 샬롯이 내뱉었다. 목소리나 눈빛만큼이나 태연하고 가벼운 발걸음이었다.
풍성하게 돋은 검은 갈기와 털에서도 흐릿한 황금빛이 일렁였다.
“…백금룡의 가호를 받았군. 또다시.”
비로소 상황을 눈치챈 네하트가 씹어 뱉었다.
지금처럼 금빛 안광을 머금지는 않았었지만. 이미 지난 결투에서 비슷한 상황을 겪지 않았던가.
큰 부상을 입혔는데도, 얼마 지나지 않아 멀쩡하게 나타나 다시 결투를 신청했었다. 백금룡의 가호 덕분이라는 말과 함께.
영구적인 부상을 입힌 건, 그에 대한 징벌의 의미도 있었다.
비참하고 고통스러운 최후를 맞이했을 줄 알았건만. 끝내 살아남아 또 한 번의 기적을 손에 넣은 모양이었다. 그 기적을 가지고 온 건, 물론 저 앞에 선 백금룡의 대행자일 터였다.
스릉-
그때, 이드리스가 허리춤의 송곳니 검을 뽑아 샬롯에게 던졌다.
무게추가 그녀 쪽으로 향하게 한 채였다. 오른팔을 휙 휘둘러 낚아채듯 받아 든 샬롯이, 멈추지 않고 걸음을 옮기며 대꾸했다.
“그래. 갚기 어려울 만큼 큰 은혜를 입었지.”
“그런데도 이렇게 당당하다니. 수치를 모르는군.”
내뱉는 와중에도, 네하트는 샬롯의 전신을 차근히 눈에 담았다.
누더기 같은 장비들로 급소를 가린 채였다. 지난 결투에서 넝마로 만들었던 것들을 조악하게나마 수리해둔 것이리라. 아마도 팔메르의 솜씨일 터였다.
“신의 도움을 받은 건 대족장도 마찬가지이실 텐데.”
이안 일행을 지나친 샬롯이, 적당한 거리를 두고 멈춰 서며 말했다.
네하트는 대답 대신 꾹 입을 다물었다. 뻔한 도발이었다.
동시에 이번 결투에서는 크룩시카의 축복을 받으면 안 된다는 사실이 다시금 뇌리를 스쳤다.
야성의 축복이 깃든 순간, 이안 호프가 기다렸다는 듯 난입할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된다면 이안 호프는 물론, 저 은발의 원로 요정까지도 죽여야 했다. 중앙에서 결코 달가워하지 않을 결말이었다.
“정말… 샬롯 족장이군….”
“또 저렇게 멀쩡해질 줄이야…!”
“꼬리 수집가 샬롯이… 돌아왔다…!”
뒤편에서 번지는 크고 작은 탄성들이 네하트의 귀를 파고들었다.
샬롯의 모습을 전사들도 비로소 확인한 것이리라.
경악과 감탄. 반가워하는 듯한 반응을 보이는 자들도 적지 않았다.
아주 거슬리는 반응이었다. 손톱으로 쇠를 긁는 듯한 불쾌감을 느끼며, 네하트가 씹어 뱉었다.
“너는 이미 내게 두 번이나 패배했다. 샬롯. 그리고 나는 두 번의 자비를 베풀었지. 그런데도 기어코, 또다시 도전하겠다는 건가?”
샬롯과 순수한 기량을 겨루는 것은, 그녀에게도 그다지 달갑지 않은 일이었다. 샬롯은 아주 뛰어난 전사가 아니던가. 부상을 당하지 않고 이길 수는 없을 터였다.
물론 패배하는 건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그건 이안 호프에게 타락의 물증을 제공하는 것보다도 최악이었다. 샬롯은 기꺼이 조사에 협조할 것이며, 그때는 전사들도 더 이상 네하트를 따라야 할 의무가 없었다.
“그럼 이번에도 이기실 수 있겠군.”
물론, 샬롯은 결투를 포기할 생각이 전혀 없을 터였다. 앞선 두 번의 결투에서 그랬듯이.
금빛 눈을 슬며시 가늘게 뜨며 내뱉은 그녀가, 송곳니 검을 앞으로 내밀며 덧붙였다.
“신성한 결투를 준비하시오. 대족장.”
콧잔등을 씰룩이면서도, 네하트는 검을 쥔 샬롯의 팔뚝이 전보다 가늘어졌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찢겨나간 각반 사이로 드러난 다리도 마찬가지였다. 체구가 조금 작아진 듯한 느낌이 드는 건 착각이 아니었다.
부상을 회복했지만, 전처럼 단련된 육체로 되돌아오지는 못한 게 틀림없었다. 게다가 꼬리가 다시 자라난 것도 아니었다.
네하트가 여유를 되찾게 하기에는 충분한 근거들이었다.
“더 이상의 자비는 기대하지 마라.”
서늘하게 내뱉은 네하트가 몸을 돌렸다. 전사들 쪽으로 성큼성큼 몇 걸음을 옮긴 그녀가, 등에 멘 송곳니 대검을 뽑아 들며 멈춰 섰다.
제멋대로 늘어선 전사들을 한차례 돌아본 것도 잠시.
“나, 대족장 네하트는 도전을 받아들이겠다!”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치켜든 전사들이 늑대처럼 울부짖었다. 손에 쥔 무기를 요란하게 두드리는 자들도 있었다.
피가 끓는 듯한 느낌. 옆의 땅에 대검을 박아 넣은 네하트가 소리쳤다.
“신성한 결투를 방해하는 자! 죽음으로 대가를 치르리라!”
전사들의 포효가 더 커졌다. 머릿속의 잡념이 씻겨나가는 것을 느끼며, 네하트가 다시 몸을 돌렸다.
허리춤의 톱날 검을 움켜쥐며 샬롯을 노려본 것도 잠시.
“……?”
문득 번지는 불쾌한 열기에, 그녀의 미간이 꿈틀댔다.
샬롯의 뒤편에 이글대는 붉은 빛이 스멀스멀 번지고 있었다.
걸음을 옮기는 네하트의 콧잔등이 슬며시 일그러졌다.
샬롯의 뒤에 가려져 있던 이안 호프의 모습이 드러나서였다. 고개를 살짝 숙이고 상반신을 웅크린 그의 전신에, 어느새 붉은 신성이 불길처럼 타오르고 있었다.
그가 양팔을 떨치듯 휘두르며 몸을 젖힌 건 바로 그 직후였다.
“—–!”
대기를 찢어발기는 듯한 포효와 함께, 그의 전신에서 붉은 신성이 원을 그리며 터져 나왔다.
일대를 가득 채우던 전사들의 함성을 삽시에 지워버리는 채였다.
반사적으로 팔을 들어 얼굴을 가린 네하트의 콧잔등이 더 일그러졌다. 불쾌하기 짝이 없는 열기였기 때문이었다. 내면의 야성이 꿈틀댔다.
“이럴 줄 알았지… 시발….”
장내가 삽시에 고요해진 가운데, 헐떡대는 숨소리에 섞인 속삭임이 그녀의 귓가를 스쳤다. 이안 호프의 목소리 같았다.
중요한 건 따로 있었다.
“……!”
얼굴을 가린 팔을 내린 순간, 불이 옮겨붙은 것처럼 붉은 신성을 머금은 샬롯의 모습이 드러났으니까. 눈동자에 아른거리는 금빛에 붉은색이 섞여들었다.
네하트와 눈이 마주친 샬롯이, 열기가 담긴 목소리로 내뱉었다.
“카르하께서도 우리의 결투를 축복하시는군. 대족장.”
“대체… 어떻게…?”
인상을 찌푸리며 네하트가 읊조렸다. 인간의 신이 수인에게 축복을 내리다니. 단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일이었다.
샬롯의 입술이 달싹였다.
“글쎄. 잘?”
“……!?”
네하트의 눈이 순간 커지는 가운데, 샬롯이 검을 까딱였다.
“무기를 드시오. 대족장.”
비로소 네하트의 얼굴이 다시 일그러졌다. 의문 따윈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사실이 뒤늦게 뇌리를 스쳐서였다.
중요한 건 샬롯이 투쟁의 신의 축복을 받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녀의 야윈 몸은 더 이상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것도.
카가가각-!
이를 악문 네하트가 톱날 검을 뽑아 들었다. 금속 고정쇠 위를 빠져나오는 칼날에서 불티가 눈부시게 튀었다.
그녀가 검 자루를 움켜쥐었는데도 샬롯은 달려들지 않았다. 자세를 낮게 다잡으며, 붉게 물들어 가는 눈으로 그녀를 응시할 뿐이었다.
먹잇감을 노리는 포식자의 눈빛. 그 사실이 네하트의 야성과 분노에 불을 붙였다.
쿠-확-!
땅을 박찬 네하트가 포탄처럼 뿜어져 나갔다. 마을 입구 너머, 공터 한복판에 선 샬롯이 삽시에 가까워졌다. 분노를 담아 휘두른 톱날 검이, 그녀의 목덜미를 노리고 떨어져 내렸다.
샬롯이 송곳니 검을 비스듬하게 치켜든 건 거의 동시였다.
쩌엉-! 카가가각-
검날이 맞닿은 순간 대기가 밀려났다. 샬롯의 전신에 맺힌 붉은 신성이 흩날리는 가운데, 그녀의 몸이 뒤로 조금 밀려났다.
네하트는 튕겨 나가지 않고 무게를 더해 검을 짓눌렀다. 맞닿아 미끄러지는 칼날에서 불티가 튀었다.
쿠드득-
샬롯의 몸이 삽시에 멈춰 섰다. 태산을 미는 듯한 감각에 네하트의 미간이 일그러질 찰나, 붉은 신성이 한순간 타올랐다.
샬롯이 팔을 떨치듯 휘두르자, 검을 쥔 네하트의 팔이 튕겨 나가듯 벌어졌다.
쉬학-!
샬롯이 그대로 네하트의 품으로 달려들었다. 붉은 궤적이 삽시에 가까워졌다. 이를 악물며 팔을 멈춘 네하트가, 그대로 다시 마주 검을 휘둘렀다.
채앵-! 쩌엉! 카가각-!
검과 검이 연달아 맞부딪쳤다. 불티가 사방으로 어지럽게 휘몰아쳤다. 이글대는 붉은 신성의 궤적 역시 마찬가지였다.
콰드득-! 쩌엉!
점점 수세에 몰리는 건 네하트였다. 그녀는 비로소 입장이 완전히 뒤바뀌었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힘과 속도, 기술까지. 모든 부분에서 샬롯이 우위에 있었다.
지난 두 번의 결투에서 그녀가 느꼈을 기분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물론, 네하트가 우세한 부분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카드드득-!
샬롯의 송곳니 검은 이가 나가듯 칼날이 깨지고 있었으니까.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지만, 작은 기회라도 놓칠 수 없었다.
“—-!”
한쪽 발을 땅에 심듯 내리찍은 네하트가 울부짖었다.
그사이 눕듯이 낮은 자세로 달려든 샬롯은, 이미 그녀를 향해 검을 비스듬히 올려 치고 있었다. 네하트는 지금까지 그렇듯 피하거나 흘리려 하지 않았다. 자루를 양손으로 움켜쥐며 마주 휘둘렀다.
샬롯이 아니라 그녀가 휘두르고 있는 검을 향해서.
쒸에엑- 콰드드득-!
검날이 맞닿은 순간, 송곳니 검의 칼날 한복판이 찢기듯 부러져 나갔다. 부러진 칼날이 스치고 지나가는 가운데, 샬롯은 마저 팔을 휘두르며 땅을 박찼다. 땅을 할퀴듯 검을 내리치는 네하트에게 시선을 떼지 않고 허리를 비트는 채였다.
새카만 궤적이 네하트의 얼굴에 가까워졌다. 샬롯의 다리였다.
콰드득- 콰장창창-!
고개가 옆으로 꺾인 채 튕겨 나간 네하트가 흙바닥을 나뒹굴었다. 의식을 잃지 않은 건, 마지막 순간 같은 방향으로 몸을 날린 덕분이었다.
카드드드드-
질척한 흙위를 구른 그녀가 간신히 검을 땅에 박으며 멈춰 섰다.
머리가 울렸지만 충격을 수습할 틈은 없었다.
쉬하악-!
부러진 검을 던져버리며 착지한 샬롯이, 용수철처럼 몸을 날려 가까워지고 있었으니까. 이글대는 붉은 궤적이 꼬리처럼 그녀의 뒤로 기다란 잔상을 만들어냈다.
“……!”
눈을 치켜뜬 네하트가 땅에 박힌 톱날 검을 그대로 앞으로 휘둘렀다. 하지만 그보다 샬롯이 주먹을 내뻗는 게 더 빨랐다.
반사적으로 얼굴 옆으로 치켜든 네하트의 왼팔 위로, 강철 주먹이 틀어박혔다.
콰드득- 콰당탕탕탕-
그대로 튕겨 나간 네하트가 움막의 벽면을 뚫고 들어갔다. 그녀가 반대편 벽면까지 등으로 부수며 튕겨 나오자, 움막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먼지구름이 자욱하게 치솟았다.
쒸아악-
이글대는 붉은 궤적이 그 사이를 꿰뚫듯 가로지른 건 바로 그 직후였다. 주먹을 움켜쥔 샬롯이었다.
“우리 야옹이가 이기겠네. 그치?”
입가에 은근한 미소를 머금은 채 지켜보고 있던 테사이아가 내뱉었다. 넋이 나간 얼굴로 지켜보던 이드리스가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카르하께서 축복을 내려주신 덕분입니다….”
그의 시선은 옆의 움막의 벽면에 여전히 고정되어 있었다. 저 너머에서 굉음이 번지고 있기 때문일 터였다.
“그러게. 제정신인가 했는데. 카르하가 축복을 내릴 걸 알고 있었던 거지, 이안?”
“뭐… 어느 정도는.”
테사이아의 시선을 받은 이안이 시큰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퀘스트가 뜬 순간부터 확신하고 있었다. 대전사의 오른팔.
게임에서는 아마도 야만 전사가 북부인 용병을 고용했을 때나 받을 수 있던 퀘스트일 터였다.
남부 출신에 수인이기까지 한 샬롯을 대상으로 받게 되었다는 건, 이제는 놀라운 일도 아니었다.
애초에 이안은 야만 전사가 아니었으니까. 게다가 카르하 역시 진작부터 샬롯을 전사로 인정하지 않았던가.
‘…마음에 들게 싸우기만 하면 종족도 출신도 상관없다 이거지.’
어쨌건, 이번 축복은 샬롯만을 위한 것인 모양이었다.
그의 전신에도 여전히 붉은 신성이 아른거리고 있었지만, 정작 능력치 상승은 미미한 수준이었다.
어쩌면 카르하는 당분간, 몇 년 사이 달라진 이안 본신의 역량을 확인하고 싶은 것일지도 몰랐다.
그 괴팍한 백정 신이라면 충분히 할 법한 생각이었다.
“우리도 가자, 이안. 나 궁금해.”
뒤꿈치를 들썩대던 테사이아가 그의 팔을 잡아끌며 내뱉은 건 그때였다.
콰앙-! 콰르르르-
이 순간에도 굉음이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샬롯과 네하트가 마을을 죄다 부수며 싸워대고 있는 게 분명했다.
팔메르와 이드리스는 이미 보이지도 않았다. 둘은 저만치의 움막 지붕에 서서, 굉음이 번지는 쪽을 주시하는 중이었다.
“…그래. 가자.”
입맛을 다신 이안이 테사이아를 따라 근처의 움막으로 걸음을 옮겼다. 결투를 구경 중인 건 팔메르와 이드리스만이 아니었다.
“…….”
“…….”
어느새 수인 전사들이 목책 위에 원숭이들처럼 빼곡하게 올라 서 있었다. 다들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잡고 고개만 빼꼼히 치켜든 채였다. 몇몇은 마을 안으로 달려 들어와 외곽의 움막 위를 날듯이 기어오르고 있었다.
‘신성한 의식은 개뿔….’
그냥 싸움 구경이구만.
내심 헛웃음을 흘리면서도, 이안 역시 움막의 지붕 위로 올라섰다.
판자를 대충 얹어 위험천만하다는 건, 테사이아는 물론 이안에게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쩌엉-!
그 잠깐 사이에 난장판이 된 마을의 전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무너진 움막의 잔해 사이에 덩그러니 박혀 있는 톱날 검이 이안의 눈에 들어왔다.
콰드득-! 빠각!
그리고 저 검의 주인은, 방금 무너진 게 분명한 폐허 한복판에서 얻어터지는 중이었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