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Dark Fantasy Villain RAW novel - Chapter 53
053화
이안과 눈이 마주친 그가, 자신도 어쩔 수 없었다는 듯한 처량한 표정을 지었다.
‘이름을 불린 게 어지간히 당황스러웠나 보군.’
이안이 입맛을 다시는 사이.
“어차피 우린 너희 인상착의도 알고 있었다. 남색이 도는 검은 머리에 검은 눈. 한 놈은 수염에 얼굴 흉터. 제일 중요한 아가씨는 붉은 머리에 녹색 눈. 딱 너희 같은데.”
대장이 위로라도 하듯 덧붙였다.
이안과 다시 눈이 마주친 그가 싱긋 미소 지었다.
“그러니까 그냥 순순히 따라오는 게 좋아. 정말 아니라면 확인만 하고 보내줄 테니까.”
너 같음 가겠냐?
이안의 눈빛이 우묵해졌다.
대장이 턱을 까딱였다.
“좋은 눈빛이군. 하지만 무모한 짓 하지 마라. 이래 봬도 우리가 사격에는 자신이 있거든. 게다가….”
그가 대단한 비밀을 알려 준다는 듯 목소리를 낮췄다.
“우린 저 꼬마 아가씨만 생포해서 돌아가도 돼. 너희 둘도 붙잡으면 추가 보상이 있지만, 그게 아니라도 충분한 거금이지.”
“아, 그래.”
고개를 끄덕인 이안이 덧붙였다.
“그럼 쏴 봐. 이제부터 움직일 테니까.”
“……?”
대장의 미간이 좁아졌다.
무슨 자신감인가, 싶은 눈빛.
이안이 보란 듯이 팔을 움직였다.
로브가 슬쩍 벌어지면서, 그 안의 단죄의 검이 드러났다.
이안이 자루에 손을 얹었다.
대장의 미간이 비로소 구겨졌다.
“미친놈이었군. 그냥 쏴 버려!”
피슉, 거의 동시에 이안과 미구엘을 향해 쇠뇌가 발사됐다.
그들의 사격 실력은 우두머리의 말처럼 훌륭했다.
발사 시점도 거의 같았고, 조준도 정확했다.
하지만 우습게도, 지금은 오히려 그 훌륭한 실력이 독이 됐다.
푸확-!
주위로 몰아친 바람 장막이 단숨에 모든 볼트를 흩어 버린 것이다.
하나 정도는 쳐낼 생각이었던 이안은, 덕분에 로브를 벗어 버리며 그대로 도약했다.
뽑혀 나온 단죄의 검이,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미처 깨닫지도 못한 한 놈에게 그대로 떨어져 내렸다.
콰직!
“꺼…… 헉.”
정수리부터 목까지 반으로 잘린 놈이 눈을 까뒤집으며 뒤로 넘어갔다.
흘러내리는 뇌수와 피.
그대로 안장 위에 착지한 이안의 왼손이 채찍처럼 휘둘러졌다.
퍼억!
그의 손길을 따라 바람이 번지고, 저만치의 다른 놈의 고개가 뒤로 튕겨 나가듯 젖혀졌다.
그대로 낙마한 놈의 얼굴 한복판에는 단도가 깊숙이 박혀 있었다.
“이런 미친…….”
그제야 상황을 깨달은 우두머리가 탄식하는 그때, 이안은 이미 안장을 박차고 뛰어오르는 중이었다.
쩌억-!
또 한 놈이 목덜미부터 반대쪽 옆구리까지 사선으로 잘려 나갔다.
잘린 상체가 피와 오물을 흩뿌리며 떨어졌다.
하반신은 여전히 말에 탄 채였다.
이안이 바닥을 구르며 착지했다.
“……!”
대장의 눈에 핏발이 돋았다.
단칼에 사람을 양단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힘이 장사이거나, 기술이 경지에 올랐거나. 최소한 무기라도 명검이라 불릴 만한 것이어야 했다.
어느 쪽이 정답인지는 본인을 제외하고는 알 도리가 없으리라.
중요한 건, 눈 깜짝할 사이에 부하가 셋이나 죽었다는 사실이었다.
“이, 시발 놈이…!”
뒤늦게 마지막 놈이 쇠뇌를 집어던지며 검을 뽑아 들었다.
어느새 자세를 다잡은 이안이 놈에게 단도를 던졌다.
아예 맹탕은 아닌지, 놈은 날아오는 단검을 몸을 젖혀 피했다.
하지만 그렇기에 뒤따라 내달린 이안의 도약까지 막지는 못했다.
안장보다 높이 뛰어오른 그가 검을 내리쳤다.
용병은 검을 들어 이안의 일격을 흘려내고 반격하려 했다.
정석적인 대응이었다.
콰직-
검이 그대로 부러지기 전까진.
단죄의 검이 놈의 어깨에 깊숙이 박혔다.
“아아악-!”
비명. 놈의 몸을 짓누르며 착지한 이안이 박힌 검을 뽑으며 확인 사살을 준비했다.
대장이 그의 지척까지 달려든 건 그때였다.
그는 이안이 부하를 죽이는 동안 뒤를 노릴 작정이었다.
푸슉-!
검을 치켜든 그는, 등에서 이어진 뜨끔한 고통에 그대로 굳어졌다.
미구엘이 발사한 볼트가 그의 등을 뚫은 것이다.
“크… 헉.”
휘청대며 낙마한 그가 억눌린 신음을 흘렸다. 그를 버리고 야속하게 도망치는 애마의 뒷모습이 보였다.
탁.
그리고 그 앞에, 이안이 착지했다.
쓰러진 우두머리는 내려다보는 그의 눈길이 무감정했다.
우두머리가 바닥을 기며 말했다.
“살려… 살려 주시오….”
이안이 그의 앞에 쪼그려 앉았다.
턱. 우두머리의 얼굴 근처에 검이 박혔다.
피와 지방이 검날을 타고 미끄러지듯 흘러내리고 있었다.
고저 없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누가 수배령을 내렸지? 제국의 상인인가?”
“제, 제국…? 무슨 말인지 모르겠소. 나도 전해 들은 얘기지만… 그들은 아니었소. 아겔 란의… 기사들이라던데….”
우두머리는 힘겨워하면서도 순순히 대꾸했다.
눈을 가늘게 뜬 이안이 덧붙였다.
“아겔 란에서 온 자들이라면 너희들 같은 놈들만으로는 우릴 잡을 수 없단 걸 알 텐데. 정말 생포하란 수배를 내렸다고?”
“사실 위치를 제보하기만 해도 보상이 있었소. 사로잡았을 때의 보수가 더 컸을 뿐… 아, 이런.”
순간 또렷하게 말하던 우두머리의 얼굴에 묘한 깨달음이 스쳤다.
그가 이안을 바라보며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난 이미 틀린 거였군. 그래서 정보라도 뽑아먹으려고 한 거야.”
“뭐, 간을 꿰뚫리고 살아남을 순 없으니까.”
선선히 대답한 이안이 일어섰다.
쿨럭, 피 섞인 기침을 토한 우두머리가 이윽고 실실댔다.
“이게 끝이라 생각하지 마라… 우린 동료가… 많아… 너희 이름은… 이미 벨 론데에선….”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하지만 이안은 이미 그를 보고 있지도 않았다.
기사라. 친위 기사단인가.
턱을 긁적이는 그의 뇌리로 그럴싸한 시나리오가 스쳐 지나갔다.
극대노한 아겔 란의 국왕. 그의 명으로 추적에 나선 친위 기사단.
아마 다수가 국경을 넘진 못했으리라. 많아야 다섯. 그보다 더 적을 가능성도 높았다.
‘반신반의하면서도 일단은 루 사드 방향으로 움직였겠지.’
아마 며칠쯤 지나 자신들이 잘못된 길로 들어섰다는 걸 알게 됐으리라.
그리고 그때부터 방향을 틀어, 들르는 마을마다 수배령을 내린 것이 틀림없었다.
기사들이기에 가능한 멍청한 짓거리였다.
일이 커지면 용병과 상인들 만큼이나 돈에 눈이 먼 영주들까지 판에 끼어들 수도 있는데.
돌아가는 상황으로 봐선 시간문제 같았다.
그때부턴 진짜 예측 못 할 개판이 펼쳐지리라.
“그, 듣자 하니 근처에 우리 이름이랑 인상착의가 쫙 뿌려진 것 같은데……. 다 잘라내기엔 꼬리가 너무 많아진 것 아니오?”
미구엘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안이 어깨를 으쓱였다.
“알면, 우선 이것들부터 치워.”
미구엘이 마부석에서 내렸다.
곧 시체들을 말 안장에 얹어 묶은 그들은, 말들을 사방으로 흩어 버렸다.
큰 도움이 되진 않겠지만 조금이라도 교전 지역이 늦게 발견되게 만들기 위해서였다.
말을 한 마리 남긴 이안이 안장 위로 올라탔다.
기동력을 하나 더 확보해 놓기 위함이었다.
이제부턴 시간 싸움이 됐으니까.
짐칸에 앉은 루시와 눈이 마주친 그가 태연하게 미소 지었다.
“머리카락까지 자르고 그 난리를 피웠는데, 결국 들켜 버렸군.”
루시가 고개를 저었다.
“그래서 여기까지 큰일 없이 올 수 있었던 거니까요. 괜찮아요.”
방금 피바람이 불었음에도 떨림조차 없는 목소리였다.
하긴. 아마 그녀는 열두 살 중에선 가장 죽음에 익숙할 터였다.
눈을 깜빡인 루시가 덧붙였다.
“그런데 왜 마법을 쓰지 않으셨나요? 어차피 죽일 거였는데.”
이 와중에도 그런 게 궁금하다니, 마법사의 기질은 어디 안 가는군.
사실 회색 마법을 쓰긴 했다만.
속으로 읊조린 이안이 어깨를 으쓱였다.
“마법은 필요한 순간에만 써야지. 이딴 것들한테도 마법을 써 대다간, 마력이 남아나지 않을 거다. 지금은 마력의 황혼기니까.”
루시가 고개를 끄덕이는 가운데.
이안이 문득 양팔을 들었다.
“지금 내 모습이나 잘 봐라. 칼을 들고 싸우면 이렇게 돼.”
“찝찝해 보여요.”
“바로 그거야.”
“하지만 멋져요. 강해 보이고.”
…고집 센 것도 딱 마법사고.
이안이 입맛을 다시는 사이.
“그래서, 이제 어쩌실 거요? 이대로 그냥 가던 길 갈까?”
마부석에 오른 미구엘이 물었다.
“아니.”
마차로 다가간 이안이, 저만치에 이어진 산을 돌아보았다.
이대로면 길어야 며칠 내로 그들의 위치가 알려질 터.
“저길 가로지르면, 시간을 얼마나 단축할 수 있지?”
플랜B를 써야 할 순간이었다.
***
미구엘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건 아무리 생각해도 좋은 판단이 아닌 것 같소. 기껏해야 이틀에서 사흘 줄이자고….”
“그 시간 동안 포위당해서 쫓기기 시작하면 생각이 달라질 거다.”
이안이 태연하게 내뱉었다.
미구엘의 한숨이 깊어졌다.
그들은 지금 산을 오르는 중이었다. 정확히는 산과 산 사이의 계곡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샛길처럼 이어진 관도가 있었지만.
오랜 시간 사람이 오가지 않은 듯, 상태가 엉망진창이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미구엘의 말에 따르면, 여기는 마수가 산다는 소문이 도는 흉지였으니까.
“내가 소문을 들은 게 벌써 몇 년 전 얘기요. 지금쯤이면 검은 벽의 광기나 괴상한 원한 같은 게 깃들고도 남았을 거란 말이오. 형씨 실력은 알지만….”
“걱정 마라. 너한테 나서서 싸우라고 할 생각은 없으니까. 넌 마차만 잘 지키면 돼. 게다가….”
이안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어둑어둑해지는 먹구름.
“어차피 돌아가기엔 늦었거든.”
미구엘은 생각해 본 적도 없었던 모양이지만.
이건 흉지 근처로 움직인다는 계획을 세운 그 순간부터 염두에 둔 대비책이었다.
추적자들도 그들이 그냥 흉지로 들어가 버리리란 생각까지는 하기 쉽지 않을 테니까.
설사 눈치채더라도 쭉정이들은 따라 들어올 엄두도 내지 못할 터.
심지어 이번 경우엔 일정까지 단축할 수 있으니 일석이조였다.
“필립이 그리워지는군. 그 양반이라면 이런 순간에 내 편을 들어줬을 텐데.”
미구엘이 체념한 듯 읊조렸다.
이안이 피식댔다.
“어차피 달라질 건 없었을 거다.”
그가 탄 말이 콧김을 뿜었다.
녀석뿐 아니라 마차를 모는 말들도 겁에 질려 있었다.
당연한 반응이었다.
온통 검게 말라붙은 나무들을 포함해서, 어딜 봐도 생기라고는 찾아볼 수도 없이 삭막했으니까.
이 산에 뭔가 도사리고 있는 건 확실해 보였다.
파사삭-
“……?!”
귓가를 스치는 소리에 미구엘이 번쩍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보이는 건 없었다.
가지만 거뭇거뭇하게 남은 나무들과 먹구름 낀 밤하늘뿐.
파사삭- 파슷-
“바람 소리인가……?”
“그럴 리가.”
코웃음 치는 이안의 눈빛은, 이미 싸늘하게 가라앉은 후였다.
파사삿- 파스슷-
이미 며칠 전에 이런 소리를 들어 봤기 때문이었다.
“여기 무슨 마수가 사는 건지 알 것 같군.”
“어떤 놈이… 사는 거요?”
이안이 문득 손을 들었다.
그가 가리킨 방향을 돌아본 미구엘이 눈을 치켜떴다.
“……!”
나무 위를 쏜살같이 이동하는 형체를 비로소 확인한 것이다.
시야 밖으로 그림자처럼 숨어 버리는 그것은, 검회색의 거미였다.
크기가 거의 늑대만 한.
“동굴 거미……?”
“그래. 저건 동굴 거미지. 저것도. 그리고 또 저것도.”
이안이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일순간 굳었던 미구엘이 허둥지둥 짐가방으로 손을 뻗어 횃불을 들었다.
화륵-
불길이 타오르는 순간, 미구엘은 나무 사이로 반짝이는 눈알들을 볼 수 있었다.
열 마리도 넘는 동굴 거미가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벨 론데의 동굴 거미들은 죄다 여기서 빠져나간 놈들인 거다.”
“그럼… 여기 산다는 마수가 바로…….”
“저것들의 어미겠지.”
파스슥- 파스스슥-
그 말이 신호라도 된 것처럼 바람 소리 같은 동굴 거미의 발소리가 사방에서 파도치듯 밀려들었다.
이안이 문득 루시를 돌아본 건 그때였다.
“잘 봐 둬라.”
“……!”
루시가 눈을 치켜떴다.
자신을 마주 보는 이안의 눈동자가, 어느새 타오르듯 붉게 일렁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지금 같은 상황이, 마법을 써야 하는 순간이니까.”
화르륵-
그의 주위로 새빨간 불덩이들이 일제히 피어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