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Dark Fantasy Villain RAW novel - Chapter 536
#536화
“어… 맞아, 그랬었지…?”
잠시 눈을 끔뻑인 테사이아가, 한 박자 늦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히 마력의 황혼기가 무엇인지는 이미 아는 모양이었다.
하긴. 아무리 역사에 관심이 없어도, 마법과 관련된 부분까지 무지하지는 않을 터였다. 이안이 어깨를 으쓱이며 덧붙였다.
“검은 땅에서는 소모된 마력이 빠르게 회복됐었지. 이젠 대륙도 그렇게 된 모양이야.”
사실 이미 전에도 비슷한 추측을 한 적이 있지 않던가. 테사이아 덕분에 사실이 되었다는 것을 확인한 셈이었다.
“그럼… 정말 알려진 대로 검은 벽이 마력의 황혼기를 연 주범이었던 건가.”
고개를 주억거리며, 테사이아가 혼잣말처럼 읊조렸다.
“왜일까. 검은 벽이 마력을 빨아들이기라도 했던 걸까? 그 존재를 유지하기 위해서…?”
그녀의 늪색 눈동자에 마법사 특유의 호기심이 감돌았다.
하지만 물론, 이안은 이유 따위는 전혀 궁금해하지 않았다. 지금 그의 뇌리를 스치는 건 그보다 훨씬 현실적인 문제였다.
“마력의 황혼기가 끝난 건지 끝나는 중인 건진 모르겠지만. 어쨌건, 지금쯤이면 다른 주문쟁이 들도 변화를 확실히 눈치챘겠지.”
정확한 위치도 알지 못하는 마탑들과 그 안에 은거 중인 마법사들.
이안을 바라보는 테사이아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정신 나간 주문쟁이 들이 탑 밖으로 기어 나올 수도 있다는 얘기야?”
이어진 그녀의 물음에, 이안이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그 정신 나간 주문쟁이 들이 더 강해졌을 거란 얘기였지만…. 그래. 그 말에도 일리가 있네.”
게임에서 마력의 황혼기는 아마도, 후반부의 난이도를 높이기 위해 만들어 둔 설정이었을 터였다.
신들의 영향력이 갈수록 약해지는 것이 그렇듯이.
‘물론 캐릭터를 타락시켰다면 입장이 좀 달랐을지도 모르지만….’
무의식적으로 이어진 생각에, 이안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타락 DLC는 일종의 숙련자용 패키지 같지 않던가.
중반부까지는 타락자라는 사실을 들키지 않기 위해 여러 노력을 기울여야 할 테니까. 하지만 이쯤 되면 제약이라 부를만한 게 그리 많이 남지 않게 되었을 터였다.
대신 혼돈에 잡아먹히거나, 광기에 물들어 변이되는 등의 위험 요소가 더 커지는 방식으로 긴장감을 유지 시켰으리라.
물론 그건, 지금의 이안도 조심해야 할 부분이었다.
“그렇게 걱정할 필요 없어. 이안.”
그의 표정을 오해한 듯, 테사이아가 말을 이었다.
“모든 주문쟁이가 정신 나간 건 아니잖아? 게다가 나나 이안도, 똑같이 강해지는 거고.”
“글쎄….”
이안이 씁쓸하게 입맛을 다셨다.
“애석하게도, 나는 다른 주문쟁이만큼 덕을 보진 못할 거야.”
“왜?”
테사이아가 고개를 갸웃했다.
“이안은 백마법사의 모든 주문을 쓸 수 있잖아.”
“쓸 수만 있는 거지.”
마력의 황혼기가 끝났다 해도, 그의 전투 방식이 달라지지는 않을 터였다.
마법사를 상대로는 특히 그랬다.
수준 차이가 크다면 모를까.
상대가 상위 마법사만 되더라도, 마법 대결만으로는 승산이 없을 터였다. 중첩되는 마력의 총량부터 주문의 위력까지, 어느 것 하나 앞서는 게 없을 테니까.
‘시전 속도는 내가 더 빠를지도 모르지만….’
거리를 유지한 채 쏟아지는 압도적인 화력 앞에서는 그다지 큰 의미가 없으리라. 게다가 주문쟁이는 보편적으로 경호원을 대동하고 다니지 않던가.
“게다가 모든 주문을 아는 것도 아니야.”
“아니라고…?”
이안이 덧붙인 말에 테사이아의 미간이 조금 더 좁아졌다.
그러니 상황을 바꿔 줄지도 모르는 혈통 관련 퀘스트를 완료해야 한다고 이안이 내심 덧붙이는 사이.
“아하, 그래… 이제야 알겠네.”
스스로 해답을 찾아낸 듯, 테사이아가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이안도 영혼에 새겨진 주문을 전부 손에 넣은 건 아니구나. 그걸 찾아내는 과정이 필요한 거야.”
“뭐… 비슷하지.”
사실은 스킬 포인트로 익히는 거지만, 이안은 부정하지 않았다.
그가 마법을 익히는 방식을 이 세계 사람의 관점으로 해석하면 크게 다르지 않을 테니까.
테사이아가 묘한 미소를 입가에 걸었다.
“이안이 왜 그렇게 명상을 자주 하는 건지 이제야 알겠어. 심상 세계를 탐험하는 거였구나. 새로운 주문을 발견할 때까지.”
…그건 정말 그냥 피곤해서 하는 거다만. 내심 덧붙이면서도 어깨를 으쓱인 이안이 덧붙였다.
“어쨌든, 앞으로 멀쩡한 주문쟁이를 찾아보는 건 점점 더 어려워질 거야. 알다시피, 검은 벽이 품고 있던 혼돈과 광기도 함께 풀려났으니까.”
“그러게. 마력의 황혼기가 끝난 게 오히려 마법사들의 타락을 부추길 수도 있겠어….”
테사이아가 곧바로 탄식했다.
찰떡 같이도 알아듣네. 생각하며, 이안이 덧붙였다.
“그러니까 너도 조심해. 테사.”
“그건 걱정마. 내가 뭐였는지, 무슨 일들을 겪었는지 잊었어?”
테사이아가 보란 듯이 코를 살짝 치켜들었다.
“어지간한 어둠은 내 영혼을 티끌만큼도 물들일 수 없을 거라고.”
“…하긴. 그럴 수도 있겠네.”
이안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비단 끔찍한 경험을 이겨내서만이 아니라, 실제로도 광기에 더 큰 저항력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어쨌건 그녀는 흡혈 요정 출신이 아닌가.
“게다가 어차피, 내 안의 뿌리가 오염된 마력을 여과해 줄 거야.”
“그 뿌리에도 한계는 있을 것 같은데.”
“물론이지. 하지만 괜찮아. 오염된 부분이 알아서 떨어져 나가는 것 같더라고. 배출하고 나면, 그만큼 다시 자라나고.”
대답한 테사이아가 슬며시 눈을 흘겼다.
“입으로 토해내는 거니까, 망측한 상상은 하지 말아줘.”
“…안 했어. 어쨌든, 경험은 있다는 거네.”
이안이 헛웃음을 흘리며 내뱉자, 테사이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생명수와 교감할 때 아주 가끔. 생명수에 스며든 불순물을 걸러내는 것도 원로의 역할이거든.”
“아하….”
정말 정화 필터 같은 거였네.
이안이 고개를 주억거리는 사이, 테사이아가 슬며시 미소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래도 걱정해 주는 건 기분 좋네. 이안을 봐서라도, 방심하지는….”
그녀의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불현듯 시선을 돌린 이안이 검지를 그녀 쪽으로 치켜들었기 때문이었다.
눈을 깜빡인 테사이아의 입가에 이내 옅은 미소가 스쳤다.
“…귀가 밝네. 이안.”
저 멀리서 나뭇잎들이 바람에 맞부딪치는 듯한 희미한 소리가 번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보다 먼저 눈치채다니. 귀쟁이 체면이 말이 아닌걸.”
이어진 테사이아의 칭찬은, 물론 이안을 전혀 기쁘게 하지 못했다.
그가 요정에 버금가는 감각을 가지게 된 건, 그만큼 높은 민첩 능력치 덕분일 테니까.
“어쨌든… 생각보다 일찍 마주치게 됐네. 알고 있겠지만, 파수꾼들일 거야. 이렇게 된 김에 생명수도 보고 갈래, 이안?”
이어진 테사이아의 물음에, 이안이 고개를 저었다.
“됐어. 이미 예정보다 늦어졌는데, 시간을 더 쓰고 싶지 않아.”
“그렇게 말할 것 같았어. 그래. 그러자.”
빙긋 미소 지으며 대답한 테사이아가 이안의 왼팔을 끌어안듯 감싸 안았다.
이안의 시선에, 그녀가 두건을 더 깊이 눌러쓰며 내뱉었다.
“왜 그렇게 봐? 우리가 무슨 명분으로 가문을 나섰던 건지, 벌써 잊었어?”
“잊지는 않았는데….”
입맛을 다신 이안이 덧붙였다.
“요정 사회에 소문이 날 텐데. 괜찮겠어?”
“여긴 깊은 숲 한복판이잖아. 이래야 나도 원로회의 징계를 피할 명분이 생긴다구. 물론 뭐.”
테사이아가 한쪽 어깨를 까딱였다.
“소문이 나라고 하는 거기도 해. 그래야 상황이 어떻게 바뀌든, 가문의 늙은이들이 발을 뺄 수 없을 테니까.”
“네 혼삿길도 막힐 테고 말이지.”
“그럼 진짜로 이안이… 농담이야. 그런 표정을 짓는 게 재미있어서 끊을 수가 없다니까.”
혀를 날름 내밀며 미소 지은 테사이아가 덧붙였다.
“어차피 난 혼인할 생각이 전혀 없어, 이안. 책임질 건 지금만으로도 차고 넘치거든. 그러니 더 잘 됐지, 뭐. 이제 누가 감히 내 앞에서 정략결혼 따위를 언급하겠어?”
배시시 미소 지은 그녀가 한쪽 눈을 찡긋댔다.
“그러니까, 장단이나 잘 맞춰 줘. 귀쟁이들을 난처하게 해 주자고.”
“뭐… 그건 나도 좋아하는 일이긴 하지.”
풀썩 웃음 지은 이안이 대답했다.
지금 오는 녀석들에게 딱히 악감정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어차피 장단은 맞춰 줄 생각이 아니었던가. 테사이아도 얻는 게 있다니 위안이 될 뿐이었다.
사아아아….
나뭇가지를 스치는 바람 소리는 이 순간에도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안은 높다란 나무 위에서 가까워지는 인기척들을 비교적 선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수인들만큼 은밀하진 않네.’
물론 이건 그이기에 가능한 감상일 터였다. 어지간한 이들은 저들이 지척까지 가까워져도 기척조차 느낄 수 없으리라.
“아름다운 숲이지요, 성자 대행?”
그의 팔을 끌어안은 테사이아가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것처럼 살갑게 속삭였다. 요정들에게는 이 정도만으로도 충분히 전해지리라는 듯한 말투였다.
태연하게 걸음을 옮기며, 이안도 고개를 끄덕였다.
“본토의 숲이라 해도 믿겠소.”
“역시 안목이 있으시군요. 맞아요. 본토의 나무들을 옮겨온 거랍니다. 그래서 더 아쉽네요.”
들으라는 듯이 내뱉으며, 테사이아가 슬며시 시선을 돌렸다.
“방해꾼들만 없었어도, 이 밤 산책을 조금 더 즐길 수 있었을 텐데요.”
이안도 비로소 고개를 들었다.
높이 솟은 나무 위는 여전히 어둠에 잠겨 있었지만, 그사이에 몸을 숨긴 그림자들을 어렵지 않게 분간할 수 있었다.
“당장 그 자리에서 멈춰라.”
그림자의 싸늘한 목소리가 번진 건 그 직후였다. 남자 요정.
“너희들은 지금 금지에 발을 들였으니. 멈춰서 지시에 따르지 않는다면, 숲의 거름이 될 것이다.”
그저 말로만 하는 위협은 아니었다. 이안의 육감이 흐릿한 경고를 보냈다. 파수꾼들이 그들에게 화살이라도 겨눈 것이리라.
“너희들이야말로 예의를 갖추는 게 좋을 거야.”
테사이아가 싸늘하게 내뱉은 건 그때였다. 여전히 오른팔로는 이안의 팔을 감싸 안은 채, 그녀가 왼손만 들어 두건을 벗었다.
“너희는 지금, 원로를 내려다보며 명령하고 있으니까.”
탐스러운 은발이 흘러내리고, 그녀의 전신에서 마력의 파장이 은은하게 번져 나갔다.
나무 위를 올려다보는 테사이아의 눈매에는 어느새 지렁이 같은 핏줄이 꿈틀대며 돋아나고 있었다.
“……!”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번진 것도 잠시, 사방의 나무 위에서 그림자들이 부리나케 떨어져 내렸다.
어둠 속에서도, 이안은 포위하듯 착지하는 네 파수꾼의 모습을 정확하게 확인할 수 있었다.
‘죄다 디아나 같네.’
몸에 착 달라붙는 가죽 방어구와 곳곳에 두른 비수들을 고정한 가죽띠. 짐승 형태의 가면을 뒤집어쓰고 있다는 부분이 특히 그랬다.
물론, 디아나의 가면처럼 특별한 마력이 느껴지지는 않았다.
‘뭐, 생명수를 깎아서 만든 가면이 흔할 리는 없지.’
이안이 생각하는 사이, 파수꾼들이 자세를 바로 하며 섰다. 왼손에 쥔 활에 여전히 화살을 걸친 채였다.
“어머. 아는 얼굴도 있었네. 어쩐지, 목소리가 익숙하더라.”
테사이아가 넌지시 내뱉은 건 그때였다. 그녀의 얼굴은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아가는 중이었다.
여우 형태의 가면을 쓴 파수꾼이 슬며시 고개를 숙였다.
“에레노스… 원로셨군요…. 얼굴이 보이지 않아… 제가 결례를 범했습니다.”
“……!”
그가 떨떠름한 목소리로 내뱉자, 그제야 다른 파수꾼들의 눈이 설핏 커졌다.
다들 테사이아의 이름을 알고 있는 게 분명했다. 하긴. 새롭게 탄생한 원로인 데다 에레노스의 가주 자리에 오르기도 했으니, 모르는 게 오히려 이상할 터였다.
“네 이름이… 일라이. 일라이 아세니브였던가?”
“…예. 맞습니다.”
테사이아가 덧붙인 말에 여우 가면, 일라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름을 기억해 주었음에도 전혀 기뻐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 반대일 터였다. 가면을 쓰고 다니는 이유가 사라진 셈일 테니까.
테사이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일라이. 그 사과는 기꺼이 받아 주도록 하지.”
“받아 주셔서 감사합니다만… 원로. 깊은 숲의 규율을 어기셨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으십니다.”
한숨 섞인 목소리로 내뱉은 그가 테사이아를 바라보았다.
“이런 야심한 시각에 통보도 없이 숲에 발을 들이셨을 뿐만 아니라, 이방인까지 동행하시다니요. 깊은 숲의 원로께서도 그냥 넘어가지 않으실 겁니다.”
“여긴 정원으로 들어가는 길이 아니잖아. 게다가 이분은 그냥 단순한 이방인이 아니야.”
테사이아가 이안의 팔을 끌어당기듯 더 깊이 품에 안았다.
“에레노스의 은인이시지.”
“…….”
멈칫한 일라이가 비로소 이안의 얼굴로 시선을 돌렸다.
“은인이시라면… 설마…?”
“그래. 여기 계신 이분으로 말할 것 같으면-”
목소리를 엄숙하게 높이던 테사이아가 멈칫했다. 이안이 오른손으로 그녀의 팔을 부드럽게 감싸 쥐었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시선을 받은 이안이 담담하게 내뱉었다.
“달밤에 할 얘긴 아닌 것 같으니. 내가 직접 하겠소.”
“…그러시겠어요?”
테사이아가 한 박자 늦게 입술을 말아 올리며 대답했다. 못내 아쉬운 게 분명했다. 슬쩍 입맛을 다시는 그녀의 팔을 보란 듯 토닥인 이안이, 일라이를 돌아보았다.
“실례했소. 나는 이안 호프라는 사람이오.”
“……!”
물론, 일라이를 비롯한 파수꾼들의 눈이 찢어질 듯 커지게 만드는 데에는 그거면 충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