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Dark Fantasy Villain RAW novel - Chapter 539
#539화
“워워-”
테사이아가 고삐를 당기며 소리쳤다. 낮은 돌담을 지나, 관도 좌우로 과일나무들이 펼쳐지기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이안도 뒤따라 고삐를 당겼다.
다그닥- 다각-
달리던 말들이 삽시에 속도를 줄였다. 말들의 헐떡대는 숨소리가 번지는 가운데, 그를 돌아본 테사이아가 조금은 머쓱하게 미소 지었다.
“여기서부턴 걸어가자, 이안. 나, 가랑이 아파.”
“그러지 뭐.”
난 또 뭐라고.
피식 웃은 이안이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한나절 내내 달렸으니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덕분에 그들은 이틀 가까이 걸어야 할 거리를 단숨에 주파해 타헤나에 접어들 수 있었다.
“출출하다. 이안도 뭣 좀 먹을래?”
냉큼 안장에서 뛰어내린 테사이아가 물었다. 등자를 밟고 일어선 이안이, 품에서 은제 궐련함을 꺼내 들며 고개를 저었다.
“됐어. 난 이거면 돼.”
“그래? 알았어. 다녀올게.”
고개를 끄덕인 테사이아가 고삐를 놔 버리고는 휙 관도 옆으로 달려갔다. 열매를 따 오려는 것이리라.
…서리는 기본이구만.
내심 읊조리며 궐련을 입에 문 이안이 말에서 내렸다.
“수고했다.”
숨을 몰아쉬고 있는 백마의 목덜미를 토닥여 주는 것도 잊지 않은 채였다. 기름 같은 땀에 흠뻑 젖은 채로도, 녀석이 푸르르 투레질하며 고개를 들썩였다. 지쳐 있었지만 동시에 묘하게 상쾌해 보이기도 하는 모습이었다.
‘마음껏 달린 게 오랜만인 건가.’
생각하며 손가락을 튕긴 이안이, 작은 불꽃을 만들어 궐련 끝에 불을 붙였다. 그대로 불꽃을 움켜쥐어 흩어버린 그가 연기를 들이마시는 사이.
“평소엔 질려서 안 먹는 건데. 맛있네.”
열매 한 알을 들고 돌아온 테사이아가 입을 우물대며 말했다.
전에 디아나가 먹었던, 자두 같기도 복숭아 같기도 한 과일이었다.
물론 그때와 달리 적당히 불그스름하게 잘 익어 있었다. 베어 문 자국 너머로 드러난 노란 과실 역시 부드럽고 촉촉해 보였다.
“오는 동안 든 생각인데 말이야.”
왼손으로 고삐를 다시 쥔 테사이아가 이안의 곁으로 다가서며 말을 이었다.
“야옹이들을 도와주려는 생각도 있었던 거지?”
이안이 궐련의 연기를 뿜으며 그녀를 돌아보았다. 과실을 한 입 더 베어 문 테사이아가 미소 지었다.
“덕분에 귀쟁이들이 또 한동안 그 녀석들을 전혀 신경 쓸 수 없게 됐잖아.”
“의회에 혼란을 좀 주고 싶었던 거지만. 뭐, 그럴 수도 있겠네.”
꿈보다 해몽이라더니.
피식 웃은 이안이 연기를 뿜으며 말을 이었다.
“벽 너머의 상황을 알려 주고 싶지 않기도 했고. 미리 알려져서 나한테 좋을 건 없으니까.”
“덕분에 한동안 시끄러울 거야. 이안과 내 관계에 대해서는 물론이고, 반역자들에 대한 이야기도 떠돌 테니까.”
원로장이 맹세를 지킬거라고는 전혀 기대하지 않는 듯한 말투였다.
이안이 넌지시 덧붙였다.
“걱정은 안 되나 보네. 원로장이 의회의 일원일지도 모르는데.”
“그 음흉한 늙은이가, 어설프게 움직여 봐야 자백밖에 안 된다는 걸 모를 리 없잖아. 괜히 날 대리인으로 삼았겠어? 뭔가 음모를 꾸민다고 해도 뭐….”
과실을 한 입 더 베어 문 테사이아가 고개를 까딱였다.
“어차피 몇 달 뒤면 다 흐지부지될 수밖에 없겠고. 안 그래?”
“뭐, 그건 그렇지.”
어쩌면 몇 달까지도 안 걸릴지도 모르지만. 내심 덧붙이면서도 이안이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일어나는 문제와 잡음 대부분은, 흑태자의 생존이 밝혀진 순간 전부 뒷전이 될 터였다. 전쟁이 시작되고 나면 더더욱.
“그래도 방심하지는 마. 만의 하나라는 게 있으니까.”
“이안은 정말, 귀쟁이들을 전혀 안 믿는구나.”
키득댄 테사이아가 손에 든 과일을 까딱대며 말했다.
“알았어. 돌아가면 디아나에게 조심하라고 얘기해 둘게.”
궐련을 문 이안의 한쪽 입꼬리가 슬며시 말려 올라갔다.
“이젠 나랑 같이 가겠다는 걸 숨길 생각도 없나 보네.”
“당연하지. 이안 덕분에 아주 좋은 명분까지 생겼잖아?”
테사이아가 보란 듯 음험한 미소를 입가에 걸었다.
“이제 나는 요정 사회에서 뭐든 마음대로 할 수 있게 된 거라구. 남부 깊은 숲이 뒤에 있으니까.”
“…그러라고 원로장이 널 대리인으로 삼은 건 아닌 것 같다만.”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면서도, 이안은 더 덧붙이는 말 없이 궐련의 연기만 들이마셨다.
의무나 책임 따위를 들먹이며 잔소리를 해 봐야 소귀에 경 읽기일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백금룡의 이름을 신나게 팔아먹고 다닌 건 그 역시 마찬가지 아니던가.
“디아나도 오히려 좋아할걸? 내가 전권을 위임해 주는데, 심지어 가문을 떠나 주기까지 하는 거니까.”
테사이아가 뻔뻔하게 덧붙였다.
이안의 입가에 맺힌 실소가 더 짙어지게 하기에는 충분했다.
“글쎄… 전혀 아닐 것 같은데.”
고향으로 돌아온 걸 땅을 치고 후회하면 모를까. 어쩌면 이미 그러고 있을지도 몰랐다.
과육을 입에 문 채 테사이아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런가? 그래도 뭐 어쩌겠어. 하라면 해야지.”
이안은 코로 연기를 뿜으며 고개만 주억거렸다. 어차피 디아나가 선택한 길이 아니던가. 게다가 테사이아를 두고 굳이 그녀를 데리고 갈 이유도 없었다.
그가 저만치에 가까워지는 도시를 바라보며 궐련의 재를 터는 사이.
“게다가 내가 보기엔, 머잖아 에레노스보다 이안이 더 위험해질 것 같다구.”
테사이아가 입을 우물대며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이었다.
“원로장도 경고했잖아. 게다가 남부의 고위 귀족들은 제도에 마법 전서로 소통하는 연락책을 하나쯤은 두고 있거든. 이안이 남부에 있다는 소문이 이미 제도까지 퍼졌을지도 몰라.”
궐련의 연기를 뿜는 이안을 돌아본 그녀가 턱을 까딱였다.
“이미 알잖아? 일단 이안부터 먼저 체포하려고 할 수도 있다는걸.”
“그래도 백금룡께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게 확실해지기 전까진, 섣불리 결정할 수 없을 거야.”
이안이 연기를 내뿜으며 태연하게 대꾸했다. 테사이아가 과육으로 범벅이 된 검지를 들어 좌우로 흔들었다.
“그래도 방심하면 안 돼. 만에 하나라는 게 있으니까. 의회가 밀어붙일지도 모른다고. 그러니까, 나 같은 유능한 주문쟁이가 곁에서 지키고 있어야 해.”
하여간, 무슨 말을 못 한다니까.
내심 읊조리며 풀썩 웃음 지은 이안이, 가까워지는 성벽을 바라보며 대꾸했다.
“마음대로 해. 어차피 당장은, 내해를 건널 방법부터 찾아야 하니까.”
“그거야 뭐, 어떻게든 되지 않겠어?”
무책임하게 내뱉으며, 테사이아가 활짝 열린 성문을 돌아보았다.
“어쩌면 빨강 머리 사촌이, 이미 뭔가 방법을 알아 왔을지도 모르고.”
“뭐, 가보면 알겠지.”
…별 일 없이 잘 기다리고 있으면 좋겠는데. 성벽을 통과한 이안의 발걸음이 절로 빨라졌다.
바깥이 그렇듯, 도시 내부 역시 그들이 떠날 때와 달라진 게 하나도 없었다. 온통 푸르렀고, 규모에 비해 고요하고 한적했다.
누군가에게는 지루하겠지만, 이안이 보기에는 평화롭기 그지없는 광경이었다. 어쩌면 이 도시는 전쟁이 벌어진다 해도 달라질 게 없을지도 몰랐다.
“보기만 해도 답답하네.”
곧 길 너머에 높다란 회백색 담장이 드러났다.
질색하듯 고개를 저으며 손에 쥔 씨앗을 던져 버린 테사이아가, 망토에 손에 묻은 과즙을 대충 눌러 닦으며 앞서 나갔다.
곧 그녀가 문 한복판의 금속 문고리를 두드렸다.
끼이-
굳게 닫혀 있던 대문이 열린 건 몇 초 지나지 않아서였다.
창대를 대충 꼬나 쥐고 금속 투구를 삐뚜름하게 쓴 어린 경비병이 밖으로 나왔다. 녀석의 나른한 눈매가 커진 건 바로 그 직후였다.
“도, 돌아오셨습니까, 가주…!”
“그래.”
삽시에 싸늘한 얼굴로 되돌아간 테사이아가, 왼손에 쥔 고삐를 살짝 흔들었다. 재빨리 밖으로 달려 나온 경비병이 고삐를 받아드는 사이.
“돌아오셨습니까, 가주. …성자 대행.”
뒤에서 선임으로 보이는 또 다른 경비병이 허둥지둥 모습을 드러냈다. 테사이아에 이어 이안에게까지 고개를 숙여 보이는 채였다.
“이 말들은 깊은 숲에서 빌려온 거니까, 며칠간 잘 먹여서 돌려 보내도록 해.”
후임 경비병이 이안의 말 고삐까지 받아드는 사이, 테사이아가 덧붙였다. 좀 전까지 실없이 웃으며 떠들던 모습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타고 나가셨던 말들은 어떻게 된 겁니까?”
“죽었어.”
“그… 렇군요. 알겠습니다.”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인 후임 경비병이 안으로 몸을 돌렸다.
“제가 모시겠습니다. 들어가시죠.”
그가 벽면에 창을 비스듬하게 기대 놓는 사이, 이안을 돌아보며 장난스럽게 눈썹을 씰룩댄 테사이아가 걸음을 옮겼다.
“…….”
이안도 대문을 지나 어둑어둑하게 이어진 통로로 들어섰다. 비로소 느껴지기 시작한 흐릿한 기척에, 그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스치는 가운데.
“손님들이 와 계실 텐데?”
테사이아가 걸음을 옮기며 물었다. 경비병이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 타오르는 여신의 사제님과, 사제님을 경호하는 오크가 와 있습니다. 성자 대행의 일행분이시라고 들었습니다.”
“대접은 융숭하게 하고 있겠지?”
“물론입니다. 벌써 일주일 넘게 편한 시간을 보내고 계십니다. 가주 대리가 각별하게 신경 쓰더군요. 가문의 서고도 개방해 드렸습니다.”
“그래…? 잘했네.”
테사이아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슬쩍 이안을 돌아보며 보란 듯 입술 끝을 말아 올리는 것도 잊지 않은 채였다.
“내 말은?”
이안이 툭 덧붙인 건 그때였다.
경비병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를 돌아보았다.
“예…?”
“내 말에는 별 문제 없었고?”
일정이 예상보다 늦지 않았던가. 마수 전마인 모로의 의태가 풀려버렸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물론 모로의 기척은 느껴졌지만….
“아. 성자 대행의 말은, 마구를 단독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사제님께서 부탁하시더군요. 가주 대리도 허락하셨고, 사제님께서 하루에 한 번씩 직접 돌보고 계십니다.”
“아하…. 잘됐네.”
이어진 경비병의 설명에, 이안의 입가에 안도의 미소가 스쳤다.
괜한 걱정이었다고 내심 덧붙이는 채였다. 하긴. 루시아가 이런 부분에서 실수를 할 리가 없었다.
그사이 경비병이 코너를 돌았다.
뒤따르는 이안의 눈앞으로 아주 잘 정돈된 에레노스의 숲이 펼쳐졌다. 좌우로 길게 이어진 저택의 복도도.
“가, 가주…!”
“다녀… 오셨습니까…!”
주위를 오가던 요정들이 황급히 멈춰 서서 고개를 숙였다. 본 척도 하지 않고 턱만 까딱이면서, 테사이아가 이안을 돌아보았다.
“전 가주 대리를 먼저 만나봐야 할 것 같군요. 저녁 식사는 귀빈들과 함께 하시는 게 어떨까요, 성자 대행?”
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합시다.”
“그럼, 밤에 뵈어요.”
한쪽 눈을 티 나지 않게 찡긋댄 테사이아가 성큼성큼 숲으로 멀어졌다. 앞을 가로막는 풀숲을 아무렇지도 않게 짓밟는 채였다.
“모시겠습니다, 성자 대행.”
이어진 경비병의 말에, 멈춰선 이안이 그를 돌아보았다.
“손님들은 어디에 묵고 있소?”
“성자 대행께서 머무시던 방입니다. 가주 대행께서 다른 방을 내어드리려 하셨습니다만, 사제님께서 요청하시더군요.”
놀랍지도 않은 요구였다. 이안이 뒤편의 통로로 고개를 까딱였다.
“혼자서도 찾아갈 수 있으니, 이만 돌아가시오.”
“…예. 편히 쉬십시오.”
사양하지 않고 냉큼 고개를 숙인 경비병이 몸을 돌렸다. 어지간히 숨 막히는 시간이었던 것이리라.
낮게 웃음 지으며, 이안은 저택의 통로를 지나 계단으로 향했다.
“…성자 대행.”
“다녀오셨군요. 성자 대행.”
마주치는 요정들이 죄다 멈춰서 고개를 숙였다.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깍듯한 태도였다.
‘…아, 그래. 가문의 어른 취급이군.’
이러다 바다 건너까지 소문이 퍼지는 건 아니겠지.
내심 읊조리면서도, 이안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인사에 화답하며 계단을 옮겼다.
그의 한쪽 입꼬리가 또다시 말려 올라간 건, 그의 숙소로 향하는 복도로 접어들었을 때였다.
“왜 저러고 있담….”
통로 끝, 굳게 닫힌 나무 문 앞에 낯익은 회색 오크가 서 있었기 때문이다. 얼굴에 크고 작은 흉터가 가득한, 희끗한 머리를 하나로 묶어 넘긴 거한. 세라스가 보낸 오크 경호병, 무카파였다.
“…돌아오셨습니까. 귀빈.”
다가오는 이안을 발견한 그가, 몸을 돌려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걸음을 멈추지 않은 채 고개를 끄덕이며, 이안이 말했다.
“여기가 아무리 귀쟁이 소굴이라도, 무장까지 하실 필요는 없으실 것 같은데.”
“업무 중이니까요.”
무카파가 고개를 들며 대답했다.
약초 타는 냄새가 코끝을 스치는 가운데, 이안이 조금 더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그래서 나와계신 거고?”
“사제님께 혼자만의 시간을 드리고 싶었습니다. 지금, 독서 중이십니다.”
아, 그래. 보기보다 섬세하시군.
생각하며 그의 앞에 멈춰 선 이안이, 나무 문 쪽으로 고개를 까딱였다.
“들어갑시다.”
“예.”
곧바로 몸을 돌린 무카파가 문을 열었다. 그 전에 문을 두 번 두드리는 것도 잊지 않은 채였다.
낯익은 장내가 드러났다.
“이안 님…! 드디어 돌아오셨군요…!”
식탁 앞에 앉아 있던 루시아가, 반색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하지만 안으로 들어서는 이안은 그녀를 보고 있지 않았다.
“왜 약초 냄새가 나나 했더니….”
살짝 미간을 찌푸린 그의 시선은 그녀가 앉아 있던 식탁을 훑는 중이었다. 활짝 펼친 양피지와 술잔. 그리고 그 옆의 가장자리에, 불붙은 궐련까지 비스듬하게 놓여있었기 때문이다.
“어… 이건 말이에요….”
시선의 의미를 깨달은 듯 루시아가 더듬대는 가운데, 이안이 비로소 그녀의 눈을 마주보았다.
“디아나가 준 거냐?”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