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Dark Fantasy Villain RAW novel - Chapter 541
#541화
“음… 글쎄요.”
기억을 되새기듯 눈을 가늘게 뜬 루시아가 말을 이었다.
“온갖 소문들이 돌고 있다는 이야기는 들었어요. 각하께서도 정확한 정보는 아는 게 없으신 눈치였고요. 저한테 이것저것 잔뜩 질문을 던져 대셨거든요. 물론….”
루시아가 손에 쥔 술잔을 살짝 까딱이며 미소 지었다.
“알아서 잘 처신했으니까, 염려 마세요.”
“그런 걱정은 애초에 안 했어.”
선선히 내뱉으며, 이안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깊은 숲에서 원로장에게 들은 이야기가 가장 최근의 소식인 모양이었다.
하긴. 루시아가 공작을 만난 건 보름도 넘게 지난 일이 아니던가.
“설마, 우리가 예상하던 상황이 벌써 일어난 건가요?”
루시아가 조심스럽게 덧붙인 건 바로 그 직후였다. 바닥에 궐련의 불씨를 눌러 끈 이안이, 두 다리를 침상에 얹으며 내뱉었다.
“아직은. 하지만 조만간일 것 같네.”
“아하… 예상보다 빠르네요….”
고개를 주억거린 루시아가 슬쩍 술잔을 입에 물고는 덧붙였다.
“백금룡께선, 여전히 응답이 없으시고요?”
“그래.”
이안이 왼손을 가슴에 얹었다. 백금룡의 부적이 담긴 주머니는 웃옷 안의 맨살에 둘러 있었다. 물론, 부적은 여전히 침묵 중이었다.
“때가 되면 신호를 주시겠지. 그전까지는, 그냥 없다고 가정하고 움직일 수밖에.”
“…네. 하지만 걱정이네요. 불똥이 이안 님께 튄다면, 불필요한 피를 보게 될 테니까요.”
술을 한 모금 마신 루시아가 못내 걱정스러운 듯 읊조렸다.
이안이 짧게 입맛을 다셨다.
“뭐…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외람된 질문을 하나 드려도 되겠습니까.”
굵고 나지막한 목소리가 끼어든 건 그때였다. 무카파였다.
뒤로 누우려다 멈칫한 이안이, 양팔을 비스듬하게 뒤로 뻗어 상반신을 기대며 그를 돌아보았다.
“하시오.”
“시간이 필요하긴 하겠습니다만. 머잖아 제국의 푸른 함대가 해수들을 토벌하기 위해 출진하게 될 겁니다. 대마족의 소식이 전해진다면 군도의 검은 함대는 물론이고 교단의 황금 함대까지도 동원될 가능성이 큽니다.”
외모에 어울리지 않는 정중한 말투로 내뱉은 무카파가, 이안과 루시아를 차례로 돌아보며 덧붙였다.
“그런데도 꼭 이렇게 서둘러서 내해를 건너셔야 합니까? 토벌이 시작되기도 전에 밀항부터 택하시는 건, 너무 위험한 결정 같아서 말입니다. 물론….”
코로 긴 한숨을 내쉰 그가 이안의 눈을 다시 마주 보았다.
“저는 귀빈의 결정에 따를 것입니다만. 제 임무는 물론이고 귀빈의 안전에도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아 여쭙는 것입니다.”
“…루시에게 아무것도 듣지 못하신 거군.”
그를 바라보고 있던 이안이 이윽고 읊조렸다.
무카파가 고개를 끄덕였다.
“비슷한 질문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만. 사제님께선 귀빈의 뜻에 따를 뿐이라고 하시더군요.”
그래. 그랬겠지.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린 이안이, 루시아를 일별하며 입을 열었다.
“물론 위험한 결정이지. 배를 구하는 것보다 무사히 내해를 건널 가능성이 훨씬 더 낮을 것이오. 하지만 마수들이 토벌되기를 손 놓고 기다리고 있을 수는 없소.”
잠시 무카파의 노란 눈을 바라본 그가 목소리를 낮췄다.
“머잖아 전쟁이 시작될 테니까.”
“……!?”
무카파의 두툼한 눈매가 꿈틀댔다. 이안이 아랑곳하지 않고 덧붙였다.
“그전에 본토로 돌아가 내 뜻에 따라줄 이들에게 소식을 전하려는 것이오. 섣불리 말려들지 않도록.”
물론 빨리 돌아가려는 가장 큰 이유는 따로 있었다.
전쟁이 시작되면 어떤 일들이 벌어질지 전혀 알 수 없지 않던가.
그리고 지금까지의 경험상, 그는 어떤 식으로든 끝내 그 한복판으로 빨려 들어가게 될 터였다.
그러니 전쟁이 시작되기 전에 백마법사와 관련된 퀘스트를 끝마쳐 둬야 했다.
아직은 정확히 어떤 보상이 기다리고 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지만. 어쨌건, 그가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살아남을 확률을 조금이라도 더 높여줄 테니까.
물론, 그가 아끼는 이들이 살아남을 확률 역시.
“저 너머의 마물들이 침공해 온다는 말씀입니까. 아니면….”
이안을 빤히 바라보던 무카파가, 이윽고 엄니가 위로 돋은 두툼한 입을 달싹였다.
“…저 너머에 정말, 히케드 전하께서 살아 계신 겁니까.”
“그 질문의 대답은, 듣지 않는 게 좋으실 거예요.”
넌지시 끼어든 건 루시아였다.
무카파의 시선을 받은 그녀가 씁쓸한 미소를 입가에 걸었다.
“무카파를 위해서 하는 말이에요.”
“…….”
물론 대답을 한 것이나 다름없는 말이기도 했다.
늘 깊고 차분하던 무카파의 노란 눈동자에 파문이 번졌다. 그가 설핏 벌리고 있던 입술을 간신히 달싹였다.
“…왜 황실에 알리지 않으시는 겁니까? 성자 대행.”
“더 많은 불필요한 희생을 낳을 뿐일 테니까.”
이안이 덤덤하게 대꾸했다. 가늘게 떨리는 무카파의 노란 눈을 돌아보며, 그가 말을 이었다.
“히케드 전하께선 저 너머에서, 벽이 무너진 이후에 해야 할 일들을 머릿속으로 그리고 또 그리며 버텨 오셨을 것이오.”
히케드가 그의 예상보다 훨씬 더 빠르게 병력을 집결시킬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하리라. 고민할 필요조차 없을 만큼의 계획이 이미 머릿속에 담겨있는 것이다.
“그러니 황실과 교단이 어떤 선제적인 대비를 하더라도, 그건 그저 전하께서 제국 땅을 밟는 시간을 조금 유예할 뿐이겠지.”
그 시간만큼의 죽음이 수반되리라는 것은, 깊이 생각할 필요도 없는 문제였다.
정의감 따윈 없었지만, 굳이 개입해 그 죽음들을 자신의 손으로 만들어 낼 생각 역시 없었다.
게다가 흑태자는 백성들이 자신을 따르지 않는다고 해서 학살을 자행할 자도 아니지 않던가.
지금까지 본 바론, 차라리 황실과 교단이 무모하고 무책임한 선택을 할 가능성이 더 컸다.
“…….”
무카파가 꾹 입을 다문 채 고개를 숙였다. 이 경험 많은 오크 전사의 머릿속에 무슨 생각들이 오가고 있을지는, 아마 본인만이 알고 있을 터였다.
“루 엔테르여….”
술잔을 움켜쥔 루시아의 입에서도 나지막한 탄식이 번졌다.
머잖아 전쟁이 일어나게 되리라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와 닿은 모양이었다. 심지어 이번에는 같은 제국인들 간의 전쟁이지 않던가.
물론 혼돈을 품은 자들이 여럿 섞여 있긴 하겠지만, 적어도 루시아는 그들을 타락자라 여기고 있지 않을 터였다.
…보고만 듣고 한숨 잘랬더니.
한숨을 삼킨 이안이, 베개에 머리를 대고 누우며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이 얘기를 깜빡했군.”
루시아가 한 박자 늦게 돌아보는 가운데, 이안이 덧붙였다.
“작년쯤에, 경이 이곳에 왔었다더군.”
“언니… 가요…?!”
그제야 루시아의 눈이 커졌다. 천장을 비스듬하게 응시하며, 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나세르와 미구엘까지. 심지어… 닐라도.”
“…닐라가, 살아있다고요?”
멍하니 눈을 끔뻑이던 루시아가 이윽고 되물었다. 이안이 지었던 것과 비슷한, 귀를 의심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어쨌건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던 음울한 생각들이 단박에 씻겨 나간 건 분명했다. 슬쩍 입꼬리를 말아 올린 이안이 내뱉었다.
“그래. 그렇다던데.”
“그래서요…? 왜 이 먼 곳까지 온 건데요? 미구엘과 닐라는 어쩌다 언니와 함께 온 거고요?”
“백금룡께서 미구엘을 찾아가셨다더군.”
천장에 시선을 고정한 채, 이안은 테사이아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덤덤하게 이어갔다.
미구엘을 전령으로 임명해 벽이 무너진 여파를 대비하게 했다는 것도. 모두가 그들이 살아있다고 믿고 있었다는 것까지, 전부.
“…다행이네요.”
숨소리도 내지 않고 경청하던 루시아가 이윽고 내뱉었다. 그녀의 입가에는 안도 섞인 미소가 절로 번지고 있었다.
“그러길 바라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희망 사항일 뿐이라고 생각했는데. 다들 정말 우리가 살아있으리라 믿어줬다니 말이에요.”
“그러니까 무사히 본토에 도착한다면, 변방부터 들르자.”
이안이 내뱉은 말에, 루시아의 눈이 다시 한번 커졌다.
“저도 같이요…?”
“사원에 있는 자들은 네가 무사히 돌아왔다는 걸 알지만, 경 쪽은 아직 모를 테니까. 믿음이 헛되지 않았다는 걸 확인시켜 주자고.”
고개를 살짝 숙여 루시아를 내려다본 이안이 덧붙였다.
“대신, 그 뒤엔 군말 없이 북부로 돌아가는 거다. 그리고 사원에서 나오지 않는 거야. 모든 혼돈이 지나갈 때까지. 알았어?”
“물론이죠…! 약속할게요.”
루시아가 목이 떨어질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해사한 미소를 얼굴 가득 머금은 채였다. 입꼬리를 꿈틀댄 이안이 다시 천장으로 시선을 돌렸다.
“좋아. 그럼 나는 이제 눈 좀 붙일게. 꼬박 이틀을 안 잤거든.”
“푹 쉬세요. 전 조용히 책만 읽고 있을게요.”
“술 적당히 마셔라. 가주와 저녁 식사를 함께하기로 했으니까.”
“네. 그럴게요. 깨워 드릴 테니, 염려 마시고요.”
…하여간 대답은 잘한다니까.
내심 읊조리며, 이안은 눈을 감았다. 그의 의식은 명상을 활성화할 필요도 없이 내면의 어둠 속으로 빠져들었다.
-…드디어 돌아왔군, 친구.
속삭임이 불현듯 뇌리를 간지럽힌 건, 체감상 아주 잠깐이 지나서였다.
하지만 눈을 뜬 이안은 어느새 해가 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곳곳에 타오르는 촛불이 만들어 낸 그림자가 천장에 무늬처럼 아른거리고 있었다.
“…….”
살짝 고개를 들어 책상에 앉아 팔을 베고 잠든 루시아를 일별한 이안이, 자신의 오른손 손등을 내려다보았다. 어느새 기어 올라온 요그가, 흑요석 같은 눈을 빛내며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오랜만에 만나서 바로 할 말은 아니지만. 피를 좀 마시게 해 주겠어? 이렇게 웃고 있지만, 사실 조금 위험한 상태라서 말이야.
풀썩 웃음 지은 이안이 상반신을 살짝 일으키며 읊조렸다.
“그래. 마셔.”
기다렸다는 듯 입을 쩍 벌린 요그가 그대로 그의 손등을 깨물었다. 동시에 혼돈의 정수가 옅은 울림을 토해냈다. 이안은 굳이 정수의 울림을 가라앉히지 않았다.
-이제야… 살아있다는 게 느껴지는군….
검붉은 피가 뭉근하게 번지는 가운데, 그 한복판에 머리를 파묻은 요그가 꼬리를 천천히 흔들었다.
“늘 함께 있었는데, 목소리는 오랜만에 듣네요. 요그.”
루시아의 잠긴 듯한 목소리가 이어진 건 그때였다. 식탁에 엎드려 있던 그녀가 부스스 상반신을 일으키며 기지개를 켰다.
-그러게. 루시. 물론 대화가 통하지 않는 것도 나름의 재미가 있긴 했지만 말이야.
요그가 키득대며 속삭였다. 그 와중에도 멈추지 않고 피를 빨아먹는 채였다.
“그동안 네가 모로를 돌보고 있었다던데.”
녀석을 내려다보던 이안이 툭 덧붙였다. 뭉근하게 번지는 핏물 사이, 조금씩 광택을 되찾아 가는 요그의 꼬리가 흔들렸다.
-그랬지. 그 녀석의 의태가 풀리면 귀찮은 일들이 잔뜩 생길 테니까. 물론 어떻게 될지 궁금하긴 했지만, 일단 그 녀석은 어쨌든-
“수고했다.”
이안이 덧붙이자, 요그의 넘실대던 꼬리가 순간 멈췄다.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뇌리를 간지럽힌 건 바로 그 직후였다.
-네게 그런 얘길 들을 줄이야. 기분이 썩 나쁘진 않네. 물론, 내가 수고한 건 사실이지만.
“그러는 김에 한 번만 더 수고해. 가서 모로에게도 방금 먹은 혼돈을 좀 나눠 줘. 품은 혼돈을 더 잘 숨길 수는 없는지도 물어봐 주고.”
이안이 덧붙인 말에, 요그가 조금 더 선명하게 키득댔다.
-기꺼이 그러지, 친구. 기꺼이….
녀석이 다시 피를 마시는 데에 몰두하는 사이, 이안이 입가의 침 자국을 닦는 루시아를 돌아보았다.
“무카파는 문 앞에 있나?”
“아마 그럴 거예요. 깊이 생각할 게 있어도 나가서 서 있더라고요.”
고개를 끄덕인 이안이 덧붙였다.
“슬슬 준비해 둬. 아마 곧 시종이 올 테니까.”
“…드디어 이안 님의 연인을 뵙게 되겠네요.”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일어선 루시아가, 손바닥으로 떡진 머리를 다듬으며 덧붙였다.
“사실 엄청 궁금했거든요. 언니와 나세르에게 들었던 이야기와 여기서 들은 가주에 대한 이야기가 너무 달라서요.”
“여기선 뭐라고 했는데?”
이안이 툭 덧붙인 말에, 루시아의 손이 멈칫했다.
“어, 그게… 무서운 분이 시라고요….”
들은 것보다 순화해서 말 한 게 분명했다. 물론, 디아나에게 들었으리라.
“경에게 들은 이야기가 맞아. 여기선 사정상 어쩔 수 없이 그러는 거니까, 다소 불쾌하더라도 너무 기분 나빠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아하… 역시. 저도 뭔가 있을 거라고 짐작은 했어요. 사실….”
슬쩍 주위를 곁눈질한 루시아가 목소리를 낮췄다.
“여긴, 귀쟁이 소굴이잖아요?”
이안이 풀썩 웃음을 터뜨리게 하기에는 충분했다. 마주 미소 지으며 눌린 머리를 다듬은 루시아가 덧붙였다.
“염려 마세요. 이안 님과 언니의 친우이신데, 당연히 제가 이해해야죠. 게다가 어차피 우리는 며칠 뒤면 떠날 거잖아요.”
“글쎄….”
비로소 입을 떼는 요그를 내려다보며, 이안이 어깨를 으쓱였다.
“아마도 본토까지 함께 가게 될 것 같은데.”
“…네?”
루시아가 고개를 갸웃하는 가운데, 요그가 이안의 손등에 기다란 핏자국을 남기며 밖으로 기어갔다.
녀석의 푸석푸석한 비늘에는 어느새 다시 윤기가 흐르고 있었다.
-나도 그 원로 귀쟁이를 보고 싶으니까 기다려 줘. 뭐, 버려두고 가도 알아서 따라갈 거긴 하지만.
속삭이며 침대 밖으로 떨어져 내린 녀석이 미끄러지듯 마루 틈으로 사라졌다. 연기로 변하지 않는 건 요정들을 의식해서 이리라.
“우리와 함께 가실 거라고요?”
자연스럽게 바닥을 내려다보던 루시아가 이내 덧붙였다. 침대보에 손등을 문질러 닦으며, 이안이 어깨를 대충 까딱였다.
“뭐, 그럴 생각 같던데.”
“이안 님의 친구분이시니 놀라운 일은 아니지만…. 말리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 가문을 다스리셔야 하잖아요. 게다가 위험한 상황도 잔뜩 기다리고 있겠고요.”
“나도 처음엔 그럴 생각이었는데….”
입맛을 다신 이안이 덧붙였다.
“원탁 의회에 복수하고 싶은 눈치여서, 말릴 수가 없더라고.”
“원탁 의회….”
읊조리는 루시아의 눈매가 절로 가늘어졌다.
“그래. 테사의 진짜 원수는 그놈들이지. 게다가 이번엔 샬롯까지 거의 죽일 뻔했고.”
“…이안 님이 그자들의 계획을 완전히 망가뜨렸다고 들었었는데. 다시 세력을 회복한 거군요.”
“그런 것 같더군. 균형을 한 번 더 무너뜨리면, 그때는 정말 돌이킬 수 없게 되겠지만. 어쨌든-”
덧붙이던 이안이 문득 입을 다물었다. 그의 시선이 굳게 닫힌 대문으로 돌아갈 찰나.
“성자 대행. 가주 대리께서 찾아오셨습니다.”
문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무카파의 굵은 목소리가 번졌다.
루시아와 눈빛을 교환한 이안이 선선히 내뱉었다.
“들어 와.”
무카파가 닫힌 문을 열었다.
그 너머로 백금 발 요정의 모습이 드러났다. 곱게 갠 옷을 양손으로 받쳐 든 그녀는, 물론 디아나였다.
“가주께서 갈아입으실 옷을 보내셨습니다. 준비를 끝내시는 대로… 식당으로 모시겠습니다….”
장내로 들어서며, 그녀가 퀭한 얼굴만큼이나 생기 없는 목소리로 내뱉었다. 그녀가 가지고 온 정복을 침상에 고이 내려놓는 사이, 무카파가 다시 문을 닫았다.
“이안…!”
디아나의 얼굴이 허물어지듯 울상으로 변한 건 바로 그 직후였다.
“제발… 가주를 좀 말려 줘…!”
이안의 바짓단이라도 붙잡을 듯한 절박한 태도였다.
아, 그래. 이미 이야기를 다 들었군. 내심 헛웃음을 흘리며, 이안은 별다른 대답 없이 걸치고 있던 상의만 훌쩍 벗어 버렸다.
검은색의 정복 상의를 집어 드는 그를 올려다보며, 디아나가 호소하듯 말을 이었다.
“또 가문을 떠날 거라고 했다고. 깊은 숲의 밀명을 받았다면서 말이야…! 네가 말려주지 않으면, 내가 이대로 영락없이 계속 가주 업무를 대리하게-”
“루시에게 궐련을 줬더군.”
“-생겼단 말이. …응?”
이안이 정복 상의를 걸치며 툭 끼어든 말에, 디아나가 한 박자 늦게 굳어졌다.
그를 올려다보며 입을 뻐끔댄 그녀의 시선이, 옆에 선 루시아 쪽으로 돌아갔다. 혀로 입술을 축인 루시아가 재빨리 읊조렸다.
“제가 달라고 한 거라고… 제대로 말씀드리긴 했는데요….”
“그런다고 진짜 주는 건 또 다른 문제긴 하지.”
이안이 단추를 잠그며 덧붙이자, 디아나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녀의 입술 사이에서 땅이 꺼질 듯한 한숨이 번지는 사이.
“받아들여. 너희 가주는 정말 깊은 숲의 대리인 자격을 얻었으니까.”
이안이 신경도 쓰지 않고 바지까지 갈아입으며 덧붙였다. 물론 평소와 달리, 디아나는 감은 눈조차 뜨지 않았다. 몸에 착 감기는 정복의 매무새를 가다듬으며, 이안이 말을 이었다.
“게다가 억지로 못 가게 막으면 그 화가 고스란히 너에게 향할 텐데. 그게 더 고달프지 않겠어?”
“하… 시발….”
디아나의 입술 사이에서 나지막한 탄식이 번졌다. 체념의 탄식일 터였다. 낮게 웃음 지은 이안이 턱을 까딱였다.
“알아들었으면 일어서. 나도 슬슬 출출하던 참이니까. 식사나 하자고.”
아랫입술을 질근대던 디아나가, 이윽고 되살아난 망자처럼 비척대며 몸을 일으켰다.
“가시죠…. 가주께서… 기다리십니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