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Dark Fantasy Villain RAW novel - Chapter 544
#544화
“듣고 계셨군요. 그러니 분노를 갈무리하세요. 경. 아직은, 때가 아닙니다.”
사제가 왼팔을 다시 아래로 늘어뜨리며 내뱉었다. 두건 아래로 일렁이는 검붉은 안광이 부드러운 호선을 그렸다.
“우리는 이제 주의 곁으로 향할 겁니다. 아주 천천히. 그리고 신중하고 은밀하게, 모든 사도가 그분의 곁에 모이게 될 겁니다. 물론, 걱정은 마세요.”
사제의 시선이 계곡 능선 너머, 저 먼 남쪽 하늘로 돌아갔다.
“주께서 길을 열어 주실 테니. 바로… 이렇게요.”
그녀의 말에 화답이라도 하듯, 자욱한 먹구름이 한순간 번쩍였다.
검붉은 벼락이 굵은 빗금을 그리며 지상으로 떨어졌다.
쿠르릉-!
천둥소리가 뒤늦게 울려 퍼지는 가운데, 빙긋 미소 지은 사제가 다시금 왼팔을 옆으로 내뻗었다.
보옥이 아래로 향하도록 손바닥을 활짝 펼친 채였다.
스아아…
사제의 눈 사이에서, 세로로 길게 찢어진 세 번째 안광이 피어났다.
파충류의 그것처럼 길게 찢어진 동공이 섬뜩하게 일렁였다. 보옥이 붉게 빛나고, 검붉은 진언이 그 아래의 공간에 새겨지기 시작한 건 바로 그 직후였다.
쩍… 쩌적…!
뒤이어 검고 끈적한 땅 아래로 거미줄 같은 균열이 검붉게 물들며 번져나갔다. 균열의 빛이 짙어질수록, 보옥을 움켜쥔 사제의 손끝에서도 검은 손톱이 칼날처럼 자라나고 있었다. 손가락 역시 끝에서부터 타들어 가듯 검게 물들었다. 손등을 타고 비늘이 조금씩 돋아났다.
쿠드드드득- 솨아아아아-
점점 더 선명하게 일렁이던 균열의 빛이 한순간 녹아내리듯 잦아든 건, 사제의 손이 손목까지 검게 변이되었을 때쯤이었다. 불길한 적막이 내려앉은 것도 잠시.
쿠구구구구구-
일대가 떨리듯 진동하기 시작했다. 자욱한 먹구름이 사방으로 흩어지듯 넘실대고, 마경의 말라붙은 나무와 흙에서 검은 가루가 먼지처럼 흩날렸다.
마경이 무너지고 있었다.
“……”
사제는 진동 한복판에서도 오연하게 선 채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옆으로 내뻗은 보옥에 맺힌 마력이 동심원의 파문을 그리며 흩어진 건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불길한 진언이 단숨에 흩어지고, 검게 물든 그녀의 손이 껍질이 벗겨지듯 재가 되어 흩날렸다.
그 아래에서 흉터 하나 없이 새하얀 손이 본모습을 드러냈다.
보옥을 움켜쥐며 팔을 늘어뜨린 사제가, 세 번째 눈을 감으며 입을 열었다.
“한자리에 모인 우리는, 녹슨 감옥을 부수는 칼날이 될 겁니다. 그리고 주께서 다시 날아오르시는 그날, 우리의 믿음과 인내는 보상받게 될 것입니다.”
“보상은… 바라지 않소….”
저주파 섞인 굵고 낮은 목소리가 동굴을 울리며 번졌다.
사제가 뒤편, 동굴 한복판에 선 흑기사의 붉은 안광을 돌아보았다.
“주께서 필요로 하신다면… 기꺼이 이 비루한 목숨이라도 바칠지니….”
나지막이 읊조리며, 그가 동굴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진동이 이어지고 있음에도 느껴지지도 않는듯한 단단한 걸음걸이였다.
“주께서 다시 날아오르시어, 제국의 저 역겨운 배덕자들과 위선자들을 심판하실 수 있길 바랄 뿐이오….”
흑기사의 목소리에 실린 저주파가 잦아들었다. 동굴 밖으로 나선 순간, 그의 검붉은 안광 역시 촛불이 꺼지듯 사그라들었다. 전신을 뒤덮은 어둠은 갑옷의 틈 사이로 스멀스멀 스며들고 있었다.
“과연… 그분께서 직접 거두신 사도다우시군요… 경… 아주 고결하십니다….”
그를 바라보는 사제의 안광이 부드럽게 휘어졌다. 그녀의 안광 역시 빛을 잃고 잦아들고 있었다.
쿠구구구구….
뒤이어 진동이 잦아들었다. 비로소 바위에서 훌쩍 뛰어내린 사제가, 다가오는 기사를 돌아보았다.
“가시죠. 주께서 이르신 대로 신중하고 조심스럽게요. 먼 길이 되겠지만….”
“그러지….”
승천을 꿈꾸던 고대용을 섬기는 기사와 사제가 계곡 아래로 걸음을 옮겼다. 곧 저 먼 하늘이 또 한 번 번쩍이고, 검붉은 벼락이 세상을 가르며 떨어졌다.
쿠르릉-!
그들의 앞길을 인도하듯이.
***
다각- 다각-
지붕 달린 이두 마차. 그리고 각자의 말에 탄 호위 기사 브레넌 경과 그의 종자가, 안개가 자욱하게 깔린 관도를 나아갔다.
“워워….”
겁먹은 숨소리를 내는 말들을 연신 다독이는 채였다.
아침부터 낮게 깔리기 시작한 안개는 오후가 되어서도 흩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스멀스멀 짙어져 시야를 방해할 정도가 됐다.
갑옷 속이 끈적끈적하게 불쾌해진 건 덤이었다.
브래넌 경은 이 안개가 비단 남부의 덥고 습한 기후 때문만은 아니리라 추측했다. 하늘의 먹구름이 날이 갈수록 불길하게 짙어지고 있지 않던가.
항간의 소문처럼, 검은 벽이 무너지며 온 세상에 광기와 혼돈을 흩뿌린 게 분명했다.
“…….”
하지만 브레넌 경과 종자의 눈빛에 옅은 긴장이 감도는 건 이 안개 때문만이 아니었다.
저 뒤편에 일련의 기수들이 그들을 서서히 따라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안개 탓에, 그들의 존재를 깨달았을 때는 이미 제법 가까워진 상태였다.
평소라면 그다지 경계하지 않았겠지만, 여긴 가장 가까운 도시도 이틀 거리는 떨어진 외곽이었다.
서쪽에 이어진 도렌 강을 건너면, 강도가 부업인 군도 인들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게 된다지 않던가.
“…오크군요.”
그런 브레넌 경의 걱정은, 안개에 드러난 실루엣이 선명해진 순간 씻은 듯이 사라졌다. 종자의 말처럼 오크였기 때문이다.
우락부락한 덩치와 험악한 얼굴. 심지어 중무장하고 있어, 덩치에 어울리지 않는 조랑말을 타고 있는데도 우스워 보이지 않았지만.
적어도 오크가 강도로 돌변할 일은 없었기 때문이다. 일행이 강도로 돌변한다면 반대로 자신들을 도와주려 할 터였다.
귀족들이 가장 신뢰하는 건 가족이 아니라 오크 경호병이라는 우스갯소리도 있지 않던가.
“요정…?”
브레넌의 눈매가 설핏 가늘어진 건 바로 그 직후였다.
오크의 뒤를 나란히 따르는 두 백마 탄 기수들의 모습도 선명해졌기 때문이었다.
단연 눈에 띄는 건 흰 망토를 걸친 은발의 요정이었다. 오만하고 차가워 보이는 아름다운 얼굴은, 주위의 안개와 어우러져 신비롭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물론 나란히 말에 탄 여인도 독특하긴 마찬가지였다. 짙은 녹색의 두건을 눌러쓰고 짐승 형태의 가면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으니까.
은발 요정의 시종일 터였다.
오크의 경호를 받는 요정은 흔히 볼 수 있는 장면이 아니었지만, 그래서 더더욱 저 요정의 신분이 범상치 않으리라 확신할 수 있었다.
“동행을 청해 보는 게 어떠시겠습니까, 나리?”
종자가 목소리를 낮춰 속삭였다. 브레넌의 눈매가 조금 더 가늘어졌다. 그가 남부에 온 건, 모시는 가문의 둘째 공자를 호위하기 위해서였다. 시답지 않은 유랑이 목적이라, 무장도 간소했다.
둘째 공자가 본토로 돌아가겠다고 우기지 않았다면, 단 한 번도 가 본 적 없는 우범 지역에는 결코 발을 들이지 않았을 터였다.
“글쎄….”
하지만 브레넌은 선뜻 대답하지 않았다. 요정과는 웬만해선 엮이지 않는 편이 좋았다. 재수 없는 건 둘째 치고 못 믿을 족속들이 아니던가. 빚을 진다면 어떻게든 받아내려 할 게 분명했다. 이런 상황이 아니라면 갈등조차 하지 않았을 터였다.
“…우선, 길을 열어 주도록 하지.”
그 사이에도 오크를 필두로 한 요정 무리는 빠르게 가까워지고 있었다. 브레넌의 시선을 받은 마부가 마차를 길 가장자리로 몰았다. 브레넌이 마차를 따라 이동하고 그의 종자가 뒤로 물러나는 가운데.
다각- 다각-
조랑말에 탄 회색 오크가 그들의 곁을 지나치기 시작했다.
마물을 떠올리게 하는 험악한 얼굴이었지만, 브레넌과 눈이 마주친 순간 살짝 고개를 까딱여 보였다.
길을 양보해 준 것에 대한 감사의 표시가 분명했다.
“…….”
“…….”
물론 뒤따르는 은발의 요정과 가면 쓴 시종은 그들 쪽으로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고고하게 살짝 고개를 치켜들고 눈을 내리깐 채, 그들이 보이지도 않는 것처럼 지나쳐 갈 뿐이었다.
신이 아주 공들여 빚은 듯한 옆얼굴을 바라보며 잠시 갈등하던 브레넌의 시선이, 이내 그 뒤편으로 돌아갔다.
다각- 다각-
나란히 걷는 둘에 가려져 있던 또 다른 기수의 모습이 드러났기 때문이었다. 범상치 않은 검은 마갑을 전신에 걸친 흑마에 타고, 검은색처럼 보이는 짙은 남색의 망토를 늘어뜨린 검은 머리칼의 기사였다.
“…….”
브레넌이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한눈에 이 자가 범상치 않은 실력자라는 사실을 깨달아서였다.
고삐를 쥔 거무스름한 판금 장갑과 팔목 보호대는 곳곳이 찌그러지고 흠집이 가득했다.
망토 사이로 드러난 갑옷 역시 미늘이 듬성듬성 떨어져 나간 모양새였다. 아주 격렬한 전투를 여러 번 치른 게 분명했다.
하지만 그런데도 무표정한 얼굴에는 흉터 하나 보이지 않았다. 서늘하게 가라앉은 눈빛 역시 일말의 감정도 담기지 않은 것처럼 무심했다.
브레넌이 느끼는 이 괴리감이야말로, 검은 머리의 기사가 엄청난 실력자라는 증거나 다름없었다.
하긴. 애초에 요정이 인간 기사에게 등을 맡기는 것부터가 범상치 않은 일이었다.
“…잠시, 실례 좀 해도 되겠소?”
브레넌이 입을 연 건, 검은 머리의 기사가 그의 곁을 지나친 직후였다. 자신이 판단한 만큼의 실력자라면, 야만인과 범죄자가 득시글대는 도시에서도 큰 도움이 되리라는 결론에 다다른 것이다.
“……?”
한 박자 늦게, 검은 머리의 기사가 고개를 돌렸다. 앞서간 요정의 귀가 쫑긋대는 것을 눈치채지 못 한 브레넌이 입을 열었다.
“나는 중앙의 챔버스 자작을 섬기는 기사, 브레넨 터너라고 하오. 둘째 공작을 모시고 룬 카티스로 향하는 길이오.”
“그러시군. 반갑소.”
검은 머리 기사가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신분을 밝힐 생각이 없는 게 분명했다. 상관이 동행중이니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물론, 브레넌은 그런 걸 따질만한 마음의 여유도 없었다. 저 의욕 없이 서늘한 검은 눈을 마주한 것만으로도, 한순간 영문 모를 긴장감에 몸이 굳어버린 것이다.
“혹 목적지가 같거나 결례가 되지 않는다면… 도시까지 동행을 청해도 되겠소…?”
마른침을 삼킨 브레넌이 내색하지 않으려 애쓰며 덧붙였다.
그를 가만히 응시하던 기사가, 요정 쪽으로는 눈길도 주지 않은 채 내뱉었다.
“미안하지만, 그럴 수는 없겠소. 마님께선 그 누구와도 동행할 계획이 없으시니.”
“…그러시군.”
멈칫한 브레넌이 이내 읊조렸다. 다소 무례할 정도로 단호한 말이었지만, 이상하게 화도 나지 않았다. 한숨을 삼킨 그가 덧붙였다.
“그렇다면… 실례했소.”
“…저 뒤, 한 시간쯤 거리에 상단 행렬이 따라오고 있소.”
고저 없는 목소리가 이어진 건 그때였다. 브레넌의 시선을 받은 기사가, 무표정한 얼굴로 덧붙였다.
“그들이라면 아마도, 기꺼이 동행할 것이오.”
브레넌은 그제야 이들이 이런 식으로 계속해서 사람들을 앞지른 게 처음이 아니리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긴. 이들은 넷 다 말에 타고 있었다. 도보로 이동하거나 마차가 섞인 이들보다 빠를 수밖에 없으리라.
다각- 다각-
시선을 돌린 기사가 그대로 브레넌을 남겨둔 채 나아갔다.
요정을 비롯한 그의 일행들은 이동을 늦추지 않아서, 이미 저 앞에 나아가고 있었다.
“…조언 고맙소.”
멀어지는 뒷모습을 바라보던 브레넌이 이윽고 내뱉었다.
기사의 망토 위로 비죽 튀어나온 대검의 자루를 뒤늦게 눈에 담는 채였다.
기사는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오른손만 살짝 흔들어 인사했다.
‘날 알아본 건 줄 알았네.’
검은 머리의 기사, 이안이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다는 사실까지는 알 도리가 없을 터였다.
이안 일행은 북서쪽으로 이어진 관도를 따라 이동했다.
때때로 같은 방향으로 이동 중인 이들을 앞지르게 된 건, 깊은 숲 북쪽을 지나친 뒤부터였다.
그리고 서쪽으로 나아갈수록 점점 더 자주 지나치는 중이었다.
“속도를 줄여라. 천천히 가자.”
뒤편에서 이어지는 나지막한 목소리에, 이안은 슬며시 한쪽 입술을 꿈틀댔다.
방금 저 기사가, 그들에게 처음으로 말을 건 사람이었다.
지금까진 아무도 그들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일행의 면면이 워낙 개성이 넘치는 덕분일 터였다.
어쨌건, 덕분에 이안은 상대적으로 훨씬 더 편하게 여정을 이어가고 있었다.
심지어 테사이아는 주목을 받는 것을 즐기는 편이니, 상부상조인 셈이기도 했다.
“좀 아까 그 사람들, 잠깐 동행해도 괜찮지 않았을까요?”
루시아가 입을 연 건 한참이 지나고 나서였다. 가면을 정수리에 얹으며, 그녀가 이안을 돌아보았다.
“이야기만 좀 얻어듣고, 다른 무리가 나타나면 그쪽으로 넘겨주면 되잖아요.”
“글쎄. 별 도움 안 됐을 거야.”
이안이 덤덤하게 내뱉었다.
“아는 것도 별로 없고. 기사의 눈에 걱정이 가득하더군.”
“맞아. 무장 상태만 봐도 뻔해. 한량 같은 귀족을 보필하러 따라온 거겠지.”
테사이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끼어들었다.
“정작 그 둘째 공작이란 놈은 마차 안에서 코 골고 자고 있던데 말야.”
“상황을 정확히 안다면, 그렇게 속 편하게 잘 순 없었겠지.”
이안까지 동의하듯 첨언하자, 루시아도 고개를 주억거렸다.
“룬 카티스에 도착하기 전에 내해나 다른 도시들의 상황을 좀 미리 알아두고 싶었는데. 아무래도 도착할 때까지 그럴 일은 없을 것 같네요.”
“뭐, 적어도 해안가 쪽으로 이어진 길이 통제 중이라는 건 확실히 알겠어.”
“…어떻게 아신 건데요?”
테사이아가 넌지시 덧붙인 말에, 루시아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테사이아가 망토를 두른 어깨를 으쓱였다.
“여긴 룬 카티스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이 아니야. 우린 타헤나에서 올라왔으니 이쪽으로 가는 것뿐이지. 그런데도 이쪽으로 돌아가는 사람이 이렇게 많다는 건,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지.”
“통찰력이 대단하세요, 언니.”
“이 정도 가지고 뭘.”
테사이아가 말과 달리 턱 끝을 거만하게 치켜들었다. 루시아의 감탄이 흡족한 듯 입꼬리를 말아 올리는 채였다.
루시아가 혼잣말처럼 덧붙인 건 몇 초 지나지 않아서였다.
“혹시 모를 사고를 예방하려는 조치일까요. 아니면 해안가에도 뭔가 문제가 생긴 걸까요.”
“글쎄. 그건 모르지. 하지만 어쨌건… 이 안개는 바다와 관련이 있는 것 같은데.”
어깨를 으쓱이며 내뱉은 테사이아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입가에 걸었다.
“서쪽으로 가면 강이 있긴 하지만, 이건 딱 봐도 평범한 물안개는 아니잖아. 게다가 짠 내도 섞여 있고.”
“…그건 그래요. 바다가 바로 옆에 있는 것도 아닐 텐데 말이에요.”
루시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테사이아가 손가락으로 턱을 어루만지며 말을 이었다.
“어쨌든 내해까지 이어져 있으니까. 강에 도착하면 물을 한 모금 마셔 봐야겠네. 어쩌면 짤지도 모르잖아.”
“창의적인 확인 방법이에요, 언니…!”
“내가 무슨 말만 하면 놀라는구나, 루시. 듣기도 보기도 좋으니까 계속 그렇게 하도록 해.”
“진심이지만, 그럴게요.”
…루시아가 오히려 놀아주는 것 같은데.
내심 웃음 지으면서도, 이안은 이어지는 대화를 한 귀로 흘렸다.
루시아와 테사이아는 온갖 주제로 틈만 나면 떠들어댔다. 덕분에 이안은 굳이 입을 열 필요가 없어서, 마음껏 생각에 잠길 수 있었다. 게다가 종종 생각지도 못한 부분을 상기시켜 주기도 했다.
방금도 그런 경우 중 하나였다.
‘강으로도 영향력을 퍼뜨릴 수 있으면, 시간이 지날수록 마물들이 늘어났겠네. 이동이 어려워졌겠어.’
게임에서 있었을 법한 상황들을 떠올릴 수 있었으니까.
최근에서야 생각하게 된 거지만, 부키키아는 검은 땅에서 죽일 수 없는 보스였던 것 같았다.
애초에 놈을 만나러 가는 것조차 불가능했을 터였다. 그런 바다 괴물들이 득시글거리는 바다를 고작 몇 척의 함선만으로 돌파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제아무리 고인 물이라도 발 디딜 공간이 사라지는 상황에서까지 대마족을 상대할 수는 없었으리라.
‘애초에 본토와 남부를 분리하는 역할이었겠지. 시간이 지나면, 각 지역도.’
게임에서도 놈을 토벌하는 건, 벽이 무너진 이후에서야 가능해졌을 터였다. 퀘스트가 어떤 방식으로 진행될지는 알 수 없었지만, 현실이 된 지금도 그다지 크게 다르지 않은 흐름으로 이어지게 되리라.
물론 그걸 미리 알아내려 애쓸 필요는 없었다.
일찍 정보를 얻는다면 물론 유용하겠지만. 아니라도 룬 카티스에 도착하고 나면 어렵지 않게 단서를 얻을 수 있을 테니까.
“-그러면서 꼬리를 잘라 버리더라니까. 우리 야옹이는 착하기도 하지. 나라면 꼬리가 아니라 목을… 어머?”
이안이 이런저런 생각을 이어가는 와중에도 재잘재잘 떠들어대던 테사이아가, 문득 짧은 탄성을 흘렸다. 안개가 자욱한 관도 저 너머로 시선을 돌리는 채였다. 엉겁결에 같은 방향을 돌아본 테사이아가 고개를 기울였다.
“왜 그러세요, 언니?”
“흐응… 아직 너한테는 안 느껴지나 보네. 하긴. 꽤 멀긴 하니까….”
눈을 가늘게 뜬 채 읊조린 테사이아가, 정면으로 턱을 까딱이며 덧붙였다.
“저 앞에서 뭔가 일어나고 있어. 싸움이 벌어진 것 같은데….”
“싸움이요…?”
루시아의 미간이 좁아졌다. 묵묵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무카파도 뒤를 돌아보는 가운데.
“적어도 사람들끼리 싸우는 건 아닌 게 분명해. 사람이라면, 타락자겠지.”
이안이 루시아의 옆으로 나서며 내뱉었다. 그는 안개 저 너머에서 번지는 혼돈의 파장을 느낄 수 있었다.
“먼저 가 볼 테니까, 너희는 천천히들 따라서 와.”
테사이아와 루시아를 돌아보며 내뱉은 그가, 마지막으로 무카파와 눈을 마주치며 덧붙였다.
“괜한 짓들 하지 않게 잘 지켜주고.”
“알겠습니다. 귀빈.”
무카파가 고개를 끄덕이자, 이안이 고삐를 가볍게 흔들었다.
모로가 뿜어져 나가듯 달려 나간 건 거의 동시였다.
“…너무 흥분하지 마. 그러다 네 본모습을 들키면 피곤해진다고.”
녀석의 목덜미를 손가락으로 두드린 이안이 내뱉었다.
모로가 대답하듯 콧김을 뿜었다. 물론, 달리는 속도는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한쪽 입꼬리를 치켜들면서도, 이안은 넘실대는 안개 너머로 시선을 돌렸다.
“-을 유지해!”
“물러나지 마! 도망치면 다 죽는 거야!”
어느새 바람 소리 사이로 흐릿한 고함과 비명, 그리고 기분 나쁜 괴성이 파고들고 있었다. 혼돈의 파장도 조금씩 선명해졌다.
‘…그래. 한동안 편하게 다니긴 했지.’
내심 읊조리며 등자를 밟고 선 이안이, 오른쪽 어깨 뒤에 비죽 솟은 대검 자루를 움켜쥐었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