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Dark Fantasy Villain RAW novel - Chapter 548
#548화
“……!”
자말이 눈을 부릅뜨는 가운데, 이안이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 생각에도 그래. 습격한 배들의 승객을 그냥 전부 잡아먹기만 한 게 아닌 거야. 영향력을 퍼뜨릴 첨병으로 살뜰하게 써먹은 거지.”
산호 가지를 다시 좌석 아래에 비스듬하게 기대 놓은 그가 루시아와 테사이아를 바라보았다.
“이미, 예상하고 있었나 보네.”
“아까 성자 대행께서 처리하신 망자들을 살펴봤거든요.”
루시아와 눈빛을 교환하며 대답한 테사이아가, 자말을 슬쩍 일별하고는 말을 이었다.
“짠 내가 그렇게 나는 데 모를 수가 없었죠. 내가 보기에도 그것들은 대부분 바다에서 온 거였어요.”
그 난장판을 언제 또 살폈담.
내심 웃음 지으며 포도주를 한 모금 마신 이안이 내뱉었다.
“아닌 것도 있었단 말씀이시군.”
“마물들도 섞여 있었잖아요? 상륙한 뒤에 세력을 불려 나간 거겠죠. 그러다가, 마침내 관도에 닿은 거고요.”
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뻔한 그림이었다. 애초에 그가 부숴 버린 식인 산호의 역할이 그런 것이었을 테니까.
“하지만… 부키키아가 지상에까지 그 마수를 뻗칠 수 있을 줄은 몰랐어요.”
미간을 살짝 찌푸리고 있던 루시아가 읊조린 건 그때였다.
“왜 검은 땅에서는 그러지 않았던 걸까요. 고립된 바다 인근은, 아주 깨끗했잖아요.”
자말의 눈이 커지게 만들기에 충분한 말이기도 했다.
이안이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뇌리로 요그의 웃음소리가 번졌다.
-그런 당연한 걸 묻다니… 취한 모양이구나. 루시.
멈칫했던 루시아가, 이내 스스로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거긴 이미 모든 곳이 마경이었죠. 굳이 더 세력을 확장할 필요도 없을 만큼, 권역을 공고히 다져놓은 상태이기도 했겠고요.”
“그래. 게다가 거기선 통하지도 않았을 거야.”
굳어진 자말을 흘깃 일별하며 대답한 이안이, 대수롭지 않게 덧붙였다.
“숫자만 많지, 사실 그다지 대단할 것도 없는 놈들이었으니까.”
“…그래도 걱정이네요. 검은 땅 기준에서는 그럴지도 모르지만, 여기선 아닐 테니까요.”
“글쎄….”
손에 든 술잔을 천천히 빙빙 돌리며, 이안이 읊조렸다.
“정규군이라면 충분히 상대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상태 이상을 불러일으킬 만한 악취와 오염된 마력을 뿜어내긴 했지만. 어쨌건 익사체들의 본질은 촉수가 달린 조금 더 강한 구울에 불과했다. 심지어 상단 경호병들조차 놈들을 상대로 제법 잘 버티지 않았던가.
루시아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런 거면 좋겠네요. 그 첨병들이 이곳에만 상륙한 건 아닐 것 같거든요.”
“그렇겠지.”
대답한 건 테사이아였다. 기특하다는 듯 루시아를 돌아보며, 그녀가 느긋하게 말을 이었다.
“하지만 웬만한 곳에는 다 멀지 않은 곳에 도시가 있어. 웬만해선, 걷잡을 수 없을 만큼 세력이 불어나기 전에 토벌될 거야.”
남부는 본토 못지 않게 광활했지만, 사막과 황야, 밀림이 차지하는 비중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그런 지역들을 이종족에게 양보한 건, 실은 그저 인간이 살기에 적합하지 않아서인지도 몰랐다.
어쨌든 남부의 인류 문명은, 남부 중앙과 내해의 해안가를 따라 이어지는 북쪽에 집중되어 있었다.
“뭐, 그 산호를 처리하는 건 다른 문제겠지만.”
“어렵지 않게 방법을 찾을 것이오.”
테사이아의 첨언에, 이안이 담담하게 내뱉었다.
물론 평범한 인간은 산호가 뿜어내는 수증기에 다가가기만 해도 혼돈에 오염되고 말겠지만.
성전사 정도만 되어도 충분히 저항할 수 있을 테고, 그게 아니라도 다가가지 않고 처리할 방법 역시 얼마든지 있을 터였다.
“뭐, 알아서들 할 문제긴 하죠.”
고개를 까딱인 테사이아가 술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이안도 동의하듯 포도주를 마시는 사이.
“외람된 말씀입니다만….”
셋의 대화를 눈을 부릅뜬 채 듣고 있던 자말이 비로소 입술을 달싹였다.
“부키키아… 라니요? 부키키아는 옛 대마족의 이름이 아닙니까? 아까 우리가 상대한 괴물들이, 그 대마족이 보낸 첨병이었다고요?”
테사이아와 루시아가 눈동자만 굴려 이안을 바라보는 가운데,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렇소. 제대로 이해하셨군.”
“…….”
멈칫한 자말의 눈매가 서서히 일그러졌다.
“…그럼 정말 검은 벽 너머에 옛 대마족들이 그대로 살아 있었다는 말씀이십니까? 막연하게 알려졌던 소문대로요?”
“뭐… 전부는 아니지만.”
이안은 이번에도 짧게 대답했다.
그중 둘을 자신이 죽였다는 얘기는, 굳이 할 필요 없는 부분이었다. 자말의 얼굴이 완전히 일그러질 찰나.
“북부인 경호병이, 식사를 가지고 왔습니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무카파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이안의 시선을 받은 테사이아가 내뱉었다.
“들어오라고 해요.”
무카파가 문을 열었다. 커다란 쟁반을 든 레긴의 모습이 드러났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구운 고기와 포크, 나이프가 놓여 있었다.
“좌석 아래에 간이 식탁이 있을 겁니다.”
마차 난간에 올라선 레긴이 내뱉었다. 덩치와 험악한 인상에 어울리지 않는, 아주 정중한 태도였다.
고개를 숙인 루시아가 좌석 아래에서 나무로 만든 간이 협탁을 꺼내 가운데에 놓았다.
“…감사합니다.”
레긴이 그 위에 손에 받쳐 든 커다란 쟁반을 내려놓았다. 김이 모락모락 번지는 커다란 고깃덩이.
포크와 나이프도 사람 숫자에 맞게 가져온 채였다. 앞접시는 없었지만, 쟁반이 충분히 넓었다.
혈을 기울여 구운 게 분명한 고기를 내려다보며, 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잘 먹을게.”
“필요한 게 더 있으십니까? 술을 더 가져올까요?”
“당장은 충분해. 필요한 게 있다면 찾도록 하지. 출출할 텐데, 가서 쉬도록 해.”
“예. …대전사.”
고개를 숙이며 목소리를 낮춰 대답한 레긴이 뒤로 물러났다. 정작 고용주인 자말 쪽으로는 눈길 한 번 주지 않는 채였다.
이안의 시선이 무카파에게로 향한 건 바로 그 직후였다.
“들어와. 함께 먹자고.”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귀빈.”
무카파가 단박에 고개를 저었다.
그럴 줄 알았다. 내심 읊조리며 낮게 웃음 지은 이안이, 레긴을 돌아보았다.
“이 친구에게도 고기 한 덩이 구워다 주겠어? 보다시피, 한 고집 하는 성격이라.”
“예. 준비하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레긴이 곧바로 몸을 돌렸다. 곧바로 무카파가 다시 문을 닫았다. 이안에게 고맙다는 듯한 눈빛을 보내는 것도 잊지 않은 채였다.
“과연… 이제 모든 북부인에게 이런 대우를 받으시는 거군요.”
입가에 은근한 미소를 머금고 있던 테사이아가 속삭였다. 이안을 바라보는 그녀의 늪색 눈동자가 깨알같이 반짝이고 있었다.
“옛날 생각이 나네요.”
검은 털의 수인과 함께 설원 지대를 누비던 시절을 말하는 것이리라. 이안이 풀썩 웃음 지었다.
“북부가 얼마나 변했는지 알면 깜짝 놀랄 것이오.”
“그래요? 꼭 직접 봐야겠군요.”
“넘어야 할 산이 많겠지만 말이오. 우선은, 식사부터 합시다.”
이안이 포크와 나이프를 들었다.
테사이아가 고개를 끄덕일 찰나, 루시아가 곁에서 속삭였다.
“기다리세요, 마님. 제가 드시기 좋은 크기로 잘라 드릴 테니까요.”
“어머. 그래 줄 거니? 어쩜. 매번 이렇게 내 마음에 쏙 드는 행동만 골라서 하는지.”
미소 지은 테사이아가, 오른손으로 포크 대신 루시아의 붉은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메브를 만나면, 너를 정말 내 의붓동생으로 삼게 해 달라고 부탁해야겠어.”
“미리 대답을 드리자면, 저는 사양하지 않을 거예요.”
루시아가 한쪽 눈을 찡긋댔다. 테사이아의 입가에 맺힌 미소가 더 짙어지게 하기에는 충분했다.
…내가 보기엔 루시아가 널 키우고 있는 것 같은데.
생각하면서도, 이안은 포크와 나이프를 들었다. 미동도 하지 않는 자말을 흘깃 돌아보는 채였다.
“안 드시오?”
“…괜찮습니다. 입맛이 없군요.”
뭐, 그러시다면야.
한쪽 어깨를 으쓱인 이안이 고기를 썰기 시작했다. 고기 냄새를 맡은 순간부터 위가 요동치고 있었다. 자말의 가라앉은 목소리가 이어진 건 바로 그 직후였다.
“그럼 정말… 대마족 부키키아가 권속들을 이끌고 내해로 넘어온 겁니까? 지금 남부의 항구가 전부 봉쇄된 것도… 그래서고요?”
“그렇소. 이해가 빠르시니 더 설명할 필요도 없겠군.”
무성의하게 대답하며, 이안이 고기를 입에 넣었다. 눈을 질끈 감은 자말의 입에서 장탄식이 번졌다.
“맙소사… 대마족이라니….”
손바닥으로 턱을 감싸 쥔 그가, 정수리까지 거꾸로 쓸어 넘기며 말을 이었다.
“제가 들었던 대마족에 대한 이야기가 얼마나 사실일지는 알 수 없습니다만… 그중에 반만 진실이라도… 악몽 같은 일들이 벌어질 겁니다.”
반 이상이 진실일 것 같은데.
이안은 포도주를 홀짝이며 내심 대꾸했다. 이 역시, 굳이 입 밖으로 꺼낼 필요 없는 말이었다. 대신 새삼스러운 사실이 뇌리를 스쳤다.
‘그러고 보니 대마족 두 놈이 더 살아 있지.’
그놈들은 어쩌고 있으려나.
이안이 시큰둥하게 생각할 찰나, 재미있다는 듯한 미소를 짓고 있던 테사이아가 입을 열었다.
“그럼 남부의 항구들이 왜 봉쇄된 거라고 생각한 건가요?”
“벽이 무너지면서 마물들이 건너왔다는 소문 정도는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저 안전을 위한 조치라 여겼습니다. 이미 본토에서도 같은 조치가 시행됐다는 이야기도 있었고요.”
“지한다르 공작 각하께 사실을 전했는데, 듣지 못하셨나 보군요.”
루시아가 넌지시 덧붙였다. 자말이 쌍꺼풀이 진한 눈매를 꿈틀대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바다가 안전하다는 게 확인될 때까지 모든 항구의 출입을 통제한다는 명령이 전부였습니다. 나름대로 인맥을 동원해 알아보려 했습니다만… 특별한 정보를 얻을 수는 없었지요.”
“…각하께서, 내부의 소란이 커지게 될 걸 염려하신 모양이군요.”
테사이아가 입맛을 다셨다.
씹던 고기를 삼키기도 전에 다음 한 점을 썰면서, 이안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전에도 느꼈지만, 남부 공작은 능구렁이 같을 뿐 아니라 신중하고 겁이 많은 게 분명했다.
하긴. 특히 다양한 종족들이 살고 있는 남부를 다스리려면 필요한 덕목일지도 몰랐다.
자말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이해할 수가 없군요…. 아무리 대마족이라지만, 내해에 자리를 잡다니요. 여신들께서 지켜보고 계신데 말입니다.”
“본래도 내해에 자리를 잡았으니 검은 벽 너머에 갇힌 거 아닌가요?”
씹던 고기를 삼킨 테사이아가 물었다. 자말의 눈매가 고개를 저었다.
“저도 자세히 아는 것은 아닙니다만. 부키키아는 내해 가장 깊은 곳까지 쫓겨났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마저도 신들의 눈을 피해 숨어들었다고 들었습니다. 해수들을 방패막이로 내세워서요.”
가두리 양식이라도 당했단 건가.
속으로만 생각하며, 이안이 콧방귀를 뀌었다.
하긴. 바다에 사는 대마족을 토벌하려면 궁지로 몰 수밖에 없었을 터였다. 그 뒤에 대체 어떻게 죽이려던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어쩌면 그저, 흑해로 추방하는 것에 실패한 것뿐인지도 몰랐다.
“하지만 내해 한복판은 엄연히 제국의 영역입니다. 찬란한 여신의 손길이 가장 깊은 곳까지 닿을 텐데요.”
“과거라면 그랬겠죠. 하지만 지금은 아니랍니다.”
대답한 건 루시아였다. 자말의 시선을 받은 그녀가 무표정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풀려난 혼돈과 광기가 천상과 지상 사이에 잡음을 만들고 있어요. 과거, 검은 벽 인근이 그러했듯. 이미 새로운 시대가 시작됐습니다.”
루시아의 고저 없는 목소리는 예언을 하는 것처럼 들리기도 했다. 화로의 성녀라는 이름에 걸맞은 모습이었다.
“후대에서는 지금을 혼돈, 혹은 광기의 시대라 부르게 될 겁니다.”
“루 솔라 맙소사….”
그녀가 화로의 성녀라는 사실까지는 알지 못하겠지만, 적어도 충분히 설득력 있게 와닿은 건 분명했다. 탄식한 자말이 눈을 감으며 마차 벽면에 머리를 기댔다.
…저렇게 충격받을 일인가.
생각하면서도, 이안은 심드렁하게 식사를 이어 나갔다. 테사이아도 루시아가 작게 잘라 건네준 고기를 아기 새처럼 넙죽넙죽 받아먹었다.
“그 산호를 부술 때 말이에요.”
루시아의 목소리가 이어진 건 몇 분 지나지 않아서였다. 그녀는 이안이 옆에 비스듬하게 기대 놓은 불길한 산호 가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다른 특이점은 없으셨나요?”
“뭐… 없진 않았지.”
이안의 한쪽 입꼬리가 슬쩍 말려 올라갔다.
“이젠 특이점이라고 부를 수도 없을 것 같지만.”
“…대마족을 느끼신 거군요.”
곧바로 이해한 듯 루시아가 내뱉었다. 자말이 감고 있던 눈을 번쩍 뜨는 가운데, 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어떠셨나요?”
“뭐, 나한테 그다지 관심이 있진 않은 것 같던데.”
이안이 심드렁하게 내뱉었다.
산호를 파괴한 순간 스쳐 간 찰나의 환영에서, 그는 깊은 바닷속의 대마족과 마주했다.
부키키아는 그를 경계하며 적대심을 내뿜었지만, 딱 그 정도였다.
사실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따지고 보면 그와 부키키아 사이에는 아무런 원한도 없지 않은가.
게다가 놈 역시 이안이 품은 혼돈 역시 느끼고 있을 터였다. 어쩌면 그저 이안을 또 다른 마족이라 여긴 건지도 몰랐다.
‘놈의 권역에 발을 들이면 상황이 달라지겠지만….’
속으로만 읊조리며, 이안은 심드렁하게 고기를 입으로 가져갔다. 그가 묵묵히 턱을 움직이는 사이.
“…성자 대행.”
그를 빤히 바라보고 있던 자말이 이윽고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안이 눈길도 주지 않은 채 대꾸했다.
“말씀하시오.”
“내해를 건너실 계획이라고 들었습니다만… 맞으십니까?”
“그렇소만.”
“그럼… 저희도 함께 데려가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