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Dark Fantasy Villain RAW novel - Chapter 552
#552화
“아하. 그래….”
그제야 테사이아의 입가에 은근한 미소가 번졌다.
“그 섬 조각들이 저 너머에 있었지.”
이안은 고개만 살짝 끄덕였다. 그의 시선은 여전히 서쪽 바다를 훑는 중이었다.
테사이아도 다시 같은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눈에 흐릿한 마력이 일렁이고, 뒤이어 동공이 올빼미의 그것처럼 확장됐다.
이안처럼 새카맣게 변한 눈동자에, 넘실대는 불빛처럼 보이던 배들의 모습이 선명하게 맺혔다.
“확실히….”
천천히 눈동자를 움직이며, 그녀가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하나 같이 제멋대로 생겨 먹긴 했네. 해적선이라고 해도 믿겠어.”
비단 돛의 형태나 숫자만 제각각인 건 아니었다. 범선의 크기도 서로 달랐을 뿐만 아니라, 배에 관해선 문외한인 테사이아의 눈에도 부자연스러운 형태를 한 것들까지 종종 섞여 있었다.
“공식적으로는 부정하고 있습니다만. 실제로도 그럴 겁니다.”
무카파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답지 않게 적개심이 섞인 목소리였다. 어쨌건 테사이아나 이안이 이 거리에서 배의 형태를 분간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다지 놀랍지 않은 모양이었다.
“군도의 군주가 몇 명이지?”
이안이 물은 건 그때였다. 무카파가 곧바로 대답했다.
“제가 알기로는 넷입니다. 군도를 구성하는 가장 큰 섬들의 숫자이기도 합니다. 나머지 작은 섬들은 나눠서 통치하는 것으로 압니다. 그들이 점령한 흑해의 섬들도 포함해서 말입니다.”
“그럼 하나는 오는 중이거나 안 올 모양이군.”
이안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대꾸했다. 눈매를 슬며시 찌푸린 테사이아가 덧붙였다.
“어떻게 안 거야?”
“깃발의 문양이 세 종류야.”
“…저게 다 보인다고? 이안이 나보다 눈이 더 좋네.”
테사이아가 감탄을 흘렸다.
범선들의 중앙 돛대 위에는 하나같이 검은 깃발이 펄럭이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거기 새겨진 문양까지는 확인할 수 없었다.
애초에 범선들 역시 손가락만한 크기 정도로 보일 뿐이었다.
“저 정도 거리면 해협 인근일 겁니다. 본래는 흑해의 괴수들이 내해로 흘러들지 못하도록 방어하는 것이 저들의 의무 중 하나입니다만….”
무카파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지금은 반대로 내해의 괴물들이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해상에 전선을 구축하고 있는 것 같군요.”
어느새 시선을 돌린 이안은 별다른 대답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뻐근한 듯, 손으로 눈가를 주무르는 채였다.
“그런 거야…? 시시하네.”
테사이아가 혀를 찼다. 뒤이어 술을 한 모금 마신 그녀가 덧붙였다.
“난 또, 저것들끼리 집결해서 내해로 진격이라도 하는 건 줄 알았는데 말이야.”
“아무리 군도의 무법자들이라도, 황명 없이는 저만한 규모의 함대를 이끌고 내해 깊숙한 곳까지 들어갈 수 없습니다.”
무카파가 덤덤하게 내뱉었다. 그의 시선은 저 먼바다에 제멋대로 흩어진 불빛들을 못마땅한 듯 훑고 있었다.
“그건 단순한 범법 행위를 넘어, 반역으로 여겨질 수도 있는 문제입니다.”
“벌써 황명이 떨어졌을 리는… 없겠구나. 그래. 그렇겠지.”
테사이아가 고개를 주억거리며 자답했다. 어느새 그녀의 눈동자 역시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아오고 있었다.
“어쨌든, 군도도 내해의 상황을 인지하고 있는 모양이네요.”
이어진 목소리는 마차 창문 너머에서 들려왔다. 테사이아가 활짝 미소지으며 고개를 돌렸다.
“일어났구나? 내 동생!”
“네. 조금 전에요.”
창문 너머에서 루시아의 얼굴이 드러났다. 잘 잔 듯 개운해 보이는 얼굴을 잠시 바라본 이안이, 창문 쪽으로 왼손을 뻗었다.
“마침 잘됐네. 술 한 병 꺼내 줘. 남은 건 테사가 다 먹어버릴 것 같으니까.”
“네.”
선선히 대답한 루시아의 얼굴이 창문 아래로 사라졌다. 좌석 아래의 상자에서 술병을 꺼내려는 것이리라. 조금 억눌린 듯한 목소리가 뒤를 이었다.
“저들이 집결해 진형을 갖춘다는 건, 부키키아와 한패가 아니라는 뜻이기도 하겠고요.”
“…아하. 너도 그 소문을 이미 알고 있었구나.”
테사이아의 눈매가 설핏 휘어졌다. 무카파의 시선을 받은 그녀가, 얼마 남지 않은 술을 한 모금 더 마시고는 덧붙였다.
“군도의 군주들이 흑해의 심연에 잠든 고대 신을 섬긴다는 소문, 몰라?”
“…들어는 봤습니다만. 그런 확인 되지 않은 풍문을 믿고 계실 줄은 몰랐습니다.”
“지금까지의 경험상, 이런 소문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더라고요. 무카파.”
내뱉으며, 루시아가 다시 창문 너머로 얼굴을 드러냈다.
밀랍으로 마개를 밀봉한 술병을 밖으로 내미는 채였다. 술병이 그대로 이안의 손아귀로 빨려 들어가는 사이, 테사이아의 입가에 비웃는 듯한 미소가 번졌다.
“교단의 사제들도 눈이 머는 판국에. 제국의 비호 아래 해적질이나 하고 다니는 것들이 타락하지 않는다면, 그게 더 놀라울 것 같은걸.”
“…….”
무카파가 대답 대신 낮은 침음을 흘렸다. 파격적인 발언을 일삼는 일행을 상대하는 것이 쉽지는 않을 터였다.
-거 참 흥미로운 이야기인걸.
그를 제외한 일행들의 뇌리로 나른한 속삭임이 번지고 있다는 사실까지는, 미처 눈치채지 못한 채였다.
이안이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술병의 밀랍을 뜯어내는 가운데.
-심해의 고대 신이라니. 조금 더 들려주지 않겠어?
연기로 화해 날아가, 테사이아의 어깨 위에서 재구성된 요그가 덧붙였다. 루시아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전설 같은 이야기이긴 해요. 흑해 어딘가에 고대의 신이 봉인되어 있다고 해요. 정확히 어떤 존재인지, 누가 언제 봉인한 것인지 알려진 바가 전혀 없다더군요.”
그녀의 시선이 내해 쪽 하늘로 향했다.
“어쨌건 흑해에 괴물들이 득시글대는 건 그 존재 때문이라고 해요. 봉인된 상태에서도 바다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거죠.”
“내 동생은 참 용하다니까.”
테사이아가 기특하다는 듯한 미소를 입가에 머금었다.
“그런 얘기는 대체 어디서 또 알게 된 거야?”
“어… 에레노스의 서고에 있던 역사서에서요…?”
루시아가 다소 머쓱하게 말하자, 테사이아의 미소가 더 짙어졌다.
“그랬어? 나도 서고를 애용할 걸 그랬네. 사실 가본 게 한 손으로도 꼽거든. 아니… 세 손가락으로도.”
“…어쨌든, 군도의 함선들은 흑해를 자유롭게 누빈다면서요. 야만인들이 사는 섬들은 물론이고, 저 먼 변방까지 숨어들어 약탈할 정도로요. 변방의 바다는 위험하기로 악명이 높거든요. 그래서, 소문이 사실이리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창문으로 고개를 내민 루시아가 마부석의 무카파를 바라보며 덧붙였다.
“그 심해의 고대 신을 섬긴다면, 해수들의 위험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울 수 있을 테니까요. 물론… 힘도 얻을 수 있겠고요.”
“정말 그런 거라면… 저들은 황실이 부여한 권리와 자유를 가장 그릇된 방식으로 이용하고 있는 겁니다.”
루시아의 말은 이안이나 테사이아보다 훨씬 더 설득력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대답하는 무카파의 목소리에 저주파가 섞이고 있었다.
그 사실을 자각한 듯 한 차례 길게 숨을 들이쉬고 내쉰 그가, 이?덧붙였다.
“사실, 아주 놀랍지는 않군요. 군도 출신들은 미신에 집착하고 법을 어기는 것을 오히려 자랑스러워 하는 족속들이니 말입니다.”
“저도 그 관점에는 동의해요.”
루시아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군도에 대한 감정이 그다지 좋지 않은 건, 아마도 가문의 영향일 터였다.
메브가 아겔 란 남부 국경의 수호자가 아니던가. 그 아래로 이어진 해안가에는 해적들이 들끓는 무법 지대였다. 자신들을 왕국이라 칭한다 했었지만, 사실상 군도의 전초기지나 다름없었을 터였다.
-정말 그렇다면… 그저 저렇게 둥둥 떠 있지만은 않을지도 모르겠는걸.
요그의 의미심장한 속삭임이 이어진 건 그때였다. 테사이아가 홱 녀석을 돌아보았다.
“그게 무슨 소리야, 뱀아…?”
눈빛과 말투에 묘한 기대감을 감추지 못한 채였다. 혀를 날름댄 요그가 웃음 지었다.
-글쎄… 이번엔 미리 알려 주고 싶지 않은 걸, 귀쟁아. 그러는 편이 더 재미있을 것 같으니까.
테사이아의 눈매가 슬며시 가늘어졌다. 콧방귀를 뀐 그녀가 전혀 관심 없는 얼굴로 술만 마시고 있던 이안을 돌아보았다.
“이안이 대신 물어봐 주면 안 돼? 네 말은 거역하지 못하잖아.”
“싫어.”
“…응? 어째서?”
테사이아가 입술을 비죽였다. 루시아도 이안을 빤히 바라보았다.
눈도 깜빡하지 않고 술을 한 모금 더 마신 이안이 내뱉었다.
“또 너희가 밤새 떠드는 걸 듣고 싶진 않거든.”
“아니… 그래도….”
“그 뱀 새끼가 아니라도, 어차피 룬 카티스에 도착하면 다 알게 될 거야.”
물론 이안은 요그가 하려는 말을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는 근거는 알지 못했지만, 딱히 알고 싶지도 않았다.
“단호하네…. 뭐, 그것도 이안의 매력이긴 하니까.”
그런 속내를 알 리 없는 테사이아가 깔끔하게 포기한 듯 읊조리며 시선을 돌렸다.
물론 루시아는 이제 요그에게 뜨거운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으헉?! 저게 무슨…?”
저 뒤편에서 경악성이 번진 건 그때였다. 이안을 비롯한 일행들의 고개가 뒤편의 비탈 위로 돌아갔다. 막 아래로 접어든 마차 앞, 브레넌이 경악한 얼굴로 바다 쪽을 돌아보고 있었다.
같은 방향을 고개를 돌린 이안은, 어렵지 않게 그 이유를 확인할 수 있었다.
“세상에… 저게 뭐야?”
저 먼바다에 자줏빛 궤적을 흩뿌리는 거대한 형체가 포물선을 그리며 솟구치고 있었으니까.
눈에 힘을 주지 않은 지금은 정확한 형태를 확인할 수 없었지만, 아주 크다는 사실을 추측하는 건 전혀 어렵지 않았다.
자줏빛을 흩뿌리며 떨어져 내리는 놈을 눈에 담으며, 테사이아가 덧붙였다.
“저게 그 대마족인 건가?”
“아니에요. 그놈의 권속이죠.”
대답한 건 루시아였다. 어느새 마차 문을 열고 상반신을 밖으로 내밀어 바다를 응시하고 있었다.
테사이아의 얼굴에 순수한 감탄이 번졌다.
“저게 일개 권속이라니… 엄청난걸.”
“그리고 확실히, 내해에 잘 적응한 모양이네.”
시큰둥하게 덧붙이며, 이안이 시선을 돌렸다.
계곡 능선 아래. 저 멀리 어둠을 아른아른하게 밝히며 나아가는 불빛들과 그것들의 목적지가 분명한 도시의 빛을 차례로 눈에 담은 그가, 이윽고 무카파를 돌아보았다.
“슬슬 말들을 먹이자고. 더 경사가 심해지면, 마차를 세울 만한 곳이 많지 않아질 것 같으니까.”
새카만 해수면 아래로 사라지는 괴수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무카파가, 화들짝 고개를 끄덕이며 고삐를 잡았다.
“예, 알겠습니다. 귀빈.”
***
어느덧 정오가 가까웠다.
다각- 다각-
마차를 끄는 백마들이 울퉁불퉁한 관도 위를 나아갔다. 지친 듯 다소 휘청대는 걸음걸이였다.
중앙의 조랑말 만이 평소와 다름없는 모습으로 두 백마를 인도하고 있었다.
창문으로 고개를 내밀어 앞을 바라보던 테사이아가, 이윽고 고개를 돌렸다.
“딱 봐도 난장판일 것 같아. 안 그래, 이안?”
“뭐… 제국 도시답진 않네.”
모로의 안장에 탄 이안이 담담하게 읊조렸다. 가까워지고 있는 도시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였다.
저 너머, 제멋대로 솟은 건물들이 드넓게 이어지고 있었다. 도시를 감싼 성벽은, 어디까지나 명목상으로만 존재한다는 듯 낡고 투박했다.
항구 도시 룬 카티스였다.
밤새 불을 밝히던 것과 달리, 낮인 지금은 칙칙하고 지저분해 보이기 그지없었다.
하늘에 가득한 먹구름과 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기도 했다.
“저쪽도 난장판이고.”
뒤를 돌아본 테사이아가 덧붙였다. 이안의 고개도 한 박자 늦게 뒤로 돌아갔다.
제멋대로 자란 풀숲과 나무들이 울창한, 그들이 지나온 야트막한 언덕길이 펼쳐졌다.
그 한복판에 멀찍이 뒤따르는 브레넌 무리도.
“드디어….”
감격한 듯 읊조리는 브레넌의 얼굴은 퀭하기 짝이 없었다. 툭 치면 쓰러질 것 같은 몰골이었다.
그건 그의 종자와 그들이 탄 말들도 마찬가지였다. 말들은 고개를 툭 떨군 채 위태롭게 걷고 있었고, 마부는 아예 등받이에 머리를 기댄 채 잠든 상태였다.
이안 일행을 따라 날이 새도록 걸었으니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반쯤 이동 전문가라 할 수 있는 일행의 행군 속도를 따라오는 건, 저들에겐 고문이나 다름없었을 터였다.
여정이 하루만 더 이어졌더라도 낙오되고 말았으리라.
“…어쨌든 끝까지 따라오긴 했네.”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린 이안이 시선을 돌렸다. 룬 카티스에 도착했으니, 더는 신경 쓸 필요가 없을 터였다.
다각- 다각-
도시로 이어진 성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문을 지켜야 할 경비병들은 창대를 지팡이처럼 어깨에 걸치고, 투구로 얼굴을 반쯤 가린 채 성벽에 비스듬하게 기대 서 있었다.
‘제국에도 이런 빠진 놈들이 있다니.’
저대로 잠든 게 분명했다. 지린내와 짠 내 사이로 풍기는 술 냄새는 저들의 것이리라. 이안이 헛웃음을 삼키며 지나치는 사이, 테사이아가 싱긋 미소 지었다.
“내가 딱 좋아하는 분위기네.”
“그렇겠지….”
이안이 실소를 흘리며 읊조렸다.
성문 너머로 드러난 도시는 겉에서 보이던 것만큼이나 넓었다. 다양한 종류의 악취가 나고, 거리와 골목 곳곳에 주정뱅이들이 말 그대로 굴러다니며 자고 있었다. 얼어 죽을 염려가 없으니 더더욱 거리낄 게 없는지도 몰랐다.
멀쩡하게 돌아다니는 자들도 없진 않았지만, 어쨌건 다들 조금씩은 취한 것처럼 보였다.
“…예상보다 훨씬 크고, 사람도 많은 것 같아요.”
반대편 창문으로 도시를 돌아보고 있던 루시아가, 테사이아의 옆으로 고개를 들이밀며 덧붙였다.
이안도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변방이 절로 떠오르는 막장 도시였지만, 어쨌건 규모만큼은 제국 대도시라는 이름에 걸맞았다.
테사이아의 느긋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샌퍼드 플럼이랬나? 그자는 어디서 찾아야 할까?”
“현지인들에게 수소문해 보면 되겠지. 그전에 당장은….”
이안의 시선이 마부석의 무카파에게로 돌아갔다. 평소와 다름없는 꼿꼿한 자세였지만, 도시가 그다지 마음에 들지는 않는 눈치였다.
입꼬리를 슬며시 말아 올린 이안이 덧붙였다.
“숙소부터 잡고 한숨 자자고. 아마도 이 도시는, 해가 떨어져야 아침이 시작되는 것 같으니까.”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