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Dark Fantasy Villain RAW novel - Chapter 557
#557화
“무풍지대라. 이름만 들어도 무시무시하네. 바다 한가운데에서 꼼짝없이 죽게 되는 거잖아.”
귓가를 파고드는 목소리와 함께, 샌퍼드는 의식을 되찾았다. 곧바로 눈을 뜨거나 움직이지 않은 건, 반쯤은 본능적인 선택이었다.
물론 얼굴과 왼팔의 욱신거리는 통증과, 방금 들은 모르는 여인의 목소리 때문이기도 했다.
“대륙 남쪽 바다도 흥미롭지만, 전 함대가 검은 벽을 따라 나아갈 결정을 한 게 더 놀랍네요.”
또 다른 여인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이번에는 묘하게 귀에 익었다.
샌퍼드의 뇌리로 정신을 잃기 전의 기억들이 빛살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난장판이 된 도박장. 왼팔에서 느껴진 지독한 통증. 온몸을 옭아매는 듯한 기분 나쁜 압박감. 허공을 가로지르는 감각과 시야를 가득 채우는 커다란 손바닥.
그리고 그 너머로 보이던 섬뜩한 눈동자.
“그때는 아직, 검은 벽이 거대한 곡선을 그리고 있다는 게 알려지기도 전이었을 것 같은데 말이에요.”
샌퍼드는 방금 덧붙인 목소리의 정체도 비로소 깨달았다. 신나게 건달들을 두들겨 패던 가면 쓴 시종. 그 무지막지한 성기사에게 가려졌을 뿐, 마찬가지로 괴물 같던 계집애였다.
‘소굴로 끌려온 거군… 젠장.’
내심 욕지거리를 토해내면서도, 샌퍼드는 미동도 하지 않고 자신의 상태부터 확인했다.
얼굴 전체가 부은 듯한 느낌이었다. 숨 쉬는 것도 불편했고, 이도 하나 빠져 있었다. 혀에 느껴지는 감촉으로 봐선 아주 깔끔하게 뽑혀 나간 것 같았다.
걸터앉은 의자와 함께, 뻣뻣한 줄에 칭칭 온몸이 묶여 있기까지 했다. 그나마 왼팔은 줄 위로 나와 있었는데, 움직일 수 없게 고정된 상태인 건 마찬가지였다. 부목을 대고 붕대를 칭칭 감아 놓은 것 같았다.
‘으악, 시발…!’
살짝 움직인 것만으로도 느껴지는 고통에, 샌퍼드는 입술 사이로 터져 나오려는 신음을 간신히 삼켰다.
“그냥 계속 나아가다 보면 벽이 끝날 수도 있다고 생각한 거 아닐까?”
오른쪽에서 저 옆에서 목소리가 이어졌다.
눈도 뜨지 않았지만, 샌퍼드는 이 목소리의 주인공이 요정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귀쟁이 특유의 재수 없는 말투와 발음이었다.
가면 시종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럴 수도 있겠네요. 맞나요?”
“…둘 다였던 것 같습니다.”
깍듯하게 대답하는 목소리에, 샌퍼드의 눈매가 꿈틀댔다.
하심이 함께 잡혀 왔다는 사실을 깨달아서였다. 저 망할 반투르 놈이, 지금 그들의 오래된 과거를 술술 불고 있다는 것도.
“그래서? 무풍지대에 들어선 뒤로도 계속 나아갔다며.”
“식량은 점점 줄어들고, 선원들의 체력도 한계에 다다랐습니다. 애초에 그런 크기의 범선은, 오래 노를 저으라고 만들어진 배가 아닙니다.”
무덤까지 비밀로 하자니까….
샌퍼드는 내심 혀를 찼다. 하긴. 말하지 않았다면 이곳이 저놈의 무덤이 되었으리라.
“하지만 함장은 약속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분명 끝이 있을 거라며, 황명을 완수한 뒤에 돌아갈 거라고 주장했지요. 그때의 눈빛이 지금도 종종 꿈에 나옵니다.”
어쨌건 샌퍼드에게는 마냥 나쁜 일이 아니었다. 저놈의 이야기에 다들 집중하고 있는 것 같았으니까. 게다가 때마침, 공작이 보낸 그 괴물 같은 성기사도 자리를 비운 것 같지 않은가.
“…….”
줄 아래로 축 늘어진 오른손을 슬며시 꿈틀대며, 샌퍼드는 조심스럽게 하나 남은 눈을 떴다.
눈꺼풀이 부어서 쉽지 않았지만, 덕분에 실눈을 뜨는 것이 더 드러나지 않을 터였다.
“그거, 검은 벽에 홀린 상태였던 것 같은데요.”
가면 시종의 목소리가 이어지는 가운데, 샌퍼드가 화들짝 다시 눈을 감았다. 앞에 마주 앉은 커다란 하반신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오크…?!’
입술을 꾹 앙다무는 와중에도, 샌퍼드는 마주 앉은 상대의 정체를 곧바로 눈치챘다. 과묵한 놈들이니 한마디도 하지 않고 조용히 있었던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그보단 저들의 조합이 더 이상했다. 성기사와 가면 쓴 시종. 요정에 오크라니.
‘이자들은 대체 뭐지? 공작은 대체 무슨 생각인 거고.’
샌퍼드는 반사적으로 뇌리를 스친 의문을 곧바로 털어냈다.
알 바 아니었다. 일단은 여기서 도망치는 게 순서였다. 하심까지 구해낼 방법은 그 뒤에 고민해 볼 생각이었다.
“하긴. 망망대해 한복판에서 계속 그걸 보고 있다 보면, 정신이 이상해질 수도 있었겠네. 듣기론, 오래 보고 있기만 해도 광기에 물들게 된다며.”
“전부 그런 건 아니에요. 하지만 함장은 사명감과 압박감이 두려움만큼이나 컸을 테니, 광기가 스며들 틈도 더 많았겠죠.”
소매를 더듬대던 샌퍼드의 오른손이 마침내 움직임을 멈췄다. 소매 안감에 감춰져 있던 비수의 자루가 잡혀서였다. 역시, 여기까지 살펴보지는 않은 것이리라.
그가 조심스럽게 비수를 밖으로 꺼냈다.
“그래서, 선상 반란이라도 일으킨 거야?”
“…처음부터 그럴 생각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군도의 함선들이 먼저 멋대로 명령을 무시하고 돌아가 버리기 시작했습니다. 저희는 그걸 구실로, 함장을 설득하려 했고요.”
“통하지 않았겠군요.”
“…예. 그래서 결국, 선장이 결단을 내린 겁니다. 그때는 부함장이었지요.”
이어지는 구태의연한 대화를 한 귀로 흘리며, 샌퍼드는 칼날을 줄에 조심스럽게 문질렀다.
이상할 정도로 질긴 줄이어서, 좀처럼 칼날이 파고들지 못했다.
입을 꾹 앙다문 그는 손목의 움직임에 온 정신을 집중했다.
“광기에 물든 게 함장 한 명만은 아니었을 것 같은데. 운이 좋았네.”
“…피비린내 나는 싸움이었습니다. 다시 떠올리고 싶지도 않은 기억입니다.”
“그래서 다시 본토로 돌아가지 못하게 된 거야? 사연이야 어쨌건, 너희는 반란을 일으킨 거잖아.”
“그래서는 아니었습니다. 상황을 설명하면 될 것이라 여겼죠. 아니라는 걸 알게 된 건, 남부에 도착한 이후였습니다.”
“순진하긴. 아하… 그래. 이제 알겠네. 공작께선 너희를 본토로 보내는 대신, 두고두고 부리기로 하신 거야. 그렇지?”
“…예. 그때까지만 해도 저희는, 몇 번이면 끝날 줄-”
샌퍼드의 등 뒤에서 벌컥 문 열리는 소리가 번진 건 그때였다.
샌퍼드가 황급히 비수를 손으로 가렸다. 어찌나 질긴지, 줄은 아직도 조금도 잘리지 않은 채였다.
“배불리 먹었어?”
“뭐… 그럭저럭.”
요정의 목소리에 화답한 건, 역시나 어제의 그 검은 머리 성기사의 목소리였다. 샌퍼드가 저도 모르게 아랫입술을 슬쩍 깨무는 사이. 문을 닫은 성기사가 느긋하게 걸음을 옮기며 덧붙였다.
“기어코 사고를 쳐 주신 덕분에, 여급의 한숨이 깊던데.”
“그건… 말했듯이 어쩔 수 없었다니까. 다 들리게 헛소리들을 하잖아.”
짧게 혀를 찬 요정이 말하자, 성기사가 낮은 코웃음을 흘렸다.
“그 귀에 안 들리려면, 아예 말을 하지 않아야 될 텐데.”
“무카파도 들을 정도였다고. 어쨌건 죽은 사람도 없고, 두둑하게 보상도 해 줬으니 됐잖아.”
“그래… 뭐, 안 죽인 것만으로도 다행이지.”
체념한 듯 읊조리며, 성기사가 샌퍼드의 곁을 지나쳤다. 샌퍼드는 숨을 죽인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성기사가 다행히 그의 곁을 지나치는 사이, 요정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밖에서 치고 온 사고에 비하면, 나는 아주 소소한 즐거움 정도였다고.”
“…보아하니 지금도 아주 즐거운 대화를 나누고 계셨던 것 같은데.”
“심지어 유익하기까지 했지. 저자가 과거 제국 함대 소속의 장교였다는 걸 알게 됐거든.”
“아하….”
일말의 흥미도 담기지 않은 탄성과 함께, 성기사가 맞은 편으로 걸음을 옮겼다.
샌퍼드는 소리 없이 침을 삼켰다. 이대로 계속 기절한 척을 하면서, 다음 기회를 노려야 했다. 분명 저 괴물이 또 자리를 비울 순간이 있을 터였다.
“역사의 산증인이나 다름없어요. 제국 개척 함대는 전멸한 것으로 알려져 있거든요.”
그사이, 가면 시종의 열기 섞인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 덕분에 위험을 인지한 제국이, 해로 개척을 전부 군도에 위임하게 됐고요. 그런데 사실 생존자가 있었다니, 놀랍지 않으세요?”
“전혀. …식사를 거른 보람이 있겠구나, 루시.”
시큰둥하게 대꾸한 성기사가, 뭔가를 꿀꺽꿀꺽 삼키기 시작했다. 번지는 향으로 봐선 포도주. 그것도 아주 비싼 포도주가 분명했다.
“물론이죠. 이 재미있는 이야기를 놓칠 뻔했잖아요.”
“…뭐. 항해술은 의심할 필요가 없겠네. 그래서 저 애꾸눈은, 아직 자고?”
“아니. 좀 전에 깨어났어.”
이어진 요정의 대답은, 샌퍼드의 피를 싸늘하게 식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혼자 조용히 꿈지럭대는 게 웃겨서, 그냥 뒀어. 이 덩치 큰 녀석의 이야기가 재미있기도 했고.”
“하여간… 악취미라니까.”
웃음기 섞인 목소리가 가까워졌다. 샌퍼드가 저도 모르게 낮은 한숨을 내쉬는 사이, 의자에서 일어선 오크의 목소리가 번졌다.
“오른손에 날붙이를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 어디, 줄은 좀 잘라냈나?”
오크의 의자에 걸터앉은 성기사가, 아무렇지 않은 말투로 물었다.
샌퍼드가 입가에 쓴웃음을 머금으며 고개를 들었다.
“전혀 못 잘랐습니다. 줄이 아주 질기군요…. 대체 무엇으로 만들어진 줄입니까?”
“내가 알기론, 마수들의 힘줄을 꼬아서 만들었다던데.”
“…마수요?”
“그래. 토끼도 사람을 잡아먹는 동네가 있거든.”
샌퍼드가 멍하니 눈을 끔뻑였다. 성기사는 더 덧붙이는 말 없이 술병을 입으로 가져갔다. 그가 향 좋은 포도주를 마시는 사이, 샌퍼드가 슬며시 시선을 돌렸다.
“아, 하하… 안녕하시오?”
성기사의 뒤에 선 회색 오크의 시선이 느껴져서였다. 물론 오크는 대꾸도 하지 않았지만, 샌퍼드는 모른 척 시선을 돌렸다.
창밖은 칙칙했다. 해가 뜨고 있는 게 아니라면, 한나절도 넘게 기절해 있었다는 뜻일 터였다.
“반갑군요, 선장.”
침대가 나란히 놓인 오른쪽 벽면. 중앙의 가장 큰 침대에 걸터앉은 은발의 요정이 인사를 건넸다. 한쪽 다리를 꼬고 입가에 요정 특유의 사악한 미소를 머금은 채였다.
샌퍼드도 재빨리 입술을 말아 올렸다.
“반갑습니다. 영애.”
“원로라고 불러주세요.”
“예. 원…. …원로?”
대답하던 샌퍼드의 눈이 순간 커졌다. 원로 요정이라니. 귀쟁이들 중에서 특히 악독하기로 유명할 뿐 아니라, 보기도 드문 존재였다. 원로 요정의 옆에 나란히 기대앉은 붉은 머리 소녀가 고개를 기울인 건 그때였다.
“우린 구면이죠? 무사히 깨어나서 다행이네요. 머리에 문제가 생긴 건 아닌가 걱정했거든요.”
“…머리가 조금 아프긴 합니다.”
샌퍼드가 멍하니 대답했다. 목소리로 어느 정도 예상하긴 했지만, 막 앳된 티를 벗은 얼굴이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저 붉은 머리도 신의 사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샌퍼드가 그녀들의 맞은편 침상에, 신병처럼 각 잡힌 자세로 앉은 하심과 눈을 마주치는 사이.
“그래서, 이제 우리를 태우고 갈 마음이 생겼나?”
술병을 입에서 뗀 성기사가 불쑥 물었다. 화들짝 그를 돌아본 샌퍼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무, 물론입니다…! 본토까지 안전하게 모시겠습니다.”
“또 거짓말이군.”
“…예?”
“퀘스트 완료가 안 떴거든.”
“……? 그게… 무슨….”
또 한 번 이어진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에, 샌퍼드의 눈매가 저도 모르게 일그러졌다. 그보다 놀라운 건, 이 성기사가 자신의 본심을 정확하게 간파했다는 사실이었다.
“마지막 기회야. 샌퍼드. 이제부턴 대답을 정직하게 하는 게 좋을 거야.”
내뱉으며 뒤에 선 오크에게 술병을 건넨 성기사가, 샌퍼드의 앞으로 천천히 상반신을 기울였다.
“또 거짓말을 했다간, 네 반투르인 친구가 새로운 선장이 될 테니까.”
“……!”
“넌 어제 그 도박장으로 가게 될 거야. 거기 사장이, 널 아주 많이 손꼽아 기다리고 있거든.”
샌퍼드는 그의 눈에 사로잡힌 것처럼 시선을 돌리지 못했다. 우묵한 검은 눈은, 이 도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숙련된 살인자의 그것이었다. 어제와 달리 가벼운 복장이라는 사실은, 위압감을 줄이는 데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했다.
뒤늦게 화들짝 정신을 차린 샌퍼드가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나, 날 죽이면 공작 각하께서 그냥 지나치지 않으실 겁니다…! 그동안 내가 얼마나 그분의 일을-”
“난 그자가 뭘 어쩌건 신경 안 써.”
성기사가 말을 잘랐다.
“예…? 하, 하지만, 나리는 각하의 기사가….”
한 박자 늦게 되묻던 샌퍼드의 눈매가, 이윽고 설핏 일그러졌다.
“…설마, 아니신 겁니까?”
성기사가 고개를 까딱였다. 입꼬리만 살짝 당겨 미소 짓는 채였다. 물론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아서, 그저 섬뜩함만 더할 뿐이었다. 샌퍼드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저, 저 녀석이 제 부관이긴 합니다만. 아직 선장을 맡기엔 역부족일 겁니다…!”
반사적으로 내뱉은 그가, 숨을 헐떡이고는 말을 이었다.
“선장은 많은 것들을 고려해야 합니다. 바람. 해류. 선원과 배의 상태. 거기다 바다와 승객들의 분위기까지 읽을 줄 알아야 합니다. 요즘 같은 어수선한 시기에는 더더욱 말입니다. 안 그러냐, 하심?”
“예…? 어, 그렇… 습니다.”
샌퍼드의 절박한 시선을 받은 하심이 고개를 끄덕였다.
엉겁결에 한 대답인 듯 묘하게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녀석이 말을 이었다.
“선장이 되먹지 못한 인간인 건 사실입니다만. 능력만큼은 출중합니다. 아직도 살아 있는 게… 그 증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
선선히 고개를 끄덕인 성기사가, 뒤이어 덤덤하게 덧붙였다.
“그럼 너도 같이 도박장으로 보내고 새 선장을 찾아봐야겠군.”
“……!?”
“네 배를 대가로 준다고 하면, 서로 하겠다고 나설 것 같은데.”
다크 판타지의 망캐가 되었다
558화
24.02.08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