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Dark Fantasy Villain RAW novel - Chapter 558
#558화
상상조차 해 본 적 없는 뻔뻔한 말에, 샌퍼드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마찬가지로 눈을 부릅뜬 하심이 내뱉은 건 바로 그 직후였다.
“하, 하지만 저도, 맡겨만 주신다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할 수 있습니다…!”
“뭐라고…?!”
눈을 부릅뜬 샌퍼드의 고개가 절로 옆으로 돌아갔다.
“하심, 네가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냐? 갑판 청소나 하던 애송이를 여기까지 이끌고 온 게 누군데!”
“그래서 지금까지 선장의 수발만 들며 살았지 않습니까!”
하심도 지지 않고 맞받아쳤다. 가뜩이나 험하게 생긴 얼굴을 더 찡그린 채였다.
“가는 곳마다 사고를 치고 다니고. 매번 뭔가 계획만 있지, 제대로 된 건 하나도 없잖아요!”
“허… 흑해의 물고기 밥이 될 뻔한 놈을 기껏 살려줬더니….”
“그 뒤로 선장 때문에 죽을 고비를 넘긴 게 몇 배는 더 많을 겁니다. 지금도 보십시오. 당장 목이 달아나게 생긴 데다, 더는 룬 카티스에서도 지낼 수가 없게 됐잖습니까!”
내뱉는 하심의 목소리에 점점 더 짙은 열기가 묻어났다.
“이젠 변방 말고는 갈 곳도 없어졌다고요! 그렇다고 뭐, 군도로 들어갈 겁니까?”
“끄응….”
결국, 할 말이 궁색해진 샌퍼드가 침음을 흘렸다.
어느새 요정과 붉은 머리의 얼굴에 웃음이 번진 가운데, 검은 머리 성기사가 손바닥으로 허벅지를 탁 두드렸다.
“결론은 나온 모양이군. 잘 가라. 샌퍼드.”
“자, 잠시만요. 나리. 나리…!”
홱 고개를 돌린 샌퍼드가 필사적으로 몸을 흔들며 내뱉었다. 가능한 가장 불쌍한 표정도 짓는 채였다.
“제가 딴생각을 품은 건, 어디까지나 나리께서 다른 손님들을 태우지 말라고 하셔서 그런 겁니다! 그 결정만 물려 주신다면, 저도 최선을 다해서 돕겠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흥정을 시도할 정도로 멍청할 줄은 몰랐는데.”
“흐, 흥정이 아닙니다! 제 주머니 사정만 걸린 문제가 아니라서 그런 겁니다…!”
다행히 이번에는 진심이 전해진 모양이었다. 일어나려다 멈칫한 성기사가, 다시 의자에 엉덩이를 대며 샌퍼드를 바라보았다. 샌퍼드가 어깨를 들썩이며 말을 이었다.
“선원들이 잔뜩 있습니다. 그놈들은 제 부하들이지, 노예가 아닙니다. 제가 주는 봉급으로 먹고산단 말입니다…!”
“흐음….”
성기사의 눈매가 슬며시 좁아졌다. 여전히 진위를 가늠하는 듯한 눈으로 샌퍼드를 빤히 응시하는 채였다. 그 눈을 피하지 않은 채, 샌퍼드가 말을 이었다.
“노잡이들은 특히 그렇습니다. 제 배가 그리 크지 않은 범요선이긴 합니다만, 노를 젓는 건 보통 중노동이 아닙니다.”
“주로 돛을 펼치고 항해하지 않나요?”
물은 건 붉은 머리였다. 샌퍼드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긴 합니다만. 내해는 바람이 제멋대로 바뀌는 터라, 노잡이들이 필요한 순간이 반드시 몇 번은 있게 마련입니다. 게다가 지금은 전에 없는 대목이지 않습니까.”
샌퍼드는 뱃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한숨을 저도 모르게 내쉬었다. 저 회색 오크의 손에 들린 포도주 한 모금이 절실했다.
“…예상된 승객을 전부 포기한다면, 아무도 따라오지 않을 겁니다. 큰돈이라도 약속된 거라면 모를까. 아니면 사람 할 짓이 못되니까요. 따라오는 의리 있는 놈들이 있다 해도, 내해를 건너기엔 역부족일 겁니다.”
“흐음….”
성기사가 낮게 침음하며 시선을 돌렸다. 하심이 곧바로 눈을 내리깔며 대답했다.
“사실입니다, 나리. 선장은 적어도 선원들의 돈만큼은 떼먹은 적이 없습니다. 본인이 도박 빚을 잔뜩 진 상태에서도 말입니다.”
“…짜식.”
하심을 돌아본 샌퍼드가 저도 모르게 읊조렸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거짓말은 하지 않는 놈이었다.
“너, 이대로 튀어서 도망칠 생각 아니었나?”
성기사가 툭 덧붙인 건 그때였다. 샌퍼드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 잘 숨어 있다가, 다른 밀항선 사이에 섞여서 손님들을 태우고 출항할 생각이었습니다. 물론 정 여의치 않으면….”
입맛을 다신 그가 다시 성기사를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가장 가까운 녀석들만 태운 채로 떠났겠지만 말입니다. 바람이 도와주지 않더라도, 시간만 넉넉하다면 노잡이 없이도 어떻게든 할 방법이 있습니다.”
“더럽게 무책임한 계획이었군….”
성기사가 헛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붉은 머리가 입을 연 건 바로 그 직후였다.
“지금 밀항선 승선비가 얼마나 비싼가요?”
“지금은… 사실, 부르는 게 값인 상태입니다. 밀항선은 생각보다 그리 많지 않습니다. 이미 거의 모든 배가 만선이니, 갈수록 더 비싸질 겁니다.”
샌퍼드가 힘없이 대답했다. 목소리에 한숨이 섞이는 것을 감추지 못한 채였다.
“이 상태로 본토로 돌아가려는 자들은 그만한 이유가 있는 데다, 가진 돈도 많을 테니까요. 게다가 여기서 서쪽으로 더 가면, 주머니뿐만 아니라 목숨도 걱정해야 할 겁니다.”
“그래서, 선원들에게 줘야 할 돈이 얼만데.”
성기사가 오크에게서 술병을 받아 들며 물었다. 샌퍼드의 눈이 절로 가늘어졌다.
“금화로… 적어도 삼백 개쯤은 필요할 겁니다.”
“뭐라고요?!”
붉은 머리가 눈을 치켜뜨며 경악했다. 미간을 찌푸린 성기사가 내뱉었다.
“바가지를 씌울 때가 아닐 텐데.”
“…시세에 맞춰 줘야 해서 어쩔 수 없습니다. 본래는 손님들에게 나눠서 받지 않습니까. 게다가 선원의 숫자가 많아서, 개개인이 가져가는 건 훨씬 적습니다. 마흔 명이 훌쩍 넘는단 말입니다….”
“우리만 타면, 그렇게까지 많이는 필요하지 않을 텐데.”
원로 요정이 싸늘하게 끼어들었다. 샌퍼드의 머리가 그 어느 때보다도 빠르게 굴러갔다.
“그렇다고 해도… 최소 스무 명은 필요할 겁니다. 숙련된 노잡이를 최소한으로 줄이고, 나머지를 쭉정이로 채운다고 해도 말입니다.”
“그럼 돈도 절반은 필요하겠군.”
“예. 물론, 저와 하심은 포함하지 않은 금액입니다! 정말입니다!”
샌퍼드가 재빨리 덧붙였다. 하심이 왜 나까지 포함하냐는 듯한 눈빛으로 바라봤지만,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였다.
“백 오십 개라….”
눈을 가늘게 뜨며 읊조린 성기사가, 술을 한 모금 마시고는 덧붙였다.
“…그래도 가진 돈이 아직 한참 부족한데.”
“우리 가문의 이름으로 외상을 달면 안 될까?”
은발의 원로가 끼어들었다. 샌퍼드의 시선을 받은 그녀가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나, 에레노스의 가주거든. 차용증을 써 줄 테니까, 일이 다 끝난 뒤에 타헤나로 가져가서 받으면 되잖아.”
“그게… 어렵습니다… 원로….”
샌퍼드가 난감하게 읊조렸다. 귀쟁이의 약속을 어떻게 믿냐는 말을 간신히 삼키며, 그가 덧붙였다.
“…귀환하고 한 달 이상 지난 뒤에 대금을 주겠다고 하면 다들 받아들이지 않을 겁니다.”
“이번에 출항하면 한동안 룬 카티스로 돌아오기도 어려울 테고요. 선장이 큰 사고를 치지 않았습니까…?”
그의 시선을 받은 하심이 덧붙였다. 에레노스 원로가 코웃음을 흘렸다.
“뭐, 죄다 오늘만 사는 거야? 어떻게 고작 한두 달도 못 기다려?”
“…저희는 미래를 생각하며 살기 어렵습니다. 영원히 행운이 따르지는 않을 테니까요. 다들 언젠가는 필연적으로, 물고기나 바다 괴물의 먹이가 되고 말 겁니다.”
샌퍼드가 덤덤하게 내뱉었다. 원로가 혀를 차는 가운데, 붉은 머리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번졌다.
“루 로지스를 섬기시나 보군요.”
“뭐… 그분을 찾아야 할 일이 많으니까요.”
샌퍼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가만히 생각에 잠겨있던 성기사가, 술을 한 모금 더 마시고는 입을 열었다.
“그럼 뭐… 어쩔 수 없이 죄다 태우고 가야 하나.”
“……! 정말이십니까?!”
“선원들이 안 따라올 거라며. 다른 방법이 없잖아. 그 많은 인원을 죄다 협박할 수도 없고.”
성기사는 영 마음에 들지 않는 말투였지만, 샌퍼드는 활짝 미소 지었다.
“자비로우시군요, 나리. 과연 찬란한 여신의-”
“잠깐만.”
이번에 말을 자른 건 은발의 원로였다. 성기사를 돌아본 그녀가, 요정 특유의 묘한 눈빛으로 입술을 달싹였다.
“우리 말고도 큰돈을 낼만 한 작자가 있잖아? 이미 안면도 있고, 다급한데 세상 물정도 잘 모르는.”
“…우리랑 동행했던 자들 말이군.”
곧바로 이해한 듯, 성기사가 읊조렸다. 원로 요정이 뱀 같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여기저기서 잔뜩 털리고 있을 텐데. 그럴 바엔 우리가 해도 되지 않겠어?”
“…흠.”
“어쩌면 아직도 배를 구하지 못했을지도 몰라. 피차 좋은 거래가 될 수도 있다고. 그러니까, 적어도 제안 정도는 해 보자.”
원로가 발끝을 까딱였다. 샌퍼드의 눈매가 슬며시 일그러졌다. 정확히 누구를 말하는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에게 달가운 제안은 아닌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어차피 손해 볼 거 없잖아. 안 되면 그냥 하려던 대로 하면 되니까. 다른 인간들과 부대끼면서 가고 싶지 않단 말이야.”
“…그래. 일단 제안부터 해 보는 건, 나쁘지 않겠네.”
원로가 한 번 더 덧붙이자, 비로소 성기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눈매를 조금 더 찌푸리는 와중에도, 샌퍼드의 뇌리로 새삼스러운 의문이 스쳐 지나갔다.
저 고귀하고 오만한 원로 요정이, 반대로 성기사의 허락을 구하고 있지 않았던가.
‘저 원로의 기사도 아니라면… 이 자는 대체…?’
교단의 정화자인가?
그가 생각하는 사이, 품에서 돈주머니를 꺼낸 성기사가 빨간 머리를 돌아보았다.
“거리로 나가 봐. 루시. 근처 어딘가에 그 거지가 있을 테니까. 이걸 주고, 브레넌 경을 찾아 달라고 부탁해.”
그가 은화 두 개를 내밀며 말하자, 루시라 불린 붉은 머리가 냉큼 일어섰다.
“알았어요. 따라가서 제안도 직접 전할까요?”
“도움이 필요하면 여기로 찾아오라고 하는 게, 거래에 더 도움이 될 것 같은데.”
“네. 그럴게요.”
은화를 받아 든 루시가 고개를 끄덕이는 가운데, 에레노스 원로가 벌떡 일어섰다.
“나도 따라갈게.”
“안 돼.”
성기사가 잠깐의 망설임도 없이 내뱉었다. 원로의 눈매가 뾰족해졌다.
“왜? 또 내가 너무 예뻐서?”
“사고는 어제만으로 충분해. 무카파, 동행을 부탁해도 될까?”
회색 오크, 무카파가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귀빈.”
“…치사하긴. 꾀도 내가 냈는데.”
샌퍼드는 내심 또 한 번 확신했다. 역시, 이들 모두가 이 성기사의 명령에 따르고 있었다. 에레노스의 원로조차 입술을 비죽이면서 다시 자리에 앉고 있지 않은가.
“일만 처리하고 금방 돌아올게요. 그사이에 이건, 직접 보여주시겠어요?”
그때, 루시가 손을 내밀며 말했다. 어느새 그녀의 손에는 곱게 접힌 양피지가 들려 있었다.
샌퍼드는 밀랍 봉인에 찍힌 지한다르 공작의 인장을 볼 수 있었다.
성기사가 서신을 받아 들었다.
“그래. 다녀와. 조심하고.”
“염려 마세요. 이미 어제 일의 소문이 돌고 있을 거예요. 게다가 무카파도 곁에 있잖아요.”
“…하긴. 무카파. 신경 써줘. 무슨 일이 생기건, 크게 만들지 말고.”
“명심하겠습니다.”
루시, 그리고 무카파가 샌퍼드를 지나쳐 걸음을 옮겼다.
문이 열리고 닫히는 가운데, 성기사의 시선이 비로소 다시 샌퍼드에게로 돌아왔다.
“그럼 이제, 이걸 읽어 볼까?”
“…예. 나리.”
그의 눈을 빤히 바라보던 샌퍼드가, 이윽고 고개를 끄덕였다. 체념하는 말투가 된 채였다. 당연했다.
그가 무슨 잔머리를 굴리더라도 이 정체 모를 성기사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으리란 확신에 가까운 예감이 들고 있었으니까.
“…드디어 진짜 할 마음이 생겼군.”
성기사가 빙긋 미소 지으며 내뱉었다. 자신의 눈에만 보이는 퀘스트 완료 창이 떠올랐다는 사실까지는, 샌퍼드로서는 알 도리가 없었다. 일어선 그가 비로소 샌퍼드의 몸을 묶은 줄의 매듭을 풀기 시작한 사이.
“그래… 여기 있는 것도, 마냥 재미없진 않겠네.”
뾰로통하게 앉아 있던 에레노스 원로가, 다시 입가에 미소를 머금으며 고개를 돌렸다. 그사이 매듭이 풀린 줄이 바닥으로 후두둑 떨어져 내렸다.
“윽….”
비로소 뻣뻣해진 몸을 이리저리 돌리며, 샌퍼드가 인상을 구겼다.
왼팔이 욱신거릴 뿐만 아니라, 손으로 만져본 얼굴 역시 예상대로 엉망진창이었다.
“힘을 아낀다고 아낀 건데. 그래도 왼팔은 부러진 것 같더군. 걱정하지 마. 응급 처치를 제대로 했으니까. 내가 직접.”
성기사가 뻔뻔하게 내뱉었다.
개자식. 하고 샌퍼드가 내심 읊조리는 사이, 그가 문득 서늘해진 목소리로 덧붙였다.
“오른팔만으로도, 네 할 일은 다 할 수 있겠지?”
“무, 물론입니다! 눈 하나로도 잘 사는데, 팔 하나가 대수겠습니까. 잘린 것도 아닌데요.”
샌퍼드가 냉큼 대답했다. 입가에 억지 미소까지 지은 채였다. 아니라고 했다간 곧바로 선장을 바꾸겠다고 할 게 분명하지 않은가.
“아주 단단하게 묶어 주셨군요. 멀쩡하게 회복될 것 같습니다…!”
“좋아. 다행이네. 역시 유능하군.”
빙긋 미소 지은 성기사가 다시 의자에 걸터앉았다. 옆에 내려놓은 술병을 집어 든 그가, 샌퍼드에게 잘 접힌 양피지를 내밀었다.
“그럼, 확인해 봐.”
“예…!”
샌퍼드가 냉큼 양피지를 받아 들었다. 지긋지긋한 인장을 잠시 내려다본 그가, 입으로 봉인을 뜯어냈다. 활짝 펼친 양피지의 글자들이 눈에 들어왔다. 글자들을 빠르게 훑어 내려간 것도 잠시.
“이안… 호프 경…?”
비로소 이름을 발견한 샌퍼드의 고개가 기울어졌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름이었기 때문이다.
어디서 들은 이름인지를 기억해 내는 데에는 몇 초면 충분했다.
“이안… 호프…?!”
물론, 샌퍼드의 퉁퉁 부은 외눈을 찢어질 듯 커지게 만들기에도 마찬가지였다. 입까지 벌린 샌퍼드가 멍하니 고개를 드는 가운데.
“그래. 그게 내 이름이지.”
그와 눈이 마주친 북부의 초인, 이안 호프가 빙긋 미소 지었다.
다크 판타지의 망캐가 되었다
559화
24.02.09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