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Dark Fantasy Villain RAW novel - Chapter 559
#559화
샌퍼드가 손에 든 양피지를 툭 떨어뜨렸다. 그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한 채 이안을 멍하니 바라보는 사이.
“그… 그러니까….”
저 옆의 침상에 걸터앉은 하심이 더듬더듬 내뱉었다. 이안을 돌아보는 그의 얼굴에도 경악이 물감처럼 번지고 있었다.
“나리가 바로… 바로 그 분이시라는… 말씀이십니까?”
“그래.”
대답한 건 은발의 원로, 테사이아였다.
“저 위대한 백금룡의 유일하며 공식적인 대행자이자 북부의 초인. 그리고 에레노스의 은인이자 이제는 남부 밀림의 대전사이기도 하신, 바로 그분이시지.”
둘과 달리, 그녀의 입가에는 거만해 보이는 미소가 맺혀 있었다.
하심과 샌퍼드를 번갈아 돌아보며 그녀가 덧붙였다.
“그러니 일생의 영광으로 여기도록 해. 너희가 검은 벽 너머에서 귀환하신 성자 대행을, 본토까지 모시게 된 거니까.”
“루 솔라 맙소사….”
샌퍼드가 비로소 나지막이 탄식을 흘렸다. 하심이 침대 아래로 떨어지듯 무릎을 꿇은 건 바로 그 직후였다.
“차, 찬란한 빛에 영광 있으라-”
“동작 그만.”
술병을 입으로 가져가던 이안이 말을 잘랐다. 몸을 숙이려던 하심은 물론 엉겁결에 의자 아래로 내려간 샌퍼드도 멈칫하는 가운데.
“앞으로도 내 호칭은 나리로 통일하도록 하지.”
이안이 나지막이 말을 이었다.
“난 지금처럼 계속, 에레노스 원로의 호위 기사인 거야. 알았어?”
“…그렇게 하겠습니다. 성자, 아니, 나리.”
샌퍼드가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하심도 튕겨 오르듯 일어서며 고개를 끄덕였다. 믿을 수 없다는 듯한 눈빛으로 이안을 뚫어질 듯 바라보는 채였다.
…쟤 눈이 왜 저래.
생각하며 짧게 입맛을 다신 이안이 다시 술병을 입에 무는 사이.
“왜 진작… 존함을 밝히지 않으신 겁니까…? 그러셨다면… 어제 같은 일은….”
바닥에 떨어진 양피지를 집어 들며 샌퍼드가 덧붙였다.
목소리가 떨리는 건 비단 놀라서만은 아닌 모양이었다. 어제 자신이 이안의 뒤통수를 쳤던 사실이 뇌리를 스친 것이리라.
술병에서 입을 뗀 이안이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그런 일이 없었다고, 정말 확신할 수 있어?”
“…그건, 사실 아닙니다.”
멈칫한 샌퍼드가 다시 의자에 조심스럽게 앉으며 대답했다. 이안과 마주 앉은 상황이 한층 더 불편해진 듯 눈을 내리까는 채였다.
“신분을 감추셔야 할 다른 이유라도 있으신 겁니까…?”
하심의 목소리가 번진 건 그때였다. 여전히 뜨거운 눈빛으로 이안을 바라보며, 그가 반투르인 특유의 두툼한 입술을 달싹였다.
“나리께서 이곳에 계신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도시의 모든 이들이 쌍수를 들고 환영하며 구름 떼같이 몰려들 것-”
“바로 그래서 안 밝히는 거야.”
이안이 헛웃음을 흘리며 내뱉었다. 그를 보기 위해 우글우글 모여드는 인파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벌써 현기증이 나는 것 같았다.
물론, 그가 본토로 돌아갔다는 사실이 최대한 늦게 알려지기를 바라서이기도 했다.
그가 본토에 있다는 것이 알려진 순간, 황실과 교단 모두 그를 붙잡거나 불러들이려 할 테니까.
“군도와 가까운 곳에서도 이안의 인기가 많은가 봐?”
재미있다는 듯 미소 짓고 있던 테사이아가 물었다. 하심이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나리가 용병 출신이라는 소문이 있지 않습니까. 밑바닥에서 살아 있는 전설이 탄생했으니, 저희 같은 놈들이 더 추앙할 수밖에요.”
“…소문이 아니라 사실이야. 출신이 아니라, 현역이고.”
이안이 시큰둥하게 정정했다. 하심의 얼굴에 경탄이 번졌다.
“정말이십니까…?! 역시…! 그럼 설마, 변방 출신이시라는 소문도 사실입니까? 북부다 변방이다, 이견이 많아서 말입니다.”
“굳이 따지자면… 변방에 가깝지.”
“크으…! 역시, 그럴 줄 알았습니다. 저는 변방이라고 믿는 쪽이었습니다!”
떨떠름하게 입맛을 다신 이안이 덧붙였다.
“어쨌든 입단속 잘해. 귀찮은 일 겪고 싶지 않으니까.”
“염려 마십시오. 입도 벙긋하지 않겠습니다.”
하심이 고개를 굳게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의 부담스러운 눈빛을 외면한 채, 이안이 입을 열었다.
“그래서, 그 서신에는 뭐라고 쓰여 있지?”
“나리께서 말씀하신 것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다만… 본토로 모셔다드린 뒤에 돌아와, 있었던 일들을 상세하게 보고하라는군요.”
짧게 한숨을 내쉰 샌퍼드가, 술병을 입에 문 이안을 힐끔 곁눈질하며 덧붙였다.
“…하지만 보고는 나중으로 미뤄야 할 것 같습니다. 이번 일이 끝나면 한동안은 변방에 숨어 지낼 생각이어서 말입니다. 아시다시피 원한을 제대로 사 버리지 않았습니까. 그 기억이 희미해질-”
“나한테 변명할 필요 없어.”
술병을 입에서 떼며 내뱉은 이안이, 한쪽 어깨를 으쓱였다.
“우릴 데려다준 뒤의 일까지 간섭할 생각은 없으니까.”
“…예. 나리.”
샌퍼드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이안의 입가에도 흐릿한 미소가 스쳤다. 의도한 건 아니지만, 그에게도 달가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지한다르 공작도 그의 행방을 정확하게 알 수 없게 될 테니까.
양피지를 잘 접어 품에 넣는 샌퍼드를 바라보며, 그가 덧붙였다.
“어쨌든 빨리 떠나고 싶은데. 곧바로 출항할 수 없는 이유는 뭐지?”
멈칫한 샌퍼드가, 이윽고 마저 양피지를 밀어 넣으며 운을 뗐다.
“…내해와 흑해를 가르는 길목에 해협이 있습니다.”
“알아. 인근에 군도의 함대가 집결 중이더군.”
이안의 첨언에, 샌퍼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알고 계셨군요. 그리고 검은 함대는… 집결이 끝나면 내해로 진격할 예정입니다.”
“응…?”
고개를 갸웃한 건 테사이아였다.
“군도의 함대가 황실의 허락 없이 진격하는 건 불법이잖아.”
“물론 그렇습니다만….”
잠시 머뭇거린 샌퍼드가, 슬쩍 이안의 눈치를 살피고는 말을 이었다.
“지금 내해에는 괴물들이 날뛰고 있지 않습니까. 밀항선은 물론이고 군도의 범선들도 여럿 침몰한 상태입니다.”
“흐음….”
눈을 슬쩍 가늘게 뜬 이안이 침음했다. 요그의 의미심장한 말이 뇌리를 스쳐서만은 아니었다. 마른 입술을 혀로 훑으며 힐끔댄 샌퍼드가 재빨리 덧붙였다.
“군도는 바닷길이 막히면, 사실상 고립되어 버리지 않습니까. 해서 이번엔 허락을 구하기 전에 독자적으로 결정을 내린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함대가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거야?”
입가에 흥미롭다는 듯한 미소를 머금은 테사이아가 물었다.
샌퍼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함대의 이동을 조금이라도 방해하는 자들은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 엄포를 놓은 상태입니다. 재수 없게 걸린다면 그대로 나포당해 가진 걸 전부 털리게 될 겁니다. 물론, 죽게 될 수도 있겠죠.”
“…그런 명분이군.”
이윽고 이안이 툭 내뱉었다. 샌퍼드의 눈썹이 움찔댔다. 그가 또다시 조심스럽게 이안을 곁눈질하는 사이, 테사이아가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읊조렸다.
“아쉽네. 그 악명 높은 군도의 검은 함대가, 대마족의 권속들과 싸우는 걸 구경할 기회였는데.”
“대마족… 이라니요?”
테사이아를 돌아본 샌퍼드가 한 박자 늦게 되물었다. 내내 이안만 바라보고 있던 하심도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차, 하고 손으로 입을 가린 테사이아가 은근한 눈빛으로 이안을 돌아보았다.
“역시, 말하지 않는 게 좋겠지?”
“이미 해놓고 무슨.”
헛웃음을 흘린 이안이, 의미심장하게 샌퍼드를 바라보며 덧붙였다.
“우리가 탈 배의 선장인데, 지금 바다가 어떤 상황인지 정도는 정확하게 알아야지.”
“역시 그렇지…?”
미소 지은 테사이아가 뜸을 들이듯 기지개를 켜며 일어섰다.
샌퍼드와 하심의 시선이 그녀의 얼굴을 따라 움직이는 가운데, 몸을 돌린 테사이아가 느긋하게 걸음을 옮기며 입을 열었다.
“지금 내해에 날뛰는 괴물들은, 대마족인 부키키아의 권속들이야.”
“부키… 키아요…?”
샌퍼드의 외눈이 일그러졌다. 이안의 곁으로 다가오는 테사이아를 바라보던 그가 이윽고 덧붙였다.
“그 옛 대마족이… 아직도 검은 벽 너머에 살아 있었다는 말씀입니까?”
“그래. 검은 벽의 광기에 완전히 잡아 먹힌 상태로.”
테사이아가 내민 손에 술병을 건네며, 이안이 시큰둥하게 덧붙였다. 이젠 이런 설명도 지긋지긋해지고 있었다.
“미친… 그 오랜 시간을 살아남아 돌아오다니….”
샌퍼드가 헛웃음을 흘리며 탄식했다. 무의식적인 반응인 듯 품으로 손을 밀어 넣는 채였다. 뒤이어 눈매를 꿈틀댄 그가 품을 뒤적이는 사이.
“걱정은 별로 안 되나 보네.”
이안이 툭 덧붙였다. 멈칫한 샌퍼드가 그를 돌아보았다.
“예…?”
테사이아가 태연하게 병째로 술을 들이켜는 가운데, 이안이 고개를 까딱였다.
“놀라기만 하잖아. 죽음의 항해가 될 것 같다는 걱정이나, 함대가 전멸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는 것 같아서.”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저 너무 놀랐을 뿐입니다.”
샌퍼드가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이안은 웃지 않았다. 테사이아가 건넨 술병을 받아 들며, 그가 덧붙였다.
“생각 잘해. 사실대로 말할 기회를 주는 거니까.”
“…….”
샌퍼드가 말문이 막힌 듯 굳어졌다. 그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이안이 술병을 입으로 가져가는 사이.
“하긴. 생각해 보면 이상하긴 하네.”
묘한 눈으로 샌퍼드를 일별하며 몸을 돌린 테사이아가, 창가 쪽으로 걸음을 옮기며 말을 이었다.
“아무리 군도의 함대가 해수 사냥 전문가들이라고 해도, 내해에서 굳이 단독으로 움직일 필요까진 없잖아. 목숨이 중요한 건 마찬가지일 텐데.”
“…….”
“제국의 개입을 촉구하는 게 아니라, 굳이 반역으로 몰릴지도 모르는 선택을 할 이유가 없잖아?”
창가 앞에서 멈춰 선 그녀가, 다시 이안과 샌퍼드 쪽으로 돌아서며 미소 지었다.
“제국과 교단에 보여 주고 싶지 않은 뭔가라도 있는 게 아니라면 말이야.”
말을 마친 그녀가 폴짝 창틀에 걸터앉았다. 술을 들이켜는 이안의 입가에 옅은 실소가 스치는 사이, 샌퍼드와 하심을 돌아본 테사이아가 덧붙였다.
“내가 너무 정곡을 찔렀나? 왜, 혹시 너희도 그자들과 한패야?”
“그,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화들짝 내뱉은 건 하심이었다. 펄쩍 뛰어오르듯 엉덩이를 들썩이는 채였다.
“군도 놈들이 얼마나 무서운-”
“하심…!”
샌퍼드가 다급하게 돌아보며 내뱉었다. 멈칫한 하심이, 슬쩍 이안을 돌아보고는 다시금 입을 열었다.
“이미 나리와 원로도 알고 계신 눈치잖습니까. 아무리 두려워도, 그 작자들과 한통속이라는 오명까지 뒤집어쓸 수는 없잖습니까!”
“끄응….”
또 말문이 막힌 듯 침음한 샌퍼드가, 이윽고 손바닥으로 부은 얼굴을 쓸어내렸다.
이안이 입을 연 건 그때였다.
“언급을 꺼리는 다른 이유가 있는 모양이지.”
“그게… 말입니다….”
마른세수를 끝낸 샌퍼드가 한숨 섞인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군도 놈들의 태반이 괴상한 고대 신을 섬긴다는 건 사실, 이 근방에선 놀라운 비밀도 아닙니다. 제가 직접 본 건 아닙니다만… 해수를 길들여 끌고 다니는 자들도 많다더군요.”
“해수를…? 그것들이, 길들일 수도 있는 거였어?”
테사이아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샌퍼드가 어깨를 으쓱였다.
“어떻게 하는 건진 저도 모르겠습니다만. 길들여서 해수 사냥에 동원한다고 하더군요. 물론, 해적질에도요. 그런데도 뱃사람들이 언급을 꺼리는 건….”
잠시 침음한 샌퍼드가, 이윽고 속삭이듯 목소리를 낮췄다.
“그 사실을 외부에 발설하면, 해수들이 배를 습격해 침몰시킨다는 이야기가 있기 때문입니다.”
“…미신 때문이었군.”
이안의 입가에 실소가 스쳤다. 하긴. 뱃사람들은 용병들보다도 더한 미신 신봉자들이라 하지 않던가.
테사이아도 비웃음을 흘렸다.
“그놈들이 그걸 어떻게 알겠어? 신도 아닌데.”
“…실제로도 입을 가볍게 놀리다가 배와 함께 사라진 자들이 한둘이 아닙니다. 해안가에 부서진 배의 잔해만 떠밀려 오곤 하죠.”
“어머. 그래…?”
전혀 놀라지 않은 말투로 되물은 테사이아가, 창틀에 옆머리를 기대며 미소 지었다.
“그럼 우리도 습격당하겠네. 이미 이야기를 나눴으니까.”
“그러게나 말입니다….”
비꼰 것을 모르지 않을 텐데도, 샌퍼드는 땅이 꺼질 듯 한숨을 내쉬었다. 도박장에서 이안을 처음 만났을 때의 여유로운 모습은, 이미 찾아볼 수도 없었다.
“출항을 막은 것도 그래서겠군. 다들 알고 있다 해도 어쨌건, 외부인들에게 들키고 싶진 않을 테니까.”
이안이 덤덤하게 덧붙였다. 샌퍼드가 자포자기한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마 그럴 겁니다. 반대로 저희가 해수들에게 잡아 먹히지 않게 하려는 것이거나요. 아무리 길들였다고 해도, 사악한 본능이 아예 사라지진 않았을 테니 말입니다.”
“저희가 불법적인 일들로 먹고살고 있긴 합니다만, 군도 놈들과는 아무런 연관도 없습니다.”
하심이 재빨리 덧붙였다. 가슴 앞에 양손을 모아쥔 채, 절절한 눈빛으로 이안을 바라보는 채였다.
“저희 선장은 겁이 많아서, 군도 근처로는 얼씬도 하지 않습니다. 안개가 짙게 낀 날에는 출항도 하지 않습니다. 여기저기 도박 빚을 잔뜩 지면서도 이 근방을 떠나지 못하는 것도 그래서입니다…!”
“…지금까지 중에 가장 진정성이 느껴지는 말이군.”
이안이 풀썩 웃음 지었다.
사실 이놈들이 타락자가 아니라는 것 정도는 이미,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가까이에서 오래 지켜봤는데도 요그는 물론 혼돈의 정수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으니까.
하심과 샌퍼드가 체념인지 안도인지 모를 한숨을 내쉬는 사이.
“얘기를 듣고 나니 더 아쉽네. 해수까지 대동한 타락자들의 함대가 대마족의 권속들과 싸우는 거잖아. 아주 볼만한 구경거리가 될 것 같은데.”
창틀에 기대앉은 테사이아가 발을 까딱이며 말했다. 하심이 고개를 저었다.
“함대는 물안개를 몰고 다닌다고 합니다. 가까운 게 아닌 이상, 정확한 실체를 파악하긴 어려우실 겁니다.”
“해수에 물안개라… 하긴.”
손에 든 술병을 살살 흔들며, 이안이 읊조렸다. 신의 눈을 가릴 수단 정도는 필요할 터였다. 혹시 모를 외부인들의 눈도. 사방이 물이니 그다지 어렵지도 않을 터였다.
생각하며 술을 한 모금 더 마신 이안이 덧붙였다.
“어쨌든, 룬 카티스를 지나쳐 가기까지 그리 오래 걸리진 않겠네. 집결이 거의 끝나가는 것 같았거든.”
“…그럼 준비를 서둘러야겠군요. 혹시 원로께서 제안하신 일이 성사된다면, 남는 선원들에게도 일자리를 알선해 줘야 합니다.”
샌퍼드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이안이 그를 바라보았다.
“네가 그런 일도 해준다고?”
“…선장의 의무입니다. 그놈들도 먹고는 살아야 하지 않습니까. 녀석들이 끼면 그만큼 나누는 몫이 줄어드는 셈이기도 하니, 선장들에게 골고루 나눠 부탁해야 합니다.”
선원 관리는 정말 살뜰하게 하는군.
이안은 새삼스럽게 외눈의 선장을 바라보았다. 하긴. 배를 타는 건 고되고 위험한 일이 아닌가.
선원들을 관리할 능력이 없는 선장들은, 진작 어딘가에서 물고기 밥이 되었으리라. 어쩌면 본인이 선상 반란을 일으킨 전적이 있으니 더 신경 쓰는 걸지도 몰랐다.
“그렇게 된다면 내가 함께 다녀 주지.”
“…도망치거나 입을 함부로 나불대고 다닐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나리.”
“알아. 그래서가 아니야. 사고 친 거 잊었어? 너희 둘만 다니면 어디서 칼침을 맞을지 모른다고.”
“그런 깊은 뜻이… 그럼, 나리-”
그제야 수긍한 듯 고개를 끄덕인 샌퍼드가 뭔가 덧붙이려는 찰나.
“어머. 벌써 오고 있네.”
창틀에 기대 있던 테사이아가 문득 탄성을 터뜨렸다. 샌퍼드가 멈칫하는 가운데, 그녀가 말을 이었다.
“이안. 와서 볼래? 미끼를 문 것 같거든.”
“그래…?”
선선히 일어선 이안이 창가로 다가갔다. 테사이아에게 술병을 건네며 창밖의 거리를 돌아본 그가, 이내 슬며시 입술을 말아 올렸다.
“…그러게. 이렇게 바로 오다니.”
점점 어둑어둑해지는 거리 너머, 낯익은 마차와 두 기수가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야기를 전해 듣자마자 곧바로 채비해서 달려 나온 것이리라.
하지만 이안의 입꼬리가 말려 올라간 건 그들 때문이 아니었다.
‘저런 그림은 예상 못 했는데.’
가면과 두건을 눌러쓴 루시아는 길을 인도하듯 앞서 걷고 있었다.
그녀와 나란히 걷는 무카파의 어깨 위에는, 놀랍게도 거지 소년이 목마 타듯 앉아 있었다.
험악한 오크의 목에 다리를 두르고 앉아 있건만, 소년은 전혀 겁에 질린 표정이 아니었다. 오히려 몹시 즐거운 듯 웃음 지으며 옆의 루시아와 떠들어대는 중이었다.
이안의 미소가 조금 더 선명해지는 사이.
“어차피 그래야겠지만. 제안은 내가 직접 할게.”
술로 입술을 축인 테사이아가 속삭였다.
“이왕이면 저 기사 말고, 마차 안에 있는 녀석과 직접.”
이안의 시선을 받은 그녀가, 입가에 요정다운 미소를 머금은 채 덧붙였다.
“그게 더 손쉬울 것 같거든.”
“…마중은 내가 나가지. 그게 호위 기사의 역할이니까.”
선선히 대답한 이안이 몸을 돌렸다.
“입조심 알아서들 잘해. 중앙의 귀족들이니까.”
고개를 갸웃거리며 품을 이리저리 뒤적이는 샌퍼드와, 곧은 자세로 앉아 있던 하심을 돌아보며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은 채였다.
미간을 찌푸린 채 몸 구석구석을 다듬던 샌퍼드가, 근처로 다가오는 이안을 돌아보았다.
“저, 나리. 저희도 포도주를 좀 나눠 마셔도 되겠습니까…?”
“안 돼.”
그들을 지나치며 대답한 이안이 방문을 열었다.
“맨정신으로 기다려. 말실수할 일 없게.”
“…….”
다크 판타지의 망캐가 되었다
560화
24.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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