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Dark Fantasy Villain RAW novel - Chapter 57
057화
검은 마차 위.
“아니…?”
푹신한 의자에 앉아 있던 하비에르가 문득 미간을 찌푸렸다.
나른한 표정으로 그 옆을 따르던 샬롯이 고개를 돌렸다.
마석 박힌 목걸이를 움켜쥔 하비에르의 얼굴이 심상치 않았다.
날카로운 눈빛. 그와 반대로 억지로 미소를 그려낸 듯한 입매.
그녀의 고용주가 일이 원치 않는 방향으로 흘러갈 때 지어 보이는 특유의 미소였다.
목걸이를 움켜쥐고 잠시 눈을 감았던 그가, 이윽고 상단의 고용인에게 손짓했다.
그를 포함해 열 명으로 꾸려진 추적대는, 그저 카일과 케네스가 남긴 이정표를 따라 이동만 한 것이 아니었다.
둘씩 짝을 지은 고용인들이 인근을 오가며 정보를 수집해 왔다.
하지만 바쁜 건 그들뿐.
샬롯에겐 따분한 행군의 연속에 불과했다.
“…그리 가지. 준비해 두도록.”
속삭임 끝에 하비에르가 내뱉자, 고개를 끄덕인 고용인들이 말머리를 돌려 달려 나갔다.
그들이 달려가는 방향이 본래의 목적지와는 다르다는 것을 확인한 샬롯이, 비로소 혀를 날름거리고는 입을 열었다.
“뭔가 문제가 생겼습니까?”
“그래… 카일과 케네스가 당했다.”
“……!”
샬롯의 눈이 순간 커졌다.
나른하게 안장에 기대 있던 그녀의 허리가 꼿꼿해졌다.
마차 반대편, 또 다른 직속 호위병인 올레그가 내뱉었다.
“그 검의 달인이라는 놈의 짓입니까?”
“이 변방에 그 둘을 동시에 죽일 실력자가 또 있는 게 아니라면, 아마도. 국왕의 말이 아예 허무맹랑하진 않았던 거야. 내 오판 때문에 추가적인 손실이 생겼군….”
하비에르의 목소리에는 일말의 애도나 슬픔도 담겨 있지 않았다.
손해 본 금액에 대한 아쉬움뿐.
올레그와 샬롯의 반응도 다르지 않았다.
애초에 그들은 고용주가 같을 뿐, 동료애 따위로 맺어진 관계가 아니었다.
샬롯의 얼굴에는 오히려 희열이 번지고 있었다.
빼앗긴 줄 알았던 사냥감이 돌아왔으니까.
“제가 나설 차례로군요.”
그녀가 가르릉대는 숨소리와 함께 내뱉었다.
안장 위로 기분 좋게 곤두선 그녀의 꼬리를 홀린 듯 곁눈질하던 하비에르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지금은 나슬란으로 간다.”
“……?”
샬롯의 꼬리가 힘을 잃었다.
나슬란은 이 근방의 도시였다. 본래라면 들를 일정도 없었던 곳.
그녀는 그제야 조금 전의 고용인들이 나슬란으로 향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상대를 과소평가하는 건 한 번으로 족해. 설사 요행수였다 하더라도, 두 번 반복되지 않으리란 법은 없지.”
“…전 그놈들처럼 당하지 않습니다.”
샬롯이 싸늘하게 내뱉었다.
하비에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네 실력을 잘 안다, 샬롯. 올레그, 자네도. 난 자네들을 믿어. 하지만 상인은 절대 믿음만으로 모든 걸 걸지 않지. 상대가 하룻강아지가 아니라는 걸 알았으니, 조금의 위험도 간과할 수 없어.”
“…어쩌실 생각이십니까?”
올레그가 물었다.
하비에르가 어깨를 으쓱였다.
“이미 다른 들개들이 그들을 쫓고 있지 않나. 우린 그것들보다 더 힘센 사냥개를 풀어야지. 사냥감의 힘이 빠질 때까지 쫓도록. 마침… 나슬란에 그런 사냥개들이 있다더군. 어리석은 선택 때문에 옴짝달싹 못 하게 된 멍청한 사냥개들이 말이야.”
그가 은근한 미소를 지었다.
샬롯에게 어떤 본능적인 혐오감을 불러일으키는, 상인 특유의 미소.
부하들을 바쁘게 놀린 덕분에, 그는 인근 영지의 상황을 손바닥 들여다보듯 알고 있었다.
사냥감이 엄한 자들의 손에 들어갈 것을 염려한 행동이었다. 만일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그자들에게서 빼앗기라도 해야 할 테니까.
국왕이 파견한 기사들의 소식도, 그 과정에서 손에 넣은 정보였다.
루시아 리우렐의 행방을 놓친 것에 분개한 나머지, 거치는 마을마다 현상금을 뿌리고 용병을 고용한 멍청한 놈들.
놈들은 결국, 돈 냄새를 맡은 영주의 명령으로 구금됐다.
국경을 넘어왔으니 저항할 명분도 없었으리라.
그들은 나슬란에서, 벨 론데의 영주 중 누군가가 루시아 리우렐을 붙잡아 오길 기다리는 신세가 됐다.
그때가 되어도 몸값을 흥정할 전령으로나 활용될 테니, 하비에르가 내미는 구원의 손길을 거절할 수 없을 터였다.
자신들의 치욕과 불명예를 씻어 낼 방법은 그것뿐일 테니까.
샬롯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내뱉었다.
“결국은… 몰이 사냥이로군요.”
“그만큼 확실한 방법이 없으니까. 아무리 멍청한 것들이라도, 제대로 된 주인이 목줄을 채워서 부린다면 쓸모가 생기는 법이지.”
“사냥감이 사냥개에 물려 죽게 만들고 싶지는 않습니다만.”
“걱정 마라. 그럴 일은 없을 테니까.”
하비에르가 저 멀리 보이기 시작한 도시를 눈에 담았다.
“사냥감의 숨통을 끊고 전리품을 차지하는 건 자네들이 될 거야. 이만하면, 모두가 만족하는 거래 아닌가?”
“…….”
그런 건 내 취향이 아니라니까. 당신처럼.
속으로 읊조리면서도, 샬롯은 더 이상 불만을 토로하지 않았다.
억눌린 야성을 발산할 기회가 다시 손에 들어온 것만으로도, 조금 더 인내할 가치는 충분했다.
***
말을 교체했음에도, 일행의 이동 속도는 그다지 빨라진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마갑에 새겨진 마법은 제대로 작동하고 있었지만, 말이 달리면 마력 소모량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기 때문이다.
시험 삼아 달려 본 결과, 반나절도 지나지 않아 마석들이 빛을 잃었다.
최소 세 가지 이상의 마법이 새겨져 있는 모양이었다.
짐가방에 남아 있던 마석은 고작해야 사흘 남짓 달리면 동날 분량.
상단에서 온 추적자 놈들은 마석을 말 그대로 물 쓰듯이 하면서 그들을 따라왔던 게 분명했다.
그래서 이안은 속도 대신 이동 시간만 늘리기로 했다.
사실, 의미는 만약의 상황에 더 빠르고 멀리 도주할 방법이 생긴 것만으로도 충분히 있었다.
미구엘은 여기에 한 가지 제안을 더했다.
“시간도 벌었고 더 오래 이동할 수도 있게 됐으니, 여기선 조금 돌아서 갑시다.”
“얼마나?”
“내 기억이 맞으면, 북동쪽으로 질러가면 영주성 인근을 지나야 한단 말이오. 별일 없으면 다행이지만, 있으면 난리가 날 거요. 그러니 우회해서 갑시다. 번 시간만큼 다시 쓰면, 충분할 거요.”
“중간에 들키면 영지를 넘나들면서 튀고?”
“바로 그거요. 이젠 뿌리칠 수도 있잖소. 형씨도 영원히 싸울 순 없으니까. 피할 건 피해야지. 여기만 지나면 버려진 땅이오. 거긴 흉지 천지이니 여기보단 안전하겠지. …거길 안전하다고 표현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너도 드디어 사람이 마물보다 무섭다는 걸 깨우쳤군.”
피식한 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게도 체력과 마력을 회복할 시간이 필요한 건 사실이었다.
그렇게 다시, 언제 끝날지 모르는 조용한 전진이 시작됐다.
마부석의 미구엘은 제국제 석궁을, 그 뒤에 기대앉은 루시는 단검을 질리지도 않고 만지작댔다.
이안은 구석에서, 갑각 같은 재질의 회색 가시에 가죽 띠로 손잡이를 만들고 있었다.
동굴 거미 여왕의 독니였다.
이건 심지어 정보 확인이 가능한 무기였는데, 무려 4레벨의 마비독을 머금고 있었다.
4레벨이면 순간적으로 이안도 마비시킬 수 있는 수준.
수치상 최대 5번에, 따로 독을 보충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강적을 상대할 때 훌륭한 보험이 되어 줄 터였다.
단검을 완성한 이안은 독니를 아공간에 넣고는 몸을 돌렸다.
그리고는 짐가방에서 식량과 붕대, 양초 따위를 꺼내 작은 배낭에 꼼꼼히 눌러 담기 시작했다.
그 영문 모를 행동들을 가만히 지켜보던 루시가, 이윽고 등받이 너머의 마부석으로 고개를 돌렸다.
“미구엘.”
“엉?”
“미구엘은 의뢰가 끝나면 어떻게 할 거예요?”
“어허! 빨리 침 뱉어! 빨리!”
어깨를 들썩인 미구엘이 재빨리 외치고는 밖으로 가래침을 뱉었다.
영문도 모른 채 일단 따라 한 루시가 그를 향해 몸을 돌렸다.
미구엘이 입맛을 다셨다.
“재수 없는 말을 하면, 빨리 침을 뱉어야 해. 일종의 액땜이지.”
“액땜은… 왜 하는 건데요.”
“잘 들어라, 루시. 용병들 사이에는 의뢰 도중에 절대 하면 안 되는 말들이 여럿 있어. 내뱉거나 대답하기만 해도 재수가 옴 붙고, 심하면 죽을 수도 있는 말이지.”
“그건, 저주라고 부르지 않나요?”
“거의 비슷해. 미신이라고 치부하는 사람도 많지만, 내 말 믿어라. 그렇게 무시한 인간들, 다 죽었으니까.”
“제 질문이 그런 거였다고요?”
“그래. 이번 의뢰가 끝나면 뭔가를 하겠냐고 했지? 이 질문에 대답한 순간 저승에 한 다리쯤 걸쳤다고 보면 돼. 비슷한 말로 고향에 돌아갈 거다. 결혼을 약속한 사람이 있다. 자식들이 기다린다가 있지.”
미구엘이 진지한 얼굴로 루시를 돌아보았다.
“이런 말은, 의뢰가 끝난 후에나 하는 거다. …사실, 넌 알 필요 없는 것들이지만.”
“미구엘은 아는 게 참 많은 것 같아요. 특히 미신에 대해서는.”
“네가 저주받았다고 생각하듯이, 나도 그렇거든.”
“하지만 제 저주는 진짜인걸요. 지금까지 이걸 피해간 건 언니를 포함해서 세 분뿐이에요.”
“나랑 저 형씨? 그럼 필립은?”
“필립은… 그 정도는 아니에요.”
푸학, 웃음을 터뜨린 미구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어쨌든 내 말이 그 말이다. 난 불운을 몰고 오는 행동은 절대 안 해. 그 덕에 아직 살아있는 거고.”
“…이해했어요.”
고개를 끄덕인 루시가, 몸을 낮춰 등받이에 턱을 얹었다.
“전 그냥, 절 데려다준 후에 갈 곳이 없다면 함께 남아 주실 수 없나 해서 여쭤본 거예요.”
“엥…? 화로의 사원에?”
“거기에도 고용인들이 있다던데요. 제가 부탁하면 미구엘이랑 이안 님도 지내실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요.”
미구엘의 옆얼굴을 올려다 본 루시가 덧붙였다.
“나중에 제가 다시 세상에 나올 때, 같이 나올 수도 있고. 미구엘은 훌륭한 길잡이니까.”
“흐음… 아니 뭐… 사실 딱히 갈 곳이 정해진 건 아니긴 한데.”
턱을 어루만지는 미구엘의 입술 끝이 슬며시 올라갔다.
“저 형씨는 안 남겠지만, 나는 네가 그렇게나 원한다면 남을 수도 있을 것 같기도 하고…?”
“재수 옴 붙는다더니. 그거면 대답한 거나 마찬가지 아니냐?”
어느새 정리를 끝내고 한쪽 벽면에 기대앉은 이안이 되물었다.
미구엘이 정색하며 고개를 저었다.
“끝을 흐렸잖소. 이건 대답한 게 아니지. …그래서, 형씨는 어떻게 생각하시오?”
“난 당연히 떠날 거다. 그렇게 봐도 달라질 건 없어. 루시.”
“…어디로 가실 건데요?”
루시가 입술을 꾹 누르며 물었다.
이안의 표정이 가라앉았다.
“글쎄… 어디든 가겠지.”
“…….”
“너랑은 상관없는 일이니까, 미련 남길 시간에 연습이나 해. 그날 이후로, 아직 불씨도 못 만들어 내고 있잖아?”
“…알았어요.”
루시가 고개를 끄덕였다.
손바닥을 내려다보는 눈길이 시무룩했다.
미구엘이 슬쩍 중얼댔다.
“거, 말 좀 곱게 하시지. 애 기죽게….”
“곱게 갈아 줄까?”
“…혼잣말이었소. 혼잣말.”
미구엘의 뒤통수에 대고 콧방귀를 뀐 이안은, 이내 비스듬하게 드러누웠다.
“명상할 거니까, 싸워야 될 일 아니면 깨우지 마라.”
“알겠소.”
잠시 어둑어둑한 하늘을 눈에 담은 이안이, 명상을 활성화했다.
주위의 잡음이 사라지면서, 의식이 내면으로 침잠했다.
행선지에 대한 상념이 이어졌다.
이번 의뢰가 끝나고 어디로 갈지는, 그도 아직 제대로 결정한 적이 없었다.
이미 게임에서의 흐름과 그의 여정이 완전히 달라졌기 때문이다.
그때는 벨 론데와 루 사드를 거쳐 북부로 갔고. 산맥 지대와 버려진 땅을 거쳐 화로의 사원으로 들어왔었기 때문이다.
사실상 모든 순서가 어그러진 셈.
‘그럼 아예 역순으로 움직이면…?’
이안은 심상에 지도를 떠올렸다.
화로의 사원에서 버려진 땅으로. 그리고 산맥을 거쳐 루 사드로 향하는 선이 어렴풋이 이어졌다.
그럴듯하지만, 변수는 여전히 많았다.
특히 버려진 땅이나 산맥 지대는, 길을 찾기가 어려운 데다 툭하면 눈보라에 얼어 죽는 바람에 많은 퀘스트를 건너뛴 지역이었다.
물론 그러면 안 된다는 걸, 공략집을 보고 난 지금은 알고 있었다.
그러니 직접 겪어 본 적은 없는 상황을 여럿 마주하게 될 터.
‘…각오 단단히 하고 움직여야겠군. 기억도 열심히 되새기고.’
그 과정에서 죽지만 않는다면, 제국에 들어설 때쯤엔 게임에서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강해져 있으리라.
‘만약 루 사드까지 포인트를 쓰지 않고도 버틸 수 있다면… ……?’
이안은 문득 생각을 멈췄다.
감각이 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되살아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휘이이이-
휘파람을 부는 것 같은 바람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 왔다.
시야가 천천히 밝아졌다.
새하얀 눈밭 위. 어둠 너머까지 끝도 없이 펼쳐진, 가지만 앙상한 흰 나무들.
‘이건 또 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