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Dark Fantasy Villain RAW novel - Chapter 575
#575화
“우웩…!”
입술을 달싹이던 테사이아가, 대답 대신 피를 왈칵 토해냈다. 갑옷과 망토에 튀었지만, 이안은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그저 테사이아의 얼굴만 훑고 있었다.
“이렇게 되기 전에 멈추라니까….”
마력 탈진. 이렇게 급격하게 진행된 걸 보면, 마지막 한 톨의 마력까지 전부 쏟아부은 게 분명했다.
물론 지금까지 버틴 것만으로도 대단하다고 할 수 있었다. 서리 장막뿐 아니라, 고위 마법까지 연달아 펼쳐 대지 않았는가. 심지어 마지막 주문의 규모가 가장 컸다.
“기절하지 말고 기다려.”
덧붙이며, 이안이 오른손을 아공간에 밀어 넣었다. 테사이아가 간신히 손을 뻗어 그의 팔뚝을 쥔 건 그때였다.
“내 거… 내 걸 마시면 돼… 허리… 뒤에….”
“나중에 네 걸 나한테 주면 되잖아.”
툭 그녀의 팔을 털어버린 이안이, 아공간에서 유리병을 꺼냈다. 이로 깨물어 마개를 뺀 그가, 병을 테사이아의 입가로 가져갔다. 우윳빛 수액이 피범벅인 입술 사이로 흘러내렸다.
사아아….
그 와중에도 증발하듯 번지는 마력과 산뜻한 향기가 이안의 코끝을 스쳤다. 물론, 이안은 멈추지 않고 유리병을 기울였다.
생명수의 진액이 마지막 한 방울까지 테사이아의 입속으로 사라졌다.
“콜록…! 하, 하아…!”
간신히 전부 삼킨 테사이아가 숨을 몰아쉬었다. 효과는 즉각적이었다. 경련하듯 꿈틀대던 눈가의 핏줄들이 서서히 잦아들고, 테사이아의 숨결 역시 안정을 찾아갔다.
그녀의 몸속에서 번지기 시작한 마력이 이안에게도 느껴질 정도였다.
“벌써… 살 것 같네…. 고마워, 이안….”
눈을 가늘게 뜬 테사이아가 읊조렸다. 창백한 미소를 입가에 머금는 채였다. 빈 병을 아공간에 되돌린 이안이, 손가락으로 그녀의 입가를 문질러 닦으며 말했다.
“빌려준 거니까, 떼먹을 생각은 하지 말고.”
“당연하지…. 또 잊었어? 난 은혜를 아는 귀쟁이라고….”
풀썩 웃음 지으며, 이안이 그녀의 오금에 왼팔을 밀어 넣었다. 테사이아가 고개를 저었다.
“그냥 눕혀만 줘… 잠깐 쉬면 금방 괜찮아질 거야….”
“알아.”
덤덤하게 내뱉으며, 이안이 테사이아를 안고 일어섰다. 그녀의 입가에 미소가 번지는 가운데, 이안이 뒤를 돌아보며 덧붙였다.
“그 전에 싸우게 될지도 몰라서 그래.”
자욱하던 안개는 이미 흔적도 남지 않았다. 눈보라의 잔재들만이 흐릿하게 흩날리고 있을 뿐이었다.
덕분에 다시 파도가 거세지고 있는 바다와 그 너머를 뒤덮은 자주색 물결이 선명해졌다.
그 앞. 듬성듬성 늘어선 함선들의 푸른 빛 역시 점점 더 짙어지고 있었다. 서리에 뒤덮인 갑판 위로 크고 작은 움직임들이 번졌다.
-분위기 깨려는 건 아니지만….
속삭임이 번진 건, 그 모든 광경을 눈에 담은 이안이 몸을 돌린 순간이었다.
상황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느긋한 말투로, 요그가 덧붙였다.
-아래로 내려갈 거면, 나는 모로에게 다녀와도 될까? 물론 친구, 네 혼돈을 나눠 주려는 거야.
그냥 그 핑계로 네가 배 터지게 처먹고 싶은 것 같은데.
생각하면서도, 이안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며 걸음을 옮겼다.
아까 말하려다 말았지만. 사실 녀석에게 혼돈을 나눠 줄 생각이 아니었던가. 축축한 판금 장화 안으로 기어들어 온 요그가 그의 발등을 물었다.
“뒤는 신경 쓰지 마! 앞만 봐! 앞사람 뒤통수만 보라고!”
그사이 이안은 갑판 가장자리의 계단을 내려갔다. 저 앞, 고래고래 소리치는 샌퍼드의 뒤통수를 눈에 담는 채였다. 품에 안겨 있던 테사이아가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따듯하네….”
이안의 품을 말하는 건 아닐 터였다. 중앙 갑판 인근의 공기는 확실히 더 푸근했으니까. 성화의 영향력 역시 마찬가지이리라.
뚱뚱해진 요그가 질색하듯 다리를 타고 기어 나가는 가운데.
“귀빈…!”
무카파가 이안쪽으로 달려왔다. 오른손에 쥔 전투 망치를 어깨에 비스듬하게 걸친 채였다.
“참 잘 어울리는군.”
이안이 턱을 까딱이는 사이, 기도를 올리고 있던 루시아가 비로소 고개를 돌렸다.
“정말이지 대단한 주문이었… 언니?”
내뱉던 그녀의 눈이 커졌다. 이안의 눈을 바라보며, 루시아가 덧붙였다.
“마력 탈진인가요?”
“이젠 아니야… 괜찮아….”
대답한 건 테사이아였다. 한쪽 팔을 맥없이 들었던 그녀가, 그대로 얼굴로 가져가며 말을 이었다.
“화로 근처에서 잠깐만 쉬면 돼… 금방 다시 쌩쌩하게 회복할 수 있을 거야….”
그녀는 입가에 잔뜩 번진 피를 닦아내고 있었다. 이 와중에도 체면을 따지는 것이리라. 물론 이안이 그랬듯, 핏자국만 더 지저분하게 번질 뿐이었다.
“부탁할게.”
이안이 그녀를 앞으로 내민 건 그때였다. 멈칫한 테사이아가, 인상을 찌푸리며 무카파를 돌아보았다.
“감히 내 몸에… 또 손을 댈 생각은 하지도 마…! 이안? 그냥 네가 저기까지- 으엑….”
이안을 올려다보며 덧붙이던 테사이아가, 맥없이 무카파의 팔로 옮겨졌다. 무카파는 그녀를 한쪽 팔로 아기처럼 안아 들었다.
그의 겨드랑이 아래에 머리를 기댄 테사이아가 말 그대로 오만상을 찌푸렸다. 무카파가 눈길도 주지 않은 채 몸을 돌리는 사이.
“선장, 얼마나 더 가야 하지?”
이안이 화로 너머를 바라보며 물었다. 외침을 멈추고 눈치만 살피고 있던 샌퍼드가 재빨리 대답했다.
“아, 아직 한 시간 이상 더 가야 합니다! 저 등대 불빛이 보이십니까? 저 근처를 지나쳐야 합니다!”
이안은 샌퍼드가 가리킨 선두 쪽을 돌아보았다. 넘실대는 파도 저 멀리, 일렁이는 불빛이 보였다.
그 아래로 어둠에 잠긴 해안 절벽의 울퉁불퉁한 능선이 설핏 드러나고 있었다.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게 되긴 했지만, 어쨌건 아직 꽤 멀었다.
“그럼 지금처럼 계속 목표만 보고 가.”
입맛을 다시며 내뱉은 이안이, 다시 샌퍼드의 얼굴을 돌아보았다.
“뒤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도 신경 쓰지 말고, 계속.”
“…상황이, 많이 안 좋습니까?”
멈칫한 샌퍼드가 물었다. 차마 자신의 눈으로 직접 확인할 엄두가 나지 않는 모양이었다.
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조만간 따라잡힐 거야.”
“하… 행운의 여신이여… 부디….”
눈을 질끈 감으며 탄식하던 샌퍼드의 어깨가 뒤이어 들썩였다.
저 뒤편에서 한순간 날카로운 괴성이 메아리쳤기 때문이었다.
콰앙! 퍼엉-
이안의 귓가로는 흐릿한 폭음도 파고들고 있었다. 함대가 부키키아의 권속들에게 따라잡힌 게 분명했다.
“이번에는 제가 따라갈게요.”
화로 옆에 누운 테사이아를 바라보던 루시아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이안을 돌아보는 가면 너머의 눈동자는 여전히 주황빛으로 일렁이고 있었다.
“아니. 지금은 화로에만 신경 써.”
곧바로 고개를 저은 이안이, 테사이아의 머리맡에 선 무카파를 일별하며 덧붙였다.
“성화가 끝까지 무사해야 노잡이들도 버티고, 부키키아도 쉽사리 덤비지 못할 테니까.”
“그럼, 이안님 혼자 저것들을 상대하시겠다고요…?”
루시아가 눈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어깨를 으쓱인 이안이 몸을 돌리며 대답했다.
“혼자는 아니지. 군도의 함선들도 있잖아. 테사도 곧 합류할 거고.”
“하지만….”
“어차피 너도 싸워야 할 순간이 올 거야. 그전에 성화가 꺼지지 않도록 만반의 준비를 해 둬.”
말을 맺은 이안이 곧바로 걸음을 옮겼다. 등 뒤로 샌퍼드의 외침이 따라붙은 건 바로 그 직후였다.
“파도가 거칠어지고 있습니다! 조심하시고 부디, 부디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초인…!”
입조심하라니까….
속으로 대꾸하며, 이안은 성큼성큼 계단을 올랐다. 이 와중에도 망토 아래에 늘어뜨린 밧줄을 왼팔에 천천히 감아올리는 채였다.
이건 그의 목숨 줄이기도 했다.
배는 이 순간에도 계속 전진하고 있지 않은가. 망망대해 한복판에 버려지고 싶지 않다면 잘 간수 해야 했다.
-어서 오라고. 다시 재미있어 지고 있으니까.
요그의 속삭임이 번진 건 이안이 선미 갑판에 올라선 때였다.
녀석은 어느새 나무 틀 사이, 반쯤 박힌 듯이 고정된 갈고리 위에 올라타 있었다.
키아- 아아아아-
히아아아-
갑판을 가로지르며, 이안은 난간 너머로 펼쳐진 광경을 눈에 담았다. 군도의 함선들은 뿔뿔이 흩어지는 중이었다. 뒤따르는 해수들을 향해 푸른 궤적을 연신 쏴대는 채였다.
송곳 같은 얼음 결정들이 쏟아져 내리거나 방벽이 솟구치기도 했다.
‘역시, 아직 주문쟁이들이 남았네.’
이안의 입꼬리가 슬쩍 비틀렸다.
저주가 분명한 불길한 마력까지 느껴지고 있었다. 어쩌면 아직 남아 있는 주문 쟁이들은 평범한 인간의 형상은 아닐지도 몰랐다.
어쨌건, 이쪽에 복수하는 건 포기한 게 분명했다. 정확히는 그들을 신경 쓸 겨를도 없는 것이겠지만.
-기대 만큼 오래 버티지는 못하겠는걸.
요그의 속삭임을 들으며, 이안이 훌쩍 난간 위로 올라 섰다.
녀석의 말대로, 모든 함선이 도주하고 있는 건 아니었다. 몇 척은 끝끝내 해수들을 뿌리치지 못했다.
키아아아아-
갑판 위에 해수 한 마리가 올라탄 배도 그중 하나였다. 거대한 톱날 상어처럼 생긴 놈이, 가시가 잔뜩 돋아난 뿔과 지느러미를 마구 휘두르며 날뛰고 있었다.
톱날에 찢기고 지느러미에 맞아 풍선처럼 터져 버린 타락자들의 잔해가 사방으로 튀어 올랐다.
콰지지지직-
기울어지고 있는 또 다른 배는, 측면에 거대한 거북이가 충차처럼 박혀 있었다. 등껍질에 삐죽삐죽한 가시가 돋은 거대 거북이였다.
배는 곧 반으로 쪼개지며 완전히 뒤집혔다. 잔해를 밟고 올라선 거대 거북이가 두 개의 머리를 치켜들고, 그 주위로 다른 해수들이 달려들었다.
배에서 번지던 푸른 빛이 자주색에 뒤덮이며 잦아들었다.
“하….”
하지만 이안의 시선이 그쪽에 머문 건 아주 잠깐이었다. 한숨을 내쉬는 그의 눈은, 함선들을 뒤따르거나 지나쳐 버리는 자줏빛들을 훑고 있었다.
-오래 안 걸릴 것 같은데. 어쩔 거야, 친구?
요그의 느긋한 속삭임이 번졌다. 녀석은 나무 틀 위로 기어 올라가 이안을 돌아보고 있었다.
혀를 찬 이안이, 틀 안쪽에 박혀 있는 갈고리를 더 단단하게 고정하며 내뱉었다.
“어쩌긴. 싸워야지.”
요그가 키득댔다. 녀석이 은근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야 알지. 어떻게 싸울 거냐는 얘기였어. 역시, 마법으로?
합리적인 추측이었다. 파도가 넘실대는 망망대해 한복판인 데다가, 배를 지켜야 하지 않던가. 하지만 이안은 갈고리에서 손을 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저것들을 죽일 정도의 마법은 못 써.”
마력 소모는 둘째 치고, 부키키아를 불러들일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놈에게까지 타격을 입힐 만한 주문은 자제해야 했다. 설사 놈과 싸우게 되더라도, 가능한 한 뒤로 미루는 편이 좋았다.
스르릉…
더 덧붙이는 말 없이, 이안이 진은 강철 검을 뽑아 들었다. 새하얀 칼날이 모습을 드러내자, 요그의 웃음이 선명해졌다.
-아, 그래… 아주 볼만 하겠는걸.
백금 방벽까지 펼치며, 이안이 녀석을 돌아보았다.
“그러다 죽는 것까지 보고 싶지 않으면, 날 도와줄 방법을 떠올리는 게 좋을 거야.”
물론 정말 죽을 생각은 없었다. 그저 뭐라도 도움이 되라는, 일종의 공갈 협박에 불과했다. 테사이아가 복귀할 때까지만 버티면 숨통이 좀 트일 테니까.
하지만 응답한 건, 뜻밖에도 요그가 아니었다.
사아아아…
왼팔을 타고 뜨끈한 열기가 번지더니, 몸속으로 신성이 더 밀려든 것이다. 이안의 입꼬리가 슬며시 말려 올라가게 하기에도 충분했다.
‘이 새끼도 듣고 있었네….’
카르하가 여전히 감청 중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서였다. 물론 여전히 예전만큼 능력치가 많이 오르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이제는 충분히 유의미한 수준이었다.
-고민해 볼게. 내가 뭔가 떠올릴 때까지, 최선을 다해 버텨 보라고.
이어진 속삭임에, 이안이 다시 정면을 돌아보았다.
“그럼, 그동안 배에 가까워지는 놈의 위치라도 계속 알려 줘.”
잿빛으로 물든 그의 눈동자가, 제대로 된 대열도 없이 우글우글 가까워지는 자주색 물결을 훑었다.
“아마 곧, 넓게 볼 상황이 아니게 될 것 같으니까.”
파도 사이로 설핏 드러나는 해수들의 모습은 말 그대로 가지각색이었다. 공통점은 끔찍하게 생겼다는 것과 크다는 것뿐이었다.
심지어 전부 모습을 드러내며 다가오는 것도 아니었다. 수면 아래에 모습을 감춘 놈들도 있었다.
“…….”
가장 빠르게 배의 후미로 가까워지고 있는 놈도 그랬다. 자주색으로 일렁이고 있어 기습당할 걱정은 없었으리란 사실은, 물론 별다른 위안이 되지 못했다.
쾅-! 콰광-
키아- 아아아-
도망치는 함대가 만들어 내는 폭음과 해수들의 괴성이 어지럽게 메아리치는 가운데.
‘이젠 하다하다….’
수면 아래로 일렁이며 가까워지는 거대한 자줏빛을 응시하던 이안의 입가에, 이윽고 쓴웃음이 번졌다.
‘…수중전까지 하게 생겼네.’
더는 지켜만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가까워지면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낼지도 몰랐지만. 그대로 아래로 들어가 배를 단박에 침몰시키려 할 가능성도 충분했으니까.
솨아아-
진은 강철 검의 표면에 황금빛 진언이 번지기 시작한 건 바로 그 직후였다. 샛노란 용의 마력이 칼날을 감싸며 솟구치는 가운데.
“하….”
왼손의 줄을 전부 풀어버린 이안이, 짧은 한숨을 내쉬고는 몸을 날렸다. 새카만 파도가 넘실대는 해수면을 향해서.
다크 판타지의 망캐가 되었다
576화
24.03.12
대여
2일 23시간 남음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