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Dark Fantasy Villain RAW novel - Chapter 585
#585화
눈을 감은 이안의 미간이, 불쾌함에 절로 일그러졌다. 그런 와중에도 양팔의 힘은 풀지 않는 채였다.
카드드드득-
자루를 타고 단단한 진흙을 가르는 듯한 감각이 번졌기 때문이다. 검날이 십자 막이 앞까지 깊숙하게 박히고, 뒤이어 이안의 전신이 끈적한 점막과 충돌했다.
충격이 크지 않은 건 작은 돌기들이 돋아난 점막이 기분 나쁘게 푹신해서였다. 물론, 눈알에 가득한 끈적한 점액이 속도를 줄여준 덕분이기도 할 터였다.
‘개 같네, 진짜….’
이안의 미간이 절로 일그러졌다. 심지어 주위가 점점 미지근해지고 있기까지 했다. 카르하의 신성이 혼돈을 태워버리고 있었다.
쿠구… 쿠구…
타고 남은 일부는 정수의 차지였다. 혼돈의 정수가 선명하게 맥동하며 혼돈을 빨아들였다. 겉은 뜨겁고 속은 차가운 감각에 이안이 내심 혀를 차는 사이.
“——-!”
찢어지는 듯한 비명이 이안의 전신을 울렸다. 동시에 부키키아가 발작하듯 몸을 뒤흔들었다.
이안은 반사적으로 왼손을 내뻗어, 앞에 튀어나온 돌기를 움켜쥐었다. 깊숙이 박힌 칼날이 살점을 가르며 주르륵 아래로 미끄러졌기 때문이었다.
쿠화악-
뒤이어 눈을 감고 있어도 보이는 자줏빛이 용암처럼 뿜어져 나와 그의 전신을 뒤덮었다. 부키키아의 체액이 분명했다.
쿠구- 쿠구-!
혼돈의 정수가 토해내는 울림이 삽시에 선명해졌다. 동시에 모든 감각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 물론, 이안은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하여간 꼭 이럴 때에.’
이제는 익숙하기 그지없는 현상이었으니까. 또 쓸데없이 부키키아의 의식과 이어진 게 분명했다.
역시나. 눈앞으로 그의 것이 아닌 기억들이 선명하게 스쳐 지나갔다.
햇볕이 내리쬐는 아름다운 바다. 곁에 수많은 동족이 헤엄치고, 그 뒤로 문어와 오징어를 섞어둔 듯한 거대한 해수가 함께했다.
바다의 수많은 포식자와 이안이 본 것과는 다른, 비교적 자연스럽게 생긴 해수들. 그리고 그것들을 공격하는 함선들의 모습이 이어졌다. 어지러운 포효와 비명.
피가 자욱하게 뒤엉기는 바다와, 죽어가는 해수들. 그 사이로 넘실대며 밀려드는 자줏빛.
‘안 궁금하다니까….’
자신의 것이 아닌 분노와 복수심 속에서, 이안은 심드렁하게 뇌까렸다. 방금의 일격이 부키키아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입힌 게 분명하다고 덧붙이는 채였다. 애초에 이미 죽어가고 있던 놈이 아니던가.
그 와중에도 장면들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주로 피비린내 나는 전투였다.
침몰하는 함선과 공포에 질린 인간들. 죽어가는 권속들. 빛 한 점 들지 않는 해저 동굴이 펼쳐졌다.
분노와 공포가 어지럽게 뒤엉킨 다음 순간, 바다 한복판을 가르는 검은 장벽이 눈앞에 펼쳐졌다. 그 끈적한 표면에서 번지는, 바다를 탁하게 물들이는 어둠까지.
-흥미롭긴 하지만 말이야.
속삭임이 불현듯 뇌리를 파고든 건, 어둠에 뒤덮인 바다와 드넓은 대양이 교차하는 순간이었다.
그리움과 갈망이 손에 잡힐 듯 선명하게 느껴지는 가운데, 요그의 속삭임이 이어졌다.
-덕분에 이놈이 정말 뵈는 게 없어진 모양이야, 친구. 우리를 매단 채로 움직이고 있거든.
동시에 모든 감각이 되돌아왔다. 요그의 말처럼, 부키키아는 움직이고 있었다.
정수의 울림과 잦아드는 열기 사이로, 몸을 스치고 지나가는 물살의 압력이 느껴졌다.
‘대양으로 돌아가려는 욕망만 남은 건가.’
생각하면서도, 이안은 요그 역시 튕겨 나가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랬다면 밧줄로 이어진 그 역시 함께 딸려 나갔을 테니까.
부키키아의 살가죽을 찢고 머리를 파묻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이안의 눈매가 뒤이어 꿈틀댄 건, 녀석이 상처 입었다는 사실이 뇌리를 스쳐서였다.
본래도 얕은 부상은 아니었겠지만. 부키키아에게 전력으로 충돌한 지금은 더 심각한 상황일 게 분명했다.
-이대로 계속 가는 게 어때, 친구? 아직 숨을 참을 수 있다면 말이야.
요그의 속삭임이 번진 건 그때였다. 뛰어내리려 몸을 웅크렸던 이안이 멈칫했다. 녀석의 나른한 속삭임이 이어졌다.
-이놈, 지금 위로 올라가고 있거든. 수면 위로 올라가면 그때 내리자고. 차라리 그게 더 안전할 것 같은데.
녀석의 말 그대로였다. 이안은 비로소 부키키아가 위로 비스듬하게 상승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최후의 발악처럼 거대한 물보라를 일으키려 한다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물론, 그런 상황은 막아야 했다.
“——!”
부키키아의 비명이 물살을 뚫고 번지는 가운데, 요그의 웃음기 섞인 속삭임이 나른하게 번졌다.
-게다가… 이놈의 혼돈은 꽤 맛이 좋거든.
이게 본론이었군.
이안의 한쪽 입꼬리가 슬며시 비틀렸다. 물론 뛰어 내리지는 않았다. 그저 오른손에 쥔 검의 자루를 더 깊숙하게 찔러넣을 뿐이었다.
어쨌건, 요그가 당장 죽을 것 같지는 않았으니까.
***
쩌저저적- 콰앙-!
연달아 번지던 결정 장막이 일제히 폭발했다. 여러 개의 촉수와 함께 솟구치던 해수가 비명을 내지르며 수면 아래로 추락했다.
“대체 뭘 하는 거야, 이안…!”
하지만 후미 난간에 선 테사이아의 얼굴에는 조금의 미소도 맺혀 있지 않았다.
흐르는 코피를 손등으로 눌러 닦으며, 그녀가 오른쪽으로 홱 고개를 돌렸다.
“……!”
좌현 너머로 비스듬하게 가까워지는 또 다른 자주색 궤적. 수면 아래로 심해어를 떠올리게 하는 기다란 형상이 조금씩 선명해졌다.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는 그녀의 눈가로, 지렁이 같은 핏줄들이 꿈틀대며 돋아났다.
“아윽…!”
인상을 찌푸린 테사이아가 비틀댄 건 바로 그 직후였다. 손으로 머리를 부여잡았던 그녀가, 뒤이어 한 모금의 피를 왈칵 토해냈다.
마력 탈진이 아니었다. 그녀의 몸속에 자리한 뿌리와 혈관은 반대로 과열된 상태였다. 지나치게 많은 주문을 연달아 운용한 부작용이었다.
콰르르르- 퍼엉-!
그녀가 숨을 몰아쉬는 사이, 뿜어져 나간 주황색 불덩이가 폭발했다. 아래로 주황색 불꽃들을 마구 흩뿌리는 채였다. 수면 아래로 설핏 모습을 드러냈던 해수가 비명을 내지르며 가라앉았다.
“괜찮아요, 언니?”
내뻗었던 오른팔을 늘어뜨리며 루시아가 소리쳤다. 테사이아가 화들짝 그녀를 돌아보며 대꾸했다.
“다, 당연하지! 별거 아니야!”
물론 그녀의 안색은 창백하기 짝이 없었다. 상태가 좋지 않은 건, 루시아의 뒤편에 이글대는 성화도 마찬가지였다.
온기는 여전히 갑판을 뒤덮고 있었지만, 불길은 처음 지폈을 때보다도 훨씬 작았다. 더는 던져 넣을 장작도 남지 않은 상황이었다.
키아아아아-
부오- 오오오오-
뒤이어 번지는 괴성에, 테사이아가 곧바로 주문을 준비하며 고개를 돌렸다. 핏줄이 꿈틀대는 그녀의 눈매가 가늘어진 건 바로 그 직후였다.
“……?”
해수들이 오히려 멀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혼란에 빠진 것처럼 울부짖으며 저 먼바다 쪽으로 일제히 방향을 바꾸고 있었다.
“이거 설마…?”
테사이아와 루시아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를 돌아보았다.
“이안…!”
변화를 눈치챈 건 둘만이 아니었다. 외눈을 치켜뜬 채 바다를 돌아보던 샌퍼드의 얼굴에도 화색이 번지고 있었다.
“물러난다…! 해수들이 물러나고 있어!”
양팔을 번쩍 치켜들며 소리친 그가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이유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한 얼굴로 계단 아래를 돌아본 그가 목청을 높였다.
“계속 저어! 절벽이 코앞이라고! 언제 또 상황이 바뀔지-”
대기를 찢을 듯한 괴성이 샌퍼드의 목소리를 묻어버린 건 그때였다. 화들짝 고개를 돌린 그의 외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넘실대는 파도 어두운 바다 저 너머. 자줏빛 촉수들을 내뻗으며 비스듬하게 솟구치는 거대한 형체가 드러나고 있었으니까.
“루 솔라 맙소사….”
하지만 샌퍼드가 경악성을 흘린 건 대마족 때문만이 아니었다.
향유고래를 방불케 하는 거대한 몸통 위. 불길처럼 이글대며 흘러내리는 붉은 궤적이 시선을 사로잡은 것이다. 샛노랗게 번쩍이는 선을 뒤따르듯 새겨넣는 채였다.
물보라 사이로 추락하고 있는 보라색 궤적은, 그 강렬한 존재감에 가려져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다.
대마족이 내뻗었던 촉수들을 웅크리듯 구부리며 수면으로 떨어진 건 바로 그 직후였다.
콰아아아아-
뒤이어 동심원을 그리며 파도가 번져 나왔다. 불현듯 외눈을 깜빡인 샌퍼드가 득달같이 허리를 숙였다.
“다들 자세 낮춰! 충격에 대비해! 파도가 온다-!”
하지만 밀려드는 파도는 아까 배를 뒤엎을 듯 덮치던 것만큼 빠르고 거세지 않았다. 그저 언덕을 넘듯, 선체가 한차례 크게 출렁였을 뿐이었다.
키에- 에에에에에-
묘하게 구슬프게 느껴지는 비명이 메아리쳤다. 계단 난간을 붙잡고 자세를 낮췄던 샌퍼드가 조심스럽게 상반신을 일으켰다.
파도가 씻겨 내려간 것처럼 고요해진 바다 저 너머.
“…허.”
수면에 둥둥 뜬 대마족의 거구에서 자줏빛 연기가 장막처럼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치솟은 불길한 자줏빛은, 내해 쪽으로 자욱하게 휘몰아치며 흩어졌다.
그리고 그 와중에도, 대마족의 꿈틀대는 거구는 물살을 가르고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샌퍼드는 놈이 흑해로 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눈치챘다.
솨아아아-
놈을 뒤따르듯 모여드는 자줏빛 궤적들도.
물론 모든 해수가 흑해로 향하는 건 아니었다. 일부는 대마족이 뿜어내는 자줏빛에 홀린 것처럼, 내해 쪽으로 멀어지고 있었다.
“타 쟈카르….”
옆에서 나지막한 탄성이 번졌다. 샌퍼드가 멍하니 옆을 돌아보았다.
갑판에 거꾸로 세운 전투 망치의 자루를 움켜쥔 오크 전사가, 어울리지 않게 일렁이는 눈으로 저 먼바다를 응시하고 있었다.
“타… 뭐요?”
“사막의 구원자께서, 심해의 대마족을 처단하신 겁니다.”
엄숙하기까지 한 말투로 내뱉은 무카파가, 비로소 고개를 돌려 샌퍼드를 마주 보았다.
“황금 사막의 옛 수호자에게 안식을 가져다주었듯이.”
“그… 러니까….”
한 박자 늦게 읊조린 샌퍼드의 고개가, 다시 바다 쪽으로 돌아갔다.
“그분께서 정말… 저 괴물을… 이런 시부럴! 깜짝이야!”
샌퍼드가 펄쩍 뛰어올랐다. 좌현 갑판 너머에서 커다란 보랏빛 궤적이 불쑥 솟구쳤기 때문이다.
범고래 해수였다.
“요그…?!”
루시아가 가면 너머의 눈을 치켜뜨며 내뱉었다. 물보라와 함께 포물선을 그리는 해수를 올려다보는 채였다. 물론 그쪽을 바라보는 건 그녀뿐이었다.
쿠당탕탕탕-
뒤이어 붉은 궤적이 갑판 위로 쏜살같이 떨어져 내렸으니까.
어느새 마구 밖으로 고개를 내민 샤힌과 시몬을 비롯한 모두의 시선이, 바닥을 나뒹구는 이안에게 집중됐다.
하지만 흠뻑 젖은 채 자세를 다잡는 이안은 그들 쪽으로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푸화악-
그는 배 아래로 사라지는 범고래 해수 쪽으로 곧바로 다시 달려 나갔다. 치솟는 물보라 사이로 왼팔을 내뻗는 채였다. 떨어져 내리던 밧줄이 그의 손아귀로 빨려들었다.
그대로 미끄러지듯 멈춰 선 그가, 양손으로 움켜쥔 밧줄을 끌어당겼다.
꾸드드득-
곳곳에 움푹 파인 갑판과 밧줄이 걸린 난간이 비명을 질렀다. 밧줄을 움켜쥔 이안이 천천히 끌려가다가 이윽고 완전히 멈춰 섰다.
그가 양팔을 움직여 천천히 밧줄을 끌어당기는 사이.
“설마….”
루시아가 이안의 곁으로 달려갔다. 샌퍼드도 엉겁결에 그녀를 따라 난간 앞으로 향했다.
루시아가 가면을 이마로 밀어 올리는 가운데, 샌퍼드가 난간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미친….”
몸에 밧줄을 휘감은 범고래 해수의 모습이 수면 위로 드러나고 있었다. 터져 나간 복부에서 내장과 체액이 줄줄 흘러내렸다. 맥없이 꿈틀대고 있기까지 했다.
그 모습을 내려다보는 루시아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설마… 요그….”
“아니야.”
말을 자른 건 밧줄을 움켜쥔 이안이었다. 루시아를 돌아본 그가, 억눌린 목소리로 덧붙였다.
“그놈은 안 죽었어.”
푸스스, 해수의 전신에서 검은 연기가 스멀스멀 번져 나온 건 그때였다. 샌퍼드의 눈이 커지는 가운데, 아른거리는 보랏빛을 머금은 연기가 쏜살같이 이안의 품으로 날아들었다.
곧바로 줄을 놔 버린 이안이, 허리에서 진은 강철 검을 뽑아 들며 내뱉었다.
“봐. 괜찮잖아.”
검집에서 빠져나오는 검날에 샛노란 진언이 위태롭게 번졌다.
이안은 곧바로 밧줄을 내리쳤다.
깔끔하게 잘려나간 밧줄이 난간 너머로 사라지고, 칼날에 번지던 마력이 증발하듯 흩어졌다.
이안이 다시 검을 허리춤으로 되돌리는 사이.
“그래서, 다 끝난 거야?”
옆에서 테사이아의 목소리가 번졌다. 그녀가 머리 색만큼이나 창백한 얼굴로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다.
“…그래. 그런 것 같네.”
이안이 슬며시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대답했다. 어느새 전신에 이글대던 붉은 신성이 아스라이 흩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뒤이어 그의 고개가 오른쪽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네 역할은 아직 안 끝났어, 선장.”
“네, 넷…!”
화들짝 어깨를 떤 샌퍼드가 허리를 뻣뻣하게 세우며 대답했다. 이안과 눈도 마주치지 못한 채였다.
“염려 마십시오, 성자 대행…!”
이안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대신 루시아와 테사이아가 소스라치게 난간 밖으로 몸을 기울이며 손을 내뻗었다.
터억-
밖으로 떨어질 것처럼 허물어지던 이안의 가슴팍을 둘의 손바닥이 붙잡았다. 그는 선 채로 기절해 버린 상태였다. 안도의 한숨을 내쉰 루시아가 이안을 갑판으로 끌어당기는 사이.
“무카파. 이안 좀 들어 주겠어? 사실, 나도 곧 기절할 것 같아서 말야.”
시선을 돌린 테사이아가 내뱉었다. 곧바로 전투 망치를 내려놓은 무카파가 성큼성큼 다가왔다.
뒤이어 한쪽 무릎을 꿇은 그가, 정신을 잃은 이안을 양손으로 고이 받쳐 안아 들었다.
어떤 종교적인 의식이라도 치르는 듯한 경건한 움직임이었다.
“초인….”
“영광 있으라….”
그건 마구 안에 선 샤힌과 시몬도 마찬가지였다. 길을 트듯 옆으로 물러선 둘이 고개를 숙이는 가운데.
“성자 대행께서 하신 말씀, 들었지?”
무카파의 뒤를 휘청대며 따르던 테사이아가 문득 샌퍼드를 돌아보았다. 그녀가 미소에 어울리지 않는 서늘한 눈빛으로 덧붙였다.
“네 역할, 알아서 잘해. 선장.”
“예…. 염려 마십시오….”
샌퍼드가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다소 떨떠름한 얼굴이 된 건 어쩔 수 없는 부분이었다. 하룻밤이 한 달처럼 길게 느껴졌으니까.
화로의 축복 덕에 몸에는 아직 힘이 남아 있었지만, 정신적인 피로는 이미 한계를 넘은 상태였다.
“조금만 더 애써 주세요. 선장. 저도 성화가 최대한 오래 유지 되도록 노력해 볼 테니까요.”
샌퍼드를 다독이듯 덧붙인 루시아가, 화로 쪽으로 몸을 돌렸다.
푹 한숨을 내쉰 샌퍼드의 시선이, 문득 바다 쪽으로 돌아갔다.
파도가 잦아드는 가운데, 자줏빛을 흩날리는 부키키아는 어느새 저만치까지 멀어지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심해의 대마족은 자신의 고향에서 최후를 맞이하게 될 터였다. 비록, 한동안 흑해와 내해에는 주인을 잃은 해수들이 들끓게 되겠지만.
“뭣들 하고 있어? 파도가 지나간 지가 언제인데!”
이내 미련 없이 시선을 돌린 샌퍼드가, 계단을 향해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며 덧붙였다.
“휴식은 등대 아래에서 가질 거다! 그러니까, 당장 노 저어!”
만신창이가 된 검은 파도 호가 다시 물살을 가르며 나아가기 시작했다. 어느새 아주 가까워진, 해안 절벽 위의 불빛을 향해서.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