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Dark Fantasy Villain RAW novel - Chapter 588
#588화
“……!”
샤힌이 눈을 동그랗게 뜨는 가운데, 옆에 선 시몬이 나지막한 탄성을 터뜨렸다.
“필립 경…!”
“…그 이름을 알 줄은 몰랐는데.”
멈칫한 이안이 그를 돌아보며 말했다. 시몬이 눈을 빛내며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모를 리가 있겠습니까? 성자 대행의 기사인데요…!”
“…….”
그게 제도 밖까지 알려진 거군.
이안이 내심 읊조리며 술을 들이켰다. 그사이 시몬의 목소리가 멈추지 않고 이어졌다.
“물론 그 이름이 본격적으로 알려진 건, 성자 대행께서 실종되시고 난 이후부터이긴 합니다만.”
“…주군을 잃어서?”
술병에서 입을 뗀 이안이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내뱉었다.
시몬이 단박에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제도의 발 빠른 귀족 몇이 접근해 모조리 퇴짜를 맞았고, 오히려 그 덕에 더 유명해졌습니다. 본래 가질 수 없는 꽃이 더 아름다워 보이는 법 아니겠습니까.”
그 자식, 고생 좀 했겠는데.
이안은 풀썩 웃음 지었다.
필립이 변심하거나 타락하지 않았다는 건, 성물 반지의 스킬을 통해 진작 알고 있었지만.
그 녀석이 다른 주군을 섬기고 있었다 해도, 딱히 실망하거나 배신감을 느끼지는 않았을 터였다.
사실상 적진이나 다름없는 대교회에 던져 놓고 몇 년을 사라져 버린 건 그였으니까.
“그 후로도 대화는커녕, 그분을 직접 만난 이도 거의 없을 겁니다.”
시몬이 밀담이라도 나누듯 목소리를 낮추며 덧붙였다.
“그 어떤 요청에도 응하지 않은 건 물론이고, 대교회에 머무는 시간도 많지 않다더군요. 제국 곳곳에 혼돈과 광기가 스미지 않았습니까.”
속삭이는 말투와 달리, 이안을 올려다보는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 생기가 넘쳤다.
순수하게 이야기를 즐기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안에게 남들은 알지 못하는 이야기를 듣게 될지도 모른다고 기대하는 것이리라.
물론, 이안은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럼 이 녀석을 교황령으로 보내도, 필립을 바로 만나지 못할 수도 있겠네.”
술을 한 모금 더 마시고는 읊조린 이안이, 무카파를 돌아보았다.
“만약 그렇게 되면, 샤힌을 소니에르 가문까지 데리고 가 줄 수 있겠어? 제도에 내 저택이 있으니, 안내만 부탁해 주면 돼.”
“그렇게 하겠습니다. 귀빈.”
무카파가 일말의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소니에르…?”
문득 눈을 가늘게 뜬 시몬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가운데, 이안이 눈길도 주지 않고 덧붙였다.
“의뢰 내용이 정해졌으니, 이제 보수만 책정하면 되겠군.”
무카파가 살짝 고개를 숙였다.
“규율상 아예 받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만. 저는 본래 제도로 향하는-”
“그 전투 망치 정도면 충분하겠지?”
“-길이었으니…. …?!”
이안이 말을 자르자, 무카파의 단춧구멍 같은 눈이 한 박자 늦게 커졌다. 어울리지 않게 숨을 헐떡인 무카파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받을 수 없습니다. 지나치게 큰 보상입니다.”
“우리가 중간에 헤어질 거라는 사실을 잊지 마. 무카파. 제국으로 향하는 길은 생각보다 더 험난하고 위험할 거야. 그 망치는 의뢰를 완수하는 데에 도움이 될 거고.”
“물론 그렇겠습니다만…. 이 망치는 제가 가치를 측정하기 어려운 보물입니다….”
“그럼 나머지는 달아 두던가.”
준다는 데도 지랄이야. 내심 덧붙이며 혀를 찬 이안이, 무카파의 눈을 마주 보았다.
“더 부탁할 게 있으면, 그때 써먹을 테니까.”
“…….”
낮게 침음한 무카파가 이윽고 가라앉은 목소리로 내뱉었다.
“그럼 의뢰를 완수한 뒤에, 제가 다시 귀빈을 찾아뵙겠습니다.”
“그때 내가 어디에 있을 줄 알고.”
“북부 어딘가에 계시겠지요. 화로의 사원에 들러, 수소문하겠습니다.”
…그 와중에 알 건 다 아네.
헛웃음을 흘린 이안이 한쪽 어깨를 까딱였다.
“뭐, 알아서 해.”
굳이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무카파는 훌륭한 즉시 전력이 아니던가. 그가 해수를 후려쳐 날려 버리던 모습은, 이안이 보기에도 꽤 인상적이었다.
이안의 시선이 멀뚱히 듣고 있는 샤힌에게로 돌아갔다.
“필립은 널 기사로 키우려 할 거다. 그게 내키지 않는다면, 그냥 내 저택에 눌러앉아도 돼.”
“하인이 되라는 말씀이시군요.”
“아니. 그냥 살라는 건데.”
“…예?”
샤힌이 어리둥절하게 되물었다. 이안이 한 번 더 한쪽 어깨를 으쓱이는 사이.
“이 황녀 전하….”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던 시몬이 불현듯 읊조렸다. 이안이 돌아보자, 그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말을 이었다.
“소니에르 가문과 성자 대행의 연결 고리는, 아무리 생각해도 그분뿐입니다. 전하께서 외가를 통해 성자 대행을 찾으신 거라면, 앞뒤가 딱 맞는군요.”
“호오….”
“대체 어떻게 성자 대행께서 남부로 돌아오셨다는 사실을 알게 되신 건진 모르겠으나…. 제가 알 수 없는 무언가가 있겠지요.”
“…오늘, 날 여러 번 놀라게 하네.”
이안이 헛웃음을 흘렸다.
굼벵이도 구르는 재주가 있다더니. 끼워 맞추는 솜씨가 수준급이지 않은가. 귀족 사회에서 온갖 소문과 풍문 사이에 파묻혀 살며 자연스럽게 발달한 능력이리라.
“전하께서 제도를 떠나 황도까지 직접 성자 대행을 모시고 온 이야기는, 귀족들의 입에 오래도록 오르내렸으니까요.”
무카파의 두툼한 눈매가 슬며시 구겨지는 가운데, 시몬이 뿌듯함마저 느껴지는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지요. 덕분에 정립되어 가던 후계 구도가 다시 완전히 미궁 속에 빠졌으니까요. 전하께선 자신의 손으로 운명을 개척하는 데에 성공하신 겁니다.”
시몬의 목소리에 점점 열기가 서렸다. 브레넌이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젓는 가운데, 그가 이안과 무카파를 돌아보며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귀족들은 이런 이야기를 아주 좋아하지요. 고결한 혈통이 자신의 고결함을 스스로 증명해내는 이야기 말입니다. 게다가 심지어 성자 대행께서 실종되셨다는 소식이 전해지고 난 뒤엔….”
신나게 떠들던 시몬이 문득 멈칫했다. 아차 하는 눈빛이 된 그가 입술을 입안으로 말아 넣는 사이, 술을 삼킨 이안이 내뱉었다.
“뒤엔, 뭐.”
“그… 소식을 듣고 쓰러지셨다거나, 한동안 식음을 전폐하셨다는 소문이… 돌았습니다. 해서 전하와 성자 대행이, 실은 연모하는 사이였다는 이야기가….”
이안의 한쪽 눈매가 슬며시 구겨졌다. 그를 잠시 바라본 시몬이, 어색한 웃음을 흘리며 시선을 돌렸다.
“…있었습니다만. 헛소문이었던 모양이군요. 하하.”
“별….”
고개를 가로저은 이안이 술병을 입으로 가져갔다. 하여간, 뭐만 하면 엮어대는 건 세상을 막론하고 마찬가지였다. 중앙 귀족들이 먹고살 만하다는 뜻이기도 하리라.
시몬이 애써 태연하게 손사래를 쳤다.
“괘념치 마십시오. 본래 호사가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이야기는 반이 사실이 아니며, 나머지 반은 과장된 법입니다.”
“글쎄. 그렇게 넘어갈 문제는 아닌 것 같은걸.”
서늘한 목소리가 번진 건 그때였다. 멈칫한 시몬과 일행들의 고개가 돌아가는 가운데, 술병에서 입을 뗀 이안도 한 박자 늦게 선미 쪽을 돌아보았다.
어느새 밖으로 나온 은발의 원로 요정이, 바람에 흩날리는 머리칼을 쓸어넘기며 다가오고 있었다.
“비슷한 소문이 또 돌면, 성자 대행께서 호색한이라는 오명을 쓰시게 될지도 모르잖아.”
테사이아가 덧붙인 말에, 이안의 한쪽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그는 남부 요정 사회에서 테사이아의 연인으로 알려진 상태가 아니던가. 시간이 지나면 그 소문도 바다를 건너게 될 터였다. 그 이후의 평판을 염려하는 것이리라.
“아하… 하긴. 그럴 수는 없지요.”
순간 굳어졌던 시몬이, 이내 비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염려하지 마십시오. 중앙으로 돌아가면, 제가 직접 그 오해를 바로잡도록 하겠습니다. 성자 대행은 물론, 전하께도 누가 되지 않을 세련된 방식으로 말입니다…!”
그게 대체 어떤 방식인지는 알고 싶지도 않았다. 곁으로 다가서는 테사이아를 바라보며, 이안이 턱 끝을 까딱였다.
“생각보다 일찍 일어났네.”
“네 체온이 사라지니까 허전해서.”
호사가들이 군침을 흘릴 농담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으며, 테사이아가 멈춰 섰다. 자연스럽게 이안의 손에서 술병을 받아드는 채였다.
“재미있는 이야기도 나누고 있는 것 같고.”
“제가 너무 시끄럽게 떠들어 댔나 보군요. 하하.”
시몬이 실없이 웃음 지었다. 함께 사선을 넘으면서, 테사이아가 전보다는 편해진 것이리라.
물론 테사이아 역시, 고고하고 오만한 원로 요정의 가면을 어느 정도 벗어 버린 상태였다.
“내 귀가 워낙 밝은 거기도 해.”
덧붙이고 술병을 입으로 가져가는 그녀를, 이안은 빤히 바라보았다.
그렇게나 주문을 많이 사용했건만. 지금 그녀는 다소 나른할 뿐, 평소와 그다지 다를 바 없어 보였다.
혼돈에 오염되거나 하는 치명적인 후유증은 남지 않은 게 분명했다.
생명수의 진액 덕분이기도 하리라.
이렇게 독한 줄은 몰랐다는 듯 인상을 찌푸린 테사이아가, 다시 술병을 건네며 덧붙였다.
“그래서 우리 새싹은, 결국 이안을 따르기로 한 거야?”
“예. 나리의 기사인 필립 경에게 가려고 합니다.”
샤힌이 공손하게 대답했다. 이안의 집에 공짜로 눌러살지는 않겠다고 결론 내린 모양이었다.
테사이아의 입꼬리가 비죽 말려 올라갔다.
“주근깨가 좋아하겠는 걸…. 아쉽지만 뭐, 그 녀석이면 어쩔 수 없지.”
“필립 경과 친하신 모양입니다.”
시몬이 덧붙인 말에, 테사이아가 보란 듯 고개를 까딱였다.
“당연하지. 햇병아리 시절부터 알던 사이인걸. 그나저나….”
테사이아가 술을 들이켜는 이안을 돌아보았다.
“우린 언제 내려? 이제 배는 그만 타고 싶은데.”
“…내일 아침까지만 참으면 돼.”
이안이 술을 삼키고는 대답했다. 슬쩍 무카파를 돌아보는 채였다.
찌뿌둥한 몸도 좀 풀 겸, 그와 함께 내려가 노를 저을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 지저분하고 출렁대는 배에서 1분이라도 더 빨리 탈출하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저희도 변방까지 함께하게 되었습니다. 계속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원로.”
브레넌이 정중하게 덧붙였다.
새삼스럽게 주위를 돌아보며, 테사이아가 눈을 깜빡였다.
“변방이라고? 아하… 그래. 다시 내해로 돌아갈 엄두가 안 났나 보지.”
“바르나소로 가고 있다고 합니다.”
이안이 대충 고개만 끄덕이는 가운데, 브레넌이 첨언했다.
“군도인과 흑해 야만인들의 소굴이라고 하더군요.”
“아, 그래…?”
품에서 궐련 함을 꺼낸 테사이아가, 궐련 한 대를 입에 물며 미소지었다.
“잘됐네. 안 그래도 언젠가는 군도 놈들을 다시 만나고 싶었는데. 운이 따르면 빚을 갚을 기회도 생기겠는걸.”
아직 앙금이 남은 게 분명했다.
이안은 대답 대신 어깨만 으쓱였다. 이해 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지만, 딱히 당장 복수할 생각 같은 건 없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함대는 전멸하지 않았던가.
그것들이 군도에서 보유한 모든 함선은 아니겠지만, 그 피해를 복구하려면 꽤 오랜 시간이 필요하리라. 물론, 청색 마탑도.
게다가 앞으로 바다에는 통제를 잃은 부키키아의 권속들까지 득시글댈 터였다.
“그래서, 다른 건 더 없어?”
부싯돌로 불을 붙여 연기를 들이마신 테사이아가, 이안에게 궐련을 내밀며 덧붙였다.
시몬이 눈을 끔뻑이자, 그녀가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성자 대행이나 나와 관련이 있거나, 최근 몇 년간 중앙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소문 말이야.”
“어… 물론, 그 외에도 여러가지가 있습니다.”
눈동자로 허공을 훑으며 내뱉은 시몬이, 이내 머쓱하게 입맛을 다셨다.
“애석하게도 남부에 있던 터라, 검은 벽이 붕괴한 이후의 상황까진 알지 못하지만 말입니다. 물론 덕분에 이렇게 귀한 인연과 값진 경험을 쌓긴 했습니다만… 조금 뒤처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괜찮아. 그 전까지로도 충분해.”
더 짙게 미소 지은 테사이아가, 궐련을 입에 문 이안을 돌아보았다.
“뭐라도 먹으면서 들으면 안 될까, 이안? 뱃가죽이 등에 붙을 것 같은데.”
내려가 노를 저을 생각이었지만, 이안은 내색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지 뭐.”
지난 몇 년간 제국에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는, 그 역시 내심 궁금하던 부분이었으니까.
샤힌이 하심의 목소리가 들리는 계단 아래로 냉큼 달려 내려가는 가운데, 시몬이 이를 드러내며 미소 지었다.
“제가 이렇게 도움이 될 수 있다니 기쁘군요. 자, 편한 곳에 자리 잡으십시오. 한때 중앙을 뜨겁게 달궜던 풍문들을, 남김없이 알려 드리겠습니다! 물론, 사실 여부는 장담할 수 없지만 말입니다…!”
그가 이안과 테사이아의 눈에 처음으로 믿음직스러워 보이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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