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Dark Fantasy Villain RAW novel - Chapter 59
059화
“이런, 염병할.”
완만하게 굽이진 길을 나아가던 미구엘이 마차를 황급히 멈췄다.
잎이 거의 떨어진 나무들 너머, 언덕 위의 전경이 설핏 드러났기 때문이었다.
마부석에서 뛰어내린 그가 살금살금 전진해 언덕 위를 살폈다.
병사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간이 검문소.
얼핏 보이는 것만 해도 열 명이 넘는 병사들이었다. 죽 늘어선 목책 사이. 기사로 보이는 지휘관이 비스듬하게 기대앉아 있었다.
“아무래도, 저 작자들이 기다리는 게 우리 같소.”
마부석으로 돌아온 미구엘이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이안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우리 위치를 눈치챘나?”
“아직. 하지만 이 앞으로 나가면 어디로 가도 결국 들킬 거요.”
“그럼 별수 없지. 기다려라.”
부스럭대는 소리가 이어졌다.
미구엘이 뒤를 돌아봤다.
그들이 탄 짐 마차는, 며칠 사이 모습이 조금 바뀌어 있었다.
좌우와 후방의 칸막이가 한 칸씩 높아진 것이다.
지나가다 발견한 버려진 마차를 분해해 덧댄 방호벽이었다.
혹시 모를 발사체는 물론, 내부가 보이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다.
덕분에 여러모로 전보다 눈에 띄는 형태가 되었지만.
어차피 이 인근의 병사나 용병들은 다 그들을 알고 있으리라 가정하고 있었으니 상관하지 않았다.
“후….”
이안이 채비를 끝냈다.
얼굴이 보이지 않게 깊이 눌러쓴 잿빛 로브. 망토도 안감이 겉으로 드러나게 뒤집어 입었고, 손에는 마법봉까지 움켜쥔 채였다.
“형씨를 아는 사람이 봐도, 동일 인물이라곤 생각 못 할 거요.”
미구엘이 덤덤하게 내뱉었다.
마부석으로 넘어오며, 이안이 어깨를 으쓱였다.
“네가 할 건 별거 없다, 미구엘.”
마부석 등받이 위에 걸터앉은 그가 덧붙였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냥 길을 따라 달리기만 하면 돼.”
“그… 어떻게 하실 건지, 미리 귀띔이라도 해 주시지 않겠소?”
“별 도움 안 될 텐데. 그냥 쫄지 말고 달려라. 멈칫대다가 마차가 전복되기라도 하면, 다 같이 망하는 거야.”
이안의 왼손에는 어느새 마석 하나가 들려 있었다.
전에 쓰던 정수보다 훨씬 작아서, 손가락 사이에 굴러다녔다.
미구엘은 알 수 없었지만, 어쩔 수 없이 필요한 물건이었다.
사령술사의 지휘봉은 스킬 데미지를 크게 올려 주는 대신, 마력 소모량도 3배나 높여 버리는 엄청난 마이너스 옵션이 붙어 있었으니까.
끝에 정수를 장착해야 사라지는 조건부 페널티였다.
물론 마이너스 옵션은 그게 전부가 아니었지만….
“하… 알겠수.”
마석을 꾹 움켜쥔 이안이 턱짓했다.
“그럼, 출발.”
“내가 어쩌다 이런… 에라이…!”
미구엘이 될 대로 되라는 듯 고삐를 후려쳤다.
다각, 다각, 다그닥- 다그닥-
언덕을 오르는 전마들의 발굽 소리가 점점 빨라졌다.
오르막이라는 게 전혀 느껴지지 않는 속도.
마갑에 박힌 마석들의 빛이 점점 선명해졌다.
“아, 아니, 저런 미친……?”
달려오는 마차를 발견한 병사들이 소란스러워졌다.
느슨하게 기대앉아 있던 지휘관이 허둥지둥 앞으로 달려 나왔다.
“당장 마차를 멈춰라! 멈추지 않으면 쏘겠다!”
석궁을 든 병사들이 마차를 겨눴다.
루시가 있는 이상 절대 진짜로 쏠 리는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미구엘은 눈을 질끈 감았다.
‘고삐를 당기면 안 돼. 쫄지 말자. 쫄지… 시부럴!’
어쩌다 이 지경까지 온 건가 하는 생각이 또다시 뇌리를 스쳤다.
이게 다 그 병신 같은 아겔 란 기사들 때문이었다.
조용히 따라왔다면 이런 개 같은 상황은 겪고 있지 않았을 텐데.
“속도 늦추지 마라. 계속 달려.”
이안의 말이 귀를 파고들었다.
웅웅 울리는 목소리.
마력이 담겼다는 증거였다.
“다시 한번 말한다! 당장 마차를 멈춰라!”
지휘관의 다급한 외침이 이어졌다.
이안이 벌떡 일어선 건 그때였다.
그가 보란 듯 양팔을 펼쳤다.
로브와 망토가 부자연스럽게 일렁이고, 그의 전신에서 아지랑이 같은 마력의 파장이 번져 나갔다.
의도적으로 마력을 내뿜고 있는 게 분명했다.
적어도 시선을 집중시키는 데에는 아주 성공적이었다.
“마, 마법사……? 마법사가 있다는 얘긴 못 들었는데?”
당황한 목소리가 바람을 타고 미구엘의 귀까지 파고들었다.
이안이 마법봉을 내뻗은 건 그 직후였다.
콰르르르르-!
“……!”
언덕 위로 거대한 불의 장벽이 눈부시게 치솟아 오르자, 미구엘의 입이 멍하니 벌어졌다.
***
콰르르르-
“우와아아악-!”
“어, 어머니……!”
초소가 아수라장이 됐다.
병사들이 후끈하게 밀려드는 열기에 바닥을 나뒹굴었다.
고개를 위로 꺾은 채 불의 장벽을 망연자실하게 올려다보던 지휘관이, 뒤늦게 입을 달싹였다.
“다들 당장 뒤로- 어어억?!”
쿠구구구-
그의 외침은 끝을 맺지 못했다.
지진이었다.
휘청댄 그가 바닥에 넘어졌다.
주위의 땅이 움푹 파이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흙이 한 지점을 향해 모여드는 중이었다.
초소 한복판의 땅이 위로 불쑥 솟아오르고 있었다.
서 있던 병사들이 굴러떨어지고, 목책들이 우수수 넘어졌다.
입을 뻐끔대던 지휘관이 간신히 다시금 목소리를 냈다.
“다, 다들 물러나! 물러나라!”
필사의 외침이었지만, 그의 목소리를 귀담아듣는 병사는 거의 없었다.
“루 솔라여… 저희를 굽어살피시고….”
“살려 줘. 제발 살려……!”
바닥에 넙죽 엎드려 기도를 올리는 자부터 벌벌 떨며 땅을 기는 자들이 태반이었으니까.
푸화악-!
돌풍과 함께, 불길 한복판에 구멍이 뻥 뚫린 건 그 직후였다.
그 사이를 쏜살같이 지나친 마차가, 마법으로 만들어진 언덕을 날듯이 타 넘었다.
“마, 막아야……!”
본능적으로 읊조리며 마차를 쫓던 지휘관의 눈길이 얼어붙었다.
멀어지는 마차 주위로 연달아 피어오르는 거대한 불덩이들.
그에게 남은 일말의 의무감마저 사라지게 만드는 광경이었다.
쾅-! 콰광! 쾅-!
쏟아진 불덩이들이 언덕 중턱을 쑥대밭으로 만들며 폭발했다.
병사들과 함께 바닥을 나뒹구는 지휘관의 뒤로, 불의 장벽이 어느새 잦아들고 있었다.
***
“으… 으하하! 해냈소!”
미구엘이 비로소 웃음을 터뜨렸다. 뒤늦게 흥분이 밀려오는지 얼굴까지 벌겋게 달아오른 채였다.
좋댄다, 새끼.
속으로 중얼댄 이안이 마부석 등받이에 털썩, 걸터앉았다.
두통과 현기증이 밀려들었다.
어느새 손에 쥔 마석이 텅 비어 있었다.
‘죽이지 않는 게 죽이는 것보다 훨씬 어렵다니. 어이가 없군.’
헛웃음을 지은 그가 사령술사의 지휘봉을 아공간에 쑤셔 넣었다.
귓가에 시끄럽게 울리던 귀곡성이 잦아들었다.
지휘봉에 깃든 원혼의 저주였다.
높은 정신력과 저항력 덕분에 아무런 영향도 없었지만, 시끄러워서 머리가 다 울렸다.
“대단하셨소, 형씨! 대마법사 흉내가 아니라, 정말 대마법사 같았단 말이오!”
“소리 그만 질러라. 머리 아프다.”
후드를 벗고 뻐근한 목을 이리저리 푼 이안이, 이내 턱짓했다.
“적당히 달리며 속도도 줄이고. 마석 닳는다.”
“아, 맞다. 그렇지. 알겠수.”
“배… 백마법사……!”
루시가 불쑥 내뱉은 건 그때였다.
이안이 자신을 홀린 듯 바라보고 있는 그녀를 돌아보았다.
“응?”
“좀 전에… 적색 마법만 쓰신 게 아니잖아요……!”
“아니, 그건….”
“엥? 정말로?!”
끼어든 미구엘이 눈을 치켜뜨며 이안을 돌아보았다.
“그럼 형씨가, 그 전설의 마법사란 말이오? 정말로?”
“확실해요…! 확실하다고요…!”
“확실은 무슨. 전혀 아니거든.”
코웃음 친 이안이 내뱉었다.
루시가 눈을 깜빡였다.
“하지만, 여러 색의 마법을 쓰셨잖아요.”
“그건 맞지만. 그게 내가 백마법사란 뜻은 아니야. 애초에 별로 대단한 마법들도 아니었고.”
이안이 루시와 미구엘을 번갈아 바라보고는 덧붙였다.
“이건 그냥 일종의 영업 비밀, 비장의 한 수 같은 거다. 그러니까 착각들 하지 마.”
“…알았어요.”
이윽고 고개를 끄덕인 루시가, 이안을 빤히 올려다봤다.
“이안님의 비밀은, 지켜드릴게요.”
“나도 마찬가지요, 형씨.”
그의 말을 전혀 믿지 않는 듯한 눈빛들.
“하… 그래. 마음대로들 생각해라. 아닌 건 아닌 거니까.”
진짜 그런 거면 억울하지라도 않지. 난 그냥 레벨만 높은 망캐일 뿐이거든?
혀를 찬 이안이 뒤를 돌아보았다.
연기가 치솟는 언덕이 어느새 한참 멀어지고 있었다.
아마 오늘부로, 변방에 마법사에 대한 괴담 하나가 추가될 터였다.
이윽고 미구엘이 이성이 좀 돌아온 얼굴로 그를 돌아보았다.
“방금 든 생각인데. 저런 검문소를 한둘은 더 마주치게 될지도 모르겠소.”
“별수 없지. 그래도 그러고 나면, 우리 앞을 막으려는 병사들은 없어질 거다. 물론….”
이안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런데도 쫓아오는 놈들과의 싸움은, 절대 피할 수 없겠지만.”
“시부럴… 벌써 코에서 쇠 냄새가 나는 것 같네.”
미구엘이 중얼댔다.
이안은 등받이에 머리를 기댔다.
슬슬 차라리 빨리 죄다 몰려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치고 있다는 증거였다.
“쉴 수 있을 때 쉬어 둬라. 쓸데없는 생각들 하지 말고. 이제, 얼마 안 남았으니까.”
***
“그래서, 이 보고서의 내용들이 다 사실이다?”
책상 앞에 앉은 랜디스 백작이 고개를 들며 물었다. 앞에선 기사, 제이미 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두 개의 초소가 파묻히고 불바다가 됐습니다. 엄청난 마법사라고 다들 벌벌 떨더군요. 게다가 그자들이 탄 마차가 상당히 빨랐답니다. 앞을 막는 건 자살 행위고 뒤를 쫓을 수도 없으니, 철수하게 해 달라는 요청이 빗발치고 있습니다.”
“겁 많은 놈들…. 하지만 틀린 말은 아니군. 보고서 대로면 엄청난 마법사인 것 같던데. 어디서 튀어나온 놈인진 모르지만, 나한테 경고를 보낸 것 같단 말이야. 아직까진 자비를 베풀고 있지만, 앞을 계속 막으면 다 죽이겠다고 말이지.”
“그럼, 병사들을 물릴까요?”
“그래. 계속 내보냈다간 나에 대한 원망이 하늘을 찌를 테니까.”
물론, 그 건방진 놈들을 그냥 보내겠단 뜻은 아니었다.
랜디스 백작이 넌지시 덧붙였다.
“그자는, 기다리고 있나?”
“물론입니다.”
“들어오라 하게.”
제이미 경이 문을 열고 손짓했다.
곧 건장한 체구의 북부인이 걸어 들어왔다.
때가 반질반질한 갑옷과 검집.
이 하이람시에서 가장 실력 있는 용병이자, 우베 용병단의 우두머리인 우베였다.
“용병들의 분위기는 어떤가?”
간단하게 인사를 나눈 백작이 물었다.
우베가 굳은 얼굴로 말했다.
“다들 이를 갈고 있습니다. 놈들 손에 죽은 동료가 꽤 있어서요. 거기다 나슬란에서 넘어온 놈들이 엄청난 속도로 따라가고 있단 얘기까지 들리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 남의 영지를 제집처럼 뛰어다니는 그 빌어먹을 제국 놈들과 아겔 란 촌놈들. 나도 거슬리던 참일세.”
백작의 눈빛이 싸늘해졌다.
무엇보다 그의 심기를 거스르는 건, 그놈들을 저지할 수가 없다는 사실이었다.
그 속 좁은 놈들에게 한마디라도 했다간, 영지로 물건을 공급하지 않을지도 몰랐으니까.
“그놈들이 빈손으로 돌아가는 걸 보고 싶단 말이지. 영애의 몸값을 깎아 달라고 애원하는 꼴을 볼 수 있으면 더 좋고. 아마 폐하께서도 기꺼워하시겠지.”
납치범들은 어느새 정치적인 영향력까지 끼치고 있었다.
아겔 란이 전쟁을 준비한다는 소문이 파다한 와중이기 때문이다.
그 소녀를 이쪽에서 먼저 손에 넣는다면, 몸값은 물론이고 국왕 폐하의 총애까지 받을 수 있으리라.
“맡겨만 주십시오. 말 잘 타고 실력 있는 놈들로 서른은 추려 뒀습니다.”
우베가 눈을 빛내며 말했다.
납치범들을 잡아 족치고 싶은 건 그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부하들의 원수를 갚아야 한다는 이유도 있었지만.
아겔 란의 기사들을 따라 건너온 옆 동네 용병단 놈들 때문이었다.
나슬란 영주의 총애를 받으며 덩치를 불린 놈들은, 그의 용병단과 알게 모르게 대립하고 있었다.
아마 이번 일을 성공시키는 쪽이, 벨 론데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지게 되리라.
“잘됐군. 본론으로 넘어가지.”
백작이 영지의 지도를 펼쳤다.
거기에는 납치범 일당의 이동 경로와, 나슬란에서 넘어온 추적자들의 경로가 꼼꼼하게 표시되어 있었다.
“지금까지의 정보를 종합해 보면, 납치범 놈들은 버려진 땅으로 가고 있는 것 같더군.”
“……!”
“자살이라도 하려 한단 말씀이십니까?”
제이미는 물론 우베도 눈을 치켜뜨며 말했다.
백작이 어깨를 으쓱였다.
“아마 그 마법사를 믿고 그러는 거겠지. 마법사에 검의 달인이면, 그 저주받은 땅을 돌파해 북부로 넘어갈 수도 있지 않겠나?”
“하늘이 돕는다면 말이죠.”
제이미가 읊조렸다.
백작이 어깨를 으쓱였다.
“나도 믿기 힘들었네만. 그게 아니면 이 동선을 설명할 방법이 없더군. 우리에게 다행인 건, 놈들이 빙 돌아가고 있다는 걸세.”
백작이 손가락으로 하이람시로부터 북쪽으로 이어지는 직선을 그렸다.
“우리가 앞질러 가서 놈들을 기다릴 수 있어.”
국경 너머의 버려진 땅으로 이어지는 강가. 계곡 끄트머리.
“가능하다면 놈들이 다리를 건너기 전에 잡게.”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지휘는 제이미 경에게 맡길 걸세. 대기하고 있게나.”
고개를 끄덕인 우베가 몸을 돌렸다.
문이 닫히자, 백작이 제이미 경을 바라보았다.
“기병 스물을 붙여 주지. 희생은 되도록 저쪽에서 나오면 좋겠군.”
우베 용병단은 유용하지만, 동시에 거슬리는 자들이었다.
갈수록 덩치가 커지면서, 언제 이빨을 드러낼지 모르는 상태가 되고 있었다.
이번 기회에 그 숫자를 조금 줄여 두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우베가 죽으면 더 좋고.
“만약 납치범들이 끝내 버려진 땅으로 넘어간다면….”
지도를 툭툭 두드린 백작이 덧붙였다.
“해가 지기 전에는 기병들을 이끌고 빠져나오도록 하게.”
“용병단은, 남겨 둘까요?”
“저놈들은 포기하지 않을 걸세. 자존심이 걸렸으니까. 권유해 보고, 통하지 않으면 그냥 둬. 아마 천칭 상단 놈들과 촌놈들도 포기하지 않을 테니, 그쯤 되면 다들 죽은 목숨이야.”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고개를 숙인 제이미 경이 몸을 돌렸다.
홀로 남은 백작이, 지도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길어야 사흘이면, 이 모든 소란의 결과를 알 수 있게 되리라.
“돈과 자존심을 다 얻거나… 다 죽겠군. 상관없지. 빼앗기지만 않는다면 말이야….”
납치범들이 살아서 도주하는 결말은, 고려 대상조차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