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Dark Fantasy Villain RAW novel - Chapter 591
#591화
이안의 표정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역시 그렇군….”
고개를 끄덕이며 읊조리고는, 술잔을 집어 들었을 뿐이었다. 그의 눈매가 슬쩍 꿈틀댄 건, 오히려 포도주를 한 모금 마신 직후였다. 예상외로 맛과 향이 훌륭해서였다.
포도주를 슬쩍 내려다본 그가 다시 술잔을 입으로 가져가는 사이.
“근방의 왕국들이 전부 국경을 버렸다는 말씀이신가요?”
가면을 위로 벗은 루시아가 물었다. 사이 자리에 의자를 가져와 앉은 시몬이 이끌리듯 그녀를 돌아보는 가운데, 오하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의도적인 건지, 어쩔 수 없었던 건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서자 왕은 의도적인 게 분명해.”
턱을 괸 테사이아가 말했다. 눈동자만 굴려 이안과 루시아를 돌아보며, 그녀가 덧붙였다.
“그자 곁에는 빨강 머리랑 짝귀가 있잖아. 어쩌면 그 못생긴 의수도 있을지도 모르고. 쓸 만한 다른 놈들도 여럿 거느리고 있겠지. 남쪽 땅을 가지고 싶었으면, 진작 어떤 식으로든 해냈을 거야.”
“그래… 그렇겠지.”
이안이 술잔을 내려놓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루시아의 은근한 시선은 모르는 척하는 채였다.
“어쨌든, 그 덕에 이 가짜 왕국도 망해 버렸어요.”
오하라가 팔짱을 낀 채 말하는 사이, 돌아온 맥스가 식탁 위에 술병과 술잔들을 내려놓았다.
“이젠 이 도시밖에 남지 않았거든요. 보아하니 조만간, 죄다 다시 군도로 불려가게 될 것 같지만요.”
“글쎄. 적어도 당분간은 아닐걸.”
어서 따르라는 듯 턱짓하며, 테사이아가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 섬 조각들 주위에 정신 나간 해수들이 득시글댈 테니까.”
“바닷길이 완전히 막혔다는 거군요.”
오하라가 술잔에 차례로 술을 따르며 미소 지었다.
“상상도 해 본 적 없는 일인데… 재미있네요.”
걱정이나 불안 따위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 눈빛이었다.
물론, 이안은 그녀의 속내 따위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었다.
“어쨌든, 간단해졌네. 그냥 빠른 길로만 가면 되니까.”
이안이 술잔을 내려놓으며 읊조렸다. 오하라가 그의 잔에 다시 술을 채워주며 미소 지었다.
“맞아요. 계곡으로 이어진 길을 따라 올라가시기만 하면 돼요. 순찰대도, 요새를 지키는 수비병도 없으니까.”
대신 마경과 마물들이 기다리고 있겠지만. 이안에게는 전혀 새롭지도 놀랍지도 않은 일이었다.
일단 국경만 넘고 나면, 얼마 지나지 않아 아는 장소들이 나올 터였다. 굳이 마을을 거쳐 갈 필요도 없으리라. 이안이 오른델로 향하는 가장 빠른 경로를 머릿속으로 그리는 사이.
“마물들을 방치하고 공존하는 쪽을 택하다니….”
조용히 술만 홀짝대던 시몬이, 느긋하게 말을 이었다.
“변방이 난장판이 되었다는 소문은 익히 들었지만, 상상 이상으로 개판이군요.”
“여긴 제국이 아니니까요. 도련님.”
장난스럽게 내뱉은 오하라가 자신의 술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그녀의 팔에 빼곡한 문신을 바라보며, 시몬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말입니다. 변방에선 마물 고기도 먹는다던데. 헛소문인 줄 알았던 이야기들이 사실인지도 모르겠어요.”
“아예 못 먹을 정도는 아니에요.”
루시아가 툭 내뱉은 건 그때였다. 시몬이 돌아보자, 술을 한 모금 마신 그녀가 특유의 무표정한 얼굴로 덧붙였다.
“마물 고기 말이에요.”
“아… 하하. 그… 렇군요…. 어떤 맛인지 조금 궁금하긴 합니다….”
시몬이 어색하게 웃음 지었다.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르겠다는 듯한 눈빛이었다.
이안이 또 한 번 말끔하게 비운 술잔을 내려놓은 건 그때였다.
“유익한 대화였어.”
품에서 가죽 주머니를 꺼낸 그가, 금화 하나를 식탁 위에 내려놓았다.
“말들을 든든하게 먹여 줘. 내 흑마는 고기를 먹으니까, 크게 한 덩어리 가져다주고.”
“식성이 특이한 말이군요. 그러죠.”
오하라가 손으로 금화를 덮으며 말했다. 이안을 주문쟁이 특유의 관찰하는 듯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채였다.
“목욕도 하고 싶은데.”
주머니를 품에 넣는 척 아공간으로 되돌리며, 이안이 덧붙였다. 오하라가 고개를 까딱였다.
“뒷문으로 나가시면 근처에 우물이 있어요. 그걸 쓰세요. 설마, 욕조 같은 걸 기대하진 않으셨겠죠?”
“했는데. 아쉽게 됐네.”
입맛을 다신 이안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내일 아침에 떠날 거니까, 오늘은 알아서들 푹 쉬어 둬.”
시몬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내일, 바로요?”
“그래. 내일. 바로.”
덧붙인 이안이 루시아를 일별하며 몸을 돌렸다.
“그럼 오후에 보자. 난 눈 좀 붙여야겠으니까.”
그전에, 간단하게라도 좀 씻고.
***
사망자들은 도시 뒤편, 길에서 멀찍이 떨어진 언덕 뒤에 묻혔다.
장례를 끝나고 돌아오는 이들의 얼굴에는, 슬픔보다는 안도가 감돌았다.
“감사합니다. 사제님.”
“…감사드립니다.”
몇 번이나 인사하는 브레넌과 시몬도 마찬가지였다. 정성을 다해 기도하는 루시아의 두건 망토 위로, 성화가 은은하게 피어오른 덕분일 터였다.
타오르는 여신이 그들의 장례를 지켜보았다는 의미였다. 참석자들에게 그건, 희생자들의 영혼이 안식에 들었다는 증거나 다름없었다.
이안이 대문도 없는 목책을 지나 다시 도시로 접어들 때쯤.
“그… 오하라가 나리의 정체를 몹시 궁금해하더군요.”
앞서 걷던 샌퍼드가 그의 곁으로 붙으며 속삭였다. 앞에 하심만 덩그러니 남겨 놓은 채였다.
“모든 결정권이 나리께 있는 것 같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알려줬냐?”
이안이 시큰둥하게 되물었다.
딱히 놀라지 않는 건, 샌퍼드가 내내 그의 눈치를 살펴서였다. 샌퍼드가 머리를 조아리며 주절댔다.
“옛날 일까지 들먹이면서… 협박해서 말입니다. 그, 어차피… 바다를 건넌 이야기를 하게 되면, 한 번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기도 하지 않겠습니까…?”
“알려 줬단 얘기네.”
이안이 낮게 코웃음을 흘렸다. 어느덧 다시 어둑어둑해지는 거리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였다.
도시는 여전히 생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이 칙칙하고 더러웠다.
“대, 대신, 나리가 떠나실 때까지는 함구하겠다는 약속부터 받았습니다. 정말입니다…!”
샌퍼드가 애원하듯 덧붙인 말에, 이안이 못 이긴 척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이실직고라도 했으니 다행이다.”
애초에 샌퍼드가 계속 입을 닫고 있으리란 기대도 하지 않은 그였다. 게다가 선원들도 다들 알고 있지 않던가. 전에 시몬이 말했듯, 어차피 알려지게 될 일이었다.
샌퍼드가 가슴을 쓸어내리며 웃음 지었다.
“염려하지 마십시오. 오하라는 여관을 떠나는 일이 거의 없고, 애나는 남의 일에 관심이 없습니다. 맥스는, 혀가 없고요.”
“귀찮은 일이 생기면 네가 알아서 수습해야 한다는 것만 알아 둬.”
골목으로 접어들며 내뱉은 이안이, 슬쩍 샌퍼드를 돌아보았다.
“아니면 너도 맥스가 될 테니까.”
“며, 명심하겠습니다…!”
목이 떨어질 듯 고개를 끄덕인 샌퍼드가, 도망치듯 하심을 향해 걸음을 재촉했다.
어느새 저만치 앞에서 왁자지껄한 소리가 번지고 있었다. 퍼질러 자던 놈들이 죄다 일어난 게 분명했다.
“…화로의 사원은, 정말 한 번 들어가면 마음대로 나올 수 없습니까?”
“다 그런 건 아니에요.”
“그럼, 사도님은요?”
“나 같은 경우에는… 아마도요.”
뒤이어 귀를 파고드는 대화에, 이안이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뻣뻣하게 굳은 시몬과 평소와 다름없는 얼굴의 루시아가 나란히 걷고 있었다.
“그럼… 혹시…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언젠가 제가… 사원으로 방문해도….”
“물론 괜찮죠.”
“……! 저, 정말이십니까?”
“수행이나 후원을 위해서라면요. 다른 사적인 목적이 있다면, 아마도 쫓겨나시게 될 거예요.”
“아, 그… 그렇군요. 수행이나 후원이라…. 알겠습니다….”
저건 전도 아닌가.
헛웃음을 흘리는 이안과 눈이 마주친 루시아가, 아무렇지도 않게 곁으로 다가서며 말했다.
“다들 벌써 자축하고 있나 봐요.”
소란이 선명해지고 있었다. 먼저 도착한 샌퍼드와 하심이 문을 열고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안과 루시아가 다가가자, 샌퍼드가 한발 앞서 장내로 들어섰다.
“다들 제대로 인사드려! 타오르는 여신께서 받아주셨다!”
“오, 오오…!”
탄성이 터져 나오는 가운데, 이안과 루시아가 장내로 들어섰다.
몸 곳곳에 붕대를 감거나 부목을 덧댄 선원들이 허둥지둥 일어섰다.
“감사합니다-!”
“감사드립니다! 타오르는 여신께 영광있으라!”
…무슨 건달들도 아니고.
제멋대로 이어지는 외침에, 이안은 고개만 설레설레 저으며 걸음을 옮겼다. 주방 앞에 선 오하라의 시선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넘기는 채였다.
“이안…!”
샤힌과 무카파, 테사이아는 구석 자리에 모여앉아 있었다. 다가오는 이안을 반짝이는 눈으로 바라보며, 테사이아가 내뱉었다.
“저 녀석들, 곧 방에서 도박판을 벌일 거래. 나도 같이해도 돼?”
“…아낀 돈을, 저놈들한테 뿌리겠다고?”
이안이 그녀의 옆에 걸터앉으며 되물었다. 재빨리 일어선 샤힌이 루시아의 의자를 가져오는 가운데, 테사이아가 코웃음을 흘렸다.
“뿌리다니? 불리는 거겠지. 판 돈도 내가 제일 많다고.”
자신만만한 말투였다. 하긴. 요정들은 타고난 도박꾼이라지 않던가.
입맛을 다신 이안이 이윽고 어깨를 으쓱였다.
“내일 떠난다는 것만 잊지 마.”
“당연하지. 잠은 충분히 잤어.”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내뱉은 테사이아가 벌떡 일어섰다. 조용히 엿듣고 있던 몇몇이 눈을 빛내는 가운데, 테사이아가 턱을 치켜들며 장내를 돌아보았다.
“내 자리도 비워 두도록 해요. 허튼짓하다 걸리면 손가락이 하나씩 사라질 거라는 것도, 알아두고요.”
“아니, 그게 무슨…. 다친 놈들이, 도박판을 벌인단 말씀입니까?”
내뱉은 건, 술잔을 집어 든 샌퍼드였다. 눈을 부라린 그가 장내를 돌아보았다.
“감히, 선장도 없이? 내 자리도 비워놔! 새끼들아!”
멈칫 굳어졌던 선원들이 그제야 웃음과 함성을 터뜨리며 술잔을 들었다. 뒤따라 자리를 잡던 시몬이 오른손을 번쩍 치켜든 건 그때였다.
“아무리 봐도, 판을 벌이기엔 방이 비좁을 것 같습니다만.”
멈칫한 선원들이 하나둘씩 돌아보는 가운데, 식탁에서 술잔을 집어든 그가 시원하게 미소지었다.
“제 방으로 모이는 게 어떻겠습니까? 가장 넓은 방이라던데요!”
“…역시 현명하십니다, 도련님!”
“놀 줄 아시는 도련님을 위하여! 건배!”
선원들이 술잔을 흔들며 소리치고, 눈을 질끈 감은 브레넌이 이마를 감싸 쥐었다. 물론 시몬은 시원하게 술을 들이켜고는 철딱서니 없게 웃음을 터뜨릴 뿐이었다.
소란 사이로 쟁반을 든 오하라가 다가온 건 그때였다.
“식사를 끝내신 뒤에, 잠시 시간을 내주실 수 있을까요?”
이안의 앞에 음식이 담긴 접시를 내려놓으며 그녀가 속삭였다. 이안이 돌아보자, 그녀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입가에 머금었다.
“따로 조용히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어서요. 성자 대행.”
“…대화만 하는 거라면.”
함구는 개뿔. 내심 읊조리며, 이안이 내뱉었다. 대답 대신 술잔에 포도주를 따라준 오하라가 루시아의 곁으로 걸음을 옮겼다.
어느새 선원들은 돼지 멱 따는 소리를 내며 노래를 불러대거나, 저마다 어떤 죽을 고비를 넘겼는지에 대해서 떠들어댔다.
물론, 사이사이로 이안과 루시아에 대한 찬양도 섞여 있었다.
‘진짜 비밀이 없네.’
헛웃음을 지으면서도, 이안은 별다른 말 없이 식사를 이어나갔다.
다들 죽음의 고비를 넘기지 않았던가. 긴장을 풀고 자축하는 자리에서, 굳이 찬물을 끼얹을 필요는 없었다.
“저도 같이 가요, 언니.”
“그럴까? 그런데, 할 줄은 알아?”
“당연하죠. 미구엘에게 온갖 도박 기술도 배운걸요.”
“그래…? 잘됐네. 저 녀석들, 전부 알거지로 만들어주자.”
루시아와 테사이아는 조용히 짝을 맞추고 있었다. 샤힌은 선원들 사이를 돌면서 잔심부름은 자기에게 시켜달라 떠들어댔다.
묵묵히 식사 중인 건 이안을 제외하면 무카파 뿐이었다. 물론, 그는 여관을 거덜 낼 기세로 먹어대는 중이었다.
“도련님! 가시죠!”
샌퍼드가 소리친 건 삼십 분도 지나지 않아서였다. 시몬이 술잔을 움켜쥔 채 튕겨 오르듯 일어서고, 비장한 얼굴의 도박꾼들이 뒤이어 하나둘씩 솟아올랐다. 반 이상이 부상자였지만, 그들을 부축한 놈들의 얼굴도 비장하긴 마찬가지였다.
“인간들이란. 불나방 같다니까.”
코웃음을 흘린 테사이아도 느긋하게 일어섰다. 기다란 궐련 대를 입에 문 그녀가, 이안을 돌아보며 한쪽 눈을 찡긋댔다.
“다녀올게. 다시 부자 될 준비 해둬.”
“이기고 돌아올게요.”
루시아가 전투를 앞둔 듯한 얼굴로 뒤를 따랐다. 곧 반이 넘는 인원들이 계단을 올랐다.
그 모습을 눈에 담은 이안이 헛웃음을 흘렸다.
“저러다 칼부림이 나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데.”
“…제가 따라가서 지켜보도록 하겠습니다. 귀빈.”
무카파가 말했다. 그를 슬쩍 돌아본 이안이 어깨를 으쓱였다.
“만약 테사가 정말 돈을 다 따면, 절반은 원래 주인들한테 돌려주라고 해줘. 같이 사선을 건넌 사이에, 웃으면서 헤어져야지.”
“…그런 상황이 생기면, 전하겠습니다.”
고기가 담긴 쟁반을 손에 든 채, 무카파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적어도, 도박에 눈이 돌아갈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리라.
어느새 식탁이 텅 비었지만.
‘이제야 좀 평화롭네.’
이안은 오히려 홀가분하게 어깨를 으쓱였다. 물론 장내는 여전히 시끄러웠다. 무표정한 얼굴의 여급, 애나가 쉬지 않고 식탁 사이를 오가며 술잔을 옮겼다.
때때로 음흉한 수작을 거는 선원의 얼굴에는 여지없이 주먹이 틀어박혔다. 웃어넘기는 건 주방에서 맥스가 지켜보고 있어서일 터였다.
“성자 대행.”
오하라가 곁으로 다가온 건, 이안이 포크를 내려놓고 술만 홀짝이고 있을 때였다. 술잔을 다시 천천히 채워주면서, 그녀가 덧붙였다.
“이제, 시간을 내주실 수 있으실까요?”
“대화라면 여기서 나눠도 괜찮을 것 같은데. 자리도 비었고.”
이안이 덤덤하게 말했다. 오하라의 미소가 은근해졌다.
“주문쟁이의 용무라서요.”
뭐, 마법이라도 보여주겠단 건가.
생각하며 어깨를 으쓱인 이안이, 술잔을 든 채로 일어섰다.
“그럼, 가지 뭐.”
2층 복도는 도박장에서 번지는 소리로 시끄러웠다. 벌써 일생일대의 승부가 이어지고 있는 게 분명했다. 이안은 반대편 끝, 일행이 묵는 방으로 들어섰다.
“다섯 분이 지내시기엔 좁을 것 같은데. 방을 하나 더 내어 드릴까요?”
뒤따라 안으로 들어선 오하라가 덧붙였다. 벽에 기대 놓은 전투 망치나 벗어둔 장비들을 눈으로 훑는 채였다. 협탁에 술잔을 내려놓은 이안이 그녀를 돌아보았다.
“괜찮아. 본론으로 넘어가지.”
“네. 사실 대단한 이야기는 아니에요. 다만, 조금… 요란해 보일 수도 있어서요.”
방 한복판에 멈춰선 오하라가 말했다. 고개를 끄덕인 이안이 계속해 보라는 듯 술잔을 집어 들었다.
빙긋 미소 지은 오하라가, 잠시 숨을 고르고는 입을 열었다.
“북부와 변방 사이에는 크고 작은 산과 계곡이 많지요. 제국으로 이어지는 것들도요.”
나지막한 목소리가 번지자, 술잔을 입에 댄 이안의 눈매가 슬며시 가늘어졌다.
오하라의 몸속에서 요동치듯 번지기 시작한 마력을 느껴서였다. 묘하게 익숙한 울림이기도 했다.
‘마력 폭주…?’
자폭하기 직전의 보스들에게서나 번지던 파장. 하지만 마력이 폭발할 것처럼 끓어오르지도, 육감이 경고를 보내지도 않았다. 대신, 그녀의 목과 팔에 뒤덮인 문신들이 불그스름하게 물들어갔다.
“그중 노스넬이라 불리는 산 뒤편에 깊은 계곡이 있어요. 그 안으로 들어가면….”
오하라가 말을 이어가는 동안, 문신은 점점 더 붉게 달아올랐다.
그녀의 문신은 목과 팔 뿐만 아니라 상반신 전체에 덮여 있는 게 분명했다. 옷 사이로도 불그스름한 빛이 일렁였다. 오하라의 얼굴에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엘도르라는 이름의 구불구불한… 호수가 나올 거예요… 그 아래….”
이를 악문 채 내뱉던 그녀가 문득 몸을 숙이며 헐떡댔다. 어느새 그녀에게선 흐릿한 탄내가 번지고 있었다.
…저러다 죽겠는데. 생각하며 혀를 찬 이안이 술잔을 내려놓을 찰나, 오하라의 억눌린 목소리가 다급하게 이어졌다.
“그 아래에, 회색 마탑이 있습니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