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Dark Fantasy Villain RAW novel - Chapter 60
060화
산기슭 한복판.
능선을 따라 이어진 길을 이동하던 짐 마차 앞에, 마침내 산의 반대편 얼굴이 펼쳐졌다.
“…그래. 다행히 보이긴 하는군.”
눈을 가늘게 뜨고 살피던 미구엘이 손을 들었다.
굽이지고 완만하게 이어진 계곡들과 능선 너머.
산기슭에 가려진 창백한 푸른 빛이 빼꼼,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저 강이 국경이오. 이 길을 따라 쭉 돌아 내려가서 저길 건너면… 어라.”
시선을 옮기며 말하던 미구엘의 미간이 문득 좁아졌다.
경치를 내려다보던 루시가 그를 돌아보았다.
“왜 그래요?”
“아니, 저 너머부터가 버려진 땅이긴 한데. 내 기억이랑 좀 다른 것 같아서 말이야.”
수염 난 볼을 긁적인 미구엘이 덧붙였다.
“내 기억에는 강가를 따라 길이 있고, 그 옆으론 황무지가 펼쳐져 있었단 말이지. 숲은 그 황무지 너머에나 있었고. …그런데 지금은 강 건너에 바로 숲이 보이네.”
“…….”
루시는 눈을 가늘게 뜨고 강 너머의 풍경을 눈에 담았다.
희끗희끗한 땅과 나무들이 희미하게 보였다.
“나무들이… 자란 거 아닐까요?”
“고작해야 10년 정도 만에?”
“버림받은 땅이라며.”
이안이 툭 끼어들었다.
“무슨 일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지. 게다가 저건 내가 보기엔….”
읊조리는 그의 눈빛이 묘하게 가라앉았다.
“보기엔, 뭐요?”
“…아니, 너희가 알아서 좋을 거 없을 것 같군.”
이내 시선을 거둔 이안이 등받이에 머릴 기댔다.
한숨 쉰 미구엘이 이내 읊조렸다.
“하긴, 뭐. 모르는 게 약이오. 여기까지 온 마당에, 불길하다고 돌아갈 것도 아니고.”
루시는 그런 미구엘의 옆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워낙 험악한 인상에다 수염이 많아서 티가 나지 않을 뿐, 처음에 비해 많이 야위고 푸석해진 얼굴.
한 번도 내뱉지는 않았으나, 루시는 그가 지칠 대로 지쳤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이안도 마찬가지였다.
겉보기엔 별반 달라진 게 없었지만, 항상 앞장서 길을 헤쳐 온 그가 지치지 않았을 리 없었다.
앉고 눕는 것밖에 하지 않는 그녀조차 힘든데, 이들은 오죽할까.
‘결국은, 다 나 때문이야.’
루시는 또다시 같은 결론을 내렸다.
나는 그저 짐일 뿐이다.
그 사실이 점점 더 그녀의 마음을 짓누르고 있었다.
어리고 약하다는 건 결코 면죄부가 될 수 없었다.
물론 이안과 미구엘은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겠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더욱, 그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그 염원을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그 순간 어린아이의 치기 어린 말이 될 뿐일 테니까.
“…….”
그래서 루시는 그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불덩이는커녕 불똥도 튀지 않는 손아귀.
그 사실이 야속함을 넘어, 이제는 원망스럽기까지 했다.
‘하고 말 거야. 할 수 있어.’
이를 악문 루시가 다시 온 정신을 집중하는 사이.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이다만.”
등받이에 뒤통수를 기댄 채로, 이안이 문득 입을 열었다.
“내가 낙오하는 순간이 있더라도, 멈추지 말고 달려라.”
“…갑자기 또 뭔 그런 불길한 말씀을 하시오?”
미구엘이 인상을 찌푸렸다.
이안이 아무렇지도 않게 덧붙였다.
“느낌이 안 좋아. 요 며칠 너무 조용하기도 하고. 보통 이럴 땐, 큰 게 오더라고.”
“형씨 제발 좀…. 하아….”
미구엘이 눈을 질끈 감았다.
하나부터 열까지 재수 옴 붙을 말만 골라서 하고 있었으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따라오는 놈들도 이제 우리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을 거야. 그러니 나만 없으면 루시를 붙잡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놈도 분명히 있겠지.”
“…….”
“그러니까 뭔 일이 생겨서 내가 떨어져 나가도, 멈추지 말고 달려라. 만약 마차가 박살 나더라도….”
이안이 옆에 놓인 배낭을 들어, 미구엘에게 휙 넘겼다.
“루시를 안고 말을 타고 튀어. 이 안에 든 거면 며칠은 버틸 거다.”
그제야 얼마 전에 그가 준비한 배낭의 용도를 알게 된 미구엘이, 한쪽 눈썹을 치켜들었다.
“그럼… 형씨는?”
“죽을 생각으로 하는 말 아니니까, 그따위 목소리 내지 마라.”
“아, 그런 거였소?”
“난 상황을 마무리하고 따라갈 거다. 그러니 어떻게든 도망쳐. 그리고 정 목숨이 위험해지면… 부츠에 넣고 다니는 그걸 쓰고.”
“……!”
순간 숨을 멈췄던 미구엘이, 이윽고 내뱉었다.
“알고 계셨소?”
“무슨 일이 생기면 발목부터 더듬대는데, 그걸 어떻게 몰라?”
코웃음 친 이안이 말을 이었다.
“어떤 놈들이건, 루시까지 상하게 하지는 않을 거다. 하지만 넌 아니지. 그러니 어쩔 수 없는 순간이 오면 그걸 쓰고, 알아서 화로의 사원까지 찾아와.”
“그럼, 루시는…?”
“내가 되찾아 오면 돼. 그런 의미에서 네가 오래 튈수록 내 일이 편해지겠지. 안 잡히면 더 좋고.”
“…….”
“어디까지나 최악의 상황을 얘기하는 거다. 대비해서 나쁠 건 없으니까.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어.”
미구엘이 피식, 체념 섞인 웃음을 흘렸다.
“형씨가 그렇게 말하면, 꼭 그런 일이 일어나던데 말이오.”
“그러니까 더더욱 명심해. 아무도 죽지 않을 방법이니까.”
“대신… 루시가 좀 괴로울 거요.”
“그 정돈 아무렇지도 않게 견딜 거다. 보기보다 강한 녀석이야.”
최악의 상황에선, 저마다 조금씩은 희생해야 하는 법.
일견 냉정해 보이지만 루시에 대한 믿음이 깔린 이안의 말에, 미구엘도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진 잠깐의 적막.
적막을 깨뜨린 건, 목소리가 아니었다.
화륵-
“……!”
루시의 손아귀에서 작은 불길이 피어오른 것이다.
루시의 눈이 커졌다.
이안과 미구엘도, 동시에 그녀의 손아귀로 시선을 돌렸다.
“해… 해냈다…! 해냈어요…!”
눈동자의 떨림을 숨기지 못한 채, 루시가 그들을 돌아보았다.
“뭐, 당연히 해낼 줄 알아서 놀랍진 않다만. 축하한다, 인석아.”
미구엘이 말과 달리 헤벌쭉 웃음 짓는 가운데, 이안이 턱을 까딱였다.
“그래서, 어떻게 했냐?”
“어쩌다 보니… 됐어요. 너무 답답하고 화가 났는데, 갑자기 될 것 같은 느낌이 들더라고요.”
푸스스-
불길이 사그라든 건 루시가 대답한 직후였다.
허망하게 손을 응시하는 그녀를 바라보며, 이안이 웃음 지었다.
“아무래도, 네 감정의 영향을 받는 것 같은데.”
“감… 정이요?”
“추측일 뿐이야. 아직은 불안정하니까. 어지럽진 않고?”
“네. 저번엔 그랬었는데… 지금은 정말 아무렇지도 않아요.”
“호오….”
이안은 또 한 번 감탄했다.
사실, 그는 루시에게서 전혀 마력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불길을 일으키고 있는 도중에도 그녀의 눈동자에는 마력이 맺혀 있지 않았다.
‘대기 중의 마력을 곧바로 끌어다가 연소시키는 건가.’
부러운 마음이 절로 들었다.
저게 어떻게 가능한 건지를 알 수 없어서 더더욱.
…이래서 원소 친화력이나 마력 혈맥 같은 특성을 찍었어야 했던 거군.
생각하며 루시의 머리를 헝클이던 이안의 손길이, 이윽고 멈췄다.
마차 뒤. 얕게 이어진 계곡을 돌아본 그의 입가에 쓴웃음이 맺혔다.
“…어쩐지, 지금 말해 놓고 싶더라니.”
이런 의미에선, 육감도 쓸모 있는 특성이라고 해야 할까.
미구엘이 그를 돌아보았다.
“…설마.”
“그래. 마차 속도를 올려라, 미구엘. 마석도 미리 준비해 놓고.”
“그, 마석 여분은 이제 한 번 더 쓸 분량밖에 없소.”
“그거면 충분해. 길어야 한나절이면 판가름이 날 테니까.”
내뱉은 이안이 몸을 일으켰다.
저만치의 능선 위로 모습을 드러낸 일련의 기수들이, 그의 시선을 느낀 것처럼 달리기 시작했다.
***
“낙마하지 않게 조심들 해라! 다 와서 자빠지면 그것만큼 꼴사나운 게 없으니까!”
“거, 기사 나리들, 길 트쇼!”
마흔이 넘는 기수들이 맹렬한 속도로 멀어졌다.
뒤에서 그들을 지켜보는 샬롯의 엉덩이가 안장 위에서 들썩였다.
돌진을 시작한 건 아겔 란의 기사들과 그들을 따르는 용병들 뿐.
그녀를 비롯한 천칭 상단 무리는, 아직 하비에르의 마차 근처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
혀를 날름댄 샬롯이 올레그와 하비에르를 돌아보았다.
하비에르의 눈빛은 고요했다.
추적하는 동안에는 그토록 열성적이었건만. 막상 일이 시작된 지금은 오히려 무심해 보이기까지 했다.
이 또한 상인 특유의 습관이리라.
“카일과 케네스를 죽인 자들이라는 걸 잊지 말게. 흥분해서 앞장서지 말고, 사냥개들을 이용해 전력을 제대로 파악하도록 해. 되도록이면 더 이상의 손실은 보고 싶지 않군.”
“…예.”
“알겠습니다.”
샬롯과 올레그가 대답했다.
“강 너머까지 가지도 않았으면 좋겠군. 물론 난 저 저주받은 땅엔 한 발자국도 들이지 않을 걸세.”
“그럴 일은 없겠지만. 그래도 걱정 말고 이쪽에서 기다리십시오.”
태연하게 내뱉은 올레그가 샬롯과 눈빛을 교환하고는 덧붙였다.
“목표물은 저희가 반드시 되찾아 올 겁니다.”
“가능하다면 밤이 되기 전에 돌아오게.”
기수들을 쫓던 하비에르의 시선이 이윽고 멈췄다.
그들이 마차를 거의 따라잡았다.
“곧 시작되겠군. 합류하게.”
샬롯이 기다렸다는 듯 고삐를 쥐어 들었다.
하비에르가 덧붙인 건 그때였다.
“샬롯. 우리 목표가 무엇인지, 잊지 말거라.”
“…….”
당신의 목표겠지.
생각하며 고개만 까딱인 샬롯이 그대로 달려나갔다.
호위병들의 절반이 그녀와 올레그의 뒤로 따라붙었다.
“올레그.”
하비에르의 마차가 어느 정도 멀어지자, 샬롯이 입을 열었다.
올레그가 놀랍지도 않다는 듯 그녀를 돌아보았다.
“검의 달인?”
“그래. 놈은 내 거야. 그러니까 계집애는 네가 챙겨라.”
“나야 상관없지. 계획은 있고?”
“상황을 봐서, 내가 놈을 낚아챌 거다. 그전까진 너도 나서지 마. 그 이후론, 알아서 하고.”
“단주가 싫어하실 텐데.”
“좇까라 그래. 애초에, 난 나보다 약한 인간의 말은 듣지 않아.”
“그래, 그래. 넌 너보다 강한 돈의 말을 듣지.”
샬롯이 으르렁댔다.
웃음을 터뜨린 올레그가 보란 듯 간격을 벌렸다.
“사냥개들이 마차를 물어뜯게 거리 잘 유지해! 상단주의 명령을 잊지 마라!”
부하들이 그들을 앞질러 달려갔다.
올레그를 노려보던 샬롯이 이내 시선을 돌렸다.
어차피 인간들이 자신을 이해하리란 기대는 한 적도 없었다.
그녀가 하비에르의 역겨운 속내를 알면서도 그의 곁을 지키는 건, 물론 돈 때문이긴 했다.
하지만 자신의 야성을 마음껏 분출하고도 뒤탈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도, 그에 못지않게 큰 이유였다.
그녀의 본능은 언제나 사냥과 혈투를 원했다.
끝내 자신보다 강한 포식자를 만나 목숨을 잃게 될지라도.
‘…후회는 없지. 꼬리만 잃지 않는다면야.’
“마차로 붙어!”
“저놈부터 떨어뜨려!”
어느새 용병들의 외침이 가까워졌다.
샬롯은 흥분을 억누르며 마차를 바라보았다.
정확히는 마차의 칸막이 위에 곡예하듯 올라선 검은 머리의 사내, 이안 호프를.
휙-
자신을 향해 날아드는 창대를 아무렇지도 않게 피한 그가, 오히려 손을 뻗어 창대를 움켜쥐었다.
“어, 어억…?!”
균형을 잃은 용병이 그의 손짓에 딸려 들어갔다.
이안이 창대를 놔버린 건 그 직후였다.
“으, 으아악-!”
낙마한 용병이 땅을 굴렀다.
그의 몸 위로 커다란 그림자가 드리웠다.
콰직!
달리는 말에 짓밟혀 꿈틀대는 놈을 바라본 샬롯이 눈을 빛냈다.
‘시작부터, 마음에 드는데?’
그사이 훌쩍 몸을 날린 이안이, 낙마한 용병의 말에 올라탔다.
“이아아아안-!”
누군가 고함을 내지르며 돌진했다.
번쩍이는 갑옷.
아겔 란의 기사였다.
“이 더러운 배신자! 우리가 네놈을 얼마나 믿었는데!”
그를 돌아본 이안의 얼굴에 조소가 번졌다.
그의 목소리가, 샬롯의 예민한 귀를 파고들었다.
“난 믿어 달라고 한 적 없는데.”
“이노오오옴-!”
기사가 달려들었다.
이안은 위태로워 보이는 자세로 그의 일격을 피하고는, 그대로 손에 쥔 검을 휘둘렀다.
결코 닿을 거리가 아니건만.
콰직-!
스쳐 지나간 기사의 몸이 크게 휘청댔다.
그의 갑옷 등 부분이 눈에 띄게 구겨졌다.
‘마법…? 마법 무구…?’
샬롯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녀가 마차와 상당한 거리를 유지한 채 이안을 관찰하는 건, 하비에르의 명령 때문이 아니었다.
이건 일종의 전희였다.
맛있는 요리일수록, 그 맛을 확실히 음미할 수 있을 때까지 아껴 먹어야 했다.
피슉-
“으악……!”
“마차 앞으로 나가지 마라! 마부 놈이 쏘는 석궁, 장전이 빨라!”
샬롯은 마차 앞쪽에서 일어나는 작은 소란 쪽으로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이안에게 점점 더 빨려들어 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콰직-!
‘손속은 단호하고….’
“이런 미친, 죽어억…?!”
서걱-
‘과감한 움직임도 마다하지 않는군. 무모해 보일 정도야.’
그녀는 이안과 그의 손에 죽어 나가는 용병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눈에 담았다.
‘검의 달인은 절대 아니야. 하지만… 그래서 더 신기하군. 저놈은 대체 뭐지…?’
샬롯이 혀를 날름거렸다.
입안에 점점 더 군침이 돌았다.
그와는 반대로, 그녀의 눈빛은 점점 더 섬뜩하게 가라앉고 있었다.
이안을 강자로 인정했다는 의미였다.
‘적어도 이게 전부는 아닐 거야. 카일과 케네스가 당할 만한 뭔가를 숨기고 있겠지.’
어느 순간부터, 그녀는 오로지 이안에만 온 정신을 집중하고 있었다.
그래서였다.
계곡이 끝나는 지점에서 기다리던 무리의 존재를 곧바로 눈치채지 못한 것은.
“…저것들은 또 뭐야.”
문득 전방을 돌아본 이안이 읊조리는 목소리를 듣고서야, 샬롯은 그와 같은 방향을 바라보았다.
달려오는 수십 명의 기수들.
“길을 막아! 간격을 벌려라!”
지휘관으로 보이는 기사의 외침이 들린 순간, 샬롯은 비로소 비죽이 입술을 말아 올렸다.
그녀에겐 오히려 깜짝 선물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덕분에 이안의 진면목을, 더 빨리 볼 수 있게 될지도 몰랐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