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Dark Fantasy Villain RAW novel - Chapter 604
#604화
“…예. 성자 대행.”
고개를 끄덕인 파엘이 이안을 돌아보았다.
“벽이 무너진 뒤에,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제도에 들러 찾아뵈었었습니다. 그때 성자 대행께서 무사하시며 남부에 계시는 것 같다는 이야기도 들었지요. 해서….”
그의 입꼬리가 절로 말려 올라갔다.
“이렇게 대륙 반대편에서 뵙게 되리란 상상은 더더욱 하지 못했습니다.”
“뭐, 그건 피차 마찬가지일 테니, 비긴 거로 합시다.”
피식 웃으며 말한 이안이 식탁 쪽을 가리키며 걸음을 옮겼다. 파엘이 선선히 뒤따르는 가운데, 그가 덧붙였다.
“한 잔 드시겠소?”
“예. 부탁드리겠습니다.”
파엘이 루시페르의 옆의 빈자리에 앉으며 대답했다. 보르가 자연스럽게 그의 뒤편에 서고, 쪼르르 달려온 샤힌이 주석 술병을 들어 빈 잔을 채우기 시작했다.
테사이아의 곁에 걸터앉는 이안을 돌아본 파엘이 입을 열었다.
“여쭙고 싶은 말이 많았는데. 막상 이렇게 앉으니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꺼내야 할지 모르겠군요.”
“그럼 내가 먼저 묻지.”
내뱉은 이안이 그를 돌아보았다.
“이제, 북부는 오가지 않는 것이오?”
“예. 저번 침식 이후로, 북부는 풍차 상단에 위임했습니다. 야인들과도 안면을 튼 상태였으니 적임이었지요.”
“조이스?”
샤힌이 가져다준 술병을 받으며 이안이 되물었다.
파엘이 싱긋 미소 지었다.
“예. 기억하시는군요.”
“등대 상단과 만났을 때, 그자의 전 호위도 함께 만났거든.”
“레긴 말씀이시군요. 하하. 둘이 갈라선 건 작년의 일인데, 덕분에 풍차 상단주가 꽤 속상해했습니다. 아, 고맙구나.”
샤힌에게 술잔을 받은 파엘이 고개를 까딱였다. 빙긋 미소 지은 샤힌이 벽면에 기대앉은 무카파의 곁으로 다가가는 가운데.
“그럼 북부가 어떤 상황인지는 잘 모르시겠군.”
포도주를 한 모금 마신 이안이 내뱉었다. 파엘이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는 않습니다. 자주 이야기를 전해 들었거든요. 그쪽의 상황이 조금… 어지럽게 돌아가고 있어서 말입니다.”
이안의 눈매가 꿈틀대는 가운데, 재빨리 술로 목을 축인 파엘이 말을 이었다.
“울라프 대공과 설원 야인들의 관계가 완전히 틀어져 버렸습니다.”
“그 부분은, 자세히 들어 봐야 할 것 같은데.”
이안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내뱉었다. 동의를 구하듯 슬쩍 일행들을 돌아보는 채였다.
물론 다들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이안은 북부의 대전사이자 설원 변경백이 아니던가.
다시 이안의 시선을 받은 파엘이, 기억을 되새기며 입을 열었다.
“성자 대행께서 실종되신 후, 야인 군단은 한동안 전선을 떠나지 않고 수색을 이어갔다고 합니다. 벽을 넘으신 게 확실해진 후론, 앞다퉈 벽을 넘으려 했다더군요.”
“…날 따라가려 했다고?”
이안이 한쪽 눈썹을 치켜들며 되물었다. 파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듣기론 그랬습니다. 하지만 검은 벽이 굳어져 불가능했다고 합니다.”
“하여간, 야인들이란.”
테사이아가 낮게 코웃음을 흘리며 읊조렸다. 파엘의 시선이 저도 모르게 보르 쪽으로 돌아갔다.
“…….”
역시나 보르는 그녀를 빤히 응시하고 있었다. 물론 테사이아는 신경도 쓰지 않고 품을 뒤적여 궐련 함을 꺼내 들고 있었다. 이안이 술잔을 들며 내뱉었다.
“그래서.”
“…해서 처음에 그들은, 전선에서 기다리기로 했다더군요. 벽이 다시 안정을 되찾을 때까지 말입니다.”
“그러려면 적어도 1년 이상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들었는데요.”
루시페르가 나지막이 말했다. 파엘이 술잔을 들어 동의를 표하고는 말을 이었다.
“그들에겐 문제도 아니었을 겁니다. 기다리지 못한 건 그들이 아니라 대공이었지요.”
“그랬겠지.”
술을 한 모금 마신 이안이 입술 끝만 살짝 당긴 채 덧붙였다.
“다른 전선들도 개판이었을 테니까. 곳곳에 광기도 스며들었고.”
“예. 제가 듣기론, 전선으로 이동을 명령했다고 하더군요.”
“그러면서 대전사께서 전사하셨다고 공표해 버렸습니다.”
파엘에 이어 보르가 툭 끼어들었다. 다시 떠올려도 불쾌한 듯 콧잔등을 씰룩이며, 그가 덧붙였다.
“혼란을 잠재운 뒤에 성대하게 장례를 치르겠다고 했다더군요.”
“…합리적인 판단인 것 같은데.”
이안이 헛웃음을 흘리며 읊조렸다. 보르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작자는 대전사가 돌아가셨기를 바란 겁니다. 장례를 핑계로 야인 전사들을 휘하로 거둬들이려는 의도였지요. 그 속내가 뻔히 보이니 더 모욕적일 수밖에요.”
“뭐… 그것도 합리적이고. 욕심을 크게 부리시긴 했지만.”
또 한 번 태연하게 대답하며, 이안이 테사이아의 얼굴 앞으로 왼손을 뻗었다. 궐련의 연기를 들이마시던 그녀가 선선히 입에 문 궐련을 양보했다.
“그래서, 반기라도 든 건가?”
“그랬다면 이렇게 차분하게 말씀드릴 수 없었겠지요. 전선 지휘관과 철권의 사제님이 열성적으로 전사들을 설득했다더군요.”
“미구엘….”
루시페르가 읊조렸다. 입가에 옅은 미소를 머금는 그녀를 돌아보며, 파엘이 덧붙였다.
“야인 전사들은 설원 지대로 돌아갔습니다. 설원 곳곳에도 광기가 스민 건 물론이고, 마물이 적잖이 숨어들었다고 하더군요.”
“좋은 명분이군.”
“예. 그 뒤로 대공께서 몇 번인가 소집을 명령했지만, 응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대공 전하께서 화가 많이 나셨겠는데….”
이안이 궐련을 입에 문 채 읊조렸다. 입가에 의미를 알 수 없는 옅은 미소를 머금은 채였다.
파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해서, 전하께선 야인들이 북부 장벽을 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북부의 일원으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뜻이나 다름없겠지요.”
“그들의 공로를 완전히 무시한 처사입니다. 심지어 설원 지대의 혼란을 잠재우며 자신들의 책임을 다하고 있는데도 말입니다.”
보르가 덧붙였다. 대공의 결정에 분노하고 있다는 건 말투만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파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히 장벽 요새의 주둔군도 그 사실을 아는 것 같더군요. 유혈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외부인의 출입까지 막지는 않아서, 상단이 오가는 것도 문제없고요.”
“꽤 추울 텐데, 풍차 상단주가 고생이 많았겠군.”
궐련을 다시 테사이아의 입에 물려주며, 이안이 읊조렸다. 파엘이 낮게 웃음 지었다.
“워낙 엄살이 심한 친구지 않습니까. 그래도 이득을 많이 봤을 겁니다. 마물들을 토벌해 나온 부속물을 거의 독점했으니까요. 마법사나 장인들이 군침을 흘리며 달려드는 것들이죠.”
술을 한 모금 마신 그가 덧붙였다.
“물론, 변방을 오가는 저희도 제법 재미를 보고 있습니다. 두 번 움직여야 하니 품은 더 들지만, 그만한 보람이 있죠. 여담입니다만, 그 과정에서 레긴 그 친구와 잡음이 생긴 것 같더군요.”
“……?”
“조이스는 북부의 다른 대도시들도 돌기를 바랐거든요.”
“그자는 불만만큼 욕심도 많은 작자입니다.”
보르가 읊조린 말에, 파엘이 콧방귀를 뀌며 그를 돌아보았다.
“이 친구야. 우리는 상인이야. 아무리 그래도 대공과 척을 질 수는 없지 않겠나.”
“거래하지 않는 게 척을 지는 건 아니지. 말장난 마시오, 단주.”
“고용주에게 못 하는 소리가 없군. 타락용의 침공 때 도망친 상단들이 어떻게 됐는지 잊었나?”
“그건 저들만 살겠다고 도망친 작자들이잖소.”
“대공 전하의 눈에는 똑같아 보일 걸세. 하여간….”
혀를 찬 파엘이 다시 이안을 돌아보았다.
“설득에도 불구하고 달라지는 게 없자, 레긴이 계약을 파기하고 떠나 버렸다고 하더군요. 야인들을 볼 면목이 없다고 말입니다.”
풀썩 웃은 이안이 읊조렸다.
“그때 그게 수치스러웠던 건가….”
“예?”
“…아니야. 어쨌든 그래서, 대공과의 관계를 제외하고 다른 문제는 없는 건가?”
“그게 가장 큰 문제이긴 합니다만… 일단 제가 알기로는 그렇습니다. 설원 지대의 광기를 거의 다 뿌리 뽑은 건 물론이고, 전보다 추위도 덜해지고 있다고 하더군요.”
대답하며 이안의 눈을 마주 본 파엘이 미소 지었다.
“성자 대행께서 돌아가신다면, 북부의 질서는 자연스럽게 바로 잡힐 겁니다.”
“…….”
이안은 별다른 대꾸 없이 술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파엘이 원하던 반응은 아니었다. 재빨리 술을 한 모금 마신 파엘이 덧붙였다.
“그런 의미에서, 저도 말씀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만….”
“하시오.”
이안이 술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파엘이 목소리를 낮추며 내뱉었다.
“혹 중앙으로 향하실 계획이셨다면… 그전에 북부로 먼저 가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이안의 눈매가 설핏 꿈틀댔다.
“제국으로 가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는 듯한 말투이신데.”
“그것이….”
파엘이 말을 흐렸다. 난처한 듯 시몬 일행들을 돌아보는 채였다.
숨죽인 채 경청하고 있던 시몬이 눈을 치켜떴다.
“설마, 저희를 믿지 못하시는 겁니까?”
“그보다는… 알게 되는 것만으로도 위험해지실 수도 있는 이야기라서 말입니다.”
“그렇다면 더더욱 알아야 합니다. 성자 대행의 위업을 중앙에 널리 알리는 것이 제 사명이니 말입니다.”
“…….”
파엘이 이안을 돌아보았다. 전혀 설득력 없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테사이아에게 받은 궐련을 입에 물며, 이안이 고개를 까딱였다.
“뭐, 못 믿을 자들은 아니오.”
시몬이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까딱이는 가운데, 이안이 덧붙였다.
“하지만 물론, 저런 사명을 내린 적은 없지. 원한다면 내보내고 이야기 나눕시다.”
“……! 자, 잠시만요! 성자 대행!”
화들짝 눈을 치켜뜬 시몬이, 양 손을 펼치며 이안을 돌아보았다.
“저, 저도 듣고 싶습니다…! 각오는 되어 있습니다. 부디 자리를 지킬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
“…경, 에드. 잠시 자리를 피해주지 않겠어?”
이안의 시선을 받은 시몬이 재빨리 고개를 돌리며 덧붙였다.
“아무래도 이 이야기는 나만 듣는 게 좋을 것 같거든. 아마도 근처로 접근하지 못하도록 복도를 지켜 줘.”
“…그냥 함께 나가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만.”
떨떠름하게 내뱉으면서도, 브레넌이 선선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에드워드도 마찬가지였다.
중년 기사가 절뚝대는 시종과 함께 문으로 걸음을 옮기자, 시몬이 다시 이안을 돌아보았다.
“성자 대행…?”
“…굳이 그렇게까지 듣고 싶다면.”
코로 연기를 뿜으며 내뱉은 이안이, 파엘을 돌아보았다. 고개를 끄덕인 파엘이 문이 닫히는 것을 확인하고는 입을 열었다.
“대교회에서 성자 대행의 행방을 쫓고 있다고 합니다. 정확히는 저 위대한 백금룡과 성자 대행, 두 분 모두를요.”
“역시….”
시몬의 눈이 커지는 가운데, 루시페르가 나지막이 읊조렸다. 이안과 눈빛을 교환하는 채였다. 테사이아의 표정까지 확인한 파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상하고 계셨나 보군요.”
“뭐, 백금룡께서 벽을 무너뜨리셨으니까. 예상 가능한 수순이잖소.”
이안이 연기를 뿜으며 대답했다.
손을 뻗어 테사이아의 입에 궐련을 물려 주며, 그가 덧붙였다.
“그래서 검은 벽을 무너뜨린 책임이라도 물으려는 건가?”
“황녀 전하께선 그렇게 예상하고 계셨습니다.”
이안이 입가에 속내를 알 수 없는 미소를 머금는 가운데, 눈을 치켜뜬 시몬이 내뱉었다.
“대교회가 어찌 감히 성자께 책임을 묻는단 말씀입니까?”
“교단 내부에는 그분을 인정하지 않는 자들이 적지 않습니다. 도련님. 그걸 넘어, 아예 눈엣가시로 여기는 자들도 있지요.”
“아니… 그게 무슨… 어째서입니까? 제국의 시작을 함께하신, 위대한 용이신데요.”
“바로 그래서야.”
이안이 덤덤하게 덧붙인 말에, 시몬이 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 됐다. 그에게 백금룡은 그저 신성한 존재이자 동경의 대상일 뿐이리라.
“게다가 성자 대행께선, 벽 너머에서 두 해가 넘는 시간을 보내지 않으셨습니까.”
파엘이 나지막이 말을 이었다.
“그에 대한 조사도 함께 이루어질 겁니다. 혹시라도….”
그가 차마 말을 끝맺지 못한 채 입을 다물었다. 술을 한 모금 마신 이안이 한쪽 입꼬리를 말아올리며 내뱉었다.
“타락하지 않았는지 확인하려고?”
“…예.”
파엘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술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보르가 콧방귀를 뀌는 가운데, 시몬이 너털 웃음을 흘렸다.
“말도 안 되는 의심이군요. 걱정할 필요도 없겠고요.”
“글쎄….”
한쪽 어깨를 으쓱인 이안이 태연하게 덧붙였다.
“날 찍어 내려는 놈들에게는 절호의 기회일 걸.”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게다가 난, 그 작자들에게 미움받을 짓을 많이 했거든.”
시몬의 미간이 어리둥절하게 일그러졌다. 그사이 숨을 고른 파엘이 입을 열었다.
“물론, 그렇지 않은 분들도 많습니다. 황녀께선 그들을 규합 중이시고요. 자세한 계획까지는 저도 알지 못합니다만… 어쨌든, 차라리 다행입니다.”
그가 궐련을 받아 입에 무는 이안을 바라보았다.
“북부에서 몇 달만 기다려 주십시오. 제가 황녀께 소식을 전하고, 상황이 안정되면 직접 모시러 가겠습니다.”
궐련의 연기를 마시며 고개를 주억거리던 이안이, 이윽고 말했다.
“난 처음부터 북부로 갈 생각이었소. 염려 마시오.”
“그러셨습니까…? 다행이군요…!”
파엘이 내심 가슴을 쓸어내리며 대답했다. 만약 이안이 반대로 제도로 향하겠다고 고집을 부린다면 말릴 방법이 없지 않았던가.
“아무래도 제 역할이, 제 생각보다 훨씬 중요한 것 같군요.”
미간을 찌푸리고 있던 시몬이 내뱉은 건 그때였다. 파엘이 돌아보자 그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성자 대행의 신성을 입증해야 하지 않습니까. 물론 무카파 경이 있긴 합니다만, 규율상 언급할 수 없는 부분들이 많을 겁니다.”
벽면에 기대앉은 무카파를 일별한 그가, 자신의 가슴에 손을 얹으며 파엘을 마주 보았다.
“하지만 저는 아니지요. 저는 제가 보고 겪은 모든 것을, 남김없이 증언할 수 있습니다.”
“으음….”
“그러니 저를 황녀 전하께 인도해 주십시오, 단주. 제 증언이 도움이 될 겁니다.”
“위험할 거다.”
내뱉은 건 이안이었다. 시몬이 그를 돌아보며 설핏 미소 지었다.
“알고 있습니다, 성자 대행.”
“너만 그런 게 아니야. 브레넌, 에드워드. 그걸 넘어 네 가문까지 위험해질 수도 있어.”
“…….”
그제야 시몬의 미소가 굳어졌다. 거기까진 생각하지 못한 것이리라. 그의 눈을 빤히 바라보며, 이안이 덧붙였다.
“나와 백금룡을 찍어내려는 자들은, 이번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 무슨 짓이든 할 테니까.”
“…그렇다 해도, 하겠습니다.”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던 시몬이 이윽고 내뱉었다. 이안의 한쪽 눈매가 꿈틀대는 가운데, 그가 말을 이었다.
“어차피 전 결국엔 사교계에 제가 보고 들은 것들을 떠들게 될 겁니다. 몇몇 사실들을 감출 수는 있겠습니다만, 모든 일을 평생 가슴에 묻고 살아가진 못하겠지요. 그게 저라는 놈이니까요.”
“…….”
“어차피 그럴 거라면 차라리, 성자 대행과 전하께 도움이 되는 편이 좋지 않겠습니까? 게다가….”
이안이 궐련의 연기를 천천히 들이마시는 가운데, 시몬이 입술을 당겨 미소 지었다.
“뭔가 문제가 생기기 전에, 황녀 전하께서 막아 주시겠지요.”
“…용기 있으시군요. 도련님.”
이안의 눈매가 슬며시 휘어지는 가운데, 파엘이 탄성을 터뜨렸다.
“아무리 전하의 비호를 받는다고 해도, 예상치 못한 위험은 언제고 발생할 수 있는데 말입니다.”
“거… 기까진 몰랐습니다만….”
“…….”
“…물론 알았다고 해도 달라질 건 없습니다. 아마도요….”
“제법이네. 인상적이야.”
입꼬리를 말아 올린 테사이아가 술잔을 슬쩍 들며 말했다. 루시페르가 술잔을 집어 든 건 거의 동시였다.
“저도요. 다시 봤어요. 공자.”
“……!”
시몬의 눈이 순간 커졌다. 동시에 그의 입꼬리가 꿈틀대며 말려 올라갔다. 술잔을 집어 든 시몬이, 자신의 가슴팍을 팡팡 두드렸다.
“저만 믿으십시오…! 그 어떤 역경과 위협도 제 입을 막을 수는 없을 겁니다. 제가 기필코. 반드시 성자 대행의 무고함을-”
“네 진심은 잘 알겠어. 시몬.”
이안이 말을 잘랐다. 궐련을 손가락 사이로 옮기며, 그가 시선을 돌렸다.
“단주. 그리고 전하의 진심도.”
“…당연히 해야 할 일입니다.”
파엘이 살짝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피식 웃은 이안이 술잔을 집어 들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내 결백을 증명하는 건, 사실 그다지 중요하지 않아. 진짜 문제는 따로 있으니까. 황녀 전하께서 대비하셔야 할 것도.”
“그게 무슨….”
파엘이 고개를 갸웃했다.
시몬. 그리고 무카파의 어깨에 기대선 샤힌도 마찬가지였다.
루시페르와 테사이아만이 의미심장하게 서로를 돌아보는 가운데, 이안이 술잔을 입으로 가져가며 덧붙였다.
“검은 벽 너머에, 선대 황태자께서 살아 계시거든.”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