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Dark Fantasy Villain RAW novel - Chapter 609
#609화
“말 그대로란다.”
태연하게 어깨를 으쓱인 아르케아스가 말을 이었다.
“천상은 결코 나를 용서하지 않을 거야. 내 손으로 결국, 대륙의 균형을 완전히 무너뜨렸으니까. 그들이 가장 염려하던, 그리고 수없이 경고한 일을 저질러 버린 거란다.”
미간을 좁힌 채 듣고 있던 이안이 내뱉었다.
“균형은 진작부터 무너진 상태였잖소.”
“천상의 시선은 우리와 다르단다. 전에도 말했듯, 저들에게 대륙의 혼란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흐름으로 보였을 거야. 원탁이 그렇게 의도했듯이. 게다가….”
이안을 응시하는 그의 눈매가 의미심장하게 휘어졌다.
“네 곁에서 마침내 나를 치워 버릴 수도 있게 됐잖니.”
“그런다고 내가….”
“마법사인 네가 계시를 받아들일 리는 없겠지. 안단다. 하지만 그 역시 네 관점일 뿐이야. 네 의사와 관계없이, 너는 이미 천상의 관심과 가호를 받고 있잖니?”
이안의 눈매가 더 일그러지는 가운데, 아르케아스가 속삭이듯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그리고, 나 역시 네가 계속 그러기를 바란단다. 이안. 네가 대륙의 혼란을 잠재울, 이 시대의 영웅이라 믿으니까. 하지만 천상을 등지고서는, 그 위업을 이룰 수 없을 거란다.”
“…….”
“그러니 나와 천상의 문제에 끼어들지 말렴. 그래서 너까지 피해를 보는 건, 내가 가장 바라지 않는 일이야.”
“…그래서.”
이안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술을 달싹였다.
“이대로 영원히, 홀로 이 땅속 둥지에서 유폐된 채 살아 가시겠다는 말씀이시오?”
“…이안.”
“나는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계속, 귀하의 이름을 팔아먹고 천상의 가호를 받으며 영웅 행세나 하고?”
“그런 의미가 아니란다….”
“내 관점에선 똑같소. 그리고, 그렇게는 못 하겠소.”
이안이 단호하게 내뱉자, 잠시 그를 빤히 응시한 아르케아스가 눈을 질끈 감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귀하의 죄를 완전히 사하지는 못하더라도, 가벼운 형벌로 갈음할 방법이 분명 있을 것이오.”
이안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귀하의 말씀대로 쉽지는 않겠지. 그러니, 같이 방법을 고민해 봅시다. 마침 뇌리를 스치는 생각도 있소.”
“…정말이지, 고집불통이구나.”
감은 눈을 뜨지 않은 채, 아르케아스가 입술을 달싹였다.
“네 그런 점이 늘 마음에 들었다만. 지금만큼은 야속하기 그지없어.”
이안이 어깨를 으쓱였다.
“귀하가 선택하신 대행자요. 받아들이시오.”
“그래… 솔직히, 기쁘기도 하구나. 이리도 나를 생각해 주다니. 내가 대행자를 아주 잘 만났어. 하지만….”
술잔을 쥐려던 이안이 멈칫했다. 아르케아스가 감고 있던 눈을 뜬 건 바로 그 직후였다.
“네가 마음에 든 건, 나 역시 고집불통이기 때문이란다.”
“……!”
그를 바라보는 아르케아스의 눈은 어느새, 인간이 아니라 용의 그것이 되어 있었다. 마력을 머금고 일렁이고 있기까지 했다.
“오랜만의 만남을 즐겁게 끝맺지 못해 아쉽구나. 하지만 부디 내 선택을 이해해 주렴. 이제 다시 네 친구들의 곁으로…?”
웅웅 울리던 아르케아스의 목소리가 말을 끝맺지 못한 채 잦아들었다.
이안이 앉은 의자가 요란한 소리와 함께 뒤로 밀려나더니, 그가 그대로 옆으로 몸을 날려 달려나가 버렸기 때문이다.
타타탓-!
삽시에 방 한복판까지 멀어지는 그를 멍하니 돌아본 아르케아스가, 이윽고 황당함을 감추지 못한 채 입을 열었다.
“네 심정은 안다만, 무의미한 반항이다. 이안. 이곳이 내 둥지라는 것을 잊지 말렴.”
“지나치게 크고 화려한 둥지지.”
멈춰서며 내뱉은 이안이, 그대로 몸을 돌려 옆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 와중에도 아르케아스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였다.
그가 출입구 쪽으로 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듯, 눈을 가늘게 뜬 아르케아스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내 주문을 피해 도망이라도 다니겠다는 거니?”
“필요하다면.”
즉답한 이안이 어깨를 으쓱였다.
“아시겠지만 나는 빠르고 체력도 좋잖소. 감도 좋은 편이고. 반면 귀하는 몸이 성치 않으시지. 충분히 대화를 나눌 만큼은 도망 다닐 수 있을 것 같소만.”
“…세상에나. 넌 정말 언제나 내 상상을 넘어서는구나.”
잠시 이안을 응시한 아르케아스가, 이윽고 고개를 가로저으며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니 피차, 괜한 힘 빼지 맙시다.”
전혀 방심하지 않고 그를 주시하며, 이안이 내뱉었다. 아르케아스가 백금발을 쓸어 넘기며 대꾸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이다. 이안.”
“내가 혼돈을 품고 있다는 사실도, 잊지 마시오.”
이안이 출입구 앞에서 멈춰서며 덧붙이자, 아르케아스의 손길이 우뚝 멈췄다. 삽시에 웃음기가 사라진 용의 눈길이, 이안에게 틀어박혔다.
“그게 무슨 의미니?”
“이대로 날 내보내시면, 나는 천상을 거부할 것이오. 아무리 아낀다 한들, 내가 타락해 버리면 어쩔 수 없겠지.”
이안이 말을 이어갈수록, 아르케아스의 눈빛이 점점 더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하지만 이안의 입을 막을 수는 없었다.
“어쩌면 카르하는 신경 쓰지 않을지도 모르겠군. 물론, 흑태자는 크게 반길 것이오. 그리고 나는, 그를 제국의 새로운 주인으로 만들도록 돕겠소.”
가면을 쓴 것처럼 무표정해진 아르케아스를 똑바로 응시하며, 이안이 어깨를 으쓱였다.
“천상이 설 자리를 잃는다면, 귀하가 그들의 눈치를 볼 필요도 없어질 테니까.”
“…발언을 정정할 기회를 주마.”
이윽고 아르케아스의 입에서 저주파 섞인 목소리가 번져 나왔다.
“진심이 아니라고 말하렴. 이안.”
“애석하게도 진심이오. 아시잖소.”
오금이 저릴 정도였지만, 이안은 내색하지 않고 대답했다.
물론, 실은 반만 진담이었다. 레벨이 초기화될 테니, 정말 타락을 선택할 생각까지는 없었으니까.
하지만 히케드의 손을 들어 주리라는 말만큼은 진심이었다.
그의 친구들은 기꺼이 따를 테고, 흑태자가 전쟁에서 승리하는 건 게임에서도 존재하던 결말 중 하나일 테니까.
최선의 결말은 아니겠지만, 선택하지 못할 것도 없으리라.
“그러니 선택하시오. 이대로 내 타락을 담보로 술래잡기를 하시겠소, 아니면 같이 방법을 찾아보시겠소?”
이안이 덤덤하게 말을 맺었다.
장내의 공기가 얼어붙는 것 같았다. 뾰족한 동공으로 그를 응시하던 아르케아스가, 이윽고 낮은 탄식과 함께 눈을 감았다.
“목숨이라면 몰라도, 타락하겠다 겁박당해 본 것은 처음이구나. 게다가 이미 전적이 있으니, 빈말로 치부할 수도 없어. 어떻게 한들 달라질 건 없을 것이거늘….”
한숨 섞인 목소리로 읊조린 그가 다시 눈을 떴다. 인간의 눈으로 되돌아온 채였다. 쓴웃음과 함께 이안을 바라본 그가 옆으로 고개를 까딱였다.
“…네 생각이 무엇인지, 들어나 보자꾸나.”
“역천룡을 죽입시다.”
이안이 곧바로 내뱉었다. 아르케아스의 매끈한 미간에 깊은 골이 파이는 가운데, 그가 말을 이었다.
“당장 그러자는 얘기는 아니오. 그놈은 봉인을 부수려 애쓰고 있잖소. 아마 천상이 눈치챌 때쯤엔 돌이킬 수 없는 단계에 다다랐을 테고. 그러니까….”
의미심장한 눈으로 아르케아스를 응시하며, 이안이 한쪽 어깨를 으쓱였다.
“그렇게 될 때까지 둡시다. 귀하가 심신을 회복할 시간도 벌 겸 말이오. 천상이 뒤늦게 눈치챈 거대한 위협을 귀하와 내가 함께 저지한다면, 천상도 모르는 척할 수 없지 않겠소?”
원탁 의회의 방식에 가까웠지만, 이안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필요하다면 그보다 더한 짓도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이안… 너는 정말이지….”
비슷한 생각을 한 듯, 아르케아스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뒤이어 헝클어진 머리칼을 쓸어넘기며, 그가 덧붙였다.
“전에도 말했지만, 그자와 싸우는 건 어떤 경우에도 좋은 선택이 될 수 없단다.”
“하지만 언젠가는 해야만 할 선택이기도 하지. 사실은 귀하도 알고 계시잖소? 결국엔 놈이 봉인을 깨뜨리고 다시 세상으로 나오리란 걸.”
태연하게 대꾸한 이안이 입술 끝만 당겨 미소지었다.
“그러니 그전에 우리가 막읍시다. 힘을 합쳐 용과 싸우는 게, 이번이 처음도 아니잖소.”
아르케아스가 또 한 번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그의 얼굴에는 당황이나 분노가 아니라, 갈등과 난처함이 오가고 있었다.
“이 이야기는… 하지 않으려 했거늘….”
이윽고 혼잣말처럼 읊조린 그가, 다시 이안을 마주 보았다.
“그래. 나쁘지 않은 계획이다, 이안. 어쩌면 정말 가능했을지도 모르겠구나.”
“하지만, 아니라는 말씀이시오?”
“그래. 남은 시간이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여유롭지 않거든.”
“…비밀로 하실 이야기가 아닌 것 같은데.”
미간을 찌푸린 이안이 내뱉었다.
한차례 숨을 고른 아르케아스가, 옅은 피로가 묻어나오는 얼굴로 덧붙였다.
“다시 앉아서 이야기 나누는 게 어떻겠니? 널 억지로 내보내지는 않으마. 그럴 수도 없구나. 네 협박이 통했으니.”
말을 마친 그가 대답도 듣지 않고 몸을 돌렸다. 다시 자리에 앉으며 상반신을 기울여, 앞에 놓인 술병을 집어 드는 채였다.
“…그럽시다.”
비로소 이안도 다시 식탁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가 다시 자리에 앉은 건, 잔을 채운 아르케아스가 술병을 옆에 내려놓았을 때였다.
“알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역천룡을 지키는 간수이자 용의 무덤을 관리하는 무덤 지기이기도 하단다.”
이안이 바라보자, 아르케아스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리고, 용의 무덤이 바로 그자의 감옥이지. 산 채로 동족들의 무덤을 영원히 지키는 것이 그자가 받은 형벌이야. 자신이 저지른 죄를 곱씹고 또 곱씹으면서.”
잔을 들어 입을 축인 아르케아스가, 자신의 가슴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내 영혼에는 무덤 지기의 권한과 간수의 의무가 새겨져 있지. 그자를 가둔 감옥과 공명한다는 의미란다. 내가 잠에서 일찍 깨어난 건, 사실 그래서였지.”
술잔을 집어 든 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저 그를 불러들이기 위해 깨어났다기에는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지 않았던가.
봉인의 균열이 심화되고 있으며 그것을 느꼈다는 쪽이, 훨씬 더 설득력이 있었다.
“역시, 검은 벽이 무너진 여파인 것이오?”
“물론 그렇겠지. 하지만 다른 외부의 요인도 개입하고 있는 게 분명하단다. 그게 아니라면 이렇게까지 빨라질 수는 없을 테니.”
“…놈의 사도들이군.”
혀를 차며 읊조린 이안이 술잔을 입에 물었다. 아르케아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 상태가 온전하지 않으며, 동면에 들었다는 사실을 눈치챈 거겠지. 천상의 분노를 샀다는 것도 알게 되었을지도 모르겠구나.”
짧게 입맛을 다신 그가 덧붙였다.
“그러니, 사도들을 불러들일 생각까지 하게 된 거겠지.”
“…아무리 그래도 너무 빠르군. 벽이 무너진 지 아직 반년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 말이오.”
“이미 오래전부터 준비하고 있었을 거란다. 균열을 심화시킬 정과 망치로 삼기 위해, 하수인들을 통해 외부의 혼돈을 수집해 온 거야.”
술을 한 모금 더 들이켠 아르케아스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천상의 영향력이 예전 같지 않다는 것도 충분한 근거가 되었겠지.”
“그놈에겐 절호의 기회겠군. 아직 모르고 있겠지만, 곧 전쟁까지 일어나게 될 테니 말이오.”
입맛을 다시며 읊조린 이안이, 아르케아스를 돌아보았다.
“그래서, 봉인이 언제쯤 깨질 것 같소?”
“정확히는 알 수 없단다. 몇 달, 아니, 몇 주밖에 남지 않았을지도 모르지. 본래 균열이란, 깊어질수록 점점 더 속도가 붙는 법이니.”
아르케아스가 술잔을 어루만지며 대답했다. 잔에 담긴 술을 응시하는 그를 바라보며, 이안이 말했다.
“내게 비밀로 하고 어쩔 생각이셨소?”
“…너를 돌려보낸 뒤에, 놈의 사도들이 있을 만한 곳으로 나갈 생각이었다. 분명 무덤 인근에 있을 테니.”
“천벌을 이용해서 그놈들을 소탕하실 생각이셨군….”
이안이 저도 모르게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아르케아스가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술잔을 말아쥐었다.
“천상의 관심도 잠시 돌릴 수 있을 테니, 그러지 않을 이유가 없잖니.”
“그리고 나서는 어쩔 생각이셨소? 봉인의 균열이 사라지는 것도, 역천룡의 야심이 무너지는 것도 아닐 텐데.”
“그렇지. 그래서 그 균열을 내가 직접 메울 생각이었다.”
멈칫한 이안의 눈매가 꿈틀댔다.
“그게, 가능한 일이오?”
“쉽지는 않은 일이지. 하지만 방법이 아예 없지는 않단다.”
“그러니까, 그 방법을 여쭙는 거잖소.”
“네가 그것까지 알 필요는 없잖을 것 같구나.”
내뱉은 아르케아스가 술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그를 잠시 빤히 응시하던 이안이, 이윽고 내뱉었다.
“내가 알면 반대할 방법이겠군. 그래서 말씀하지 않으시는 거고.”
“…….”
“목숨이라도 바칠 생각이셨소? 아니면, 그자와 함께 봉인되기라도 하시려는 것이오?”
“…어느 쪽이건 상관없잖니.”
천천히 술을 들이켜며 듣고 있던 아르케아스가, 이윽고 잔을 내려놓으며 대답했다.
“모든 살아 있는 것은 언젠가 죽게 되는 것이 순리이지. 그렇지 않은 우리는, 순리에서 벗어난 존재들인 거란다.”
미간을 찌푸린 이안을 돌아본 그가 여상하게 말을 이었다.
“그러니 나는 이번 기회에, 이치에 걸맞은 결말을 맞이하고 싶을 뿐이야. 그 과정에서 세상에 도움이 될 수도 있으니, 더할 나위 없겠지.”
없긴 개뿔. 내심 읊조리며, 이안은 술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그가 생각을 정리하며 술을 들이켜는 사이.
“천상이 아니라 나를 택해주어 고맙다. 이안. 위안과 감동을 넘어, 기나긴 삶의 보람마저 느껴지더구나.”
아르케아스가 타이르듯 다정하게 말을 이었다.
“내게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해. 그러니 네 계획은, 계획으로만 남겨두도록 하자.”
“…아니.”
이윽고 술잔에서 입을 뗀 이안이 내뱉었다. 아르케아스의 눈매가 꿈틀대는 가운데, 그가 빈 잔을 내려놓으며 덧붙였다.
“나는 아직 귀하를 보내드릴 생각이 없소.”
“이안….”
“귀하의 도움이 더 필요하단 말이오. 내 뒷배가 사라지는 걸 그냥 두고 볼 수는 없지. 귀하는 더 주무시면서 회복에만 전념하시오.”
아르케아스의 노란 눈을 돌아본 그가, 이윽고 내뱉었다.
“역천룡은 내가 죽일 테니.”
아르케아스의 한쪽 눈매가 일그러졌다.
“…그 말을 내가 받아들일 거라고 생각하는 거니?”
“동의를 구하려고 한 말이 아니오.”
어깨를 으쓱인 이안이 앞에 놓인 술병을 집어 들며 덧붙였다.
“나는 그자가 어디에 봉인되어 있는지, 이미 알고 있으니까. 그 안으로 들어갈 방법도.”
그가 다시 자신의 잔에 술을 따르는 가운데, 아르케아스의 눈이 한 박자 늦게 커졌다.
“뭐… 라고…?!”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