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Dark Fantasy Villain RAW novel - Chapter 617
#617화
“뭐, 놀러 가냐?”
금광이 아른거리는 눈을 가늘게 뜬 이안이, 전장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읊조렸다. 말과 달리, 앞으로 한 걸음을 내딛는 채였다.
굳어 있던 용의 마력은, 아르케아스가 본모습으로 돌아간 순간부터 다시 순환하고 있었다. 순간 이동의 후유증은 물론, 진작에 완전히 떨쳐낸 상태였다.
-애석하게도, 이번에 내가 할 수 있는 건 구경밖에는 없는 것 같아서 말이야. 네가 또 혼돈과 융합이라도 할 게… 이런.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대답하던 요그가, 이내 탄식했다.
-저 잔소리쟁이가, 아직 네가 끼어들기를 원하지 않는 모양인데.
이안의 몸속, 용의 마력이 다시 굳어지듯 흐름을 멈추는 것을 느낀 게 분명했다.
신중하게 옮기는 걸음을 멈추지 않은 채, 이안이 내뱉었다.
“이건 내가 멈춘 거야.”
그의 눈동자에 맺힌 금광 역시, 흐릿하게 사그라들고 있었다. 그제야 요그가 낮은 웃음을 흘렸다.
-기척을 감추려는 거군. 끼어드는 대신, 조용히 지켜보겠단 거지?
당연한 말을. 속으로 읊조리며, 이안은 전장을 응시했다. 비스듬하게 맞부딪친 용의 숨결은 아직도 힘겨루기를 이어가고 있었다.
콰과과과과-
분수처럼 넘실대는 검붉은 불길과 눈부시게 흩어지는 뇌전 자락들은, 비현실적이고 경이로웠다.
‘절대 가까워지고 싶지 않기도 하고.’
어지간한 불길은 미지근하게 느낄 상태이긴 했지만, 아예 무적이 된 것은 아니었다. 게다가 아무리 봉인된 상태라 해도, 상대는 전설의 악룡이 아닌가.
정면에서 맞부딪치면 오래 버틸 수 없으리라. 애초에 여분의 장비를 챙겨온 것도 그래서였다.
“어차피 당장은 끼어든다고 도움도 안 돼. 그러기도 어렵고.”
이안이 읊조린 그때, 백금룡이 토해내던 숨결이 먼저 잦아들었다.
검붉은 불길이 샛노란 뇌전의 잔재를 꿰뚫으며 솟구쳤다.
쩌저저적-
날개를 활짝 펼친 백금룡의 앞으로, 육각 역장들이 벌집처럼 뒤덮였다.
콰르르르-
그 위를 뒤덮은 검붉은 불길이 뭉게구름처럼 자욱하게 갈라졌다. 역장과 백금룡의 모습이 그 너머로 가려지는 가운데, 역천룡의 숨결이 가라앉았다.
크르르르…
일대의 공기가 이글대고,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낸 놈의 안광이 새빨갛게 타올랐다. 새카만 비늘 사이로도 붉은 마력이 용암처럼 이글댔다.
“—–!”
열기를 사방으로 뿜어내는 듯한 포효와 함께, 역천룡이 복부에 박힌 말뚝을 단숨에 절벽에서 뜯어냈다.
전신에 박힌 말뚝 끝에서 진언이 낙인처럼 빛났지만, 역천룡을 억누르기에는 역부족인 것 같았다.
‘역시, 봉인의 균열이 커지면서 억제력도 약해진 건가.’
내리막 중턱에 멈춰선 이안의 눈매가 절로 가늘어졌다. 게임에서는 공격하는 중간중간 고통스럽게 울부짖지 않았던가.
아예 예상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지만. 저 말뚝을 깊이 박아 넣는 것이 그때만큼 치명적인 효과를 만들지는 못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그래도, 효과가 아예 없진 않겠지.’
어쨌건, 용의 포효를 듣고도 무력화나 공포 상태에 빠지지 않았다.
팔다리가 조금 저릿한 느낌이 번질 뿐이었다. 몸속에 가득한 백금룡의 마력 덕분이기도 하리라.
쿠하- 아-!
역천룡이 날개를 힘껏 펄럭이며 솟구쳐 오른 건 그때였다.
궤적을 따라 새빨간 불티가 휘몰아치고, 목과 꼬리의 족쇄에 이어진 사슬이 기다랗게 드리웠다.
먹구름처럼 번지는 열기 아래에 삽시에 다다른 놈이, 날개를 활짝 펼치며 멈춰 섰다. 비늘에 일렁이는 마력이 삽시에 선명해졌다.
슈화아아아-
뒤이어 역천룡의 뒤편으로 검붉은 진언이 불길하게 새겨지기 시작했다. 흩어지는 열기 사이로 금빛이 아른거리며 번져 나온 건 거의 동시였다.
검붉은 진언 회로가 삽시에 허공에 완성되는 가운데, 역천룡이 양 날개를 힘껏 앞으로 휘저었다.
쿠-화아아아-
날갯짓의 궤적을 따라, 검붉은 불길이 돌개바람처럼 휘몰아치며 터져 나왔다. 순식간에 흉포하게 기세를 불리며 뻗어 나가는 화염의 소용돌이에, 비탈길을 내려가던 이안이 자세를 낮췄다.
쿠크르르르- 콰과과과광-!
샛노란 뇌전 가닥들이 화살처럼 뿜어져 나오기 시작한 건 거의 동시였다. 날개를 활짝 펼친 채, 육각 역장들을 앞에 두른 백금룡의 모습이 드러났다.
그의 등 뒤로도 원을 그리는 진원 회로가 선명하게 일렁였다.
콰과과과과과-
허공에 눈부신 폭발들이 이어졌다. 휩쓸린 불길이 사방으로 휘몰아치고, 튕겨 나온 뇌전들이 폭발했다. 그럴 때마다 바닥에 뒤덮인 뼈들이 튀어 올랐다.
충격파가 이안의 전신을 두드리고, 후끈한 열기가 밀려들었다.
-네 말대로네, 친구. 끼어들 수가 없겠어.
요그의 웃음 섞인 속삭임이 이어졌다. 자세를 낮춘 채 다시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이안이 혀를 찼다.
아르케아스의 마력 덕분에, 그의 주문에 휩쓸릴 일은 없다는 게 그나마 위안이었다. 아니었다면 용의 무덤으로 발을 들일 엄두도 내기 어려웠을 테니까.
‘아무리 신격을 쌓았다고 해도, 대체 저렇게 어떻게 저런 거랑 도끼 한 자루로 맞짱 뜰 생각을 한 거지.’
새삼스럽게 카르하에게 감탄하며, 이안은 저 너머로 펼쳐진 용의 무덤을 눈에 담았다.
위에서 본 것과 달리, 용의 뼈들은 하나하나가 아주 컸다. 물론 전혀 놀랍지 않았다. 이미 용의 뼈를 눈앞에서 본 적이 있지 않던가.
‘…저것들이 날아들면 그걸 피하는 게 더 문제겠는데.’
이안이 생각지 못한 문제 하나를 새삼스럽게 떠올리는 사이.
-그래서, 어쩌려고 친구?
요그의 속삭임이 상념을 깨뜨렸다. 아직도 저 위쪽을 구경 중인 게 분명했다. 라크마흐는 물론, 아르케아스의 뒤편에 후광처럼 피어오른 주문 회로들이 점점 더 거대하게 영역을 넓혀 가고 있었다.
콰아아아-
쏟아져 나오는 불길과 뇌우도 마찬가지였다. 라크마흐는 검붉은 해일에, 아르케아스는 눈 부신 빛에 휩싸인 것처럼 보였다.
-저렇게 소모전으로 가면, 결국 네 잔소리꾼이 질 것 같은데.
요그가 태연하게 말을 맺었다. 이글대며 밀려드는 열기에 미간을 찌푸리면서도, 이안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그 전에 내려올 거야.”
역천룡은 지금 아르케아스가 정확히 어떤 상태인지 모르고 있지 않던가. 게다가 내색하지 않을 뿐, 이 순간에도 엄청난 고통을 감수하고 있을 터였다.
말뚝에 새겨진 진언이 새하얗게 이글대는 게 불길 사이로도 보일 정도가 아닌가. 인내심이 길게 이어지지는 않으리라. 그리고 그때가, 아르케아스가 말한 적당한 순간이기도 할 터였다.
-시시하구나… 아르케아스…
라크마흐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울려 퍼진 건 바로 그 직후였다.
…내 예상보다 더 성질 급한 놈이군. 생각하며 이안이 한쪽 입꼬리를 비트는 가운데, 라크마흐가 말을 이었다.
-내 목을 물어뜯고 심장을 꺼내 씹고 싶어 할 줄 알았거늘. 무의미한 주문이나 쏟아내며 시간을 끌고 있구나. 내가 지치기라도 바라는 것이냐?
-그럴리가.
아르케아스의 차분한 목소리가 번졌다.
-그리 말해주니 고맙구나. 네 목을 비틀고 싶은 욕망을, 더는 참기 어려웠는데.
동시에 백금룡의 뒤편, 거대한 꽃처럼 번진 주문 회로가 끝에서부터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라크마흐가 쩌렁쩌렁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이것이 신들이 억누른 네 본모습이지…! 이제야 또렷하게 떠오르는구나!
잦아드는 뇌전 사이, 역장마저 거둬들인 백금룡의 모습이 드러났다.
그가 그대로 날개를 휘둘러 불의 해일을 향해 마주 날아드는 가운데, 라크마흐의 등 뒤에 덮인 검붉은 진언들도 용암처럼 뚝뚝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동족들을 찢어발기며 심지어 그것을 즐기던 너의 모습이!
백금룡이 불의 물결을 거스르듯 돌진하고, 검붉게 달아오른 역천룡의 전신이 드러났다.
전신이 붉게 이글대고 머리에 솟은 뿔들도 달궈진 쇠처럼 빛나고 있었다. 날개를 활짝 펼친 그가, 그대로 백금룡을 향해 마주 돌진했다.
-어디 한 번 짐승처럼 뒹굴어 보자 꾸나, 아르케아스! 거짓된 신들의 주구로 전락한 나의 숙적이여!
두 용이 만들어내는 궤적이 삽시에 가까워졌다. 그 와중에도 둘 다 전혀 속도를 줄이지 않는 채였다. 그저, 서로를 향해 아가리를 쩍 벌릴 뿐이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맞부딪친 두 궤적이, 한순간 허공에 정지했다.
쩌어엉-!
뒤이어 동심원을 그리며 터져 나온 충격파가 동공을 휩쓸었다. 마법의 잔재는 물론이고 열기까지 단숨에 모조리 밀어내는 채였다.
‘미친…!’
이안이 자세를 낮춘 채로도 휘청대는 가운데, 요그의 즐거운 듯한 속삭임이 이어졌다.
-네 말대로 됐네. 친구.
물론, 녀석의 말에 대꾸할 틈은 없었다. 이안이 균형을 다잡는 사이, 두 용이 하나의 덩어리처럼 뒤엉킨 채 추락하고 있었으니까.
용의 무덤 한복판이었다.
콰아아앙-!
동굴 전체가 뒤흔들리고, 운석이라도 떨어진 것처럼 일대의 뼈들이 사방으로 튀어 올랐다.
‘이럴 줄 알았다, 시발…!’
위를 올려다본 이안이, 이를 악물며 가장자리를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포물선을 그리며 솟아오른 온갖 종류의 뼈들이 제멋대로 떨어져 내리기 시작해서였다.
-깔리면 뼈도 못 추리겠는걸.
요그가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오히려 묘하게 즐거워하는 듯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물론 온갖 보구들을 두른 지금은 저것들에 깔려도 곧바로 죽지 않을 터였다. 하지만 내출혈을 포함한 복합적인 골절상을 입게 되리라는 건 분명했다.
제대로 싸워보기도 전에 생명의 영약을 소모할 수는 없었다.
쿠웅-! 쿵!
이안의 곁으로 온갖 뼈들이 떨어져 내렸다. 두개골. 턱뼈. 갈비뼈나 날개 뼈는 물론이고, 정확한 부위를 알 수 없는 뼈들까지.
아예 단숨에 파묻히지 않은 건, 그나마 뼈들이 저마다 시차를 두고 떨어져 내리고 있어서였다.
쿠웅-! 콰직-!
이안은 불현듯 멈춰 서거나 곡예 하듯 방향을 틀기도 하고, 때때로 몸을 날려 바닥을 나뒹굴며 그 모든 것들을 피해냈다.
물론 극도로 발휘된 육감과 집중력 덕분에 가능한, 반쯤 본능적인 움직임이었다.
“—–!”
그사이 무덤 한복판에서는 용들의 난타전이 시작되고 있었다.
그토록 맹렬한데 충돌한 데다 추락하기까지 했건만. 대륙에 마지막으로 남은 두 용은, 아무렇지도 않게 포효하며 서로에게 달려들었다.
콰앙-! 쩌어엉-!
몇 번의 격렬한 충돌 끝에, 역천룡이 백금룡의 목덜미를 깨물며 찍어눌렀다. 그들의 주위는 어느새 돌바닥이 훤히 드러나 있었다.
콰지직-!
배를 드러내며 아래에 깔린 백금룡이, 앞발로 놈의 옆 머리를 후려쳤다. 샛노란 발톱에서 터져 나온 전격이 가죽을 타고 흐르고, 검은 비늘이 후드득 흩뿌려졌다.
쿠드득…!
하지만 역천룡은 목덜미를 깨문 턱을 벌리지 않았다. 달아오른 송곳니가 매캐한 연기와 함께 천천히 비늘을 녹이며 파고들었다.
역천룡의 날개가 백금룡의 날개 안쪽을 파고들려 애쓰는 찰나.
“—–!”
역천룡이 아가리를 쩍 벌리며 고통스러운 비명을 토해냈다. 백금룡이 무릎으로 복부의 말뚝을 후려쳐 박아 넣어서였다.
아르케아스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다시 한번 앞발로 라크마흐의 아가리를 후려쳤다.
쩌어엉-! 콰치칫-!
고개가 홱 돌아간 역천룡의 상반신이 옆으로 튕겨 나갔다. 놈이 뒤따르는 사슬에 칭칭 감기며 나뒹구는 사이, 자세를 다잡은 백금룡이 고개를 치켜들며 포효했다.
“——!”
그의 목덜미에는 이빨 자국이 새카맣게 새겨져 있었다. 샛노란 안광을 이글댄 그가, 전신에 마력을 머금은 채로 몸을 날렸다.
촤르르륵-!
그사이 날개를 펼치며 몸을 뒤흔들어 사슬을 떨쳐낸 역천룡이 몸을 일으켰다. 이미 백금룡이 아가리를 쩍 벌리며 가까워지고 있었다.
콰지지지직-!
그대로 충돌한 역천룡이 뒤편의 뼈 더미들을 마구 튕겨내며 밀려났다. 그 사이로 포효와 굉음, 충격파가 어지럽게 이어졌다.
-이런 원시적인… 싸움을 보게 될 줄은 몰랐는데. 안 그래?
요그의 웃음기 섞인 속삭임이 이안의 뇌리를 울렸다. 밀림처럼 솟은 뼈 더미 사이, 이안이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또 한 번 날아든 뼈 소나기를 간신히 전부 피해냈기 때문이다. 손끝 하나 다치지 않았지만, 손해가 아예 없지는 않았다.
‘진짜 얼굴을 다 가리는 걸 쓸 걸 그랬나.’
투구가 벗겨져 버린 것이다.
앞을 가로막고 위에서 쏟아지는 거대한 뼈들을 피하는 데에 온 정신을 집중해서, 언제 벗겨진 것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물론 안다 해도 이 사이에서는 찾을 수도 없겠지만.
“—–!”
이안의 고개가 저 건너편으로 홱 돌아간 건 그때였다.
몇 번의 굉음과 폭발 끝에 터져 나온 비명은, 아르케아스의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서두르는 게 좋겠어, 친구.
득달같이 뼈의 밀림 사이로 몸을 돌리는 이안의 뇌리로, 요그의 나지막한 속삭임이 이어졌다.
-저쪽 분위기가, 심상치 않거든.
요그의 속삭임 그대로였다.
백금룡은 지금 역천룡의 아래에 깔려 있었다. 활짝 펼친 양 날개는 역천룡의 날개에 짓눌렸고, 쩍 벌어진 아가리 한복판에는 쇠사슬이 감긴 채였다.
카드득…!
역천룡의 족쇄에 이어진 쇠사슬은, 용도 끊어낼 수 없었다.
떨쳐내고자 내뻗은 앞발을 후려쳐 짓누르며, 역천룡이 그의 노란 눈을 내려다보았다. 이글대는 시선이 교차한 것도 잠시.
-상태가 온전하지 못했구나, 아르케아스. 이토록 약해지다니… 죽기 위해 찾아온 것이었더냐?
속삭이며, 역천룡이 목을 치켜들어 사슬을 더 꽉 조였다. 일말의 두려움도 담기지 않은 노란 눈을 내려다보며, 그가 말을 이었다.
-마지막으로 묻겠노라. 빛바랜 황금이여. 나와 함께, 천상에 오르지 않겠는가?
-거절하겠다. 영원한 죄인이여.
아르케아스가 즉답했다. 역천룡의 눈매가 슬며시 휘어졌다.
-그 또한, 아쉽기 짝이 없군…
동시에 그의 앞발이 자신의 가슴팍으로 향했다. 붉게 달아오른 발톱들이, 그대로 가슴에 박힌 말뚝을 단단히 움켜쥐었다.
쿠… 드드드득…
아르케아스의 눈이 커졌다. 검붉은 마력과 푸르스름한 혼돈이 주위로 번지고, 말뚝이 천천히 밖으로 뽑혀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솨아아-
칼처럼 끝이 뾰족한 거대한 말뚝이, 이윽고 온전한 본모습을 드러냈다. 갈비뼈 아래, 뻥 뚫린 구멍에서는 검붉은 피와 마력, 그리고 푸르스름한 혼돈이 뒤엉켜 일렁이고 있었다.
-내 숙적에 걸맞은 최후를… 선사하겠노라…
나지막이 읊조리며, 역천룡이 앞발에 쥔 말뚝을 치켜들었다. 말뚝을 타고 마력이 모여든 것도 잠시.
-……!
불현듯 고개를 돌린 라크마흐가, 말뚝을 머리 옆으로 휘둘렀다.
그의 목덜미로 날아들던 조그마한 보라색 궤적이, 말뚝과 충돌해 맥없이 튕겨 나갔다.
아지랑이를 줄기줄기 뿜어내는 길고 새카만 칼날이 핑글핑글 돌며 포물선을 그렸다. 고개를 돌려 그 궤적을 응시하던 역천룡의 시선이, 이윽고 아래로 내려왔다.
-그래, 내가 잠시 너를 잊고 있었구나…
역천룡의 불그스름한 눈매가 부드러운 호선을 그렸다. 말뚝을 검처럼 고쳐 쥐며, 그가 속삭였다.
-불경하고… 충직한 대행자여.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