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Dark Fantasy Villain RAW novel - Chapter 618
#618화
머릿속을 울리는 목소리에도, 이안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천천히 걸음을 옮기는 그의 시선은, 역천룡의 앞발에 들린 거대한 말뚝에 고정되어 있었다.
‘저걸 대체 어떻게 뽑은 거지.’
게임에서는 본 적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가장 치명적인 약점이 사라진 것이기도 했다.
다른 곳의 말뚝들도 그때만큼의 효과를 내지 못하리라는 확신도 뒤를 이었다. 물론, 그렇다 해서 충격에만 빠진 건 아니었다.
-어른들의 일에 끼어들다니, 네 주인이 그토록 걱정되더냐?
이어진 목소리에, 이안은 비로소 거대하게 솟은 용의 머리를 올려다보았다.
이글대는 붉은 안광과 마주한 순간, 가뜩이나 달아오른 신경이 탈것처럼 곤두섰다.
물론 그의 의도가 먹혀든 것이기도 했다.
흑검을 내던지고 이렇게 천천히 다가가는 건, 용의 주의를 끌고 시간을 벌기 위해서가 아니던가.
-기특하고 가련하군…
역천룡의 목소리가 뇌리를 간지럽혔다. 아무런 긴장감도 느껴지지 않는 건, 그럴 이유가 전혀 없기 때문일 터였다.
그에게 이안은 언제든 눌러 죽일 수 있는 날벌레와 다를 바 없을 테니까. 이 와중에도 그보다는 백금룡을 더 신경 쓰고 있으리라.
백금룡이 아무런 움직임이나 반응도 보이지 않는 것도 그 사실을 알고 있어서일 터였다.
“알면 그거 도로 집어넣고 물러나.”
평범한 인간이라면 정신을 잃거나 이성의 끈을 놓았을 시선을 받으면서도, 내뱉는 이안의 목소리는 떨리지조차 않았다.
높은 정신력과 전신에 두른 보구들 덕분만은 아니었다. 이미 용을 상대한 경험이 있는 데다, 수많은 끔찍한 괴물과 싸워오지 않았던가.
역천룡은 그중에서도 가장 강한 적이었지만, 그것도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었다.
-나를 앞에 두고도 그리 말하다니. 담대하구나. 그래… 너를 기억한다….
오히려 기꺼운 듯 내뱉은 역천룡의 안광이 슬며시 휘어졌다.
-내가 아끼던 노예를 죽였을 때, 이미 눈여겨보았지…. 아르케아스가 너를 좋아하는 이유를 알겠더군. 그래서 너를 살려 두기로 결정했다는 것을, 알고 있느냐?
이안의 뇌리로 흑검을 휘두르던 흑기사가 스쳐 지나갔다. 놈을 죽인 뒤에 떠올랐던 환영도.
육탄전 덕분에 완전한 공터로 변한 전장을 천천히 가로지르며, 이안이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아쉽게 됐네. 그냥 뒀으면 네 사도들을 죄다 죽일 수 있었을 텐데.”
주의를 완전히 돌리기 위한 도발이었지만, 물론 진심이기도 했다.
놈의 마력이 깃든 용의 무구도 잔뜩 수집할 수 있었으리라.
하지만 역천룡은 이번에도 분노 대신 웃음을 터뜨렸다.
-나의 아이들이 듣지 못해 아쉽구나. 그랬다면 좋은 유희거리가 생겼을 것이거늘. 허나, 그 오만함조차 마음에 드는구나. 그러니 명하겠노라.
이안을 잠시 내려다본 역천룡이 덧붙였다.
-나를 섬기거라. 황금의 대행자여.
-감히…!?
아르케아스의 눈이 커졌다.
쿠드득, 그의 입에 감긴 사슬이 더 조여들었다. 동시에 한쪽 앞발로 백금룡의 가슴 한복판을 짓누르며, 라크마흐가 말을 이었다.
-그런다면 너의 주인은 죽지 않을 것이다. 대신 이 무덤을 지키는 무덤지기이자 새로운 죄인으로 이곳에 살게 되겠지.
이안은 대답 대신 아르케아스를 돌아보았다. 자신보다 더 거대한 용에게 깔린 그는, 곳곳의 비늘이 떨어져 나가고 크고 작은 상처를 입은 상태였다.
역천룡 역시 상처를 입긴 마찬가지였지만, 그의 상태가 조금 더 좋지 않았다.
물론, 역천룡을 노려보는 눈빛에는 여전히 투지가 가득했다.
-네가 원한다면, 때때로 네 옛 주인을 만날 수 있도록 자비를 베풀 것이다…
이어진 부드러운 목소리에, 이안은 다시 역천룡을 올려다보았다.
그를 내려다보는 붉은 안광이 느긋하게 일렁였다.
-네가 혼돈을 품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네가 던진 장난감에서 선명하게 느껴지더군…. 너 역시 실은 저 거짓된 신들을 따르지 않는 것이겠지. 이 빛바랜 황금이 그렇듯이.
역천룡의 목소리가 더 낮고 부드러워졌다.
-천상이 네 주인을 영원히 용서치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겠지. 나를 섬긴다면, 대신 그 가증스러운 것들을 전부 없애 버릴 수 있을 것이니라. 그리고 지상에 너의 제국을 건설할 수도 있으리라… 나를 추앙하는 새로운 제국을…
“…아주 솔깃한 제안이군.”
이안이 비로소 내뱉었다. 백금룡의 시선이 슬며시 돌아오는 가운데, 그가 눈길도 주지 않고 말을 이었다.
“그쪽을 먼저 만났다면 받아들였을지도 모르겠어.”
지잉, 그의 왼손 위로 육각형을 그리는 샛노란 마력의 방패가 피어오른 건 그때였다.
허리춤의 진은 강철 검을 움켜쥐며, 이안이 덧붙였다.
“하지만 이미, 그쪽을 죽이기로 약속하고 선금까지 받아 버려서 말이야.”
진은 강철 검의 새하얀 검날이 모습을 드러냈다. 검면을 타고 샛노란 진언이 번지는 가운데, 역천룡이 낮은 웃음을 흘렸다.
-신의까지 있다니, 볼수록 마음에 드는군. 하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나를 섬기지 않는다면 살려 둘 수 없겠구나. 대신, 고통 없는 죽음을 약속하마…
놈의 검은 비늘 아래에 붉은 마력이 끌어올렸다.
치솟는 광검을 움켜쥔 이안이 질주하기 시작한 건 거의 동시였다.
대화를 나누는 사이 놈과의 거리는 충분히 가까워진 상태였다.
주문은 순식간에 완성되겠지만, 적어도 한칼 정도는 먹일 수 있으리라.
내달리는 이안의 시선이 활짝 펼친 백금룡의 날개와 그걸 짓누르고 있는 역천룡의 날개로 향했다.
‘…그럼 저 양반도 빠져나올 틈이 생기겠지.’
허공에 삽시에 새겨지던 붉은 진언이 허물어지듯 흩어진 건 그때였다. 역천룡의 눈매가 꿈틀대는 가운데, 아르케아스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이렇게 우리가 맞닿는구나, 라크마흐.
-이런 수작을…?
백금룡을 내려다본 역천룡의 눈매가 일그러졌다. 백금룡의 입을 가로막은 사슬에 어느새 금빛 마력이 일렁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슬을 끊을 수는 없으나, 그 안에 마력을 밀어 넣어 역천룡의 주문을 방해할 수는 있었던 것이다.
사슬에 새겨진 진언이 삽시에 노란빛을 머금어 가고, 그건 역천룡의 목에 감긴 두꺼운 족쇄도 마찬가지였다.
-건방진 짓을 벌이는구나, 아르케아스…!
소리치며, 라크마흐가 손이라 불러도 될 오른 앞발의 말뚝을 치켜들었다. 어느새 다시 뾰족한 끝이 아래를 향하게 움켜쥔 채였다.
그의 거체가 순간 기울어진 건 바로 그때였다.
카가가가각-!
활짝 펼친 백금룡의 날개 위로 달려 올라간 이안이, 그 위를 짓누르고 있는 역천룡의 날개 끝. 발톱처럼 보이는 뾰족한 뼈 끄트머리를 갈라버린 것이다.
손아귀가 아릴 정도의 저항감이 느껴졌지만, 이안은 이를 악문 채 팔을 끝까지 휘두르며 지나쳤다.
타타탓-!
검을 내뻗은 이안이 멈추지 않고 달려가는 가운데, 사슬을 이빨 사이에 깨문 아르케아스가 자신의 가슴을 짓누르고 있는 역천룡의 앞발을 후려쳤다.
-이제 다시 짐승처럼 싸워보자꾸나, 라크마흐…!
-감히…!
균형을 잃은 라크마흐가 비틀대고, 이안이 날개 피막 아래로 뛰어내리며 소리쳤다.
“움직이시오!”
그의 외침이 끝나기도 전에, 아르케아스가 날개를 위로 치켜들었다.
그 풍압만으로도 이안의 몸을 떠밀기에는 충분했다.
뒤로 젖혀졌던 허리를 앞으로 구부린 이안이 백금 방벽을 치켜드는 가운데, 욕의 속삭임이 번졌다.
-짓밟히지 않도록 조심하자고, 친구.
자꾸 당연한 소리를.
방패를 앞세운 채 바닥을 구르며 이안이 생각했다. 아르케아스도 요그와 같은 생각인 게 분명했다. 날개를 치켜든 그는 역천룡을 반대쪽으로 넘겨버리고 있었으니까.
쿠우웅-!
역천룡의 거대한 몸집에 동굴 전체가 울리고, 땅이 들썩였다.
반대로 놈의 위에 올라탄 아르케아스는, 뒷발로 놈의 복부에 솟은 말뚝을 걷어찼다.
“—–!”
역천룡이 분노와 고통이 뒤섞인 포효를 토해냈다. 그사이 아르케아스가 입과 머리에 두른 사슬을 끌어당겼다.
촤르르르- 철컥-!
적당한 길이까지 고개를 뒤로 뺀 아르케아스가, 다시 사슬을 이빨 사이에 단단하게 깨물었다. 그의 앞발이 역천룡의 머리를 후려친 건 바로 그 직후였다.
쩌어엉-!
굉음이 터져 나오는 가운데, 방향을 돌린 이안이 방패 날을 땅에 박아 넣었다.
미끄러지듯 멈춰 서는 그의 눈동자에 마력이 일렁이고, 맹렬한 바람이 전신으로 모여들었다.
슈화아아아-
용의 마력은 주문을 증폭할 뿐만 아니라, 시전 속도까지 빠르게 만들어줬다. 어쩌면 이건, 과거 용의 진원을 삼킨 덕분인지도 몰랐다.
-역시, 가까이에서 보는 게 훨씬 더 재미있는데.
요그의 속삭임을 흘리며, 이안은 한데 뒤엉킨 두 용을 눈에 담았다.
라크마흐는 반대로 자신을 찍어 누르는 라크마흐를 향해 말뚝을 칼처럼 휘두르고 있었다.
카드드득-!
뾰족한 끝이 아르케아스의 가슴을 훑고 지나가자, 비늘이 우수수 떨어져 나가며 불그스름한 혈선이 생겨났다.
“—–!”
느껴지지도 않는다는 듯 포효하며, 백금룡이 또 한번 역천룡의 머리통을 앞발로 후려쳤다.
‘둘 다, 주문을 못 쓴단 말이지.’
다시금 그들에게 달려가기 시작한 이안의 눈이 번뜩였다.
금강석처럼 단단한 비늘과 뼈. 거대한 덩치와 강인한 힘. 그에 어울리지 않는 지성과 불사에 가까운 긴 수명까지.
용은 온갖 강점으로 가득한 종족이었지만, 그들이 초월자라 불리게 된 데에는 대양에 비유되는 마력과 진언으로 대표되는 마법의 비중이 가장 컸다.
마력의 힘겨루기에 들어간 지금은, 가장 큰 위험 요소가 사라졌다는 뜻이기도 했다.
-여전히 비열한 술수에 능하구나, 아르케아스! 내 눈을 속이고 저 하찮은 미물들을 결집했을 때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어…!
물론 진언 마법이 봉인되었을 뿐, 아예 마력이 사라진 건 아니었다.
지금도 백금룡의 발톱에는 뇌전이 번쩍였고, 그에게서 벗어나고자 버둥대는 역천룡의 전신에서는 불티가 번지고 있었다.
타타탓-
하지만 저 정도는 몸에 걸친 보구들만으로도 충분히 막아낼 수 있으리라. 그보다는 차라리 눈먼 발길질을 더 조심해야 했다.
‘말뚝은 뽑았지만, 그 자리가 약점이 아니게 된 건 아니겠지.’
서로를 할퀴고 후려치는 용들을 눈에 담으며, 이안은 차분하게 생각을 이어나갔다.
그의 뇌리로 역천룡의 가슴 한복판, 말뚝을 뽑아낸 뒤에 남은 구멍이 스쳐 지나갔다. 인간으로 치면 명치 언저리. 심장 바로 아래쪽일 터였다. 그 안으로 들어간다면, 곧바로 심장을 찌를 수 있으리라.
물론 다른 용이 그렇듯 뼈로 단단하게 보호받고 있겠지만. 백금의 발톱으로 잘라낼 수 있다는 것도 이미 확인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그 몸으로 나를 압도할 수 있다고 여긴 것은, 오만하기 짝이 없구나….
어쨌건, 이 기회가 그리 오래 이어지지 않으리란 건 분명했다.
역천룡의 목에 감긴 족쇄는 어느새 다시 검붉게 물들고 있었으니까. 난투극을 벌이는 와중에도 백금룡의 마력을 밀어내고 있는 게 분명했다.
물론, 시간을 더 벌 방법은 명확하게 존재했다.
-친구. 조심.
불현듯 이어진 속삭임에, 이안은 미끄러지듯 멈춰 서며 백금 방벽을 앞으로 내리찍었다. 그의 웅크린 몸이 그 너머로 가려질 찰나.
콰아앙-!
역천룡의 활짝 펼친 날개가 떨어져 내렸다. 백금룡의 날개 끝에 짓눌린 채였다. 진동과 함께 불티 섞인 돌풍이 휘몰아쳤다.
쿠화아-
물론 백금 방벽을 부수지도, 그 너머의 이안에게 영향을 주지도 못했다. 방패 너머로 고개를 든 이안의 시선이 위로 향했다. 아르케아스의 시선이 느껴져서였다.
‘역시, 내가 무슨 생각인지 아시는 거군.’
이안은 슬쩍 미소 지음과 동시에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백금룡의 날개에 짓눌린 역천룡의 날개가 들썩였다. 하지만 그 한 번 뿐이었다. 아르케아스가 자신의 목덜미를 깨물려는 역천룡의 머리를 후려쳤기 때문이었다.
굉음과 충격파가 터져 나오고, 이안이 날개 위로 뛰어올랐다.
타타타탓-!
역천룡은 자신의 날개 위로 올라선 이안을 느끼지도 못한 것 같았다. 백금룡에게 짓눌린 채 난투극을 벌이고 있으니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날개뼈를 따라 몇 걸음을 내달린 이안이, 뒤이어 힘차게 박차며 도약했다.
쉬학-!
금빛이 아른거리는 바람이 그의 몸을 떠밀었다. 왼팔을 치켜들며 솟구치는 이안의 시선은 저 앞, 역천룡의 날개뼈 관절에 솟은 말뚝에 고정되어 있었다.
‘내 기억보다 크네.’
말뚝은 관절에 반쯤 박힌 상태인데도, 그의 키보다 높았다. 삽시에 아래로 가까워지는 말뚝과 그 위로 일렁이는 진언을 응시하던 이안이, 이윽고 치켜들고 있던 백금 방벽을 힘차게 내리찍었다.
콰드득-!
백금 방벽의 방패 날이 진언 한복판에 틀어박혔다. 진언의 빛이 넘실대는 가운데, 이안이 쥐고 있던 주먹을 활짝 펼쳤다.
쩌엉-!
그의 손바닥에 고정된 비늘에서, 금빛이 아른거리는 충격파가 터져 나왔다. 진공 폭발.
콰드득-!
용의 마력으로 증폭된 폭발은, 말뚝을 더 깊이 박아 넣기에 충분했다. 반발력으로 이안이 공중제비를 돌며 솟구치는 사이.
“—-!”
역천룡이 비명을 터뜨렸다. 아르케아스가 앞발로 놈의 머리를 짓누른 건 바로 그 직후였다.
역천룡의 몸이 들썩이고, 이안의 시선이 놈의 어깻죽지에 박힌 또 다른 말뚝으로 향했다.
‘저것까지 박아 넣긴 어렵겠네.’
말뚝 끝에 닿기에는 아슬아슬한 높이였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이안이 왼손 손바닥을 뒤편으로 펼쳤다.
푸확-!
증폭된 돌풍이 그의 몸을 떠밀었다. 동시에 이안이 광검을 옆으로 비스듬하게 내밀었다.
카드드드득-!
샛노란 칼날이 가까워지는 말뚝의 옆면에 틀어박혔다. 놀랍게도, 말뚝은 용의 마력이 응축된 칼날로도 완전히 잘라낼 수 없었다. 날이 반쯤 박혀 들었을 뿐이었다.
차라리 잘된 일이었다. 그대로 백금의 발톱을 비활성화하며 몸을 웅크린 이안이, 발로 말뚝의 옆면을 박찼다.
타탓-!
이안이 굴절되듯 방향을 바꿔 쇄도했다. 아르케아스를 떨쳐내려는 듯 거세게 그의 팔뚝을 긁어대는 앞발이 눈에 보였다. 발톱에서 불티가 터져 나오고 있었다. 하지만 이안은 방벽을 얼굴 앞으로 치켜들 뿐이었다.
쉬하악-!
이안의 몸이 아슬아슬하게 굵고 기다란 팔을 스치고 지나갔다. 역천룡의 가슴 한복판으로 비스듬하게 틀어박히는 궤적이었다.
-단숨에 여기까지 오다니. 인상적인걸, 친구.
요그의 느긋한 속삭임이 뇌리를 스치는 가운데, 이안의 시선이 위에 비스듬하게 펼쳐진 아르케아스의 전신을 훑었다.
‘엉망진창이시군.’
지금 그는 여러모로 평소의 기품 넘치는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다. 짐승처럼 으르렁대고 있을 뿐만 아니라, 몸 곳곳에 비늘이 떨어져 나가고 피가 줄줄 흘렀다.
물론, 그런 자신의 모습은 신경도 쓰지 않는 게 분명했다.
꽈드드득…!
사슬을 재갈처럼 입에 문 채 한쪽 팔로는 역천룡의 머리를, 다른 팔로는 말뚝을 붙잡은 채로 짓누르기에 여념이 없었으니까.
상태가 엉망인 건, 물론 역천룡도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놈이 목에 두른 족쇄는 다시 노랗게 일렁이고 있었다.
-저기로 가려는 거지?
이안의 시선이 반대편으로 돌아간 건 바로 그 직후였다.
발톱이 할퀴고 간 흔적이 역력한 가슴팍 너머, 피와 마력을 머금고 붉게 일렁이는 구멍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역시. 회복도 못 하는 거네.’
생각하며, 이안이 방벽을 앞세운 채 역천룡의 가슴 위에 구르듯 착지했다. 끈적한 피와 마력, 동시에 뜨끈한 열기가 전신으로 전해졌다.
보구들이 없었다면 용암 위에 선 듯한 느낌이 들었으리라.
“—–!”
백금룡의 앞발에 짓눌린 역천룡이 울부짖는 가운데, 이안이 달리기 시작했다. 백금룡이 그의 의도를 눈치챈 듯 몸을 더 높이 드는 사이.
-느낌이 안 좋은데. 친구.
요그가 불현듯 속삭였다.
내달리는 와중에도 미간을 좁힌 다음 순간, 가슴의 구멍에 고인 피와 마력이 삽시에 새파란 혼돈으로 물들어갔다.
화르르르-!
뒤이어 놈의 가죽 위로 새파란 불길들이 혈관처럼 번져나갔다.
후끈하게 전해지는 열기에 이안의 미간이 더 일그러지고, 새파랗게 물든 핏물이 끓어올랐다.
이안이 반쯤 반사적으로 백금 방벽을 치켜든 순간.
콰아아아아-!
가슴에 뚫린 구멍에서 새파란 불길이 용암이 분출되듯 터져 나왔다. 열기 섞인 충격파가 뒤를 이었다. 이안의 질주를 멈출 뿐만 아니라, 반대로 날려 버리기까지 할 정도로 엄청난 기세였다.
-이안…!
아르케아스의 경악성이 터져 나오는 가운데, 이안의 미간이 절로 일그러졌다. 백금 방벽으로 가렸음에도 폐가 익은 듯한 고통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시발…!’
입안에 쇠 맛이 나고, 위기감이 극한까지 치솟으면서 시간이 한없이 느려졌다.
이안은 역천룡의 전신으로 혈관처럼 번져나가는 푸른 불길. 그리고 푸르스름하게 물들어가는 사슬의 진언과 들썩이는 백금룡. 새파랗게 이글대는 역천룡의 안광까지 동시에 인지할 수 있었다.
그대로 말뚝을 휘둘러 백금룡을 후려쳐 날려 버린 역천룡이, 가슴의 구멍에서 혼돈 섞인 푸른 불길을 뚝뚝 떨어뜨리며 몸을 돌렸다.
-과연…! 빛바랜 황금의 대행자로구나…! 과감하고… 간교하군…!
공터로 추락한 이안이 사정없이 나뒹굴며 뒤로 밀려나는 사이.
쿠웅-
완전히 몸을 돌린 역천룡이 앞발을 땅에 찍으며 일어섰다. 한 손에는 말뚝을 지팡이처럼 움켜쥔 채였다. 어느새 놈의 눈동자는 물론 뿔과 날개. 그리고 몸 곳곳에 박힌 말뚝까지도 새파란 불꽃을 머금고 이글댔다.
카가가각-!
백금 방벽을 땅에 찍은 이안이 간신히 자세를 다잡으며 멈춰섰다. 한 모금의 피를 왈칵 토한 건 바로 그 직후였다.
크르르르…
하지만 자신의 상태를 제대로 살필 상황이 아니었다. 그를 내려다보는 역천룡의 아가리에서 푸른 빛이 넘실대며 번지고 있었으니까.
-약속대로 그에 걸맞은 최후를… 선사해 주마…!
씹어 뱉는 목소리가 끝나기도 전에, 역천룡이 새파란 불길을 토해냈다. 이안의 눈에는 창염의 해일이 밀려드는 것처럼 보였다.
피할 틈은, 물론 없었다. 이안은 휘몰아치는 방벽을 시전하면서 방패를 치켜들었다.
그 위로 푸른 불길이 뒤덮였다.
콰르르르르르-
돌개바람은 형태를 갖추기도 전에 스러졌지만, 다행히 백금 방벽은 깨지지 않았다. 표면이 명멸하듯 번쩍이고, 가로막힌 불길이 넘실대며 밀려났다. 하지만 물론, 열기까지 막아주지는 못했다.
‘시발…!’
이안은 이를 악물었다. 전신이 뜨겁다 못해 차갑게 느껴질 정도였다. 당장이라도 눈이 멀어버리고 숨이 끊어질 것 같았다. 하지만 그렇게 되는 것보다, 불길이 머리 위로 솟아오르는 게 더 빨랐다.
“—-!”
아르케아스의 분노한 포효가 이어졌다. 이안은 비로소 그가 역천룡의 족쇄와 이어진 사슬을 끌어당기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호오…?
허에 숨결을 토해내는 와중에도, 역천룡이 묘한 탄성을 흘렸다.
물론 이안은 털썩 주저앉은 채, 맥없이 백금 방벽이 고정된 왼팔을 툭 떨어뜨릴 뿐이었다. 전신에서 매캐한 연기가 번지고, 시야가 부옇게 흐렸다.
하지만 이 정도인 게 다행이었다. 어쨌건 죽지도, 정신을 잃지도 않았으니까. 진은 강철 검을 툭 떨어뜨린 이안이, 본능적으로 아공간으로 손을 넣었다.
생명의 영약을 움켜쥔 그의 손길이, 다음 순간 문득 굳어졌다.
“……?!”
푸른 덩어리처럼 보이는 역천룡 근처로, 거대한 보랏빛이 아른거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형태가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불길한 예감만은 또렷했다.
-그래… 과연.
그 예감을 확신으로 바꿔주듯, 역천룡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끝내, 혼돈에 물들고 말았던 것이로구나. 아르케아스.
…….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