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Dark Fantasy Villain RAW novel - Chapter 626
다크 판타지의 망캐가 되었다 626화(626/655)
#626화
“…….”
거부조차 할 수 없는 퀘스트였다.
반사적으로 내용을 확인한 이안의 눈매가 조금 더 일그러졌다.
그가 한 줄에 불과한 내용을 응시하는 사이.
“놀라게 해서 미안하구나. 하지만 이안, 너도 알잖니. 이건 해야만 하는 일이야.”
아르케아스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여전히 담담하기 짝이 없는 말투였다.
“…아니.”
이안이 퀘스트 창을 닫으며 내뱉었다. 아래로 이어진 보상의 내용에는 눈길도 주지 않은 채였다.
그 너머. 다시 금색으로 되돌아온 아르케아스의 눈을 바라보며, 그가 덧붙였다.
“오늘 죽여야 할 용은 하나였소. 그놈은 이미 저기 죽어있고.”
“그래… 순서가 잘못되었구나. 네게 감사를 표하는 것이 우선이거늘.”
여전히 양손으로 흑검을 받쳐 든 채, 아르케아스가 천천히 무릎을 굽혔다.
“고맙다, 이안. 내 해묵은 숙원을 이뤄 주어서. 나 혼자서는 해낼 수 없었을 것이다.”
“…그건 피차 마찬가지였잖소.”
잠시 말문이 막힌 듯 그를 바라본 이안이, 이윽고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솔직히 백마법사 퀘스트를 완료했다고 하더라도, 혼자서는 역천룡을 죽이지 못했을 것 같지 않았던가.
동료들의 도움이 필요하고, 적지 않은 희생을 감수해야 했으리라.
뒤이어 비틀대며 일어선 이안이 덧붙였다.
“게다가 따지고 보면, 완전히 죽은 것도 아니고.”
“말했듯, 라크마흐는 부활할 수 없을 것이다. 설사 다시 영혼을 하나로 이어 붙인다고 해도, 전혀 다른 괴물일 뿐이지. 지금은 그보다….”
자세를 바로 하며 대답한 아르케아스가, 차분히 그를 마주 보았다.
“내가 훨씬 더 큰 문제란다. 이안.”
“…….”
이안의 눈매가 꿈틀댔다. 아르케아스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혹여라도 너 때문이라 여기지 말렴. 전에도 말했듯, 아무리 준비를 철저하게 했더라도 막을 수 없었을 테니까. 이건, 필연적으로 일어나게 될 일이었어.”
이안은 가늠하듯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늘 그랬듯, 그는 여전히 아르케아스의 진의를 가늠할 수 없었다.
미세한 표정이나 눈빛의 변화, 손짓이나 발짓. 심장 박동 수의 변화 따위를 아무렇지도 않게 읽어내던 그의 감각은 지금, 아무런 변화도 감지하지 못했다.
잠시 이를 악물었던 이안이 이윽고 내뱉었다.
“돌이킬 방법이 있을 것이오. 내가 찾아보겠소.”
“없을 거란다. 이게, 유일한 해결책이야.”
아르케아스가 손에 든 흑검을 위아래로 살짝 흔들었다.
눈길도 주지 않은 채, 이안이 내뱉었다.
“단언하지 마시오. 무슨 일이든 예외는 있는 법이니.”
“그래. 네가 바로 그런 존재이지. 혼돈을 품고도 영혼이 물들지 않는 건 어쩌면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네가 유일할지도 몰라. 신들도 그래서 네가 타락하지 않았다고 결론 내린 것이겠지.”
선선히 대답한 아르케아스가, 입가에 옅은 미소를 머금었다.
“하지만 나는 아니란다. 노력해 봤지만, 너처럼 완벽하게 혼돈을 차단하는 건 불가능했지. 그저 그 시기가 앞당겨진 것일 뿐, 나는 결국 혼돈에 굴복하게 되었을 거야.”
이안의 미간에 골이 파였다. 그의 말에 담긴 속내를 깨달아서였다. 이윽고 낮은 한숨과 함께, 그가 읊조렸다.
“그래서, 처음부터 라크마흐와 함께 죽을 생각이셨던 거군….”
“…차라리 잘 되었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내 대행자에게 유산을 남길 수 있게 되었으니.”
아르케아스가 조금 더 짙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물론, 이안의 표정은 전혀 풀어지지 않았다.
“내가 귀하의 혼돈을 빨아들이면 되지 않겠소? 내가 품은 혼돈과 같은 색이던데.”
이윽고 그가 내뱉었다. 아르케아스의 미소가 멈칫하는 가운데, 이안이 말을 이었다.
“마침, 내 혼돈의 정수도 비어있고, 조금 기다리면 내 사역마가 깨어날 것이오. 이 녀석에게 먹이면 다시 귀하의 혼돈을 흡수할 수 있겠지.”
“…이안.”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으리란 건 알고 있소. 하지만 시간은 벌 수 있을 것이오. 그 사이에 이미 혼돈에 물든 귀하의 영혼을 정화할 방법을 찾아보도록 합시다.”
잠시 묘하게 일렁이는 눈으로 이안을 바라본 아르케아스가, 이윽고 고개를 저었다.
“내 안에 스며든 혼돈은 막대하단다. 억누르기 쉽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영혼에 받아들이지 않으면 통제할 수도 없지. 네 그릇으로 이걸 전부 받아내는 건 불가능할 거란다. 혹여 가능하다 하더라도….”
그의 시선이 이안의 손목 쪽으로 내려갔다.
“그 과정에서 네 사역마는 완전히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게 될 거란다. 본래 신의 파편이잖니. 게다가 어쩌면, 너 역시 그리될지도 모르지.”
싸늘하게 가라앉은 이안의 눈을 다시 마주 본 그가, 옆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너는 이미 혼돈에게 잡아먹힌 적이 있잖니?”
“그럼 저 말뚝들도 동원합시다.”
이안이 곧바로 내뱉었다. 라크마흐의 시신을 돌아보며, 그가 말을 이었다.
“저것들은 혼돈과 마력을 억제하는 힘이 있는 것 같던데. 고통스러우시겠지만, 시간을 벌 수는 있지 않겠소. 그동안 나는 마탑들을 돌면서 방법을 찾아보겠소. 엘리에게도, 도움을 청하고.”
“……!”
아르케아스의 눈이 설핏 커졌다.
그의 금빛 눈동자를 다시 돌아보며, 이안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 녀석은 검은 벽을 연구하고 있잖소. 혼돈과 흑마법에도 관심이 많고. 지금쯤 분명, 조예가 깊겠지. 그러니-”
“제발 그러지 말렴.”
아르케아스가 말을 잘랐다. 간청하는 듯한 눈으로 이안을 바라보며, 그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네가 밝히지 않는다고 해도, 언급만으로도 그 아이는 내가 혼돈에 물들었으리라는 것을 곧바로 눈치챌 거야. 영특한 아이잖니.”
“…….”
“나를 도울 방법을 찾지 못한다면, 그 아이는 평생을 죄책감 속에서 살게 되겠지. 그런 가혹한 짐을 짊어지게 하지 말아다오. 이안. 엘리는 네 대자이기도 하잖니.”
말문이 막힌 이안이 눈매만 꿈틀댔다. 틀린 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엘리야가 타락의 길로 빠져드는 계기가 될 수도 있었다.
그사이 한차례 숨을 고른 아르케아스가 말을 이었다.
“게다가 저 신벌의 말뚝들을 내 몸에 박아 넣는다고 해도, 남은 시간은 그리 길지 않을 것이다. 나는 이미 막대한 혼돈을 받아들였으며, 멈출 수 있는 단계를 한참 지났으니. 나는 머잖아 완전히 타락하게 될 것이야.”
“그래서….”
이안의 턱에 힘줄이 돋았다. 코로 긴 숨을 내쉰 그가 덧붙였다.
“기어코 죽으셔야겠다는 말씀이시오? 그것도, 내 손에?”
“…이런 멍에를 짊어지게 해서 미안하구나. 이안. 하지만 내가 가장 유의미하게 죽음을 맞이할 방법은 이것뿐이란다.”
여러 생각이 오가는 가라앉은 눈을 잠시 응시한 아르케아스가, 이윽고 한 걸음 앞으로 다가왔다.
“네 영혼의 격을 높여줄 것이며, 내 유산을 계승할 자격도 얻게 될 것이니.”
그가 이안의 손에 검 자루를 억지로 쥐여 줬다. 놔버리지 못하게 하려는 듯 양손으로 이안의 손을 꾹 말아쥐며, 그가 덧붙였다.
“죄책감 느끼지 말렴. 내가 요청한 것이니. 차라리, 나를 이기적이라 원망해 주면 좋겠구나.”
“…이기적이라는 것을 알고는 계시는군.”
이안이 내뱉은 말에, 아르케아스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그가 붙잡은 손을 놓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
“말이 나온 김에, 이기적인 부탁을 조금 더 해도 되겠니? 유언이라고 생각하고 들어 주렴.”
“그건 질문이 아니잖소.”
이안이 핀잔하듯 읊조렸다. 물론, 아르케아스는 전혀 개의치 않고 입을 열었다.
“내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리지 말렴. 세상 사람들은 아직 내가 살아있다고 여겨야 해. 그저 아주 길고 깊은 잠에 빠졌을 뿐, 언젠가는 다시 깨어나게 되리라고 말이야.”
“…귀하의 죽음을, 숨겨 달란 말씀이시오?”
이안이 미간을 찌푸린 채 되물었다. 아르케아스의 손에 붙잡혀 있을 뿐, 검을 쥔 그의 손아귀에는 여전히 힘이 전혀 들어가지 않은 상태였다.
“그래야 네가 계속 내 대행자로 남을 수 있지 않겠니. 내가 죽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교단과 원탁은 아무런 거리낌 없이 너를 노릴 거란다.”
입가에 옅은 미소를 머금은 채 내뱉은 아르케아스가, 슬쩍 그의 앞으로 얼굴을 기울였다. 그의 눈동자에 흐릿한 보랏빛이 스쳤다.
“게다가 네 명예도 땅에 떨어뜨릴 거야. 불명예와 비난은 오롯이 내 몫이 되어야 한단다. 너는 그저, 내가 낳은 또 다른 피해자로 남아야 해. 실제로도 그렇잖니?”
“…….”
이안의 눈빛이 더 우묵해졌다.
그는 정말 아르케아스가 자신의 죽음을 준비해 왔음을, 그리고 그에 대한 대비책까지 생각해 뒀음을 실감하고 있었다.
“물론, 그저 유언이란 말로 네게 강요하려는 건 아니란다. 너는 용병이니, 합당한 대가를 지급해야 하겠지.”
이안의 손등을 토닥이며 덧붙인 아르케아스가, 그의 손을 자신 쪽으로 슬쩍 당겼다.
흑검의 검날이 둘의 사이를 가르듯 드리우는 가운데, 아르케아스의 눈동자에 금광이 아른거렸다.
사아아아…
맞잡은 손아귀에도 마력이 번졌다. 이안은 자신의 손바닥에 진언이 새겨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의 시선을 받은 아르케아스가 빙긋 미소 지었다.
“내 별장으로 들어갈 열쇠란다. 그 안의 모든 것을 네게 주마.”
“……!”
이안의 눈매가 저도 모르게 꿈틀댔다. 그의 놀란 반응이 만족스러운 듯, 아르케아스가 말을 이었다.
“둥지는 변방 남부와 제국 서부 사이의, 벨 스코넨 산맥의 지하 어딘가에 있단다. 그중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 근처로 가렴. 그럼, 열쇠가 너를 인도해 줄 거야.”
이안의 뇌리로 과거, 제국 서부로 밀입국하던 때의 기억이 스치고 지나갔다. 제멋대로 이어진 산 어딘가에, 아르케아스의 둥지로 이어지는 입구가 감춰져 있는 것이다.
“합당한 보상을 받았으니, 따라 주리라 믿으마.”
손아귀의 마력이 잦아드는 가운데, 아르케아스가 덧붙였다.
이안은 대답 대신 짧은 침음을 흘리며 그를 마주 보았다. 용의 둥지를 물려받은 셈이건만, 놀랍게도 조금도 기쁘지 않았다.
이안의 손을 토닥이던 아르케아스의 시선이 아래로 내려간 건 그때였다.
“그러고 보니 공교롭긴 하구나. 이 검은 라크마흐가 만들어낸 무구이니 말이야.”
앞에 길게 드리운 검은 칼날을 내려다보는 그의 한쪽 입매가 슬며시 말려 올라갔다.
“어떤 의미로는 결국, 그자도 자신의 숙적을 죽이는 데에 성공한 셈이군. 운명이란 늘 이토록 짓궂은 면이 있지….”
물론, 이안은 전혀 웃지 않았다. 아르케아스를 잠시 바라본 그가 내뱉었다.
“다만 얼마라도 시간을 주시오. 적어도 내가, 귀하를 살리려는 노력이라도 해 볼 수 있게.”
“…네가 다시 돌아왔을 때의 나는, 지금의 나와 같지 않을 것이다. 이안.”
멈칫한 아르케아스가, 타이르듯 말하며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그때의 내가 어떻게 되어 있을지는, 전혀 예상할 수 없구나. 너를 죽이려 할 수도. 어쩌면, 너를 영원히 곁에 두고자 할지도 몰라. 물론, 세상으로 뛰쳐나간 상태일지도 모르지.”
“…….”
“그러니 내 소원을 들어주렴. 내가 아직 온전한 나일 때. 내 영혼이 저 공허에 떨어지지 않을 지금, 내게 안식을 선사해다오.”
간고하게 말한 그의 입가에, 문득 장난스러운 미소가 번졌다.
“나는 그러지 않는다면 널 내보내 주지도 않을 생각이란다.”
“…여기 가둬 두겠단 말씀이오?”
한쪽 눈매를 찌푸린 이안이 되물었다. 아르케아스가 어깨를 까딱였다.
“이미 합당한 보상을 받았잖니? 너는 여기서 내가 혼돈에 물들어가는 모습을 보게 될 거야. 나를 죽일 결심이 서게 될 때까지.”
“아르케아스….”
이안이 저도 모르게 탄식했다. 아르케아스의 미소가 더 짙어졌다.
“그렇게 불러주니 좋구나. 진작에 이름으로 불러 달라 말할 걸 그랬어.”
“…….”
“타락하겠다고 협박하지 말렴. 그런다 해도 이번엔, 달라질 게 없을 테니.”
동시에 그의 눈동자에 보랏빛이 일렁였다. 이안은 손을 타고 그의 혼돈이 밀려드는 것을 느꼈다.
뭔가 하기도 전에, 텅 비어있던 정수가 해갈하듯 공명하며 혼돈을 빨아들였다.
“작별의 순간이 길어지면, 헤어짐이 더 아쉬워지기만 할 뿐이지.”
말하며 이안의 왼손도 자루를 쥐게 한 아르케아스가, 천천히 뒤로 물러났다. 한 손으로 흑검의 날 끝을 붙잡아 자신 쪽으로 향하게 끌어당기는 채였다.
이안의 양손에 들린 검날이 맥없이 딸려와, 이윽고 그의 가슴 한복판에 닿았다.
“내 심장은 이곳에 있단다. 그리고 지금은 아주 무방비하지.”
“…….”
검을 움켜쥔 이안의 콧잔등이 일그러졌다. 아르케아스의 눈동자가 금색으로 되돌아온 건 그때였다.
그의 얼굴에 구슬픈 미소가 번졌다.
“부탁하마, 이안. 나의 대행자야. 더는 내가 애원하게 하지 말아다오. 응?”
으득, 이를 악문 이안의 손아귀에 비로소 힘이 들어갔다.
흑검의 십자 막이를 타고 보라색 아지랑이가 스멀스멀 번지기 시작한 건 바로 그 직후였다.
비로소 검날을 놓은 아르케아스가 양팔을 살짝 벌렸다. 보라색 아지랑이가 톱날처럼 이글대는 칼날을 가슴 앞에 댄 채였다.
“하….”
하지만 이를 악문 채 탄식할 뿐, 이안은 검을 찔러 넣지 못했다.
그의 눈에는 이 순간에도 온갖 생각들이 오가고 있었다. 백금룡을 살릴 방법을 떠올리기 위해서.
“나도 참 못 말리겠구나.”
그를 가만히 바라보던 아르케아스가, 문득 풀썩 웃음 지었다.
“이런 순간에도, 네 갈등과 고민이 오히려 기쁘게 다가오다니 말이야.”
다음 순간, 그가 아무런 예고도 없이 이안을 향해 몸을 던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