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Dark Fantasy Villain RAW novel - Chapter 636
다크 판타지의 망캐가 되었다 646화(636/655)
#646화
“루시…!”
간신히 균형을 다잡은 메브가, 당황을 감추지 못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가, 갑자기 그게 무슨-”
“그래. 그랬지.”
말을 자른 건, 루시아와 시선을 교환하고 있던 이안이었다. 숨을 멈추며 굳어졌던 메브의 시선이 그의 뒤통수로 향하는 가운데.
“그러셨군요…. 잘됐네요. 다행이에요….”
루시아가 입술을 말아 올리며 읊조렸다. 장난기가 아니라 안도가 묻어나오는 미소였다.
이안을 올려다보는 눈에는 묘한 기대감이 맺히고 있었다. 간절해 보이기까지 했다.
이안의 입가에 옅은 쓴웃음이 번지게 만들기에도 충분했다.
‘역시, 내가 여기 남길 바라는 건가.’
루시아의 속내를 알 것 같아서였다. 녀석은 그의 가장 큰 비밀을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지 않던가. 그의 미소에 담긴 의미를 읽은 듯, 루시아의 눈매가 꿈틀댔다.
눈빛에 아쉬움이 스친 건 잠깐이었다.
“그럼, 같은 방을 쓰실 건가요?”
계단으로 발을 들이며, 루시아가 아무렇지도 않게 덧붙였다.
귀를 의심하듯 눈을 치켜뜬 메브가, 앞서 계단을 오르는 녀석을 올려다보았다.
“루시페르…!”
“못 하는 말이 없네. 타오르는 여신께서 지켜보시는데.”
뒤따라 계단을 오르며, 이안이 덧붙였다. 루시아가 다시 빙긋 미소 지으며 그를 돌아보았다.
“글쎄요. 여신께선 오히려 좋아하시지 않을까요?”
“루 솔라 맙소사…. 루시, 제발 그만하렴….”
이안의 뒤에서 메브의 탄식이 번졌다. 그녀는 손바닥으로 얼굴을 감싸 쥐고 있었다. 둘의 대화에 다른 의미가 더 있으리라고는 짐작조차 하지 못할 터였다.
물론, 알고 있는 이안도 헛웃음을 흘리긴 마찬가지였다.
“하긴. 그건 두 분이 알아서 하실 부분이죠. 죄송해요. 제가 괜한 소릴 했네요.”
그가 뭔가 말하기도 전에 덧붙인 루시아가, 다시 성큼성큼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린 메브가, 감은 눈을 뜨지 않은 채 한숨을 내쉬었다.
“대체 어쩌다가… 저렇게까지 왈가닥이….”
“…면목이 없소.”
“응…?”
이안이 내뱉은 말에, 멈칫한 메브가 그를 올려다보았다. 입맛을 다신 이안이 그녀를 돌아보았다.
“나랑 다니다가 저렇게 된 것 같아서 말이오.”
“아, 아니….”
이안과 눈이 마주친 그녀가, 당황한 듯 시선을 피하며 읊조렸다.
“그게… 나쁘다는 말은… 아니었어….”
다시 만난 이래 처음으로 어색해하는 얼굴이었다. 루시아가 한 말들이 뇌리를 스치는 것이리라.
‘새삼스럽긴.’
내심 읊조리며 웃음을 삼킨 이안이, 루시아를 따라 복도로 들어섰다. 촛불의 불빛이 줄지어 일렁이는 복도는, 아래와 마찬가지로 말끔하게 비어 있었다.
“이안…!”
저 너머의 문이 벌컥 열리면서 은발의 요정이 튀어나온 건 바로 그 직후였다.
“왜 이렇게 오래 걸렸어…! 기다리다 숨넘어가는 줄 알았잖아…!”
홱 몸을 돌린 테사이아가 마주 달려오며 덧붙였다. 그 와중에도 목소리를 억누른 건, 루시아가 검지를 입 앞에 가져다 대고 있어서일 터였다.
타타탓-! 쉬학-
물론, 그녀가 이안을 향해 몸을 날리는 것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팔다리를 활짝 펼친 채 가까워지는 그녀를 바라보며, 이안이 헛웃음을 흘렸다.
‘틈만 나면 이러네.’
재미 들렸나. 생각하는 와중에도, 그의 눈동자에 흐릿한 파문이 번졌다.
“……!”
허공을 가르며 가까워지던 테사이아의 몸이 덜컥 멈춰선 건 바로 그 직후였다. 보이지 않는 손아귀가 그녀를 움켜쥔 것이다.
팔다리를 허우적댄 테사이아가, 허공에 대롱대롱 매달린 채로 미간을 좁혔다.
“…치사하게 이러기야?”
“응. 이러기야.”
이안이 눈도 깜빡하지 않고 대답했다. 그녀를 지나치고서야 의념을 흩어 버리며, 그가 덧붙였다.
“…벌써 마셔대고 있었네.”
“할 게 없어서 어쩔 수 없었어. 여기가 얼마나 지루한 곳인지 알아, 이안?”
그대로 착지한 테사이아가, 자연스럽게 메브의 팔짱을 끼며 말을 이었다.
“죄다 감자를 캐거나 장작만 패다가, 남은 시간엔 기도만 하고 앉아 있다니까? 아니면 반 토막들이랑 둘러앉아서 이상한 그림이나 그리든가.”
“그림…?”
“…도면을 말씀하시는 걸 거예요.”
이안이 되묻자, 나란히 걷던 루시아가 대신 대답했다. 테사이아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우리 동생이 왜 그렇게 밖으로 나가고 싶어 하는지 너무 잘 알겠더라니까. 게다가 그 눈먼 쇳덩어리들.”
혀를 찬 그녀가, 팔짱 낀 메브를 올려다보며 덧붙였다. 메브의 표정은 물론, 신경도 쓰지 않은 채였다.
“그 재수 없는 것들 때문에 더 갑갑했어. 마음대로 돌아다니지도 못하게 했거든. 뭐, 내가 잘못 끼어들면 문제가 복잡해질 수도 있다나. 봐. 너희가 왔는데도 마중도 못 나가고 처박혀 있었잖아.”
“원장께서 부탁하신 거겠군.”
이안이 걸음을 멈추지도, 뒤를 돌아보지도 않고 말했다. 테사이아의 시선이 그의 뒤통수로 향했다.
“어떻게 알았어?”
“현명한 판단이니까.”
대답하며, 이안이 열린 문 너머로 들어섰다. 복도와 마찬가지로 아무런 장식도 없이 건조한, 그러나 촛불의 빛이 따스하게 번지는 방의 전경이 드러났다.
“오셨습니까, 나리.”
방 한복판에 놓인 타원형의 식탁과 그 옆에 선 갈색 피부의 청년도.
능글맞은 미소를 머금은 얼굴을 바라보며, 이안이 턱을 까딱였다.
“그래. 오랜만이다. 나세르.”
“예. 이미 알고는 있었습니다만… 정말 무사히 돌아오셨군요. 제 믿음이 부족했다는 사실이 이렇게 부끄러울 수가 없습니다.”
장내로 들어서는 이안을 바라보며 탄성을 흘린 나세르가, 입가의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덧붙였다.
“사실 다른 분들과 달리 저는, 내심 반신반의하고 있었거든요. 검은 벽이 무너진 후에도요.”
“굳이 필요 없는 말까지 떠드는 건 여전하네.”
이안이 걸음을 옮기며 대꾸했다. 식탁에 놓인 주석 술잔과 술병. 그리고 빵이 담긴 접시를 내려다보는 채였다.
“네 물건들은 거기 침상 위에 뒀어. 이안.”
뒤따라 들어온 테사이아가 덧붙였다. 옆을 돌아본 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소 낡았지만 큰 침상 위에, 그가 소환될 때 두고 갔던 장비들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고생하셨습니다, 나리.”
그가 침상으로 다가가는 사이, 나세르가 메브에게 다가갔다. 앞으로 손을 내뻗는 채였다. 익숙하게 투구를 건네주며, 메브가 미소 지었다.
“너도 고생 많았다. 나세르.”
“제 예상보다 멀끔하시군요. 다행입니다. 그럼, 갑옷부터 벗으시겠습니까?”
“나중에. 무기만 받아다오.”
“예. 이리 주십시오.”
…어쨌든 프로 종자는 다 됐구만.
내심 읊조리며 자신의 장비들을 훑어본 이안이, 이윽고 슬쩍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역시. 수리도 받아뒀네.”
장비들이 전체적으로 깔끔하게 정비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갑옷과 각반의 미늘은 물론이고, 팔목 보호대나 정강이 받침대의 구겨진 부분들이 매끈해졌다. 철판을 덧대 구멍을 메꾼 부분도 있었다.
“네. 도시의 대장장이들에게 부탁했어요.”
루시아가 방문을 닫으며 말했다. 의자에 몸을 던지듯 걸터앉은 테사이아가 주석 술잔을 집어 들며 덧붙였다.
“땅딸보들이 우글우글 몰려왔었다니까. 벽 너머의 반 토막들이 만들었다는 얘기를 들어서 그런가. 이리저리 돌려보고 난리를 치더라고.”
장내로 들어선 루시아가 테사이아의 옆에 걸터앉으며 말했다.
“돈도 안 받았어요. 이안 님이 난쟁이 생존자들을 구해주셨다는 걸 알려 줬거든요. 아쉽게도, 재질까지 똑같진 않지만요.”
“상관없어.”
고개를 주억거린 이안이, 오른손을 아공간에 밀어 넣었다.
“수리받을 게 더 있으니까. 섞어서 쓰면 돼.”
뒤이어 그가 장비들을 와르르 바닥에 쏟아냈다. 테사이아와 루시아는 물론, 메브의 검을 차례로 받아 들던 나세르의 고개도 그쪽으로 돌아왔다.
“그게 다 뭡니까…?”
“고대 유물들. 보다시피, 좀 망가졌지만.”
이안이 왼손의 장갑을 벗으며 말했다. 눈을 끔뻑이며 술을 한 모금 마신 테사이아가 덧붙였다.
“겉에 녹아 붙은 거, 다 금이야?”
“설마, 백금룡께서 선물해 주신 건가요?”
루시아가 뒤이어 덧붙였다. 이안이 팔목 보호대까지 벗어 떨어뜨리며 대꾸했다.
“맞아.”
“세상에…. …그런데 왜, 망가진 것들을 주신 거예요?”
“처음부터 이렇진 않았어.”
몸을 돌리며 대답한 이안이 식탁으로 걸음을 옮겼다. 메브와 슬쩍 눈빛을 교환하는 채였다. 루시아의 고개가 조금 더 기울어졌다.
“그럼요…?”
“이안은 역천룡과 싸웠어.”
대답한 건 메브였다. 그녀가 태연한 건, 여기까지 오는 동안 이미 이안에게 이야기를 들어서였다.
일행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녀에게로 돌아갔다.
“예…?!”
“뭐라고요!?”
“그리고, 죽였지.”
말을 맺은 메브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일행들의 반응이 자신과 똑같아서인지, 아니면 이안의 업적이 자랑스러워서인지는 그녀 본인만 알고 있을 터였다.
“…….”
나세르조차 미소를 잃고 입을 벌리는 가운데, 이안이 빈자리에 걸터앉으며 덧붙였다.
“그놈이 봉인을 깨뜨리기 직전이었거든.”
그가 빈 주석 잔을 자신의 앞에 내려놓았다. 루시아의 앞에 놓으려던 술잔을 내려놓은 테사이아가, 재빨리 그의 잔에 술을 채워주며 말했다.
“그래서 널 불러들인 거였어…?”
“그건 아니고. 내가 잘 설득했지.”
“그럴 리가. 분명 절대로 네가…. …아, 그래.”
믿을 수 없다는 듯 내뱉던 테사이아가 짧은 탄성을 흘렸다.
“설득이 아니었던 거구나. 이해했어.”
이안의 뒤에서 나세르의 목소리가 이어진 건 거의 동시였다.
“정말, 전설처럼 신을 참칭할 만큼 강했습니까…?”
“그랬지. 끔찍하게.”
참 너 다운 궁금증이네.
내심 덧붙이며, 이안이 술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벌꿀주였다.
“루 엔테르 맙소사… 용을 또 하나 죽이신 거군요….”
그가 술을 들이켜는 사이, 루시아가 마침내 탄성을 흘렸다.
“용을 둘이나 죽인 인간은, 대륙의 역사를 통틀어 나리가 유일하실 겁니다.”
나세르가 동의하듯 말을 받았다.
사실 셋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이안이 내색하지 않고 말했다.
“완벽한 건 아니야. 마지막 순간 영혼을 쪼개서, 사도들의 몸으로 흩어졌으니까.”
“육체를 버리고요…?! 그게, 가능한 일이었어요?”
루시아가 눈을 치켜뜨며 물었다.
“백금룡께서, 다시 영혼을 합치더라도 용이 될 수는 없을 거라고 하셨대.”
대답한 건 이안의 옆자리에 걸터앉은 메브였다.
“그러니까, 죽은 것과 다름없지.”
“어쨌든, 그 인간도 용도 아닌 것들이 아직 살아 있긴 하단 거네.”
테사이아가 그녀에게 술잔을 건네며 덧붙였다. 눈매를 슬며시 가늘게 뜨는 채였다. 루시아를 제외하면, 다들 과거 역천룡의 사도를 본 적이 있지 않던가.
“당장은 신경 쓸 필요 없어. 영혼을 다시 합치는 게 쉬운 일은 아닐 테니까. 당장 급한 일은 따로 있고. 게다가 여기도….”
술잔을 내려놓으며 말 한 이안이, 루시아를 돌아보았다.
“…당연히 있을 줄 알았던 한 놈이 안 보이는 것 같은데.”
“아. 맞아요…!”
그제야 눈을 깜빡이며 대답한 루시아가, 재빨리 술을 한 모금 마시고는 덧붙였다.
“방에 돌아오자마자 말씀드릴 생각이었는데. 너무 놀란 나머지 잠시 깜빡했어요.”
“깜빡할 정도면 죽거나 다친 건 아닌가 보네.”
어깨를 으쓱인 이안이, 다시 술잔을 집어 들었다.
“어쨌건, 사원에는 없는 거고.”
“…그게, 몇 주 전에, 사제 몇을 이끌고 호프 시로 갔대요.”
루시아가 조심스레 덧붙인 말에, 술잔을 입에 문 이안이 멈칫했다.
그의 이름을 따서 지은, 설원 야인들의 도시. 하지만 그의 미간이 좁아진 건 그 흑역사 같은 이름이 튀어나와서가 아니었다.
“…야인들에게, 뭔가 문제라도 생긴 거야?”
이제는 흐릿한 기억만 남은 예지몽이 뇌리를 스쳐서였다.
술을 마저 마신 이안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묻자, 루시아가 말을 고르듯 술잔에 얹은 손가락을 꼼지락댔다.
“장벽을 부술 뻔했다나 봐.”
그녀가 입을 열기도 전에, 테사이아가 가로채듯 끼어들었다. 이안의 미간이 절로 좁아지는 가운데, 입술을 말아 올린 그녀가 덧붙였다.
“널 찾으러 가고 싶은데, 관문을 열어주지 않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