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Dark Fantasy Villain RAW novel - Chapter 64
064화
올레그의 모습은 이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회전하는 연기가 장벽처럼 사방을 감싸고 있었다.
장벽에서 오염된 마력이 물씬 느껴졌다.
“하….”
쫓아가기에는 이미 늦었음을 직감한 이안이, 바람 칼날을 두른 채 쇄도하는 샬롯을 눈에 담았다.
피부가 저릴 정도의 살의.
그나마 다행인 건, 살덩이의 관심이 그녀에게로 돌아갔다는 사실이었다.
촉수들이 그가 아니라 샬롯을 향해 뻗어나갔다.
시선은 여전히 이안에게 고정한 채, 샬롯이 허공에서 궤적을 틀었다.
이안도 종종 활용하던 방식.
‘…나랑 싸우던 놈들이 이런 기분이었겠군.’
서거걱-
그녀의 쌍검이 거침없이 촉수들을 썰어 댔다.
잘려 나간 촉수는 땅에 떨어져도 죽지 않고 지렁이처럼 꿈틀댔다.
그사이, 이안도 가만히 기다리고만 있지는 않았다.
화르르륵-
연달아 피어오른 불덩이가 뿜어져 나가고, 휘몰아치는 방벽과 서리 방패가 연달아 시전됐다.
샬롯은 아까처럼 맞아 주지 않았다.
묘기 부리듯 몸을 틀어 날아드는 불덩이를 모조리 피한 그녀가, 쌍검으로 서리 방패를 내리찍었다.
콰장창-!
방패가 폭발할 틈도 없이 박살 났다.
뒤에서 손아귀에 냉기를 가득 머금은 이안의 모습이 드러났다.
푸확-!
냉기 파동. 샬롯의 주위로 돌풍이 휘몰아친 건 그 직후였다.
이안과 샬롯이 동시에 튕겨져 나갔다.
‘휘몰아치는 방벽까지…?’
하위 회색 마법은 다 들어 있는 건가.
생각하며 착지한 이안이 고개를 들었을 때, 샬롯은 이미 그의 코앞으로 쇄도하고 있었다.
이안이 황급히 검을 들었다.
연달아 이어진 두어 번의 충돌.
물러나는 이안의 발걸음을 따라 불길이 치솟았지만, 샬롯은 아랑곳하지 않고 고스란히 받아 냈다.
그녀의 주황색 눈동자에는 주체할 수 없는 야성과 희열이 뒤엉켜 있었다.
지금 이 일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이안이 어떻게 여러 색의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것인지 따위는 신경조차 쓰지 않는 게 틀림없었다.
그저 지금 이 전투를 즐기고, 그를 죽일 생각뿐.
쌍검이 쉴 새 없이 날아들었다.
방어를 도외시한 저돌적인 공격의 연속.
갑옷의 마석이 쉴 새 없이 번쩍이면서 그녀의 움직임을 보조했다.
이안에겐 반대로 위기의 연속이었다.
여러 요인이 복합된 결과였지만, 동시에 상성의 문제이기도 했다.
‘게임에서도 암살자한텐 쥐약이었는데. 회색 마법까지 쓰는 수인 암살자라니….’
무기를 맞부딪칠수록 모든 게 더 확실해졌다.
힘과 속도, 체력, 전투 기술에 이르기까지.
이안이 야성을 드러낸 그녀를 앞서는 부분이 단 하나도 없었다.
집중력이 최고조로 치달은 와중에도 언제나 샬롯이 더 빨랐고.
일격 일격에 실린 무게는 제대로 된 반격조차 허용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이 공세가 끝날 것 같지 않았다.
단 한 번이라도 실수하거나 집중력이 흐트러진다면 치명상을 입게 되리라.
그나마 앞서는 요인은 마법이겠지만.
샬롯은 그가 마법을 시전할 틈을 조금도 만들어 주지 않았다.
단죄의 일격은, 물론 사용할 엄두도 나지 않았다.
이안의 몸 곳곳에 자잘한 상처들이 늘어 갔다.
펑-!
이안이 간신히 피어 올린 화염구가 샬롯의 얼굴에 닿기도 전에 폭발했다.
샬롯은 오히려 폭발의 반경에 머리를 들이밀면서 이안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가슴팍에 끝까지 교차한 팔 끝, 쌍검이 섬뜩한 예기를 흩뿌렸다.
쩌엉-!
좌우에서 동시에 날아드는 궤적 사이로, 이안이 간신히 검을 밀어 넣었다.
교차된 검날이 목 좌우에서 멈췄다.
날 앞부분으로 이어진 곡선이 당장이라도 그의 목을 벨 듯했다.
이안은 왼팔을 자신의 검날에 가져다 대며 버텼다.
하지만 샬롯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밀려난 건 이안이었다.
이내 그의 등에 딱딱한 기둥이 닿았다. 나무 둥치였다.
퇴로가 막혔다.
생각하기가 무섭게, 섬뜩한 예감이 이어졌다.
콰직-!
날아든 꼬리 갑주가, 고개를 옆으로 젖힌 이안의 귀 끝을 살짝 잘라내며 둥치에 박혔다.
이게 여기까지 길어지는군.
생각하며, 이안은 이를 악물었다.
교차한 검날이 조금씩 가까워졌다.
샬롯의 주황색 눈에 희열과 전율이 번졌다.
곧 이안의 목을 베리라 확신한 것이리라.
이런 순간에조차, 이안의 정신력은 제 역할을 다했다.
그는 조금도 이성을 잃지 않았다.
다만 주마등처럼 밀려드는 정보들을 오롯이 받아들였다.
일렁이는 잿빛 장벽. 더 이상 비명도 들리지 않는 숲. 타들어 가는 나무와 매캐한 연기. 어기적대며 기어 오는 살덩이. 이 광경이 펼쳐지기 직전에 빠져나간 올레그. 뒤따르던 부하 넷. 그를 기다리고 있을 미구엘과 루시. 목을 노리는 단검과 되돌아가는 꼬리. 동공이 세로로 길게 찢어진 주황색 눈동자. 그리고 곧 다가올 죽음.
이 빌어먹을 세상에서의, 죽음.
“…….”
그 모든 것들이 스쳐 간 찰나의 순간, 이안은 결정을 내렸다.
그는 샬롯의 눈을 응시하며 상태창을 열었다.
그리고는 힘 수치를 하나씩 하나씩 올리기 시작했다.
두 팔로 전해지는 압력이 견딜 만하게 느껴질 때까지.
다신 하지 않을 줄 알았던 선택이지만, 아무런 망설임도 없었다.
“……?!”
이윽고 샬롯의 눈이 커졌다.
아무런 말도 내뱉지 않았지만, 지금 일어나는 현상을 이해할 수 없는 게 틀림없었다.
조금씩 그녀의 검을 밀어내던 이안이, 이윽고 이를 악물었다.
쩌엉-!
샬롯이 튕기듯 뒤로 물러났다.
검을 내리친 이안은, 올린 힘 수치의 절반만큼을 민첩성에도 투자했다.
필요한 작업이었다. 지능과 정신력이 그렇듯, 힘과 민첩성은 언제나 최소한의 균형을 맞춰 줘야 했다.
효과는 이번에도 즉각적이었다.
모든 감각이 한 꺼풀 더 선명해지는 느낌.
“…….”
샬롯은 어떻게? 따위의 흔히 할 법한 탄성은 내뱉지 않았다.
그저 감탄하듯 이안을 바라보고는 양손의 검을 고쳐 쥐었다.
이안도 우묵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그녀를 마주 보았다.
그런 그들의 옆으로 그림자가 드리운 건 그 직후였다.
쒸에엑-!
파공음. 살덩이의 촉수가 이안과 샬롯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이안과 샬롯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몸을 날렸다.
그들을 노리던 촉수가 조각나 떨어졌다.
이안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살덩이에게로 달려들었다.
샬롯도 마찬가지였다.
검격이 연달아 이어졌다.
수십 조각으로 잘려나간 육편이 사방에 흩어졌다.
꿈틀대는 살점 한복판에서, 이안과 샬롯은 다시 서로를 마주 보았다.
쉬학-!
먼저 움직인 건 샬롯이었다.
여전히 저돌적인 공세.
하지만 전처럼 위협적이지 않았다.
이안은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듯한 고도의 집중 상태 속에서, 자신의 움직임이 더 빠르고 정교하고 강해졌음을 실감했다.
샬롯의 공격을 몇 차례 막아낸 그가, 그녀가 검을 회수하는 틈을 노리고 반격을 시도했다.
푸확-!
이안의 팔이 휘몰아치는 방벽에 막혀 튕겨 나갔다. 하지만 그 사이를 파고드는 샬롯의 움직임이 여전히 선명하게 인식됐다.
그는 밀려나는 힘을 고스란히 이용해 샬롯과 거리를 벌렸다.
그녀를 따라 한 움직임.
그러면서 그사이에 휘몰아치는 방벽을 시전하기까지 했다.
하위 마법에 불과할지라도, 지금 같은 상황에선 고위 마법만큼이나 유용했다.
푸확-!
달려들던 샬롯이 돌풍에 가로막혔다. 그 사이로 화염구가 뿜어지고, 폭발과 거의 동시에 용수철처럼 튀어 오른 이안의 검이 날아들었다.
카드득-
샬롯이 이안의 검을 막아냈다.
그건 달라진 전투의 양상을 증명하는 행동이나 다름없었다.
역으로 그녀를 밀어붙이면서, 이안은 어떻게 더 빨리 주문을 완성시킬 수 있었는지를 생각했다.
시전 속도는 정신력과 지능 수치의 영향만을 받는 줄 알았는데.
인식부터 시전까지의 과정이 한층 더 매끄러워진 느낌이 들었다.
그럼 모든 능력치가 서로에게 간접적인 영향을 끼친다는 것일까?
현실이 된 지금은 충분히 가능할 법한 가정이었다.
푸확-!
그때 샬롯의 전신에서 돌풍이 터져 나왔다.
이안을 밀쳐내고 소리 없이 포효한 그녀가, 송곳니를 드러내며 몸을 날렸다.
여유가 사라진 얼굴.
하지만 눈빛만큼은 여전히 희열로 가득했다.
자신의 모든 역량을 내보일 수 있다는 사실이 기쁘기라도 한 듯이.
하지만 이안은 그녀의 장단에 오래 맞춰 줄 생각이 없었다.
이제는 이 전투를 충분히 끝낼 수 있었으니까.
콰직-!
달려든 샬롯이 이안을 덮쳤다.
교차된 쌍검 사이를 단죄의 검이 깊이 막아냈다.
다만 이번에는 한 손이었다.
이안의 왼손은 샬롯의 옆구리로 향해 있었다.
그의 손에 들린 조악한 형태의 회색 단검. 그 삐죽한 끝부분이 샬롯의 옆구리, 판금과 사슬의 이음매 사이를 정확히 찔렀다.
거미 여왕의 독니.
“……!”
샬롯의 눈이 천천히 커졌다.
독이 번지면서 몸이 마비되는 것을 느꼈으리라.
이윽고 이안이 그녀의 몸을 걷어차 밀어냈다.
몸이 뻣뻣하게 굳은 샬롯이 쓰러졌다.
“하아… 하아….”
비로소 거친 숨을 토해내며, 이안이 그 앞으로 다가섰다.
샬롯은 이 순간에도 검이 아니라 그의 눈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공포 대신, 오히려 기묘한 만족감이 감돌았다.
‘모든 걸 선보였으니 죽어도 괜찮다, 이건가.’
이안에겐 이해되지 않는 사고방식.
다만, 그녀의 그런 눈빛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녀는 오늘 내내 최악의 방해자였고, 끝내 그가 능력치 포인트까지 사용하게 만들었으니까.
만족스러운 죽음을 선사하는 건, 그에 합당한 대가가 아니었다.
죽음은 그것을 가장 두려워하는 자들에게나 최고의 형벌인 법.
이안의 눈동자가 스르륵, 그녀의 하반신으로 돌아갔다.
‘게임에서 수인 용병을 복종시키는 방법이… 이거였지.’
그의 시선이 축 늘어진 샬롯의 꼬리 갑주로 향했다.
수인의 꼬리는 그들이 타고난 야성의 상징이자 자부심.
‘이걸 자르면 야성이 거세되었다는 뜻이라던가….’
별거 아닌 서브 퀘스트를 주던 수인 NPC의 대사가 떠올랐다.
제국 귀족의 노예였던 자였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꼬리를 자른 귀족에게 절대적으로 복종하던.
고민은 거기서 끝났다.
“……!”
이안이 꼬리를 툭 발로 찬 순간, 샬롯의 눈동자에 파장이 번졌다.
경악과 불신. 그리고 마침내, 그녀의 눈에 공포가 번졌다.
이안의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나한텐 목숨이 가장 소중하거든. 그걸 빼앗으려 했으면… 너도 가장 소중한 걸 걸어야지.”
“……!”
샬롯의 눈빛이 휘청댔다.
이안이 검을 들었다.
콰직-!
“……!”
온 힘을 다해 내리친 칼에, 그녀의 꼬리 절반이 잘려 나갔다.
샬롯의 눈이 더 이상 커질 수 없을 만큼 커졌다.
남은 꼬리 단면에서 피가 흘렀다.
이안은 신경도 쓰지 않고 잘린 꼬리를 집어 들었다.
놀랍게도 정보를 확인할 수 있었다.
무려 유일 등급의 장신구였다.
샬롯의 야성.
보유 능력치는 하나였다.
수인, 샬롯의 복종.
…복종?
“…….”
이안은 샬롯을 돌아보았다.
그녀의 눈동자에 가득하던 생기와 야성, 희열은 자취를 감췄다.
그저 망연자실하게 이안의 손에 들린 자신의 꼬리를 바라볼 뿐.
…그렇단 말이지.
코웃음 친 이안이 몸을 돌렸다.
그녀의 표정을 감상할 여유 따윈 없었다.
‘밤새 여기 있을 순 없어. 나가야 돼.’
지금쯤 올레그가 마차를 따라잡았을지도 몰랐다.
다른 장소에도 마물이 기어 나오고 있을 가능성도 충분했다.
저런 살덩이를 만들어 내는 놈의 영역이라면, 그 어떤 악몽 같은 상황도 현실이 될 수 있었다.
대비책이 마련되어 있다 해도, 결코 충분하지 않았다.
당장 나갈 방법을 찾아야 했다.
이안은 연기의 장막을 따라 내달렸다. 엄청난 양의 오염된 마력이 뒤엉킨 결계였다. 당연히 빈틈 따윈 없었다.
‘저것들을 다 죽이면, 길이 열릴까?’
멈춰 선 이안은, 꿈틀대는 살덩이들을 돌아보았다.
놈들은 가만히 멈춰선 채였다.
마치 그를 기다리듯이.
그때, 예의 그 가래 끓는 듯한 목소리가 바람을 타고 번져나갔다.
모든 살덩이가 동시에 말하고 있었다.
“운명을… 거부하지….”
“그래. 받아들이겠다.”
이안이 내뱉었다.
일순간 목소리가 끊어졌다.
당황한 것처럼 느껴지는 적막.
이안이 덧붙였다.
“내가 네놈을 찾아가겠다. 그러니까 당장 길을 열어.”
“나를 찾아오리라… 맹세… 하겠느냐…?”
“맹세하지. 난 어차피 북부로 가고 있다. 의뢰를 끝내면 네놈을 찾아가마.”
그리고 네놈의 대갈통을 박살 내 주지.
이안이 뒷말을 삼키는 사이.
솨아아아-
살덩이들에게서 잿빛의 마력이 뿜어져 나왔다.
마력은 곧 거대한 문양으로 바뀌었다.
“맹약은… 체결… 되었다…!”
다음 순간, 이안의 왼손 손아귀에도 같은 문양이 새겨졌다.
퀘스트 창이 떠올랐다.
얼어붙은 심연.
이안은 더 보지 않고 창을 껐다.
당장 중요한 건 이게 아니었다.
콰아아아-
장막의 흐름이 거세졌다.
살덩이들이 우르르 허물어지고, 나무의 불길들이 일제히 꺼졌다.
연기 장막이 흩어졌다.
숲의 전경이 비로소 드러났다.
일행이 지금쯤 어디에 있을지 찾아내는 것은, 뜻밖에도 전혀 어렵지 않았다.
저 너머, 주황빛이 밤하늘을 밝히며 넘실대고 있었으니까.
숲이 불타고 있었다.
불길한 직감.
“…루시.”
더 생각할 것도 없이, 이안은 불빛을 향해 몸을 날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