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Dark Fantasy Villain RAW novel - Chapter 640
다크 판타지의 망캐가 되었다 650화(640/655)
#650화
치켜뜬 체르윈의 눈매가 가늘게 떨렸다. 그녀의 붉은 눈에 이채가 번지는 사이.
“그저 교리와 법도를 따르는 것뿐이니, 제국과 대교회를 배신하는 것도 아니잖소.”
내뱉은 이안이, 고개를 옆으로 살짝 까딱였다.
“무지에서 비롯된 잘못이라면 모를까. 알고도 저지른다면, 언젠가 그 죗값을 치르게 되겠지.”
과거 누군가에게 들었던 말을 대충 인용한 것에 불과했지만, 전혀 중요하지 않은 부분이었다.
“…옳은 말씀이군요. 이건 성전이 아니라 내전이지요.”
체르윈이 듣고 싶었던 말일 테니까. 멈추고 있던 숨을 내쉬며 읊조린 그녀가 술잔을 말아 쥐었다.
“무고한 생존자들을 죽이게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무작정 황명을 따를 수는 없을 겁니다. 심지어, 증인 중 한 사람이 부원장이기까지 하니까요.”
결심을 굳히듯 덧붙이며, 체르윈이 술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그런 그녀를 가만히 응시하며, 이안도 술을 들이켰다.
‘역시, 히케드를 그저 존경만 한 게 아니었던 건가….’
거절한 퀘스트의 내용을 내심 곱씹는 채였다.
그는 퀘스트가 반드시 좋은 결과로 이어지는 건 아니라는 것을, 이미 여러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다.
방금 퀘스트도 그런 함정 중 하나같았다. 아르케아스 때처럼, 보상 역시 석연치 않을 정도로 매력적이지 않던가.
비극적인 미래까지 예지한 시점에서, 이런 큰 문제를 보상만 보고 덜컥 결정 내릴 수는 없었다.
만일 그 결과로 체르윈이 광기에 물들기라도 한다면, 사원은 물론 루시아에게도 예상할 수 없는 영향을 끼치게 될 터였다.
‘…무슨 지뢰밭을 걷는 기분이네.’
후반부라 그런가. 이안이 내심 덧붙이며 독주를 삼키는 사이, 체르윈이 술잔을 내려놓았다.
“하나 더 여쭤도 될까요, 성자 대행?”
“하시오.”
이안이 술잔을 입에서 떼며 내뱉었다. 체르윈의 목소리가 곧바로 이어졌다.
“그렇다면 성자 대행께선, 오라버니의 편에 설 의향도 있으신 겁니까?”
“뭐….”
술잔을 내려놓은 이안이 다시 그녀를 마주 보았다.
“그게 더 적은 피해로 이 모든 혼란을 끝맺을 방법이라면.”
그를 바라보는 체르윈의 눈매가 설핏 가늘어졌다.
“오히려 더 큰 혼란을 낳게 되지 않을까요? 대교회와 황실이 무너지기라도 한다면….”
“대교회가 사라진다 해서 사람들의 신앙심까지 사라지는 건 아니오. 새로운 구심점이 생겨나겠지. 변방에 새로운 성지가 만들어졌듯이. 물론, 황실도 마찬가지고.”
담담하게 대답한 이안이, 잠시 체르윈을 응시하고는 덧붙였다.
“게다가 어차피 히케드 전하께서는, 내전에서 승리한다 해도 황좌에 앉지는 않으실 것이오. 제국이 검은 땅의 생존자들을 받아들이게 만드신 후에 기꺼이 물러나시겠지. 그리고 나서는 아마도….”
잠시 백발의 흑태자를 떠올린 이안이, 입가에 옅은 쓴웃음을 머금었다.
“검은 땅으로 돌아가실 것이오. 아직 대마족이 더 남은 데다, 타락자와 마족. 마물들까지 득시글대고 있으니까.”
“……!”
“전하께선 제국을 지키기 위해 기꺼이 놈들과 대적하시겠지. 물론 그러다 보면 언젠가, 필연적인 광기에 휩싸이게 되시겠지만….”
눈을 부릅뜬 체르윈을 일별한 이안이, 술잔을 집어 들며 말을 맺었다.
“그때 그분을 심판해도 늦지는 않을 것 같군.”
“…정말 그러시리라 믿으십니까?”
그가 술잔을 입으로 가져가는 사이, 체르윈이 내뱉었다. 이안의 입가에 맺힌 쓴웃음이 조금 더 짙어졌다.
“그러길 바라지. 만약 새로운 황제가 되려 하신다면, 그때는 내가 전하를 막을 것이오. 물론, 성녀께서도 도와주셔야겠고.”
말을 마친 그가 술잔을 입에 물었다. 술을 마시는 그를 응시하던 체르윈의 입꼬리가, 이윽고 슬며시 말려 올라갔다.
“성자 대행께선 정말이지….”
그녀의 눈매는 반대로 설핏 일그러져서, 울음을 참으며 애써 미소 짓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고결한 분이시군요. 이런 생각을 하고 계시리라고는, 감히 상상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어디까지나 가정일 뿐이오.”
이안이 말끔하게 비운 술잔을 내려놓으며 대꾸했다.
“만약 황실과 손을 잡게 된다면, 그때는 최선을 다해 히케드 전하와 싸울 것이오.”
상관없다는 듯 미소 지으며 그를 바라본 체르윈이, 이내 다시 입을 열었다.
“지금까지 그랬듯, 앞으로도 화로의 사원은 성자 대행을 지지할 겁니다. 설사, 그것이 대교회의 뜻과 다를지라도.”
지금까지보다 더 정중하고 공손한 말투였다. 이안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그가 바라던 결론이기도 했다.
“제가 보기에 성자 대행께, 더는 대행이라는 단어는 어울리지 않을 것 같군요.”
체르윈이 덧붙인 말에, 이안의 미소가 설핏 굳어졌다. 그의 시선을 받은 체르윈이 더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말을 이었다.
“성자라 불리시기에 한치의 부족함도 없으시니까요. 왜 천상이 성자 대행을 그토록 총애하는지, 오늘에야 비로소 온전히 이해하게 됐습니다.”
“…일어날 때가 된 것 같군.”
질색하듯 고개를 가로저은 이안이 의자에서 엉덩이를 뗐다.
잊지 않고 술병 쪽으로 손을 뻗는 채였다. 체르윈이 한발 앞서 술병을 움켜쥔 건 그때였다.
“……?”
“아직 드리고 싶은 말씀이 남아 있답니다.”
이안의 의아한 시선을 받은 체르윈이 내뱉었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어느새 의미심장한 빛이 번지고 있었다.
“울라프 대공에 대해서요.”
“이미 대충 이야기를 듣긴 했소만.”
입맛을 다시면서도, 이안이 다시 의자에 엉덩이를 붙였다. 체르윈이 내민 술병 앞에 자신의 잔을 가져다 대며, 그가 덧붙였다.
“나 때문에 고민이 많으시다고.”
“대공은 생각하시는 것 이상으로 성자 대행을 의식하고 있습니다.”
이안의 잔을 채운 체르윈이, 자신의 잔에도 술을 따르며 말을 이었다.
“검은 벽 너머로 실종되신 후로, 북부에선 성자 대행의 위상이 오히려 더 드높아졌으니까요. 살아 돌아오신 지금은 더더욱 걷잡을 수 없이 거대해지고 계시죠.”
“귀하도 대공만큼이나 상황을 과하게 받아들이고 계신 것 같은데.”
이안의 대답에, 술병을 내려놓은 체르윈이 낮은 웃음을 흘렸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성자 대행이 살아 계시다 여기던 그 많은 이들의 믿음이, 이렇게 보답받았는데도요?”
“…….”
“야인 중엔 성자 대행께서 신이 되셨다 여기던 자들도 있습니다. 카르하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계시리라고 말이에요.”
한쪽 눈매를 찌푸린 채 듣고 있던 이안이 한 박자 늦게 내뱉었다.
“이제 아니라는 걸 확실히 알겠군.”
“글쎄요. 그들에겐 성자 대행이 죽음을 딛고 부활한 것처럼 느껴질 겁니다. 물론, 믿음이 보답받은 자들도 크게 다르지 않을 테고요.”
이안의 눈매가 더 일그러졌다.
반대로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체르윈이 느긋하게 술잔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북부인은 대부분 이 두 부류 중 하나였어요. 야인들만이 아니라, 거의 모든 북부인이요.”
그녀가 이안을 향해 까딱인 술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낮은 한숨을 내쉰 이안도 술잔을 집어 들었다.
‘결국, 지들 멋대로 믿고 지들 멋대로 보답받았단 거잖아….’
입 밖으로 꺼낸다 해도 달라질 것 없을 말을 내심 읊조리는 채였다. 하긴. 야인들은 그가 눈앞에서 마법을 사용해도 권능을 부린다 여기던 자들이 아닌가.
허무맹랑한 탄생 설화를 붙여대기까지 했으니, 지금은 그보다 더한 신화를 쓰고 있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러니 대공은 성자 대행을 북부에서 내보내고 싶을 겁니다. 무슨 수를 동원해서라도요.”
술잔을 내려놓은 체르윈이 덧붙였다. 이안이 낮은 콧방귀를 흘렸다.
“이미 어제 일행들과 나누었던 얘기요. 그자가 무슨 도발을 하건 넘어가지 않을 테니, 염려하지 마시오.”
“물론 그러시겠죠. 게다가 저 역시, 대공이 허튼짓하지 못하도록 손을 써둘 겁니다.”
곧바로 내뱉은 체르윈이, 입가에 묘한 미소를 머금었다.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그런 게 아니에요.”
“그럼 무엇이오?”
“만약 성자 대행께서 원하신다면… 언제든 북부를 손에 넣으실 수 있으시리란 말씀을 드리려던 겁니다. 그것도, 아주 손쉽게요.”
“…….”
이안의 한쪽 입매가 절로 비틀렸다. 어제는 대륙이더니, 오늘은 북부라는 생각이 뇌리를 스쳐서였다.
‘왜 죄다 내 머리에 뭘 씌우지 못해 안달인지.’
아직 퀘스트가 뜨진 않았지만, 어쩌면 게임에서도 존재하던 이벤트들인지도 몰랐다. 명성이 일정 수치를 넘으면 발생하는 것이다.
물론, 직업별로 전용 퀘스트가 나뉘어 있을 가능성도 충분했다.
“성자 대행의 자격에는 의심할 바가 없습니다. 굳이 제가 따로 설명하는 게 입이 아플 정도죠. 하지만 이런 말씀을 드리는 건, 비단 그래서만이 아니에요.”
체르윈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목소리에 점점 더 묘한 열기를 머금고 있기까지 했다.
“그게 가장 피를 덜 흘릴 방법일지도 몰라요. 울라프 대공은, 갈수록 자신의 안위에만 몰두하고 있습니다. 침식의 여파를 정리하는 과정에서도 불필요하게 많은 피가 흘렀죠.”
술잔을 움켜쥔 그녀가 이안 쪽으로 상반신을 기울였다.
“훨씬 더 적은 희생으로 해결할 방법이 분명히 있었는데 말이에요. 자신의 위상을 높이고 야인들의 평판을 깎아내리기 위해, 병사들의 목숨을 내던진 겁니다.”
“…….”
이안을 응시하는 그녀의 눈동자에 흐릿한 주황빛이 감돌았다.
“성자 대행께서 북부를 지배하신다면 그런 일이 반복되진 않겠지요. 게다가 북부가 처음으로, 진정한 하나가 될 수 있을 거예요.”
체르윈을 응시하던 이안이, 이윽고 입을 열었다.
“…그보단, 내가 북부를 손에 넣으면 그만큼 제국의 힘이 약해지기 때문에 권하시는 것 같은데.”
그만큼 반대쪽에는 승산이 생길 테고.
속으로 덧붙이며, 이안은 대답을 기다렸다. 하지만 체르윈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입꼬리를 살짝 말아 올렸을 뿐이었다.
물론, 그것만으로도 대답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 여자도 황실 혈통이라 이건가.’
내심 헛웃음을 흘리면서도, 이안은 한 번 더 목을 축였다.
사실 새삼스러운 면모도 아니었다. 애초에 루 엔테르는 열정과 광기의 여신이 아니던가. 차기 성녀인 루시아조차, 여차하면 주먹부터 내지르고 보는 성격의 소유자였다.
“미안하지만, 그 제안은 거절하겠소.”
이윽고 술잔을 내려놓은 이안이 내뱉었다. 체르윈의 눈매가 꿈틀대는 가운데, 그가 심드렁하게 말을 이었다.
“보셨다시피, 야인들조차 제대로 다스리고 있지 못해서 말이오. 내가 북부를 지배했다간, 순식간에 무법천지가 되고 말 것이오.”
빈말이 아니었다. 야인들이 자급자족에 익숙하지 않았다면. 그리고 화로의 사원과 육각 연맹이 그들을 지원하지 않았다면, 호프 시는 진작 붕괴했을 테니까.
물론, 왕 같은 게 되고 싶지 않아서이기도 했다. 그 순간 즉시 제국의 반역자에 이름이 올라가도 이상하지 않았다.
“글쎄요… 제 생각은 다르지만….”
읊조리면서도 다시 등받이에 기대앉은 체르윈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술잔을 집어 들었다.
“성자 대행의 뜻이 그러시다면, 그렇게 알겠습니다. 제가 강요할 수는 없는 부분이니까요.”
“잘 아시는군. 이 문제는 이렇게 결론짓는 것으로 합시다.
곧바로 대답한 이안이 술병을 들며 일어섰다. 그 옆의 마개도 잊지 않고 집어 드는 채였다.
이번에는 체르윈도 그를 저지하지 않았다. 이안이 덧붙였다.
“어차피 내일 떠날 것이니, 설원의 흉지로 이동하는 데에 필요한 물자들을 좀 빌려 가겠소.”
“예. 얼마든지요. 부원장에게 말씀 전해주세요. 알아서 준비할 겁니다.”
체르윈이 선선히 대답했다. 고개를 끄덕이며 술병의 마개를 닫은 이안이 몸을 돌렸다.
“하지만 성자 대행.”
뒤에서 체르윈의 목소리가 번진 건 바로 그 직후였다. 멈칫한 이안이 돌아보자, 술을 한 모금 마신 체르윈이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때로는 원치 않더라도, 필연적으로 일어나고 마는 일도 있는 법입니다. 우리는 보통 그런걸-”
“운명이라 부르지. 그래. 나도 알고 있소.”
말을 자른 이안의 한쪽 입꼬리가 슬며시 말려 올라갔다.
“하지만 나는 이미 많은 운명을 바꿔왔소. 귀하도, 그중 하나고.”
“……?”
체르윈이 어리둥절하게 눈을 끔뻑였다. 하지만 이안은 더 덧붙이지 않고 다시 몸을 돌렸다.
“그게 무슨….”
체르윈이 나지막이 읊조린 건, 그가 문을 연 직후였다.
소리 없는 코웃음을 흘린 이안이 복도로 나섰다. 북부를 손에 넣는 운명 따윈 몇 번이고 거절하리라, 내심 덧붙이는 채였다.
그리고 다음 날. 그를 포함한 일행은 아침 일찍 사원을 떠났다.
자진해서 모인 사제들의 정중한 배웅을 받으며. 겨울을 준비 중인 장벽 관문을 향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