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Dark Fantasy Villain RAW novel - Chapter 648
다크 판타지의 망캐가 되었다 658화(648/655)
#658화
칼렙의 눈이 절로 커졌다.
먼 거리인 데다 높이 솟은 나무와 눈보라도 시야를 가리고 있었지만. 눈 밝은 북부인 수색병은 아른거리는 그림자의 실체들을 흐릿하게나마 확인할 수 있었다.
이 세상의 존재가 아닌 것 같은, 저주받은 몰골들.
크워어억- 키에에에에-
바람 소리 사이로 흐릿한 괴성이 메아리치기 시작했다. 어둠이 넘실대는 것처럼 느껴지는 건 착각이 아닐 터였다. 숲의 모든 마물이 침입자들에게로 모여들고 있었다.
퍼버벙- 화르르르-
그 와중에도 어둠을 밝히는 폭발은 멈추지 않고 이어지고 있었다.
칼렙의 눈에는 불빛이 일렁이며 멀어지는 것처럼 느껴졌다. 대전사가 정말 멈추지 않고 마경을 돌파하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침식 때 흘러들어온 것들과 변이된 설원 마물들이 섞여 있대.”
칼렙의 귓가로 낭랑한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불빛이 일렁이는 저 너머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테사이아가 말을 이었다.
“건너온 것들은 대마족의 권속이고. 아키하타라…? 들은 적 있어?”
“아키하타라라…. 예. 대교회의 서고에서 기록을 읽은 기억이 납니다.”
대답한 건 나세르였다.
“북동부… 그러니까 북부 전선 너머의 아키하 산맥에 모여 살던 하피 군락의 우두머리였다고 합니다.”
“그 날아다니는 것들? 별것 아닌 괴물들인데….”
“일반적으로는 그렇죠. 아실지 모르겠습니다만, 가끔 유독 큰 군락을 다스리는 여왕이 출몰하곤 합니다. 그놈이 그랬다더군요. 계기는 알 수 없지만, 다른 마물들까지 받아들이며 세력을 키웠다더군요. 그래서 붙은 이명이….”
기억을 되새기듯 눈을 가늘게 뜬 채 내뱉은 그가, 턱을 어루만지며 말을 이었다.
“깃털 왕관의 대모나 만마의 어머니였다고 합니다. 직접 모습을 드러낸 적은 많지 않습니다만… 나타날 때마다 엄청난 희생을 만들어내기도 했습니다. 생존자가 증언하길, 스치고 지나갈 때마다 모조리 목이 잘려 나가고 피의 궤적이 허공을 가른다고 했다더군요.”
“기억력이 쓸만하네, 짝귀.”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내뱉은 테사이아가, 태연하게 어깨를 으쓱였다.
“어쨌든. 검은 땅에서 만난 권속과 같은 혼돈을 품은 놈들이 있나 봐.”
“…대전사의 사역마가, 그런 것들을 전부 알려주는 겁니까?”
멍하니 이야기를 듣고 있던 칼렙이 물었다. 테사이아가 그를 돌아보며 키득댔다.
“그래. 머릿속에 속삭이지. 저 녀석은 보통 사역마가 아니야. 너희 대전사께선, 고대신의 파편을 굴복시켰어.”
“……!”
칼렙의 눈이 또 한 번 커졌다.
의문 대신, 과연 반신이라는 생각이 뒤를 이었다. 천둥과 벼락의 가호 속에서 태어났다지 않던가.
필멸자의 껍데기에 갇혀 계시다고는 하나, 고대신의 파편 따위를 제압하는 것은 전혀 어렵지 않으셨으리라.
“앞이나 잘 봐. 털보. 우린 이미 마경에 들어섰으니까.”
술을 한 모금 마신 테사이아가 덧붙인 건 그때였다.
퍼뜩 정신을 차린 칼렙이 정면을 돌아보았다.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어둠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길이 조금 넓어지고 구불구불해 보이는 건 착각이 아닐 터였다. 심지어, 백마들은 길 가장자리로 비틀대며 나아가고 있었다.
“……!”
눈을 치켜뜬 칼렙이 고삐를 옆으로 끌어당겼다. 다행히 말들은 저항하지 않고 길 한복판으로 방향을 틀었다. 완전히 홀린 건 아닌 상태 같았다.
‘큰일 날 뻔했군….’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칼렙의 뇌리로, 마경에 홀릴 뻔했던 동기들의 말들이 스치고 지나갔다.
분명 외곽을 따라 걷고 있었는데, 다음 순간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둠 속으로 향하고 있었다던가.
키이이이- 에에에-
그사이 마물들의 비명은 점점 더 희미해져 바람 소리에 녹아들듯 섞이고 있었다. 불길 역시 이제는 그저 주황빛이 아른거리는 것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이런, 연결이 끊어졌네.”
느긋하게 술만 홀짝이던 테사이아가 읊조린 건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서였다. 칼렙이 정면에서 시선을 돌리지 않고 귀만 쫑긋 곤두세우는 가운데, 나세르가 덧붙였다.
“가깝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뭐, 상대적으로 그렇단 거겠지. 요그의 능력이 그렇게까지 정교하진 않고 말이야. 아니면 혹은….”
잠깐 뜸을 들인 테사이아가 말을 맺었다.
“마경의 근원에 거의 다다라서, 주문이 교란되는 걸지도 모르고.”
저 멀리서 유독 밝은 빛이 번쩍인 건 거의 동시였다. 멈칫한 칼렙의 고개가 한순간 옆으로 돌아갔다. 육안으로 상황을 파악할 수 없는 먼 거리였지만, 전투가 격렬하게 벌어지고 있다는 건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끄아아- 아아아아아-
몇 분 지나지 않아, 악마가 울부짖는 듯한 괴성이 번져 나왔다. 휘몰아치던 눈보라가 비명과 함께 고요하게 잦아들었다.
하지만 적막은 그리 길지 않았다.
쿠- 구구구구구-
땅이 둔중하게 뒤흔들리기 시작한 것이다. 눈을 부릅뜬 칼렙이 자세를 낮추며 고삐를 끌어당겼다.
다행히 백마들은 멈춰선 채 헐떡댈 뿐 난동을 부리지 않았다. 이미 뭔가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아무래도 끝난 모양이네.”
테사이아가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심드렁한 목소리로 내뱉었다.
방심하지 않고 고삐를 움켜쥔 칼렙이 그녀를 돌아보았다.
“정말 이렇게 빨리 근원을 제거하셨다는 말씀입니까?”
아직 한 시간도 채 지나지 않은 시점이 아닌가. 지진이 잦아들기 시작하는 가운데, 술을 한 모금 더 마신 테사이아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래. 결국, 우린 구경만 하다 끝나네.”
어둠 너머에서 마물들의 비명이 메아리치듯 번지기 시작한 건 그때였다. 숲 전체가 비명을 토해내는 것처럼 들리기도 했다.
눈을 가늘게 뜬 채 어둠 너머를 응시하던 나세르가, 이윽고 입꼬리를 묘하게 말아 올렸다.
“앞으로는 말씀을 유의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원로.”
어둠 너머가 파도치듯 일렁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너머를 응시하던 칼렙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저건 설마….”
“남은 마물들이 도망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내뱉은 나세르가 느릿느릿 일어섰다. 왼손으로 망토 뒤편에서 방패를 꺼내 들고, 오른손은 허리춤의 장검 자루를 움켜쥐는 채였다.
“보다시피, 우리도 휩쓸릴 것 같고요.”
“차라리 잘됐지 뭐.”
그가 검을 뽑아 드는 가운데, 테사이아가 술병의 마개를 닫으며 내뱉었다.
“덕분에 나도 재미를 좀 볼 수 있게 됐잖아.”
뒤이어 망토 앞자락을 느슨하게 푼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너희는 빠져 있어. 이 원로께서 막아줄 테니까.”
“…아까 드린 말씀은 농담이었습니다만.”
왼손에 방패를 고정한 나세르가 검을 늘어뜨리며 말했다. 피식 웃은 테사이아가 마차 측면으로 돌아섰다.
“걱정하지 마. 어차피 나는 시간만 벌면 되니까.”
손에 쥔 술병을 칼렙의 품에 휙 던져준 그녀가 고개를 까딱였다.
“가던 길 계속 가. 털보.”
“예, 예…! 원로!”
고개를 끄덕인 칼렙이 손에 쥔 고삐를 흔들었다. 테사이아의 눈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였다. 그녀의 눈에 어느새 푸르스름한 마력이 모여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적색 마법사를 본 적은 있었지만, 청색은 처음이었다. 주문과 어울리는 환경에 오래 머물면 광기에 물들게 된다는 미신이 있다던가.
키에에엑- 키아아아-
고막을 파고드는 괴성에, 칼렙의 고개가 옆으로 돌아갔다.
어느새 넘실대는 어둠의 실체가 조금씩 드러나고 있었다. 밀려드는 마물들의 물결. 여전히 희미했지만, 칼렙은 그것들의 모습을 어렴풋이나마 확인할 수 있었다.
날개뼈가 어울리지 않게 돋아난 마물들과 몸 곳곳에 가시 같은 뿔이 돋아난 마수들.
‘설원 늑대…?’
뇌리를 스치는 생각에, 칼렙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심지어 자줏빛 안광을 이글대는 망자들도 섞여 있었다. 광기의 근원에 홀려, 온갖 종류의 마물이 무리를 이룬 것이다.
“대단한 전투였나 봅니다. 광기에 물든 것들이 저렇게까지 겁을 집어먹은 걸 보면.”
나세르가 태연하게 내뱉은 말은, 칼렙이 느끼고 있는 감상과는 사뭇 달랐다. 물론 그 역시, 말투와 달리 언제든 움직일 수 있도록 자세를 낮춘 채였다.
은발을 휘날리며 선 테사이아가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우두머리가 죽고 근원까지 사라졌는데, 오죽하겠어?”
“하긴… 광기에 물든다고 본능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긴 하죠.”
고개를 끄덕이는 테사이아의 망토가 머리카락만큼이나 펄럭였다. 그 사이로 가슴 앞에 모아쥔 양손이 설핏 드러났다.
“고삐 놓치지 마, 털보.”
이내 덧붙인 그녀가 왼팔을 앞으로 내밀었다. 활짝 펼친 손아귀에는 어느새 보옥이 새파랗게 빛나고 있었다.
슈화악-!
보옥에서 파장이 터져 나온 건 거의 동시였다. 칼렙의 어깨가 굳어지게 만들 정도의 냉기가 섞인 파장이었다. 뒤이어 저만치 옆의 숲에 얼음 결정들이 번지기 시작했다.
쩌저저저저저적-
칼렙은 줄지어 번져나가는 결정 장막을 돌아보았다.
눈 결정을 확대해 놓은 듯한 형태라는 것까진 알지 못했지만. 어쨌건 상황에 어울리지 않게 아름답다는 것만큼은 분명했다.
그 너머로, 밀려드는 마물들의 물결이 점점 더 선명해졌다.
여전히 왼팔을 앞으로 내뻗은 테사이아가 보옥을 힘껏 움켜쥔 건 몇 초 지나지 않아서였다.
콰과과과과광-!
동시에 줄지어 이어진 결정 장막이 일제히 폭발하며 터져 나갔다. 그 너머로 안개처럼 자욱한 후폭풍이 휘몰아쳤다.
키에에엑-! 키아아아-
마수들의 비명이 어지럽게 뒤엉켰다. 하지만 테사이아는 이미 양손을 다시 가슴 앞으로 모아 쥐며 눈을 반개하고 있었다.
솨아아아-
그녀가 다시 양손을 앞으로 내민 건, 후폭풍 사이로 뒤엉킨 마물들의 모습이 설핏 드러날 무렵이었다.
쩌저저저저적-
싸늘한 파장이 칼렙을 훑고 지나간 직후, 길 가장자리를 따라 얼음 장벽이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넘어진 것들을 짓밟고 서로를 밀쳐내며 밀려드는 마물들이 잿빛 빙하 방벽에 완전히 가려졌다.
쩌저적- 꾸드득-
은발과 망토를 넘실대는 테사이아는 내뻗은 양팔을 내리지 않았다. 보옥에서 번지는 파장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래서인지 길가를 완전히 가로막으며 솟아오른 방벽은, 마차가 나아가는 방향을 따라 계속해서 솟아오르며 이어졌다.
콰드드드득-!
그 너머에서 둔중한 굉음과 함께 비명이 어지럽게 메아리쳤다.
밀려든 마물들이 그대로 방벽에 충돌한 것이리라. 하지만 빙하 방벽은 무너지거나 부서지지 않았다.
그저 반대편에 균열이 번진 듯 더 불투명하게 변하면서 계속해서 이어져 나갈 뿐이었다.
콰드드득- 키에에엑-!
물론 모든 부분이 그런 건 아니었다. 마차 저 뒤편. 증발하듯 사그라드는 방벽을 뚫고 마물들이 튀어나온 것이다.
“…….”
어느새 후미 지붕에 선 나세르가 방패를 치켜든 채 그것들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그가 싸울 필요는 없었다. 길가로 밀려 나온 마물들은, 멈추지 않고 내달려 반대편 숲으로 들어가 버리고 있었으니까.
키이이이익-! 크르렁-!
그건 저 앞쪽도 마찬가지였다. 칼렙은 십여 미터 앞을 지나치는 마물들의 물결을 눈에 담았다.
자줏빛 안광을 빛내는 것들이 길을 가로지르며 내달리고 있었다. 이 와중에도 마차와 가까워지지 않는 건, 빙하 방벽이 계속해서 솟아오르고 있어서이리라.
그가 악몽에서나 나올 법한 괴물들의 행진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사이.
“괜찮으십니까, 원로?”
마물들을 노려보던 나세르가 소리쳤다. 양팔을 내뻗은 테사이아가 곧바로 화답했다.
“당연하지! 앞으로 한참은 더 계속할 수 있어!”
고개를 돌려 나세르를 돌아본 그녀의 한쪽 입매가 말려 올라갔다.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겠지만 말이야.”
방벽 너머에서 콰광, 하는 폭음이 터져 나온 건 바로 그 직후였다. 나세르와 칼렙의 고개가 동시에 빙하 방벽 위로 돌아갔다. 저 너머가 동이 트듯 밝아지고 있었다.
콰르르르- 콰과광-!
뒤이어 폭발이 빠른 속도로 가까워졌다. 방벽의 잿빛 표면에도 그 너머에서 번지는 불빛이 일렁였다.
“…….”
칼렙은 넋을 잃고 얼음 표면에 맺힌 불빛을 응시했다. 그 사이로 보랏빛 궤적이 넘실대는 것처럼 보이는 건 아마도 착각일 터였다.
키에에엑- 이아아아-!
앞과 뒤를 가로지르며 도망치는 마물들의 숫자가 빠른 속도로 줄어들었다.
테사이아가 내뻗고 있던 양팔을 늘어뜨린 건, 더는 한 마리의 마물도 지나치지 않게 되었을 때였다.
솨아아아아…
일렁이는 불빛을 머금은 빙하 방벽이 위에서부터 증발하듯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건너편에서 번지던 비명이 사그라지면서, 일대에 묘한 적막이 내려앉았다.
다각… 다그닥…
방벽 너머에서 가장 먼저 드러난 것은, 두건 망토를 눌러쓴 이안과 그를 태운 채 천천히 걸음을 옮기는 모로였다. 그를 잠시 멍하니 응시한 칼렙의 입술이 달싹였다.
“카르하여….”
모로의 전신은 일렁이는 빛을 머금은 것처럼 번들댔다. 전신 마갑에 번들대는 체액이 불빛을 반사하는 것일 터였다.
하지만 이안의 두건 망토는 반대로 빛을 삼키는 것처럼 어두웠다. 그가 오른손에 늘어뜨린 칼날 역시, 빛을 전혀 반사하지 않고 불길하게 검었다.
두려움과 경외를 동시에 불러일으키는 모습이기도 했다.
“고생하셨습니다!”
나세르의 외침이 칼렙의 정신을 일깨웠다. 어느새 검과 방패를 회수한 그는 성큼성큼 마차 측면으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덧붙이며 몸을 숙인 그가 마차의 한쪽 문을 열었다. 나세르는 곧바로 훌쩍 뛰어내려 묘기를 부리듯 안으로 들어갔다. 칼렙이 튕겨 오르듯 일어선 건 바로 그 직후였다.
“고, 고생 많으셨습니다! 반신이시여…!”
힘차게 소리치면서도 북부식으로 고개를 살짝 숙이는 채였다.
덕분에 빙하 방벽이 완전히 사라지면서 펼쳐진 광경이 자연스럽게 눈에 들어왔다.
화르르르…
찢겨나가고 타들어 간 마물들의 시체가 사방에 널브러져 있었다.
주황색 성화가 곳곳의 시체를 불태우며 횃불처럼 주위를 밝혔다.
다각- 다각-
루시아와 메브가 탄 백마가 그 한복판을 가로지르며 다가오고 있었다. 가면을 눌러쓴 루시아의 두건에는 성화가 잦아들고 있었다.
그녀의 뒤에 앉은 메브는 마물들의 체액을 뒤집어쓴 듯한 몰골이었다. 그녀가 움켜쥔 양손 검의 얇고 긴 검날에서도 불길이 은은하게 일렁였다.
“너희도 수고 많았다.”
마차 옆으로 비스듬하게 다가서며 이안이 내뱉은 건 그때였다.
“역시, 남겨 두고 가길 잘했네.”
비로소 칼렙이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드는 가운데, 지붕에 걸터앉은 테사이아가 내뱉었다.
“오거 마족이 우두머리였다고?”
“그래. 말도 하더군.”
이안이 검을 허리춤으로 되돌리며 대꾸했다.
문밖으로 상반신을 내민 나세르가 그에게 수건으로 쓸 천을 내민 건 그때였다. 두건을 벗으며 받아 든 이안이 얼굴에 튄 체액을 닦기 시작했다.
“시간이 더 지났다면 대마족이 되었을지도 몰라요.”
뒤편으로 다가온 루시아가 덧붙였다. 그녀가 가면을 머리 위로 밀어 올려 얼굴을 드러내며 말을 맺었다.
“그전에 죽여서 다행이죠.”
“수고했어. 동생아.”
테사이아가 태연하게 대꾸하며 칼렙에게 손을 내밀었다. 재빨리 몸을 숙인 칼렙이, 마부석 뒤편에 기대 두었던 술병을 그녀의 손에 쥐여줬다. 그사이 메브에게도 수건을 건넨 나세르가 덧붙였다.
“생각보다 마물의 숫자가 많더군요. 역시, 흉지가 설원의 마물들을 잔뜩 불러들인 모양입니다.”
“그래. 이곳만 그런 건 아니겠지.”
검을 회수한 메브가, 안면 가리개를 닦으며 담담하게 대꾸했다. 그사이 테사이아의 손을 붙잡고 마차 지붕 위로 올라간 루시아가, 맥이 풀린 듯 그대로 주저앉았다.
“도망친 것들은 아마 다른 흉지로 흘러 들어갈 거예요.”
그녀의 시선이 길 반대편의 숲을 훑었다. 도망친 마물들은 이미 어둠과 내리는 눈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거기 살던 놈들과 싸우지 않는다면, 점점 더 많은 마물이 우릴 기다리게 되겠죠.”
“상관없어.”
내뱉은 건 목덜미를 닦던 이안이었다. 테사이아가 입에 문 술병이 허공을 가로질러 그의 손아귀로 빨려 들어간 건 거의 동시였다.
“……!”
반신이 아무렇지도 않게 선보인 권능에 칼렙이 눈을 치켜떴다. 그사이 이안이 술병을 입으로 가져가며 덧붙였다.
“그때쯤엔 우리만 있는 게 아닐 테니까.”
“하긴… 그렇겠네요.”
고개를 주억거린 루시아가 그대로 지붕에 벌렁 드러누웠다. 독주를 벌컥 들이켠 이안이, 뒤편의 메브에게 술병을 날려 보내며 입을 열었다.
“길을 잃진 않았겠지, 칼?”
“무, 물론입니다, 반신이시여!”
곧바로 대답한 칼렙이 자리에 앉았다. 저 앞에 갈림길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좌측으로 이어진 갈림길을 가리키며, 그가 다시 이안을 돌아보았다.
“저 안으로 들어가면, 아마도 날이 밝기 전에 또 다른 마경을 지나치게 될 겁니다!”
“그럼 계속 가자고. 아직은 쉬지 않아도 될 것 같으니까.”
어깨를 으쓱인 이안이 고삐를 쥐며 덧붙였다.
“그놈의 반신 소리는 넣어두고.”
***
휘오오오오-
눈 섞인 삭풍이 이안의 전신을 훑고 지나갔다. 눈 덮인 숲은, 말 그대로 시간이 멈춘 것처럼 고요했다. 어둑어둑한 그 너머를 응시하던 이안이, 문득 입을 열었다.
“마경이 멀지 않은 것 같은데.”
마부석. 서리 덮인 두건 망토를 깊이 눌러쓴 칼렙이 고개를 끄덕이며 시선을 돌렸다.
“이 근방은 저희도 제대로 수색을 끝마치지 못한 곳이긴 합니다만… 아마도 저 안쪽 어딘가일 겁니다.”
일행은 사실상 흉지 한복판을 관통하고 있었다. 그리고 여기까지 오는 동안, 그들은 두 개의 근원을 더 제거한 상태였다. 이미 이 일대는 완전히 새로운 생태계가 형성되고 있었다. 몇 년간 더 방치된다면, 작은 검은 땅이 된다 해도 이상하지 않은 상태였다.
“뭐, 가 보면 알겠지.”
내뱉으며 이안이 뒤를 돌아보았다. 피곤이 제법 쌓였을 텐데도, 그의 시선을 받은 메브는 아무렇지도 않게 안면 가리개를 내렸다.
서리 맺힌 털가죽 두건을 깊이 눌러쓰는 채였다.
“저도 준비됐어요.”
마차 문이 열리고 가면을 눌러쓴 루시아가 밖으로 상반신을 내민 건 거의 동시였다. 메브를 향해 익숙하게 손을 뻗는 채였다.
열린 문틈으로 테사이아가 빼꼼 얼굴을 내밀었다.
“하던 대로 하면 되지? 다녀와!”
…이젠 투덜거리지도 않네.
이안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날이 추워지고 축복이 사라지면서, 테사이아와 나세르는 필요한 상황이 아니면 마차 밖으로 나오지 않게 됐다.
루시아가 자리를 잡은 것을 확인한 이안이, 허리춤의 검을 뽑으며 내뱉었다.
“들었겠지. 하던 대로 해.”
“예, 대전사!”
칼렙이 고개를 끄덕이며 소리쳤다. 전투가 거듭될수록, 그의 태도는 오히려 점점 더 신병처럼 변하고 있었다.
넌 좀 풀어져도 될 것 같은데. 내심 생각하며, 이안이 모로의 고삐를 흔들었다.
다그닥- 다그닥-
모로가 기다렸다는 듯 마차를 비스듬하게 앞지르며 달려 나갔다.
며칠째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움직이고 있는데도, 녀석의 움직임에는 활력이 넘쳤다. 아마 마물들의 피와 살을 신나게 먹어 치워서일 터였다.
마찬가지로 혼돈을 연달아 배 터지게 집어삼킨 요그도, 또 한 번의 탈피를 위해 잠든 상태였다.
하지만 이안은 별다른 고민 없이 숲을 내달렸다.
쿠구… 쿠구…
아까부터 혼돈의 정수가 신호를 보내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제 삼의 눈을 뜨면서 한층 더 예민해진 육감의 인도를 따르기만 해도 충분했으니까.
“……?”
이안의 미간이 꿈틀댄 건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숲으로 접어든 지 제법 시간이 지났는데도 앞을 가로막는 마물이 나타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희미한 악취가 코끝을 스치고 있었다.
곧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
숲 저 너머에, 찢겨나가고 난도질당한 마물 시체들이 펼쳐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야인 토벌대가 휩쓸고 지나친 흔적이 분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