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Dark Fantasy Villain RAW novel - Chapter 65
065화
불길이 점점 선명해졌다.
여러 나무들에 붙은 불길은 주위로 옮겨붙지 않고, 그저 밝고 맹렬하게 타오르고만 있었다.
누군가의 감정을 대변하듯이.
불길의 인근까지 달려간 이안의 눈에 처음으로 들어온 것은, 정신이 나간 것 같은 상단 경호병의 얼굴이었다.
그는 말에서 떨어졌는지 불길을 등진 채 내달리고 있었다.
“여기 악마가- 악마가 있-”
콰아아아-!
눈부신 불기둥이 그를 집어삼킨 건 그 직후였다.
이안이 근처에 당도할 때쯤 불기둥이 잦아들고, 안에서 숯덩이가 된 시신이 허물어졌다.
그 너머로, 주저 앉은 루시의 얼굴이 드러났다.
거칠게 나부끼는 로브.
위로 삐죽 솟은 머리칼.
노란색과 주황색이 뒤엉켜 일렁이는 눈동자.
그리고 슬픔과 분노로 일그러진 얼굴.
언제나 무표정한 그녀가 저런 표정이 된 이유를 알아내는 건, 전혀 어렵지 않았다.
“…….”
주저앉은 그녀의 바로 앞에, 미구엘이 쓰러져 있었으니까.
주위는 피로 흥건했다.
팔이 잘렸기 때문일 터였다.
루시는 팔목 아래, 팔뚝 중간이 잘려나간 미구엘의 왼팔을 필사적으로 움켜쥐고 있었다.
출혈을 조금이라도 멈춰 보려는 생각일 터.
“……!”
루시의 시선이 이안 쪽으로 득달같이 돌아온 건 그때였다.
발작적으로 일렁이는 눈동자.
이어진 섬뜩함에, 이안은 앞으로 몸을 날렸다.
콰아아-
불기둥이 바로 뒤에서 치솟았다.
그조차 뜨겁다 느낄 정도의 열기.
바닥을 구른 이안이 자세를 다잡으며 루시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동자가 휘청댔다.
“이, 이안님…?!”
“그래. 나다.”
“제가, 제가 무슨 짓을.”
불기둥이 단숨에 흩어지고, 주위의 나무들을 태우던 불길이 힘을 잃었다.
루시가 입술을 떨며 내뱉었다.
“죄송해요. 죄송해요…!”
“사과할 필요 없다. 아무렇지도 않으니까.”
일어선 이안이 걸음을 옮겼다.
이런 상황에서 조건 반사적으로 저지른 행동에 책임을 물을 생각 따윈 없었다.
게다가 지금 중요한 건 따로 있었다.
“미구엘, 미구엘이…!”
루시가 비로소 눈물을 왈칵 쏟으며 내뱉었다.
이안은 주변에는 눈길도 주지 않은 채 다가가, 미구엘의 상태부터 살폈다.
팔뚝 중간 쯤부터 깔끔하게 잘려나간 왼팔.
왼쪽 어깨부터 명치까지 찢겨진 가죽 갑옷.
그 사이에서도 피가 배어 나왔다.
미구엘의 눈이 가늘게 뜨인 건 그때였다.
“…형씨.”
“말 하지 마라.”
“계획대로… 못 했소….”
“그건 딱 봐도 알아.”
미구엘이 웅얼댔다.
의식을 잃기 직전이었다.
이안은 루시가 움켜쥐고 있는 미구엘의 잘린 팔 단면을 바라보았다.
피가 아직도 흘러 나오고 있었다.
당장 출혈을 멈추고 감염도 막을 방법은, 하나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네 팔을 불로 지질 거다. 견디지 말고, 그냥 기절해.”
이안이 손아귀에 화염구를 피워 올리며 내뱉었다.
미구엘의 창백한 입술이 간신히 달싹였다.
“시부럴….”
이안은 곧바로 화염구를 움직여, 미구엘의 팔 단면에 가져갔다.
“……!”
살 타는 냄새. 잠시 바들대던 미구엘이 이내 축 늘어졌다. 차라리 기절한 게 다행이리라.
필요 이상으로 많이 타지 않게 최대한 정교하게 처리한 이안이, 화염구를 아무렇게나 던져 버렸다.
다행히 출혈은 멈췄다.
“계속 잘 들고 있어라.”
“…네.”
자신이 아픈 것처럼 눈물 흘리던 루시가 고개를 끄덕였다.
곧바로 일어선 이안은, 멀지 않은 곳에 전복된 마차로 다가갔다.
마차는 처박히듯 뒤집혀 있었지만, 오히려 그래서 아래에 깔린 것들은 거의 무사했다.
이안은 그 아래를 뒤져 배낭을 집어 들고는 다시 돌아왔다.
“그대로 들고 있어라.”
배낭을 뒤적인 이안이 익어버린 단면에 천을 대고는, 주위를 붕대로 압박해 칭칭 감기 시작했다.
이내 그가 턱짓했다.
“천으로 몸의 피를 닦아.”
루시가 재빨리 움직였다.
손이 이미 피투성이였지만,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미구엘의 가슴팍에 번진 피를 닦아냈다.
이안은 그제야 루시의 손에 뭔가가 들려 있다는 걸 눈치챘다.
당장 중요한 부분은 아니었다.
이안은 비로소 제대로 드러난 가슴의 상처를 확인했다.
다행히 그리 깊지 않아서, 벌써 피가 응고되고 있었다.
아마 팔로 공격을 막아내며 쓰러진 덕분일 터였다.
비록 손은 날아갔지만. 몸이 두 쪽 나는 것보단 나은 결과였다.
“하늘이 도왔군.”
미구엘의 가죽 갑옷을 벗기면서, 이안이 덧붙였다.
“올레그가 이랬나?”
“…네.”
“놈은?”
루시가 대답 대신 뒤를 돌아보았다.
그제야 저만치에 널브러진 커다란 숯덩어리가 눈에 들어왔다.
말과 함께 통째로 타 버린 올레그였다.
도망치다가 숨이 끊어진 모양.
인마 모두, 걸치고 있던 마법 무구만이 그나마 형태를 보전하고 있었다.
타 죽은 시체는 저 하나가 전부가 아니었다.
곳곳에 숯덩이가 된 말과 인간의 시체가 널브러져 있었다.
“고통스러웠겠군. 잘 했다.”
내뱉은 이안이 미구엘의 가슴 상처 위에 천을 덧댔다. 출혈이 거의 멎어서, 감염만 조심하면 될 것 같았다.
상처에 붕대를 감으며, 이안이 말을 이었다.
“그래서, 왜 계획대로 못 한 거냐.”
“그게… 저 사람들의 상태가 이상했어요.”
루시가 가라앉은 눈으로 말했다.
“달려와선 마차를 넘어뜨렸죠. 그러면서 비명과 고함을 지르고, 마구 욕을 해 댔죠. 미구엘이 저를 안아 들면서 그랬어요. 저 사람들, 눈이 돌았다고.”
“눈이?”
“정말 그랬어요. 눈가에 핏줄이 튀어나오고, 눈이 번들댔거든요.”
“…오염된 마력에 중독된 거군.”
이안은 멀어지던 올레그와 연기 장막, 그리고 번지던 오염된 마력을 떠올렸다.
결계가 완성되기 전에 통과하긴 했지만, 그 과정에서 오염된 마력을 온몸으로 머금은 모양이었다.
오염된 마력은 종류에 따라 다양한 상태 이상을 유발했다.
공포, 착란, 광분 등등.
아까 본 자의 정신 나간 얼굴이, 단지 루시에 대한 공포 때문만은 아니었던 것이다.
“저자가 저한테 소리쳤어요. 다 너 때문이라고. 그냥 죽여 버리겠다고. 저는 단검을 뽑으려고 했고, 미구엘이 막았죠. 그리고….”
루시가 미구엘의 창백한 얼굴을 돌아보며 숨을 골랐다.
떠오르기 괴로운 모양.
이안이 충분하다고 말하려는 찰나, 그녀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이안 님의 말씀이 맞댔어요. 전 칼을 들기엔 너무 어린 나이라고. 그러면서 이걸 쥐여 줬어요.”
루시가 손에 들고 있던 것을 로브에 문질러 닦고는 내밀었다.
고대어가 빼곡하게 새겨진 손바닥만 한 부적이었다.
안에 응축된 마력이 느껴졌다.
“이걸 쓰면 저를 멀리 날려 보내줄 거라고요. 거기가 어디든 안전한 곳에 숨어서 아침을 기다리라고. 그럼 이안 님이 찾으러 올 거라고요. 시간을 끌 테니, 이 부적 양쪽에 손을 올리고 힘을 주랬죠. 그리고는 앞으로 걸어 나갔어요.”
“…널 살리려고 올레그와 맞섰다고?”
이안이 놀란 표정으로 되물었다.
루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어요. 첫 공격은 막았죠. 하지만 두 번째에… 이렇게 됐어요. 전 도저히 이 부적을 쓸 수 없었어요. 저자가 다시 치켜드는 피 묻은 도끼만 보였으니까. 그리고….”
“그다음은 말 안 해도 돼. 주위만 봐도 충분히 알겠으니까.”
“…저 사람의 말이 전부 틀린 건 아니에요. 전부 저 때문인 건 사실이니까.”
루시가 눈물을 꾹 억누르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미구엘이 이렇게 된 것도요. 제가 조금만 더 빨리 마법을 썼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내가 볼 땐 이놈이 이렇게 돼서 네 마법이 더 강해진 것 같은데.”
내뱉으며 붕대질을 마무리한 이안이, 루시를 돌아보았다.
“네가 도망치지 않았기 때문에, 이놈이 산 거고.”
어디까지나, 아직은. 평소라면 내뱉었을 뒷말을 삼킨 이안이, 이윽고 덧붙였다.
“잘했다는 얘기다. 루시.”
“…….”
입술을 질끈 깨문 루시의 눈에서, 결국 눈물이 다시 터져 나왔다.
주위의 나무에 붙은 불길들이 커졌다 작아지길 반복했다.
이안은 그녀를 위로하지 않았다.
그저 그녀가 울도록 놔둔 채 미구엘의 옷을 대충 다시 입히고, 마차로 향했을 따름이었다.
돌아온 그의 품에는 부서진 잔해들이 여럿 들려 있었다.
“여기에 불 좀 붙여라. 주위에 붙은 불은 끄고. 이놈이 깨어날 때까진 여기 있어야 할 것 같으니까.”
“네. 네에….”
대답한 루시가 눈물을 닦았다.
그녀의 눈과 머리칼이 일렁였다.
화륵, 이안이 모아 놓은 잔해에 불이 붙었다.
뒤이어 눈을 감고 숨을 고르자, 일대의 나무에 타오르던 불길들이 일제히 잦아들었다.
일렁이던 머리칼이 가라앉았다.
‘저런 건 나도 못 하는데….’
어이가 없군.
내심 읊조리며, 이안은 마차에서 침구와 로브, 망토 따위를 되는대로 찾아냈다. 흙과 재로 범벅인 것도 있었지만 상관없었다.
“…달라고?”
모닥불로 돌아온 이안이, 손을 내미는 루시를 보며 물었다.
루시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안이 건넨 침구들을 받아든 그녀는, 미구엘의 온몸을 말 그대로 꽁꽁 싸매기 시작했다.
지극 정성이군.
이안이 결국 피식댔다.
“숨 막히지 않게 잘해라. 네 것도 남기고.”
“여기 같이 들어가서 자면 돼요.”
“그러든가.”
심드렁하게 내뱉던 그의 미간이 문득 좁아졌다.
그의 고개가 숲의 어둠 너머로 돌아갔다.
“……!”
루시도 마찬가지였다. 어둠을 돌아보는 그녀의 얼굴이, 얼어붙듯 무표정해졌다.
뒤이어 어둠 너머로, 비척대는 인기척이 드러났다.
“…내 꼬리.”
쌍검을 움켜쥔 샬롯이었다.
생기를 잃은 눈으로 중얼대던 그녀가, 이안을 발견하고는 인상을 구겼다.
“내 꼬리…! 내놔…!”
그녀의 걸음이 빨라졌다.
루시의 눈빛이 타오르려는 찰나.
“넌 그냥 있어라.”
손을 들어 저지한 이안이, 단죄의 검을 뽑아 들며 일어섰다.
앞으로 나선 그가, 달려오는 샬롯을 우두커니 마주 보았다.
“……!”
악에 받친 듯 이안을 노려보던 샬롯의 눈빛이, 이윽고 흔들렸다.
내달리던 발걸음이 느려졌다.
이안에게 멀지 않은 거리까지 다가왔을 때는, 빙판을 걷는 것처럼 주춤대기까지 했다.
“…….”
이안을 바라보는 샬롯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움찔대며 일그러지는 얼굴.
자신의 꼬리를 잘라 낸 자에 대한 공포가, 그녀의 영혼에 각인되어 버린 것이다.
저벅.
이안이 한 걸음 내디딘 건 그때였다.
멈춰 선 샬롯이 몸을 떨었다.
전신의 털이 곤두선 것 같았다.
이안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에게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철그렁.
샬롯의 쌍검이 땅에 떨어졌다.
고양의 앞의 쥐처럼 몸을 떨던 그녀가, 이윽고 주저앉았다.
샬롯의 눈동자에 공포와 굴욕이 뒤섞였다.
그녀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차라리… 죽여라…!”
수인의 관점에선, 그녀가 공포를 이겨내고 목소리를 낸 것만으로도 감탄했을 일이었다.
물론 이안은 그런 사실 따위엔 관심도 없었다.
그저 그 앞에 멈춰 선 채, 공포에 젖은 주황색 눈동자를 내려다볼 뿐.
“그 전에.”
이윽고 이안이 입을 열었다.
샬롯이 움찔대며 그의 입을 주목했다.
“네 고용주를 내 앞에 끌고 와라. 말만 할 수 있는 상태면 돼. 그리고 다른 놈들은 전부 죽여. 놈들의 목도 가져와라. 빠짐없이, 전부.”
“……!”
샬롯의 눈이 커졌다.
이안은 추적자들을 멀찍이 뒤따르는 검은 마차의 존재를 이미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그가 느긋하게 말을 이었다.
“이왕이면, 마차도 챙겨 와. 타고 갈 게 필요하니까.”
“그러면… 꼬리를… 돌려줄 거냐…?”
샬롯이 더듬대며 물었다.
이안이 코웃음 쳤다.
“네 꼬리가 고작 그 정도의 가치밖에 없진 않을 것 같은데.”
“…….”
“네가 저지른 짓까지 생각하면, 더더욱 부족하지.”
“제… 기랄…!”
샬롯이 분한 듯 씹어 뱉었다.
하지만 이안의 명령에 따를 수밖에 없을 터였다.
꼬리를 되찾아야 하니까.
뿌득.
이윽고 샬롯이 자신의 쌍검을 부러뜨릴 것처럼 집어 들었다.
분한 표정과 달리, 그녀는 이안과 눈도 마주치지 못한 채 내뱉었다.
“내일… 돌아오겠다….”
샬롯이 도망치듯 어둠 너머로 몸을 날렸다.
검을 회수한 이안이 모닥불로 돌아왔다.
“방금… 뭐였어요…?”
멍한 얼굴로 지켜보던 루시가 물었다.
이안이 어깨를 으쓱였다.
“뒤처리는 깔끔하게 해야지.”
“그게 아니라……. …아니에요.”
루시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무렴 어떠냐는 생각일 터.
피식한 이안이 턱짓했다.
“자라. 네 말대로 미구엘한테 체온도 나눠 주고.”
“네. …감사해요, 이안 님.”
“뭐가.”
“전부 다요.”
그 말을 끝으로, 루시가 로브와 망토 뭉치 속으로 파고들었다.
그녀가 미구엘의 옆에 자리를 잡았다.
진짜 부녀지간 같군.
생각하며, 이안은 미구엘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여전히 창백한 얼굴.
하지만 호흡은 훨씬 안정된 상태였다.
‘…적어도 당장 죽진 않겠네.’
생각하며, 그는 미구엘의 행동을 다시 한 번 곱씹었다.
자기 희생이라니.
평소의 겁 많은 성격을 생각하면, 정말이지 어울리지 않는 선택이었다.
루시에게 그만큼 정이 든 것일까.
무슨 이유건, 숭고한 결단이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이타심이라는 개념조차 없는 이 세계에선 더더욱.
‘오래 살고 볼 일이라니까….’
피식댄 이안이 모닥불에 마차 파편을 몇 개 더 던져 넣었다.
비로소 지독한 두통과 현기증, 피로가 몰려 들었다.
온몸이 트럭에라도 치인 것처럼 욱신거렸다.
하지만 잠들 수는 없었다.
아무리 맹약을 맺었다 해도, 정체도 모르는 고대 망령의 권역에서 모두를 무방비 상태로 놔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개 차가운 맥주 한 잔 마실 수 있음 소원이 없겠다, 진짜….”
읊조리며, 이안은 배낭에서 꺼낸 육포를 억지로 입에 물었다.
그야말로 긴 하루였지만, 밤은 이제 시작된 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