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Dark Fantasy Villain RAW novel - Chapter 67
067화
루 사드 왕국, 글루미르.
왕국에서 두 번째로 크고 부유한 이 영지는 마족, 그것도 흡혈 일족이 지배하는 땅이었다.
글루미르 외곽에 위치한 미로 저택이 바로 그들의 본거지였다.
제국 양식으로 지은 3층짜리 대저택. 미로 저택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은, 저택에 딸린 거대한 정원이 미로의 형태로 조성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사실 정원만 그런 것은 아니었다.
저택 역시 보기와 달리 어둡고 복잡한 구조로 만들어져 있었다.
저택을 몇 번 방문해 본 이들 조차, 잠깐 방심하면 길을 잃을만큼.
물론 이 사실을 아는 이들은 대륙을 통틀어도 극소수에 불과했다.
미로 저택의 주인인 니그리안테 백작 부인과 마주 앉은, 후드를 눌러쓴 사내도 그중 하나였다.
“부인께서 잃어버린 어린 양은, 되찾으셨습니까?”
사내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로브에는 금실로 커다란 원이 수놓아져 있었다.
루 솔라의 상징.
하지만 백작 부인은 문양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흡혈 일족은 제국과 교단에 복속된 지 오래였다.
불로와 불사의 비밀을 연구하는데 협조하는 것을 대가로, 그들은 제국과 가장 가까운 변방 왕국에서 번영을 누리고 있었다.
눈앞의 이 남자는 바로 그 부분을 관리하는 자였다.
“애석하게도… 아직이에요. 사제님.”
결론부터 말한 부인이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홀리게 될 미소였지만, 사제라 부르는 눈앞의 이 남자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래서 오히려 더 흥미로운 존재가 되어가는 모양이더군요. 지금까지와는 다른 실험체가 될 거예요. 단지 요정이어서가 아니라, 그만큼 생에 대한 의지로 똘똘 뭉쳐 있는 것 같거든요.”
“시간이 더 필요하다는 말씀이시군요.”
부인은 긴장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더욱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이 자는 루 솔라의 광신도였다.
원한다면 미로 저택 전체를 빛으로 뒤덮어 버릴 수도 있는.
부인이 그의 정체와 얼굴을 밝히려 애쓰지 않는 이유이기도 했다.
때로는 모르는 것이 오히려 안전한 법이었다.
“얼마 전, 벨 론데에서 그 아이의 행적을 발견했어요. 일족의 심판자를 파견했으니, 오래 걸리지 않을 겁니다.”
“…부인께는 다행스럽게도, 우리 계획에 작은 차질이 빚어진 상태입니다.”
우리가 정확히 누구를 뜻하는지는 부인도 알지 못했다.
다만 그들의 계획은 얼핏 알고 있었다.
“변방에 더 짙은 어둠이 깃들게 할, 그 계획 말씀이시군요.”
“빛이 더 밝고 찬란하게 빛나기 위한 계획이지요.”
사내의 정정에 부인은 미소로 화답했다.
“예상치 못한 변수가 있었지만, 달라질 것은 없을 겁니다. 여신께선 예상할 수 없지만 감당할 수 있는 시련만 주시는 법이니까요.”
“부디 잘 해결되시길 바라요.”
내뱉으며, 부인은 가장 미친 건 광신도가 아니라 루 솔라 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 역겨운 빛의 여신은, 신도들이 그저 자신을 열성적으로 섬기기만 한다면 무슨 짓을 벌여도 개의치 않는 것 같았으니까.
그게 아니라면 눈앞의 이 사제에게 그토록 강대한 신성을 내려줄 리가 없었다.
“그리될 겁니다. 부인께서도 그러시길 바랍니다. 반년의 기한을 더 드리겠습니다.”
내뱉은 사제가 일어섰다.
“이번이 마지막입니다. 다음엔… 새로운 양이라도 준비하셔야 할 겁니다.”
“기꺼이.”
사제가 몸을 돌렸다.
부인의 입가에 맺힌 미소는, 그가 문을 나선 순간 씻은 듯이 사라졌다.
서랍에서 소녀의 피로 담근 혈주를 꺼내며, 그녀가 읊조렸다.
“예상치 못한 변수라….”
사실, 그녀는 사제가 말한 변수가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아겔 란의 구원자이자 벨 론데의 학살자. 그저 이름만이 알려진 출신 불명의 용병.
일족이라 부르고 싶지도 않은, 그 이종족 실험체 계집의 행적을 추적하다 알게 된 사실이었다.
“…부디 더 어지럽혀 주길.”
저들이 일족의 귀중한 진혈을 탐낼 여력이 없도록.
진심을 담아 기원하며, 부인은 혈주를 단숨에 입에 털어 넣었다.
***
내쉬는 숨결에 입김이 서렸다.
의자에 축 늘어진 이안의 얼굴에는 홀가분함이 감돌았다.
이제 몇 시간이면 화로의 사원에 도착할 터였기 때문이다.
루시와 미구엘을 그 안에 넣어주기만 하면. 이 길고 긴 의뢰도 마침표를 찍게 되리라.
그리고 나서는 곧바로 인근의 마을부터 들를 생각이었다.
재정비와 휴식도 필요했지만, 뜻밖에도 가장 급한 건 목욕이었다.
몸에서 하수구 냄새가 났으니까.
“아무래도, 라르무트에선 하비에르를 믿지 않은 모양이군.”
문득 샬롯이 내뱉었다.
이안이 눈동자만 움직여 그녀의 뒤통수를 올려다보았다.
“알아듣게 말해.”
“기사들이 기다리고 있다.”
“뭐라고…?”
자세를 바로 한 이안의 미간이 이내 구겨졌다.
관도를 따라 이어진 언덕 중턱에, 모닥불을 피운 채 기다리는 판금 갑옷 차림의 사내들이 눈에 들어왔다. 총 넷. 둘은 기사였고 둘은 종자로 보였다.
“저자들이 우릴 기다리는 건진 어떻게 알고?”
그들을 보고 본능적으로 어깨를 움츠린 미구엘이 물었다.
샬롯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문장이 보이지 않나? 벼락 기사단이다.”
“벼락… 기사단?”
“라르무트의 친위 기사단이지.”
“이런 염병할… 다 끝난 줄 알았더니.”
미구엘이 탄식했다.
이안의 미간도 절로 구겨졌다.
라르무트는 루시가 루 엔테르의 은총을 받은 걸 알고 있었다.
그러니 그들의 행선지를 예상하는 것도 어렵지 않았을 터. 소식을 듣자마자 만일을 대비해 최정예 기사들을 파견한 모양이었다.
길목을 지키고 있다가 사원에 도착하기 전에 루시를 가로챌 생각이리라.
루시를 손에 넣으려는 의지가 강한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까지 철저할 줄이야.
‘역시 통수는 방심한 순간에 맞는 건가….’
이안은 게임에서 벼락 기사단과 싸워 본 적이 있었다.
미쳐버린 채로도 마경이 된 성을 지키던 중간 보스들.
당연히 끔찍하게 강했고, 패턴도 까다로웠다.
숫자는 그때보다 훨씬 적지만, 그렇다 해도 강할 게 분명했다.
지친 상태로 상대한다면 더더욱.
마차를 발견하고 준비하기 시작한 기사들을 눈에 담던 샬롯이 이윽고 웃음 지었다.
“멋지군. 벼락 기사단이라니.”
“지원군이 와서 신나셨나 보군.”
미구엘이 비아냥댔다.
샬롯이 무슨 개소리냐는 듯 그를 돌아보았다.
“저들이 날 살려줄 것 같나?”
“……? 멋지다며.”
“멋진 죽음이 될 거란 얘기다. 이 꼴로 오래 사느니, 저들과 싸우다 죽는 게 훨씬 아름답겠지.”
“…….”
“저들은 제국에서도 손꼽히는 실력자들이다. 게다가 회색 마탑의 정수가 담긴 무구로 무장하고 있지. 결말은 정해져 있겠지만, 아름다운 전투가 될 거야.”
미구엘이 말문이 막힌 듯 입만 뻐끔댔다.
이안의 코웃음이 이어졌다.
누구 마음대로 결말을 정해?
“싸워 보기도 전에 죽을 생각부터 하다니. 꼬리가 잘리더니 야성도 잃었나 보군.”
샬롯이 발끈한 표정으로 그를 돌아보았다.
“내 야성은 무사하다! 사실을 말했을 뿐이야…!”
“제아무리 강자라도 목이 잘리거나 심장이 터지면 죽어.”
천천히 목을 풀면서, 이안이 샬롯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게 내가 아는 사실이다.”
“…….”
이번엔 샬롯이 말문이 막힌 표정이 됐다.
이안을 바라보던 그녀가, 이윽고 수치스러운 듯 시선을 돌렸다.
이안의 눈빛은 전혀 삶을 포기한 자의 그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투사의 눈빛.
“마차를 멈춰라!”
그때 우렁찬 외침이 울려 퍼졌다.
말에 올라탄 기사들이 옆구리에 장창을 끼운 채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단 둘뿐임에도 이안의 육감이 경고를 보냈다.
‘졸라게 세다 이거지.’
이안은 몸을 일으키며 내뱉었다.
“미구엘, 전투가 시작되면 우회해서 언덕을 넘어라. 결과는 신경 쓰지 말고 사원으로 가.”
“아, 알겠수….”
기사의 목소리가 재차 이어졌다.
“빈손으로 돌아가지 않게 해 준 네놈들의 저력에 찬사를 보내마! 하지만 여기까지다! 순순히 영애를 넘긴다면 고통 없는 죽음을 약속하지!”
거참 기사다운 짓거리군.
이안은 대꾸도 하지 않고 마차 옆으로 뛰어내렸다.
그의 뒤로 쌍검을 뽑아 든 샬롯이 몸을 낮춘 채 착지했다.
마차 앞으로 나서는 둘의 모습에 기사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명예로운 죽음을 원하는 거군.”
생각을 바꾼 듯 말에서 내린 그들이 창을 던지고는 검을 뽑았다.
파치칫, 갑옷을 타고 번진 푸른 스파크가 검을 타고 흘렀다.
이안과 샬롯의 전신에도 바람이 휘몰아쳤다.
거리가 좁혀짐에 따라 기사들의 걸음도 빨라졌다.
이윽고 양측이 서로를 향해 질주하기 시작했다.
충돌이 임박한 순간.
화르르르-!
“……?!”
그들 사이로 샛노란 불의 장벽이 피어올랐다.
눈을 치켜뜬 이안이 멈춰 서고,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샬롯이 이안을 돌아보았다.
네가 한 거냐는 눈빛.
이안은 대답 대신 시선을 돌렸다.
이건 마법이 아니었다.
신성력을 연료로 타오르는, 성화.
권능을 발현한 자를 찾아내는 건 어렵지 않았다.
언덕 정상에 신성력을 머금은 기수가 팔을 치켜들고 있었으니까.
그 좌우로 서른이 넘는 기수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전투를 멈추시오!”
사제복을 걸치고 손에는 메이스를 움켜쥔 자들이 언덕을 달려 내려오며 소리쳤다.
‘루 엔테르의 사제들이군.’
이안이 검을 늘어뜨렸다.
사제들은 반으로 나뉘어 절반은 마차를 호위하고, 절반은 두 기사를 포위했다.
사제 중 하나가 말했다.
“무기를 거두시오. 여긴 타오르는 여신의 권역이오.”
치칫- 파치칫-
기사들은 여전히 푸른 전격이 맺힌 검을 움켜쥔 채 사제들을 돌아보았다.
“우린 라르무트 영공 전하의 명을 받들어 이곳에 왔소. 그대들이 여신을 섬기는 사제들이라 하나, 무관한 공무를 방해할 권리는 없소.”
“무관하지 않소. 여신의 은총을 받은 아이가 관계된 이상.”
“그대들이 우리를 염탐하는 걸 알면서도 놓아둔 것은, 어디까지나 자비를 베푼 것이었소. 하나, 우리가 이대로 돌아간다면 영공 전하의 진노가 사원으로 향할 것이오.”
노골적인 협박.
그에 대답한 건 사제가 아니었다.
“그대들은 영공께서 왜 그대들을 사원이 아닌 이런 장소에서 기다리게 한 것인지 까진 헤아리지 못한 모양이군요.”
여인의 목소리.
사제들이 간격을 벌리고, 로브를 눌러쓴 여사제가 앞으로 나섰다.
성화를 일으킨 장본인.
그녀가 눌러 쓴 후드를 벗으며 내뱉었다.
“가서 영공께 전하세요. 루 엔테르를 섬기는 체르윈 아스트레이아가 기꺼이 기다리고 있겠다고.”
금발과 붉은 눈이 드러났다.
“아, 아스트레이아……!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마마…!”
탄식한 기사들이 재빨리 한쪽 무릎을 꿇었다.
이미 검에 맺힌 전격은 자취를 감춘 후였다.
눈앞의 이 여사제가 제국 황실의 직계 혈통이었기 때문이다.
이안은 다른 의미로 놀라워하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화로의 성녀. 실물을 이렇게 빨리 보게 될 줄은 몰랐는데.’
그가 게임에서 화로의 사원에 들른 3 챕터 중반부, 그녀는 이미 목숨을 잃은 상태였다.
꺼져가는 성화를 되살리기 위해 화로의 불씨에 자신의 몸을 바친 것이다.
덕분에 화로의 불길은 되살아났지만, 사제들은 광기에 빠졌다.
성녀의 유지를 이어받는다며 인간을 바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 제물 의식의 종지부를 찍은 건, 물론 이안이었다.
그는 모든 사제를 죽이고 화로의 성화를 꺼뜨렸다.
루 엔테르의 신격을 떨어뜨린 것이다.
대륙을 더 깊은 어둠으로 몰아넣은 결과라는 사실은, 물론 말할 것도 없었다.
‘…이젠 사라진 미래겠지만.’
그사이, 기사들이 물러났다.
루시와 미구엘이 사제들의 호위를 받으며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다가오는 가운데, 체르윈이 말에서 내렸다.
양손을 가슴 앞에 모아 쥔 그녀가 깊이 고개를 숙였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불씨의 운반자여. 화로의 사원이 갚을 수 없는 큰 은혜를 입었습니다.”
상대의 종족과 신분 따윈 전혀 개의치 않는 정중한 태도였다.
이윽고 그녀의 시선이 루시에게로 향했다.
“반갑구나. 오래 기다렸다.”
“처음 뵙겠습니다. 루시페르 애쉬 리우렐이에요.”
루시가 깍듯이 인사했다.
루시페르라고…? 생각하며 이안이 미구엘과 시선을 교환하는 사이, 그녀가 덧붙였다.
“저는 이제 바로 사원으로 가게 되나요?”
“그래. 너는 나와 함께 생활하며 공부하게 될 거란다. 장차 내 역할을 이어받게 될 테니까.”
“…하지만 저는, 마법을 배우고 싶은걸요.”
“놀랍게도, 타오르는 여신의 신성은 적색 마법과 비슷한 부분이 많단다. 나도 여신의 뜻을 섬기기 전엔 적색 마법사였어. 중요한 건, 네가 내면의 열정을 잃지 않는 것이지.”
상황은 빠르게 정리됐다.
일행은 다시 마차에 올랐고, 사제들의 호위 아래 사원으로 향했다.
미구엘이 마차와 나란히 걷는 체르윈을 문득 돌아보았다.
“그, 그런데 저희가 오고 있다는 건 어떻게 아셨습니까요?”
“한 달여 전쯤, 여신께서 신탁을 내리셨습니다. 화로의 불씨가 운반되리라고요.”
“신탁이요…? 여신께서 직접…?”
미구엘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주 드문 일이었기 때문이다.
이안은 실소를 삼켰다.
한 달여 전이라면, 그가 퀘스트를 받은 시점과 겹쳤으니까.
‘어지간히 절박했던 모양이군. 하긴, 신격이 추락하고 있었을 테니.’
“제국의 기사들이 마을에 머무는 것을 보면서, 저들이 불씨를 가로채려 한다는 것을 눈치채고 있었죠. 축객령을 내릴 명분이 없어 지켜보기만 했을 뿐. …늦지 않아 다행입니다.”
고개를 끄덕이던 미구엘이 다시금 눈치를 살폈다.
잠시 머뭇거린 그가 덧붙였다.
“사원에 들어가면, 저랑 루시는 당분간 나올 수 없는 겁니까?”
“견습 기간에는 사원 외부로 나서지 못하는 것이 철칙이니까요.”
“어… 그럼… 사원에는 내일 가고, 마을에 먼저 들르면 안 되겠습니까?”
“……?”
체르윈이 고개를 갸웃하는 가운데, 미구엘이 식은땀을 흘리면서도 꿋꿋이 하려던 말을 이어나갔다.
“이 긴 여정이 끝났는데, 술 한 잔도 하지 않고 헤어질 수는… 없어서 말입니다…!”
이안은 헛웃음을 지으며 그를 돌아보았다.
이 와중에도 회식을 챙긴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