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Dark Fantasy Villain RAW novel - Chapter 68
068화
“…….”
체르윈이 눈을 끔뻑이는 가운데.
“그렇다면, 제가 호위하며 마을로 모시겠습니다!”
“저도…! 새 불씨를 모시겠습니다!”
득달같이 돌아본 사제들이 연달아 소리쳤다.
거의 모든 시간을 사원에서 보내는 그들의 삶은, 기본적으로 금욕적일 수밖에 없었다.
화로가 꺼져 가던 요즘은 더더욱.
사제들의 뜨거운 눈빛에, 체르윈이 결국 웃음 지었다.
“그럼, 다 같이 가도록 하죠.”
***
화로의 사원에 인접한 마을은 흔히들 대장장이 마을이라 부르는 곳이었다.
루 엔테르의 가호를 받아 따듯한 편인 데다가 마물의 습격도 거의 없었기 때문에, 사원이 쇠퇴하고 있는 지금도 상당한 규모가 유지되고 있었다.
이안이 기억하던 살풍경한 마을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는 광경.
어쨌건 덕분에 주점은 상당한 규모를 자랑했다.
이안을 따라 들어온 샬롯을 보고 놀란 표정을 짓던 마을 사람들은, 뒤따라 사제들이 우르르 들어서자 알아서 자리를 비켜 줬다.
곧 음식과 술이 자리에 깔렸다.
사제들은 기다렸다는 듯 앞에 놓인 것들을 먹어 치우기 시작했다.
축제 분위기가 따로 없었다.
루 엔테르의 사도가 될 불씨가 나타났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몰락하던 교단에서 루시의 존재는 희망의 등불이나 다름없었다.
‘난쟁이들이랑 섞여 살면서 수인을 보고 놀라다니….’
그 한복판에 묵묵히 앉은 이안은 술잔을 입에 가져가며 실소했다.
그의 눈엔 난쟁이나 수인이나 별반 차이가 없었다.
“어떠시오?”
그의 건너편에 앉은 미구엘이 묘한 눈빛으로 물었다.
술맛을 뜻하는 것이리라.
“좋군.”
이안이 진심으로 내뱉었다.
식도가 탈 것 같은 독주였지만, 오히려 그래서 마음에 들었다.
그는 높은 저항력과 정신력 덕분에, 어지간한 술로는 취기조차 느낄 수 없었으니까.
“북부의 술은 다 그 정도요. 맥주도 나쁘진 않지만, 종종 그리웠단 말이지.”
미구엘이 술을 홀짝이며 말했다.
그의 볼은 벌써 발그레하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미구엘은 왜 북부를 떠났던 거예요?”
그의 곁에서 따듯한 수프를 입에 넣던 루시가 문득 물었다.
미구엘이 눈을 끔뻑였다.
“갑자기 그런 게 왜 궁금하냐?”
“한 번도 들은 적이 없는 것 같아서요.”
“별거 아닌 얘긴데.”
“그래도요. 궁금해요.”
“으음… 그렇다면야. 나는 북부의 작은 마을 출신이었다. 그때는 아직 마족과의 전쟁이 한창이던 시기지….”
이안은 별로 궁금하지도 않은 미구엘의 과거 이야기를 귀에 담으며 천천히 음식을 음미했다.
질긴 고기, 그리고 정체 모를 건더기가 떠다니는 수프였지만 지금은 진수성찬이 따로 없었다.
“…검은 벽이 미구엘의 고향을 앗아간 거네요.”
“그런 셈이지만. 떠난 시간이 길어서 그런가, 지금은 그냥 북부 자체가 고향처럼 느껴지는군.”
이안이 식사를 끝낸 건 미구엘의 과거사가 끝을 맺을 무렵이었다.
루시는 안타까운 눈빛이었지만.
이안에겐 별다른 감흥을 주지 못했다.
애초에 여긴, 비극적인 사연 하나쯤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이 오히려 드문 세상이었다.
‘심지어 난 다른 세상에서 왔다고….’
미구엘이 이안을 바라본 건 그때였다.
“그래서… 형씨는 어디로 가실 거요? 전에 말씀하신 대로, 곧장 제국으로 가실 거요? 그러니까, 직할령으로?”
“글쎄….”
“북부에 들른 김에 트라벨가로 가시는 건 어떻소? 형씨 능력이면, 거기서 떼돈을 벌 수 있을 텐데.”
트라벨가는 북부 자치령의 수도였다. 이안의 옆에 앉은 샬롯이 귀를 쫑긋댔다.
그가 어딜 가든 따라다녀야 하는 만큼 신경이 쓰이는 것이리라.
“트라벨가도 들르긴 해야지.”
술잔을 놓은 이안이 왼손 손아귀를 내려다보았다.
“그 전에 먼저 끝내야 할 일이 있지만.”
“엥…? 할 일이 남으셨다고?”
루시는 물론, 그녀의 옆에 앉은 체르윈까지도 이안을 바라보았다.
잠시 고민한 이안이 내뱉었다.
“우리가 지나온 숲, 북부 깊은 곳까지 이어져 있는 모양이더군. 거기 도사린 놈과 맹약을 맺었어. 그러니까, 놈을 찾아가야 돼.”
“뭐라고…? 그 얘길 왜 지금까지 안 하셨소?”
“별거 아니니까, 신경 꺼라.”
“아니, 고대의 존재와 맹약을 맺은 게 어떻게 별 게 아니오? 그게 형씨한테 원하는 게 뭘 줄 알고.”
다들 경악한 표정이었다.
샬롯조차 이안을 돌아볼 정도.
하지만 이안은 여전히 심드렁했다.
“날 원하겠지. 상관없어. 죽이면 그만이니까.”
어차피 이안이 자신을 찾아올 때까지 환영을 보내 댔을 놈이었다.
덕분에 버려진 땅을 평화롭게 지나쳤으니, 손해 본 것도 없었다.
게다가 이안이 맺은 맹약의 내용은 놈을 찾아가는 것뿐이었다.
일단 만나기만 하면 어떻게든 그를 손에 넣을 자신이 있다는 의미일 터였다.
물론 그런 주제에 자신의 정체도 위치도 알려 주지 않은 건 좀 열 받았지만.
그놈의 케케묵은 골통을 박살 내 주면 씻은 듯이 후련해 지리라.
“버려진 땅에서부터 북부까지 이어진 숲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체르윈이 물었다.
이안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가 턱을 만지며 읊조렸다.
“서고를 찾아보면 관련된 자료가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혹, 다른 단서는 없으신지요?”
“있소.”
이안은 왼손의 장갑을 벗었다.
그의 손아귀에 흐릿한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체르윈이 그 문양을 뚫어질 듯 응시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을에 얼마나 더 머무실 건가요?”
“이틀. 길면 사흘.”
“그 안에 최대한 알아보도록 하죠. 은혜를 조금이라도 갚을 수 있다면, 더한 도움이라도 드리고 싶군요.”
“뭐든 거절하진 않겠소.”
“그럼 내일 사원에 들러 주십시오. 외부인의 입장을 허락하지 않은 지 오래되었지만, 여러분들은 예외로 두겠습니다.”
“뭘 주시려고…?”
“화로의 축복을 청하겠습니다.”
“……!”
이안의 눈빛이 순간 번뜩였다.
게임에선 냉기 저항과 체력 회복 속도를 상승시켜 주던 루 엔테르의 축복.
북부의 춥고 삭막한 야전을 누비는 데 적잖은 도움이 될 터였다.
“떠나기 전에 부탁드려도 괜찮겠소?”
“물론입니다. 여신께서도 불씨의 운반자인 이안 경에게는 축복을 아끼지 않으실 겁니다.”
이안이 옆을 까딱였다.
“여기 이 녀석도 부탁드리겠소.”
“……!”
샬롯이 놀란 듯 눈을 치켜뜨는 가운데, 체르윈이 미소 지었다.
“물론이죠.”
고개를 끄덕인 이안이 다시 술잔을 입에 가져갔다.
목이 타는 듯한 감각에 기분 좋은 숨을 내쉰 그가, 이윽고 자신을 바라보는 샬롯을 돌아보았다.
“뭐.”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재빨리 시선을 거둔 샬롯이, 문득 혀로 입가를 핥고는 내뱉었다.
“전에도 그런 고대의 존재와 싸워 본 적이 있는 거냐? 아주 익숙해 보이는데.”
“전에도? 푸하.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군!”
대답은 미구엘 쪽에서 나왔다.
눈이 설핏 풀린 미구엘이 이안을 턱짓하며 소리치듯 말했다.
“이 형씨가 내 눈앞에서 쳐죽인 고대 마물과 망령, 타락자의 숫자만 해도 수십은 가뿐하게 넘는다고. 괜히 아겔 란의 구원자라고 불리는 줄 알아?”
“……!”
샬롯의 귀가 뾰족해졌다.
미구엘이 실실댔다.
“왜. 넌 그런 종류의 괴물들은 상대해 본 적은 없는 모양이지?”
“…제기랄.”
시선을 돌린 샬롯이 술잔을 들었다. 애송이 취급을 당해도 할 말이 없다는 게 수치스러운 모양.
“앞으론 지긋지긋하게 겪게 될 거다. 난 그런 놈들 전문이니까.”
심드렁하게 내뱉은 이안이, 무심한 눈길로 샬롯을 돌아보았다.
“물론 너도 목숨 걸고 싸워야 할 거야. 내게 진 빚을 다 갚아야, 꼬리를 되찾을 수 있을 테니까.”
“……!”
이안을 마주 보는 샬롯의 눈빛이 파르르 떨렸다.
어이없게도, 그녀의 눈에 번지는 건 기대감이었다.
혀로 입술을 축인 샬롯이 이윽고 내뱉었다.
“그것만으로도 언젠가 꼬리를 돌려준다면. 기꺼이.”
…확실히 제정신은 아니라니까.
내심 실소하면서도, 이안은 말없이 술을 입에 털어 넣었다.
어차피 피할 수 없으니, 차라리 즐기는 게 나을지도 몰랐다.
루시와 미구엘, 그리고 사제들은 다음 날이 되어서야 사원으로 향했다.
이안은 함께 가자는 부탁을 거절하고 마을에 남았다.
이곳이 여정의 종착지인 저들과 달리, 그는 마을에서 해야 할 일이 여럿 남아 있었다.
***
샬롯이 볼 때, 이안은 확실히 다른 인간들과는 다른 별난 구석이 있었다.
꼬박 한나절을 자고 일어나 가장 먼저 한 행동이 목욕이라는 것부터가 그랬다.
심지어 그는 한 시간이 넘게 공들여 몸을 씻었다. 뜨거운 물을 몇 번이나 돈을 들여 바꾸면서.
그녀가 아는 인간들은, 심지어 귀족이라 할지라도 씻는 것에 저렇게까지 집착하지 않았다.
어차피 다시 더러워질 텐데.
그 후로 이안은 마을을 돌며 필요한 물건을 샀다.
북부의 추위를 견디기 위한 방한복과 각종 병장기 위주였다.
상당히 많은 양이었고, 굳이 가격을 흥정하지도 않았다.
이안이 돈이 많다는 사실도 놀라웠지만, 진짜 놀라운 건 그때부터가 시작이었다.
“그 많은 걸 어떻게 들고 가려는 거지? 마차에 실을 건가?”
숙소로 돌아와 물건을 분류하는 이안을 보며, 샬롯이 물었다.
이안은 대답 대신 허공에서 물건을 사라지게 만드는 마법을 아무렇지도 않게 선보였다.
“어떻게 한 거지…?”
“잘.”
“…….”
무성의한 태도에도, 그녀의 의문은 그리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이건 네 거다.”
이안이 곰 가죽을 덧대 만든 망토와 갑옷 안에 입을 방한 장비들을 그녀에게 던져 준 것이다.
“내… 거라고? 왜…?”
샬롯은 당황한 나머지 되물었다.
자신은 그의 노예나 다름없는 데다, 보통 인간들은 수인이 추위를 타지 않는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실제로도 어느 정도는 그랬지만.
“왜라니? 네가 얼어 죽으면 그만큼 내가 할 게 늘어나는데, 당연한 거 아닌가?”
“…….”
다음날도 이안은 그녀를 끌고 다니며 식량을 비롯한 물자들을 차곡차곡 채워 넣었다.
그 과정에서 샬롯이 주목을 받은 건 당연한 일이었다.
“예비 마족 년이라니, 불길한 걸 데리고 다니는군.”
“이미 예비가 아닌지도 모르지. 저런 것들은 죄다 죽여서 가죽을 벗겨 버려야 되는데.”
이런 시선과 대우는 그녀에게는 더없이 익숙한 것들이었다.
천칭 상단의 경호병이 된 후로 대놓고 말하는 자들은 줄었었지만, 본질적으론 달라진 적이 없었다.
하비에르 같은 몇몇 괴상한 작자들을 제외하고는, 인간들은 언제나 그녀를 특이한 노예나 불길한 마족으로 취급했다.
물론 법은 언제나 인간들의 편.
보는 눈이 많을 땐 무시가 답이었으므로, 샬롯은 늘 그렇듯 보란 듯이 고개를 빳빳하게 든 채로 신경도 쓰지 않았다.
하지만 이안은 아니었다.
“수인 가죽은 특히 질기고 따듯하다던데. 이봐, 비싸게 쳐 줄 테니 우리에게 넘기는 게 어때?”
상인 중 하나가 그렇게 제안한 순간, 그의 얼굴 한복판에 곧바로 주먹을 꽂아 버린 것이다.
그리고는 기다렸다는 듯 달려드는 마을의 건달들을 전부 다 묵사발로 만들어 버렸다.
망치나 집게 따위를 집어 든 마을 사람들이 모여들었지만, 신경도 쓰지 않는 듯한 태도였다.
오히려 그는 보란 듯 마지막 건달의 팔을 부러뜨리고는 마을 사람들을 돌아보았다.
“또 수인 가죽 필요한 사람?”
나서는 사람은 물론 없었다.
이안은 아무렇지도 않게 남은 준비를 마쳤다.
그리고는 그 행동에 대해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마차를 몰고 마을을 떠날 때까지.
“어제, 왜 그런 거지?”
결국, 먼저 물은 건 샬롯이었다.
“어제…?”
“그것들 두들겨 팬 것 말이다.”
“아. 그거. 난 개소리를 그냥 들어 주는 편이 아니라서. 그게 왜?”
샬롯은 진심인가 싶어 그를 돌아보았다.
“…정말 그게 다 개소리라고 생각하는 거냐?”
“내가 죽인 타락자는 죄다 인간이었다. 그렇다고 인간을 전부 예비 타락자라고 부르진 않지.”
평소처럼 의자에 기대 있던 이안이 심드렁하게 덧붙였다.
“너희 수인도 그렇겠지.”
“…….”
샬롯은 눈을 끔뻑였다.
솔직히 말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처음처럼 아주 굴욕적이고 비참한 상황이 이어질 줄 알았건만.
요 근래 이안의 행동을 돌아보면, 그저 그녀를 시종쯤으로 여기는 것 같았다.
그리고 심지어, 그게 전혀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자꾸 그에게 빚을 지는 듯한, 그걸 넘어 은혜를 입는 것 같은 기분마저 드는 것이다.
‘설마, 이것도 꼬리를 잘린 여파인가…?’
“다음부턴 네가 알아서 처리해라. 내 귀에 개소리 들리지 않게.”
이안의 말에 움찔, 귀를 떤 샬롯이 이윽고 다시 앞을 바라보았다.
“…그러지.”
그들은 화로의 사원에 도착했다.
체르윈과 제법 긴 대화를 나눈 그는, 사원 중앙에 놓인 거대한 화로 앞으로 샬롯을 데려갔다.
그리고 그녀에게도 정말 화로의 축복이 내렸다.
몸속 어딘가에 열기가 들어찬 것 같은, 나쁘지 않은 느낌.
샬롯이 그 감각을 내심 즐기는 사이, 이안은 마중 나온 루시, 미구엘과 작별 인사를 나눴다.
루시는 이안을 꼭 껴안았다.
심지어 미구엘도 그랬다.
“수련이 끝나면 제국으로 갈 거예요. 그때 다시 만나요. 이안 님.”
“또 봅시다. 형씨.”
질색하듯 미간을 찌푸리면서도, 이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언젠가는.”
루시와 미구엘은 하고 싶은 말이 많아 보였지만, 이안은 길게 대화를 나누지 않고 마차에 올랐다.
마부석에 탄 샬롯이 물었다.
“어느 방향으로 갈 거지?”
“북쪽으로.”
마차가 출발했다.
뒤에서 루시와 미구엘이 뭐라 소리쳐 댔지만, 이안은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저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머금은 채, 의자에 깊이 몸을 묻을 따름이었다.
그게 떠돌이의 방식이라는 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