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Dark Fantasy Villain RAW novel - Chapter 70
070화
샬롯이 어둠 너머로 사라졌다.
그녀는 살기를 드러내거나 무기를 뽑아 들지도 않았다.
그저 땅에 깔리듯 낮은 자세로, 미끄러지듯 소리 없이 달려 나갔다.
“…….”
홀로 남은 이안은 콧잔등을 긁적였다.
오감을 예민하게 일깨워 그녀의 기척을 쫓았지만, 벌써 어디로 간 건지 전혀 알 수 없었다.
‘확실히, 전사보다는 암살자가 어울리는데. 본인은 왜 싫어하는지 모르겠군.’
생각하며, 이안은 구운 육포를 입에 물었다.
요 며칠간 샬롯이 보이는 이상 행동에 완전히 적응한 그였다.
여전히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그에게 적의를 드러내는 것도 아니었고, 오히려 반대로 마음에 들고 싶어 애쓰는 것처럼 보였기에 그냥 놓아두기로 한 것이다.
적어도 요령을 피우려고 눈치를 보는 것보단 나았으니까.
‘아무리 그래도, 이 야밤에 혼자 사냥이라니….’
키우는 고양이가 자꾸 벌레를 잡아다 머리맡에 두고 간다던, 과거 친구의 말이 문득 떠올랐다.
설마하니 그녀가 노리는 게 벌레는 아닐 테지만, 헛웃음이 나오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쩌엉-!
저 멀리서 날카로운 굉음이 이어진 건 그때였다.
짐가방에 느슨하게 기대 있던 이안이 상체를 일으켰다.
소리가 들린 방향을 돌아보았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의 가시 범위를 넘어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었다.
콰직-! 쩌엉- 콰르르-
심상치 않은 소리가 이어졌다.
그리고 빠른 속도로 옆으로 이동하면서 계속해서 이어졌다.
이안의 시선이 소리가 움직이는 방향을 따라 돌아갔다.
저 멀리, 어둠을 머금은 앙상한 나뭇가지의 그림자가 들썩이고, 한밤의 소란에 놀란 북부의 날짐승들이 소스라치게 날아올랐다.
이안의 시선이 이윽고 모닥불 옆의 마차에 가로막혔다.
‘…혼자서도 괜찮은 거 맞나.’
전력 이탈될 일은 없어야 하는데.
생각하며, 이안이 옆에 풀어 둔 검집을 쥔 순간 거짓말처럼 소음이 멎었다.
상대적으로 더 무겁게 느껴지는 적막.
이윽고 절뚝거리는 발소리와 함께, 뭔가를 질질 끌고 오는 듯한 소리가 마차 뒤편에서 가까워졌다.
코를 스치는 피 냄새.
이안이 미간을 찌푸리는 가운데, 샬롯의 모습이 천천히 드러났다.
“…조금 늦었다.”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은 것과 달리, 그녀의 얼굴에는 귀 아래부터 턱까지 할퀸 듯한 상처가 길게 새겨져 있었다.
철철 흐른 피가 주위의 털을 적시며 응고되는 중이었다.
한쪽 팔의 보호대도 날아갔고, 그 아래의 팔에도 긁힌 잔 상처가 남았다.
갑옷의 마석들이 흐릿하게 일렁이는 걸 보니 마력을 거의 다 소모한 모양.
하지만 이안은 그녀의 상태를 먼저 지적하지 않았다.
“…호오?”
그녀의 손아귀에 머리채를 잡힌 채 축 늘어져 있는 시신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피 묻은 은발과 헐벗은 가녀린 몸.
낯이 익은 실루엣이었다.
“널 따라오던 계집이다. 괴상한 짓거리를 하더군. 도망치려 해서 끝까지 따라가서 죽였다.”
내뱉은 샬롯이 그의 앞에 시체를 툭 던졌다.
시신의 뒤통수에 단검이 자루만 보일 정도로 깊숙이 박혀 있었다.
헝클어진 은발 사이로, 미간에 단검 날이 삐죽 튀어나온 얼굴이 드러났다.
“테사이아….”
이안이 눈을 가늘게 뜬 채 내뱉었다.
얼굴의 피를 손으로 훑어 날름대면서, 샬롯이 곁에 주저앉았다.
“아는 계집인가?”
“그래. 봐서 알겠지만, 마족이다.”
“마족…?! 마족이었다고?”
샬롯의 주황색 눈이 커졌다.
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흡혈 요정이지. 전에 아겔 란에서 잡혀 가는 걸 구해 줬었다. 내 목을 물어뜯으려 했지만.”
“…그럼, 그 서부 변방부터 여기까지 따라왔다는 건가.”
“그런 모양이군. 또 만나자더니.”
이안은 아겔 란에서 미구엘에게 들었던 소문을 떠올렸다.
사냥개의 피를 빨던 괴인의 소문.
그때도 설마 하긴 했었는데.
‘북부까지 포기하지 않고 따라오고 있었을 줄이야.’
샬롯이 만족스럽다는 듯 가르릉댔다.
“그럼 그렇게 오래 눈치채지 못한 위협을 내가 처리한 거군. 심지어 마족을.”
“그래. 네가 얼마나 위험한 짓을 한 건지 이제 알겠지.”
“별거 아니었다. 이 정도는 하룻밤이면 멀쩡해질 거야.”
누가 전사 아니랄까 봐, 허세는.
코웃음 친 이안이 가방에서 천과 붕대를 꺼냈다.
그가 얼굴에 붕대를 감아 주기 시작하자, 샬롯이 눈을 치켜뜬 채로 굳어졌다.
“다음부턴 혼자서 날뛰지 마라. 네가 죽으면 내 손해야.”
덧붙인 말에, 굳어져 있던 샬롯이 황급히 시선을 피했다.
“그, 그럴 일은 없다. 괴상한 계집이긴 했지만, 내 적수는 아니었어. 죽이기 어렵지도 않았고.”
“그거야 죽인 게 아니니까 그렇지.”
“뭐…?”
샬롯이 휙 그를 돌아보았다.
그럴 리 없다는 듯한 시선.
이안은 붕대를 더 꽉 압박해 감으며, 널브러진 테사이아의 시신을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미간에 삐죽 튀어나와 있던 단검 날이, 어느새 보이지 않을 정도까지 밀려나고 있었다.
“뱀파이어는 이 정도로 죽지 않아. 목을 자르거나 몸을 양단해도 살아 있지.”
“…….”
붕대질을 마무리한 이안이, 굳어 있는 샬롯의 팔에도 천을 대고 붕대를 감으며 말을 이었다.
“마족이란 놈들은 대부분 목숨줄이 엄청나게 질기지. 네가 저 단검을 뽑은 채로 가지고 왔다면, 끌고 오는 도중에 기습당했을 거다.”
“그런….”
샬롯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마족을 상대해 본 건 처음이었으니 충분히 할 수 있는 방심이었지만, 본인은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거기다 사실 이안에겐 오히려 이쪽이 더 잘된 일이었다.
“그래도 덕분에 편해지긴 했지. 이 녀석의 몸을 제압해라. 마족을 죽이는 법을 알려 줄 테니까.”
테사이아를 직접 죽일 수 있는 기회였기 때문이다.
그녀라면 상당한 경험치를 줄 테고, 어쩌면 받은 적 없는 퀘스트까지 완료될지도 몰랐다.
물론, 그 전에 대화 몇 마디 정도는 나눌 생각이었다.
여기까지 따라온 그 정성이 갸륵해서라도, 몇 마디 정도는 이죽거려야 속이 시원해질 테니까.
“…그래. 알았다.”
샬롯이 시무룩한 와중에도 고개를 끄덕였다.
이안이 테사이아의 몸을 툭 발로 차 완전히 엎드리게 뒤집었다.
붕대가 감긴 팔을 이리저리 돌린 샬롯이, 무릎으로 테사이아의 등을 찍어 누르고는 양팔을 뒤로 꺾어 움켜쥐었다.
둘의 체격 차이가 상당했기 때문에, 어른이 아이를 괴롭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이 계집, 손발톱이 길어지더군. 하지만 이러면 소용없을 거다.”
“자신의 피를 무기처럼 쓰기도 할 테니까. 방심하지 마라.”
“알았다. 걱정 마라. 꿈틀대는 게 고작일 테니.”
샬롯이 그르렁댔다.
이젠 말을 참 잘 듣는군.
생각하며, 이안은 테사이아의 뒤통수에서 조금씩 스스로 밀려나고 있는 단검을 단숨에 뽑아 들었다.
스르륵-
단검 날에 맺혀 있던 피가 테사이아의 상처 사이로 흘러 들어갔다.
뒤통수와 얼굴에 이어진 관통상이 스르륵, 빠르게 아물었다.
동시에 탁하게 풀어져 있던 그녀의 동공에 빛이 되돌아왔다.
잠에서 깬 것처럼 눈을 깜빡인 테사이아가, 자신을 결박한 손길을 느낀 듯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거 놓고 다시 붙어. 이 피도 맛대가리 없는 짐승아.”
낭랑하지만 약이 바짝 오른 목소리였다. 샬롯이 비웃었다.
“이미 한 번 뒈진 귀쟁이가 입이 험하군. 한번 빠져나와 보시든가.”
샬롯의 무릎과 팔에 더 힘이 들어갔다. 팔의 붕대가 붉게 물들었다.
테사이아가 이를 갈며 바둥댔다.
“내가 조금만 더 기운이 있었어도 이까짓-”
푹.
테사이아의 악다구니가 순간 끊어졌다.
얼굴 앞의 땅에, 자신의 뒤통수를 꿰뚫었던 단검이 박혔기 때문이다.
등 뒤를 노려보던 그녀의 검붉은 눈동자가 비로소 위로 향했다.
자신을 내려다보는 무표정한 얼굴. 서늘하게 가라앉은 검은 눈동자.
“…오랜만이야, 이안.”
그녀의 목소리가 부드러워졌다.
얼굴에도 배시시, 요사한 미소가 번졌다.
소녀 같기도 여인 같기도 한, 아주 공을 들여 빚어낸 듯한 미모.
물론 이안의 마음을 흔들어 놓을 수는 없었다.
“오랜만이군. 테사이아.”
“내가 너한테 내 이름을 가르쳐 준 적이 있던가…?”
“내가 너에게 내 이름을 가르쳐 준 기억도, 없는 것 같은데.”
“네 이름은 듣고 싶지 않아도 들리거든. 뭐, 무슨 상관이야. 반가워. 일단, 이 짐승부터 치워 놓고 이야기 나눌까? 사실, 너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거든.”
“난 지금 이 자세가 딱 좋아 보이는데. 집념이 대단하군. 여기까지 따라오다니.”
“네 체취는 대륙 끝에서도 맡을 수 있어. 게다가, 네 뒤를 따라다니면 먹을 게 알아서 떨어지더라고.”
그런 거였냐.
이안의 입가에 실소가 스쳤다.
하긴. 피비린내 나는 여정을 거쳐 온 그였다. 그가 죽인 인간과 마물의 잔재만 주워 먹어도 굶주릴 걱정은 없었으리라.
그녀의 머릿결과 얼굴을 훑어본 이안이 이윽고 내뱉었다.
“그런 것치곤 좀 마른 것 같은데.”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거든. 말했다시피, 사실 너한테 그 문제로 얘기를 좀 하고 싶었어. 그런데 겁이 나서 좀처럼 다가갈 엄두가 나지 않았었거든. 어쨌든 이렇게 자리가 마련이 됐네.”
테사이아가 창백하게 미소 지었다.
“그래서 말인데, 마주 앉아서 얘기 나누면 안 될까? 이 짐승의 냄새가 너무 고약해서 말야. 요즘 토끼나 다람쥐 같은 것만 먹었더니, 짐승 피 냄새는 맡기만 해도 토할 것 같거든.”
얘기 같은 소리 하고 앉아 있네.
코웃음 친 이안이 단검을 뽑아 들며 샬롯을 바라보았다.
“잘 봐 둬라. 이런 평범한 날붙이로는 흡혈귀를 죽일 수 없어.”
콰직-
“캬아아악-!”
단검이 테사이아의 어깻죽지에 틀어박혔다.
그녀가 비명을 질렀다.
무시한 채, 이안이 말을 이었다.
“이런 건 그저, 잠깐 가사 상태에 빠지게 하거나 고통을 줘서 헛짓을 하기 어렵게 만들 뿐이지. 물론 그렇다고 이것들이 불사는 아니야. 죽일 수 있는 아주 다양한 방법이 있지.”
“……!”
테사이아가 숨을 헐떡였다.
설마, 하는 눈빛.
샬롯이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가운데, 이안이 말을 이었다.
“가장 간단한 건 은이 섞인 무기로 목을 자르거나 심장을 찌르는 거다. 하지만 은으로 만든 무기는 구하기도 어렵고, 쓸 일도 많지 않지. 그러니까 보통은….”
화륵, 이안의 손아귀에서 불길이 솟았다.
“피가 전부 타 버릴 때까지 불을 지르거나, 신성력으로 뇌나 심장을 녹여 버려야 하지.”
“…잠깐만. 이안? 잠깐만 얘기를 나누자. 응?”
테사이아가 타이르듯 내뱉었다.
이안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그녀 역시 깨달은 모양이었다.
휙, 불길을 길가의 눈더미에 털어 버린 이안이 옆에 놓인 단죄의 검을 집어 들었다.
“불태우는 건 시간이 오래 걸리니까, 지금은 신성력으로 죽이는 게 간단하겠지.”
“이, 이안? 이안. 잠깐만. 제발.”
테사이아의 목소리가 다급해졌다.
그녀의 얼굴에서 여유가 사라졌다.
샬롯이 손을 움직여, 테사이아의 양팔을 한 손으로 움켜쥐었다.
혀를 날름댄 그녀가 테사이아의 귓가에 속삭였다.
“네 덕분에 좋은 걸 배웠군, 귀쟁이 년아. 다음부터 네 동족을 사냥할 때 명심해 주지.”
“닥쳐, 짐승아. 난 동족 같은 거 없어. 이안, 제발 부탁이야, 응? 살려 줘. 난 널 죽이려고 따라온 게 아니야. 물론 처음엔 그랬지만, 얼마 전부턴 아니었어. 네가 해낸 것들을 보면서, 내 힘으론 절대 널 죽일 수 없다는 걸 알게 됐거든. 그래서 그냥 네가 남긴 잔재만 주워 먹기로- 아아악-!”
테사이아가 다시 비명을 질렀다.
샬롯이 그녀의 어깨에 박힌 단검을 비틀었기 때문이다.
테사이아의 절박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정말이야, 이안! 제발 살려 줘. 난 정말 널 죽일 생각이 없어. 그럴 수도 없고. 난 여기서 죽으면 안 돼. 안 된다구!”
“하나같이 식상한 유언이군. 테사이아.”
말을 자른 이안이 천천히 단죄의 검을 뽑아 들었다.
“테사. 테사라고 불러 줘. 너는 괜찮아.”
억지 미소를 지으며 말한 테사이아가 온몸을 비틀었다.
하지만 샬롯의 손아귀를 빠져나갈 수는 없었다.
버둥대는 그녀의 손에서 손톱이 길어졌다가 짧아지고, 발톱이 툭 튀어나왔다가 들어가길 반복했다.
어깨에서 흘러나온 피가 부글부글 끓으면서 삐죽댔다.
“정말 너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어. 내 말을 들어 줘. 이안. 제발.”
이안은 그녀의 절박한 붉은 눈을 내려다보았다.
남은 힘이 거의 없어 보였다.
샬롯과 싸우는 데 이렇게까지 힘을 소진한 걸 보면, 게임에서보다 턱없이 약한 상태인 게 분명했다.
당연히 그때 같은 보상이나 경험치를 기대할 수도 없으리라.
하지만 벌충할 수 있는 존재들은 있었다.
루 사드의 뱀파이어들.
게임에선 대부분이 테사이아에게 잡아먹힌 후라 그와 싸울 수 있는 놈들이 거의 없었지만, 이번에는 아닐 터였다.
공략에도 테사이아가 그들을 죽이기 전에 미리 가서 정리하면, 그녀를 약화시킬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경험치와 전리품도 더 많이 손에 넣을 수 있다고 쓰여 있었었다.
그러니 아예 테사이아를 미리 죽인다면, 그런 시간 제한 없이 뱀파이어들을 처리할 수 있으리라.
“내 피를 끝내 먹지 못한 건 참 애석하게 됐군, 테사.”
“거짓말이 아니야! 제발 잠깐만 내 말을 들어 줘. 응? 제발!”
“잘 가라.”
이안이 검을 들었다.
테사이아가 왈칵 피눈물을 토하며 소리쳤다.
“도망치거나 반항하지 않을게. 그냥 잠깐만 얘기를 들어 줘, 제발! 부탁, 아니, 의뢰! 그래! 너한테 의뢰할 게 있단 말이야!”
머리 위로 치켜든 이안의 손이 순간 멈칫했다.
…의뢰라고?
그의 눈이 가늘어지는 가운데.
“넌 용병이잖아, 이안. 의뢰가 들어오면, 들어는 줄 수 있는 거 아니야? 의뢰인이 인간이 아니라도?”
눈가가 피범벅이 된 테사이아가 간청하듯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