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Dark Fantasy Villain RAW novel - Chapter 71
071화
“…….”
이안의 팔이 천천히 내려갔다.
샬롯이 설마 이 개소리를 들을 거냐는 눈빛으로 바라보았지만, 그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테사이아의 말이 아예 억지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들어 보고 정말 개소리면 그때 목을 날려 버려도 늦지 않았다.
테사이아가 안도인지 뭔지 모를 숨을 내쉬는 그때.
푹.
이안이 단죄의 검을 옆의 땅에 꽂았다.
정확히 테사이아의 목 앞.
날을 그녀의 목으로 향한 채였다.
그 옆에 주저앉은 이안이 검 자루에 손을 얹은 채 내뱉었다.
“들어는 주지. 하지만 개소리를 하거나 개수작을 부리면, 이게 작두로 변할 거다.”
테사이아의 시선이 적당히 얇고 길게 이어진 검날로 향했다.
서슬 퍼런 예기.
침을 삼킨 그녀가 미소 지었다.
“그래, 알았어. 하지만 정말 알아줘. 난 네 피를 빠는 걸 포기했어. 말 탄 인간들이 잔뜩 몰려가서 너랑 싸운 날 이후로는 특히. 그전에는 조금만 더 참으면 널 잡아먹을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이상하게도 그날 이후로는 상상만 해도 등에 소름이 돋고 무서워졌거든.”
…내가 능력치를 올린 그날이군.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이안은 내심 놀랐다.
감으로 그 변화를 눈치채다니.
“그렇다고 널 따라다니지 않을 이유는 없었어. 말했다시피 굳이 내가 싸울 필요가 없었으니까. 하지만 네가 요전 마을에 들렀을 땐, 상황이 조금 달랐어. 마을 근처로 갈 수가 없었거든. 밤에는 그래도 버틸만 했지만, 낮이 되면 몸속이 끓고 속이 뒤집히는 느낌이 들었지. 역겨웠어.”
화로의 사원 인근을 말하는 것이리라.
거긴 루 엔테르의 권역이니, 뱀파이어인 그녀에겐 흉지나 다름없었을 터였다.
이안이 미간을 좁힌 건 다른 이유였다.
검을 쥔 그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그래서, 지금 네가 떠드는 말이 의뢰랑 무슨 상관이지?”
“이, 이제 본론이야. 네가 그 마을에 있는 동안, 나는 멀리 나와서 숨어 있었어. 네가 거길 떠나면 다시 따라갈 생각이었거든. 그런데 며칠 뒤에, 그자가 날 찾아왔어. 자기를 일족의 심판자라고 했지.”
이안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심판자…?”
“그래. 규율을 어긴 일족과 일족의 공적을 처단하는 일을 담당하고 있댔어. 그러면서 잡종 실험체 주제에 자길 만나게 된 걸 영광으로 알라더군.”
테사이아가 잠시 헐떡였다.
그때 느낀 공포와 분노를 다시 한번 느끼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놈은 내 앞에 작은 관 세 개를 꺼내서 보여 줬어. 팔다리를 내 몸과 분리해서 따로 가져갈 거랬지. 돌아가면 다시 조립해 줄 테니 걱정 말라면서. …나는 당연히 개소리하지 말라고 했지. 그 실험실로는 다시 가지 않겠다고. 거긴 정말 끔찍했거든. 지금도 가끔 꿈에-”
“본론만.”
“…그래서 싸웠어. 하지만 엄청나게 강했지. 내가 알지도 못했던 방식으로 힘을 다루더라고. 하지만 나도 무작정 당하진 않았어. 네 덕분에 힘을 차곡차곡 비축해 뒀거든. 거기다 놈의 술수들을 따라 할 수도 있었고. 이길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지만, 아니었어. 놈이 본 실력을 발휘하니 상황이 완전히 바뀌었지.”
이안은 슬쩍 미간을 좁혔다.
그가 기억하는 테사이아는, 뱀파이어들의 진혈을 삼키며 여왕의 자리까지 오른 대마족이었다.
그때도 심판자의 추적은 있었으련만.
‘…혹시, 이것도 나 때문인가.’
짚이는 변화는 그뿐이었다.
테사이아는 그의 뒤를 따라다니게 되면서, 본래라면 홀로 투쟁하며 일깨웠을 잠재력과 전투 기술을 온전히 체득하지 못한 것이다.
이것도 나비 효과라고 해야 하나.
그가 생각하는 사이, 테사이아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물론 나한테도 살아남기 위한 비장의 한 수가 있었어. 그건 통했지. 물론 나도 무사하진 못했지만… 적어도 도망칠 시간은 벌 수 있었어.”
“추적을 뿌리치는 게 쉽지는 않았을 텐데.”
“머리를 썼지. 난 짐승들을 많이 사냥했으니까. 그것들을 홀리는 건 숨 쉬듯이 할 수 있었거든. 보이는 짐승마다 내 피를 묻혀서 무작정 흩어지게 했어. 피 냄새로 날 추적하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테사이아가 이안을 올려다봤다.
“그리곤 네 냄새를 따라갔어. 네 생각밖에 나지 않았어. 너라면 날 도와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거든. 전에도 날 구해줬었으니까. 근거 없는 생각이란 건 널 보고 나서 깨달았지. 그래서 일단, 숨어서 짐승들을 잡아먹으면서 힘을 회복하기로 했어. 네가 도와주지 않으면, 도망은 칠 수 있어야 했으니까.”
“개소리하지 마라. 네가 며칠이나 지켜보던 걸 알고 있다.”
샬롯이 으르렁댔다.
테사이아가 곧바로 내뱉었다.
“그건 무서워서 그랬어. 네가 만나자마자 나한테 칼부터 들이댈 것 같았다구. 넌 날 죽이는 방법도 알 것 같았고. 몇 번 네게 다가가려고 시도했는데, 그때마다 겁이 나서 더 다가갈 수가 없었어. 이 짐승이 날 눈치챈 건 그래서일 거야. 알았어? 네가 잘나서 날 찾은 게 아니야. 날 이긴 것도 아니고. 내 힘이 온전했다면 네까짓 건 지금 산산조각 나서 굴러다니고 있을 거라고, 이 짐승아!”
이게 그라데이션 분노인가 하는 그건가.
이안은 샬롯을 죽일 듯 노려보는 테사이아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샬롯의 코웃음이 이어졌다.
“그런 가정은 무의미한 거다, 귀쟁아. 지금 내 밑에 깔려 있는 건, 결국 너니까.”
우득, 샬롯이 테사이아의 팔을 더 강하게 눌렀다. 테사이아가 고통스러운 듯 움찔댔지만, 이번에는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무식하게 힘자랑이나-”
씹어뱉던 그녀의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단죄의 검이 그녀의 목 쪽으로 기울어졌기 때문이다.
일말의 동정심도 담기지 않은 검은 눈이,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래서, 그 심판자를 죽여 달라는 거냐?”
“그자가 전부는 아닐 거야. 그자가 나한테 그랬거든, 일족은 날 포기하지 않을 거라고. 그러니 차라리 그냥 지금 자기한테 잡히는 게 나을 거랬지. 그러니까 그자를 죽이더라도, 또 다른 심판자가 내 뒤를 쫓아 오겠지.”
“…….”
이안의 눈빛이 깊어졌다.
테사이아가 침을 삼키고는 말했다.
“하지만 놈들은 그저 하수인일 뿐이야. 날 이런 괴물로 만든 것들은 여전히 루 사드에 도사리고 있지. 난 그놈들을 절대 용서할 수 없어. 그러니까 이안, 내 복수를 도와줘. 이게 내 의뢰야.”
솔직히 말해, 아주 매력적인 제안이었다.
테사이아를 곁에 두면, 언젠가 찾아가 죽여야 할 뱀파이어들이 제발로 찾아오리란 거였으니까.
어쩌면 게임에서 테사이아가 힘을 키워 간 방식도, 자신을 찾아온 심판자들을 죽여 그들의 진혈을 흡수하는 것이었을지도 몰랐다.
그가 테사이아를 돕는다면, 심판자들이 줄 경험치를 손에 넣음과 동시에 테사이아가 더 강해지는 것을 막을 수도 있으리라.
겸사겸사, 언젠가 죽여야 할 뱀파이어들의 전력도 줄일 수 있을 테고.
하지만 그런 생각을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다.
그저 무표정한 얼굴로 테사이아를 내려다볼 뿐.
“나 혼자선 도저히 놈들을 이길 수 있을 것 같지 않아. 하지만 네가 날 도와준다면 얘기가 달라질 거야. 난 네가 해낸 것들을 봤어. 넌 강하고, 어떤 상황에서도 의뢰를 포기하지 않지. 그러니까 부탁이야, 이안. 내 의뢰를 받아 줘.”
테사이아가 간청했다.
이윽고 이안이 입을 열었다.
“네 사정은 알겠다, 테사이아.”
“테사. 부디.”
“그래. 테사. 어쩌면 네 말대로 내가 널 따라오는 심판자와 싸워 줄 수도 있겠지. 네가 루 사드의 뱀파이어들에게 복수하는 것도 도와줄 수 있을지도 몰라.”
“너라면 분명히 해낼 수 있을-”
“하지만 의뢰라는 건, 이런 부탁만으로 성립되는 게 아니다. 물론 나도, 알량한 동정심 따위로는 움직이지 않지.”
“……!”
테사이아가 눈을 치켜떴다.
검 자루를 쥔 손을 까딱이면서 이안이 덧붙였다.
“의뢰에는 합당한 보상이 있어야 하는 법이다. 네 말대로면 나는 흡혈 일족 전체와 싸우게 될 텐데. 넌 어떻게 그에 합당한 보상을 지급할 거지?”
“뭐, 뭐든지. 뭐든지 줄게. 뱀파이어들은 돈이 아주 많아. 내 복수를 도와주면, 전부 다 네 거야. 난 그런 거엔 관심도 없어.”
“확실하지 않은 보상이군. 게다가 그건, 널 돕지 않더라도 내가 응당 손에 넣게 될 전리품이기도 하지. 의뢰의 보수는 네가 가진 걸 줘야 하는 거다, 테사.”
말을 자른 이안이 고개를 숙였다.
“마지막으로 묻겠다, 테사. 내가 네 의뢰를 받아들인다면, 너는 내게 뭘 줄 수 있지?”
테사이아의 눈동자가 떨리다가, 이윽고 서서히 가라앉았다.
자신이 잃게 될 것과 자신이 내놓아야 할 것 모두, 하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모양이었다.
“…날 줄게, 이안.”
이윽고 그녀가 입을 열었다.
이안의 눈이 슬쩍 가늘어졌다.
“내가 줄 수 있는 건, 지금 내 목숨밖에 없으니까.”
“네 목숨은 내게 아무런 가치도 없는데.”
“날 마음껏 부려. 네가 하라는 건 전부 할게. 지금 네가 하는 일도 도울 거야. 대신 네가 하려던 일들이 끝나면, 내 복수도 도와줘. 영원히 이 북부에서 살 건 아니잖아. 그때까지 날 곁에 두고 써 줘.”
“내 노예가 되겠다고?”
“뭐라고 불러도 좋아. 어차피 나는 다른 대안이 없어, 이안. 이대로는 결국 루 사드로 다시 끌려가게 될 테니까.”
“…….”
“내가 누군지도 모르는 채로 짐승처럼 다뤄지다 죽고 싶지 않아. 그러느니 차라리, 네 의뢰인이자 노예로 살면서 복수를 꿈꾸겠어.”
아예 멍청하진 않군.
하지만 그렇다 해서, 그녀의 말을 다 믿는 건 아니었다.
“여전히 타산이 맞지는 않는군.”
내뱉으며, 이안은 테사이아의 붉은 눈을 내려다보았다.
“심판자들로부터 얻게 될 전리품은 전부 내 거다.”
“알았어.”
“그리고 넌, 놈들에게서 단 한 방울의 진혈도 얻지 못할 거야.”
“……!”
테사이아의 눈이 순간 커졌다.
진혈을 탐하는 건 흡혈귀의 본능.
그걸 참는 게 쉬울 리 없었다.
하지만 이안의 말에는 선택권이 없었다.
“…알았어.”
이윽고 테사이아가 대답했다.
고개를 끄덕인 이안이 손을 뻗어, 그녀의 앙상한 어깨에 아직 박혀 있는 단검을 단숨에 뽑았다.
“계약은 성립됐다.”
그가 샬롯을 바라보았다.
정말이냐는 듯 눈을 치켜뜨면서도, 샬롯이 테사이아를 제압하고 있던 손을 풀었다.
손목을 어루만지며 일어선 테사이아가 미소 지었다.
“고마워, 이안. 진심이야.”
“명심해라. 계약을 파기하고 도망치면, 심판자들뿐 아니라 나도 널 추적하게 될 거다.”
“물론이지. …그런 의미에서.”
테사이아의 시선이 미간을 찌푸린 채 서 있는 샬롯에게로 향했다.
“이제 이 짐승은 쓸모없을 것 같은데. 내가 죽여도 될까?”
“죽고 싶으면 그렇게 해. 그게 아니면 조용히 앉아 있어라.”
“…알았어.”
샬롯에게 날 선 시선을 보내면서도, 테사이아가 순순히 모닥불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녀의 뒷모습을 죽일 듯 노려본 샬롯이 이안을 돌아보았다.
“정말 저런 귀쟁이 마족의 약속을 믿으려는 거냐, 이안?”
“우린 약속을 한 게 아니야. 계약을 했지. 너도 이제 용병이니 그 차이를 알아 둬라.”
“분명히 우릴 배신할 거다.”
이안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때는 네가 죽일 수 있게 해 주지. 네가 잡아 온 녀석이니까.”
“……! 정말인가?”
샬롯의 눈이 번뜩였다.
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나도 저 녀석을 믿는 건 아니야. 그러니까, 네가 감시해라. 헛짓하지 않게.”
순간 움찔했던 샬롯이, 묘한 기대를 머금고 그를 바라보았다.
“헛짓거릴 하면, 그냥 칼로 찔러 버려도 되나?”
“필요한 상황이라면.”
그 정도론 죽지 않을 테니까.
샬롯의 얼굴에 흐릿한 미소가 번졌다. 고개를 끄덕인 그녀가 홱 몸을 돌려 모닥불 옆으로 갔다.
“지켜볼 거다, 귀쟁이 년아. 부디 헛짓거릴 해 줬으면 좋겠군.”
“나도 들었으니까 말 걸지 말아 줘. 입 냄새나.”
샬롯이 으르렁댔지만, 테사이아는 본 척도 하지 않았다.
그 광경을 바라보던 이안의 얼굴에, 이윽고 헛웃음이 스쳤다.
티르 엔의 성기사. 그리고 루 엔테르의 은총을 받은 아이와 동행한 게 불과 얼마 전의 일이건만.
지금은 수인과 흡혈 요정이 동행이라니.
‘…정말이지 앞날은 알 수 없는 거군.’
속으로 읊조리며 모닥불로 다가간 이안은, 모포 위에 놓여 있던 자신의 로브를 집어 테사이아에게 내밀었다.
“……?”
테사이아가 고개를 갸웃하며 그를 바라보았다.
정말 몰라서 저렇게 보는 건가.
혀를 찬 이안이 내뱉었다.
“앞으론 항상 걸치고 있어라. 네가 계속 벌거벗고 다니는 꼴을 보고 싶진 않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