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Dark Fantasy Villain RAW novel - Chapter 73
073화
관도를 가로질러 동쪽의 먼 산기슭까지 이어진 장벽은, 아주 오랜 세월 이곳을 지킨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다른 곳들이 으레 그렇듯, 고대의 성벽을 개조하고 증축해 만든 관문인 모양이었다.
성벽 위, 쇠뇌를 든 경비병들이 마차를 내려다보았다.
건조한 눈길로 샬롯을 응시하던 경비대장이 이안 쪽으로 다가왔다.
“신분을 밝히시오.”
이안은 기다렸다는 듯 얇게 말린 양피지를 건넸다.
“용병, 이안 호프요.”
양피지를 펼친 경비대장의 눈매가 이내 가늘어졌다.
“화로의 사원…? 이게 위조가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할 수 있소?”
“없소만. 신분을 위조할 거였다면 그 이름을 붙이진 않았을 거요.”
“하긴. 그야 그렇군.”
경비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안은 화로의 사원을 살뜰하게 이용해 먹었다. 지도나 축복뿐 아니라, 그의 신분을 보증해 줄 문서까지 부탁한 것이다. 아공간에서 썩어 가던 오염된 정수의 정화는 덤이었다.
사원은 당연히 은인의 부탁을 전부 들어주었다.
그 결과, 이안은 체르윈 아스트레이아의 인장이 찍힌 신분 보증서를 가지게 되었다.
북부는 물론이고 제국에서도 먹힐 이름이었다.
“사원과 각별한 관계이신 모양이군. 화로의 불길이 꺼져가고 있다는 소식은 들었소만.”
“그 불길을 되살리는 데 큰 도움을 준 것이 여기 이 이안이오.”
내뱉은 건 샬롯이었다.
이안의 눈길을 받은 그녀가 무표정하게 혀로 입가를 훑었다.
당연히 해야 할 말을 했다는 듯.
어떤 녀석들이 묘하게 겹쳐지는 그 모습에 이안이 미간을 좁히는 사이.
“그렇다면 이해가 되는군. 하긴, 범상치 않다 여기긴 했소만. 그게 좋은 의미여서 다행이오. 일행은 모두 귀하의 부하들이시오?”
“…그렇소.”
일단은.
“용병단이라… 여기선 귀한 손님이시군.”
중얼댄 경비대장이 품에서 도장을 꺼내 양피지의 한쪽에 찍었다.
도장이 마르기를 기다리며, 그가 다시 이안을 바라보았다.
“해서, 어디로 가는 길이시오? 트라벨가?”
“지금은 북쪽으로 가고 있소.”
“얼마나 북쪽? 이 닝글로슬도 충분히 북쪽이오만.”
궁금한 게 많은 양반이군.
생각하면서도 이안은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더 먼 북쪽. 아히고른 산맥 근처로 가고 있소.”
이안 자신이 보기에도, 이 마차와 마차에 탄 구성원의 면면을 보면 호기심이 들 만했기 때문이다.
제국제 검은 마차. 마찬가지로 검은 마갑을 덧입은 혈통 좋은 전마.
마부석에는 수인이, 이안의 발치에는 로브를 눌러 쓴 앙상한 체구의 여인까지 기대앉아 있었으니까.
이만하면 이 제정신이 아닌 세계에서도 충분히 특이한 조합이라 할 수 있었다.
“아. 진짜 북쪽을 말씀하시는 거군. 거긴 사람이 발을 들일 곳이 아닌데. 지금 같은 계절엔 특히 더. 의뢰라도 받으신 거요?”
“화로의 사원에서.”
이안은 태연하게 사원의 이름을 팔았다. 설사 그들의 귀에 들어간들, 이 정도로 쪼잔하게 굴지는 않으리라.
“정말 대단한 실력자들이신 모양이군. 그게 아니라면 그런 무모한 의뢰를 청할 리 없으니.”
“북쪽의 상황이 그렇게 안 좋소?”
“…혹시 북부는 초행이시오?”
이안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경비대장이 잠시 침음했다. 괜한 말을 하는 것이 아닌지 갈등하는 눈치.
“무슨 얘길 하셔도 달라질 건 없으니, 편히 말씀하시오. 오히려 도움이 될 거요.”
이안이 넌지시 덧붙였다.
경비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질문에 대한 답을 드리자면, 아주 안 좋다 할 수 있소. 북쪽 전체가 북부 자치령이라곤 하지만. 사실상 땅에 눈이 덮이지 않은 지역까지만 북부로 쳐야 하오. 그 너머는 백색 마경이나 다름없소. 그 인근에 살던 자들도 죄다 가까운 남쪽으로 이주한 지 오래요. 이 닝글로슬도 그중 하나고.”
잠시 말을 멈춘 경비대장이 덥수룩한 수염을 긁적였다.
“나라면 최소한 봄까진 이곳에 머물거나 동쪽으로 말머리를 돌리겠소. 카링기온까지 갈 것도 없이, 트라벨가만 해도 실력 있는 용병단을 필요로 하는 일거리가 아주 많을 테니까. 여긴… 조금 심심하겠지만 말이오.”
그렇단 말이지.
고개를 주억거리며 이안이 물었다.
“그럼 사실상 여기가 북부 최북단 도시 중 하나란 말씀이시오?”
“아직은 아니지만, 곧 그렇게 될 것이오. 해가 지날수록 점점 추위가 아래로 내려오고 있으니. 윗동네까지 눈이 덮이는 것도 머지않았지. 그래 봐야 이 위로 있는 건, 여기랑은 비교도 안 될 만큼 작은 마을들일 거요. 사실, 거기서 아직도 버티는 자들이 제정신일 것 같지도 않소.”
“그럼 여기서 보급을 충분히 하고 떠나야겠군….”
“급한 의뢰인 모양이군.”
“봄까지 기다린다고 그렇게 달라질 것 같지도 않아서 말이오.”
“그것도 아예 틀린 말은 아니군.”
경비대장이 양피지를 말아 건네며 덧붙였다.
“도시 서쪽 너머에는 광산이 있소. 그 인근은 외부인이 접근할 수 없는 곳이오. 성 근처도 마찬가지고. 웬만하면 시가지를 벗어나지 마시오. 문제 생길 일은 만들지 않으시리라 믿겠소.”
“걱정 마시오. 푹 쉬면서 돈만 잔뜩 쓰고 떠날 거니까.”
“훌륭하군.”
경비대장이 뒤로 물러섰다.
관문 앞을 지키던 병사들이 길을 텄다.
샬롯이 느긋하게 마차를 몰아 관문을 지나쳤다.
계절을 증명하듯 황량하게 방치된 밭과 상당히 넓게 형성된 도시의 전경이 드러났다.
이안의 예상을 뛰어넘는 광경이었다.
사실 여긴, 게임에선 본 적도 없던 도시였기 때문이다.
게임에 없던 마을이 튀어나오는 건 드문 일이 아니었지만, 이만한 규모는 처음이었다.
‘퀘스트가 없으리란 게 갑자기 좀 아쉬워지는군… 여유도 있는데.’
어쨌건 이런 도시라면 흡혈귀 심판자가 따라붙는다고 할지라도, 미치지 않고서야 난동을 피우지는 않을 터였다.
자치령 도시 한복판에 마족이 출몰했다는 이야기가 퍼지면, 곧바로 제국의 추적을 받게 될 테니까.
그때, 테사이아가 눈치를 살피며 고개를 들었다.
지난밤에 사냥을 한 덕에, 그녀의 얼굴에는 한결 윤기가 돌았다.
“언제나 이런 귀찮은 과정을 거치는 거야?”
“자유 도시가 아닌 경우에만.”
“재미있는 경험이었어. 당당하게 관문을 통과해 본 건 처음이거든.”
“그러시겠지.”
“안에서도 잘해 볼게. 이상하게 전엔 항상 관심을 끌었었거든.”
“그야 네가 벗고 다녀서 그런 거겠지.”
“아하….”
하는 짓도 평범하진 않았을 테고.
이안은 몰랐다는 듯한 테사이아의 반응에 코웃음을 치며 시선을 돌렸다.
어쨌건 지금은 샬롯이 있으니, 상대적으로 그녀가 관심을 받을 일은 많지 않으리라.
“어딜 가장 먼저 들러야 하지?”
그때 샬롯이 물었다.
또다시 기본적인 질문.
이안이 턱짓했다.
“여관이나 도시 어딘가에 마구간이 있을 거다. 거기부터 들러.”
“알았다.”
“아까는 왜 끼어든 거지? 너답지 않은 짓이었는데.”
“아, 그거. 화로의 사원에서… 배웠다.”
샬롯의 목소리에 머쓱함이 묻어났다.
이안의 미간이 좁아졌다.
“미구엘?”
“네가 대사제와 대화 중일 때 다가와서 말을 걸더군. 너를 소개하는 방법부터, 시종으로서 대행해야 할 덕목들을 떠들어 댔다. 그게 생각이 나더군. 어쨌건 지금 나는… 네 시종이나 다름이 없으니까….”
“하….”
이안이 헛웃음을 흘렸다.
그걸 계속 전승하고 있었다니.
테사이아가 눈을 빛낸 건 그 직후였다.
“이안을 소개하는 방법이 따로 있어? 뭔데?”
“그자가 말하길-”
“그만.”
말을 자른 이안이 싸늘한 눈으로 둘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싸우지 말랬지 친한 척하란 얘긴 아니었다. 그리고 샬롯, 그 개소리는 잊어라. 필요 없으니까.”
“그러면 나는 더 편하다만… 네 공적을 알리는 건 필요할 것 같다, 이안. 용병단은 소문과 평판이 중요한 법이니까.”
“고작 셋인데 용병단은 무슨…. 필요 없어. 평판은 다시 쌓으면 그만이야.”
“왜. 난 용병단, 마음에 드는데.”
테사이아가 히죽댔다.
그러시겠지.
관자놀이를 누르며 이안이 내뱉었다.
“그걸 계속 유지하고 싶으면, 지금처럼 요정 마법사인 척이나 잘하도록 해.”
“알았어. 그럴게.”
마차가 도시로 접어들었다.
칙칙한 검은 땅과 벽돌 건물들.
마구간을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물자를 운송하는 일이 잦은 듯, 상당히 큰 마구간이 대로변에 따로 위치해 있었으니까.
여관에서 멀지도 않은 위치였다.
“굉장히 좋은 말이군요, 나리.”
마구간지기가 마차와 말, 그리고 샬롯을 번갈아 힐끔대며 말했다.
마차에서 내린 이안이 내뱉었다.
“짧으면 이틀, 길면 며칠 더 묵을 수도 있다. 최대한 좋은 걸 먹이고 편히 쉴 수 있게 해라. 북쪽으로 갈 거니까.”
“북쪽이면, 얼마나 북쪽이요?”
또 이걸 묻는군. 하긴, 여긴 이미 제국 기준으로는 북부였다.
“아히고른 산맥 근처까지.”
“그 정도면… 돌아오실 땐 말이 없어지실 텐데요.”
“가는 동안에라도 버틸 수 있도록. 그리고 청소도 부탁하지.”
이안이 건넨 은화 몇 개에 마구간지기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이안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몸을 돌렸다.
샬롯과 테사이아가 그의 뒤로 나란히 걸었다.
행인들의 시선이 그들에게 한 번씩은 머물렀다.
이안은 소리 없이 입맛을 다셨다.
‘별로 눈에 띄고 싶진 않지만….’
샬롯과 함께 하는 이상 익숙해져야 하는 부분이었다.
대장간을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거리 하나가 온통 대장간이었기 때문이다.
“똑바로 잡아라, 멍청한 놈아! 내리칠 때 자꾸 튀잖아!”
“풀무질 제대로 해!”
인간과 난쟁이들이 뒤엉켜 쉴 새 없이 움직였다.
여기서 만든 물건들을 북부 전선으로 보내는 모양이었다.
‘여기도 사람 사는 동네긴 하네.’
이 세계가 가상이 아니리란 사실을 새삼 곱씹게 하는 광경이었다.
게임에선 본 적 없는 도시에서 느낀 활기였기에 더더욱 그랬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극단적인 세계가 실존할 수 있는 건진 아직도 의문이었지만.
어쩌면 이런 것도, 그가 선진국 축에 드는 나라에서 살았기 때문에 가지는 의문일지도 몰랐다.
전쟁이나 가난이 휩쓸고 있는 나라에서 태어났다면, 처음부터 그다지 놀라지 않았을지도.
가판에 늘어선 물건들을 손끝으로 툭툭 건드리며 거리를 지나친 이안이, 이윽고 왔던 길을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그의 시선이 가판 너머에 시큰둥하게 기대앉은 중년 난쟁이에게로 향했다.
“저기가 가장 실력이 좋은 것 같군.”
“…그걸 어떻게 안 거지?”
“잘.”
저 가게의 물건이 가장 정보를 많이 확인할 수 있다거나 하는 식의 설명은, 굳이 필요하지 않았다.
“어차피 넌 선택권도 없어. 돈은 내가 내니까.”
“…나도 돈이 있긴 하다만.”
“네 돈도 내 돈이다.”
“그것도… 맞는 말이군.”
이안이 가판에 다가섰다.
그가 단검을 비롯한 물건을 몇 개 집어 들자, 비로소 난쟁이 장인이 그를 바라보았다.
“안목이 상당하시군.”
“종종 듣는 말이지. 얼마요?”
“꽤 비싼데. 돈은 있으시고?”
물론 그의 입은, 이안이 가판에 제국 금화를 몇 개 놓은 순간 곧바로 닫혔다.
이안이 금화를 향해 뻗어 나오는 짧고 두꺼운 손을 막았다.
“이건 맞춤 제작비까지 포함된 돈이오.”
“맞춤 제작?”
이안이 손목 아래가 찢겨 나간 샬롯의 팔 보호대와 금이 간 견갑을 그의 눈앞에서 벗겼다.
“이것들을 보수하고, 사이에 들어갈 것도 만들어 주시오.”
“오… 이건 마법 무구로군….”
장인이 물건을 이리저리 확인했다.
“난쟁이 장인의 솜씨고… 재질도 보통 제국 강철이 아니오. 새겨진 마법도 정교하군. 똑같이 재현할 방법은 현재로선 없소만.”
“움직이기 편하고 견고하기만 하면 달라도 상관없소.”
“그러시다면야… 이리 오시오.”
샬롯이 가판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대장간 구석에서 코를 골며 잠든 도제에게 일어나라고 소리친 난쟁이 장인이, 이윽고 그녀의 팔 치수를 재며 중얼댔다.
“수인을 보는 건 오랜만인데. 거기다 요정과 함께라니. 괴상한 조합이군.”
샬롯의 낯이 굳어지는 가운데, 이안이 코웃음을 쳤다.
“내 눈엔 댁들도 괴상하긴 마찬가지요.”
“…수인과 요정을 함께 데리고 다니는 그쪽이 가장 괴상하오. 이게 어떤 의미인지 모르시는 건가?”
태연하게 내뱉은 장인이 앞의 종이에 뭔가를 적기 시작하며 덧붙였다.
“내일 다시 오시오. 그리고 비용이 조금 부족한 것 같은데.”
“제대로 된 걸 준비하는 게 좋을 거요. 바가지를 씌우는 만큼.”
이안이 금화 한 개를 더 가판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그의 가라앉은 눈빛을 힐끔댄 장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도 당해 주는 손님에겐 그래야지.”
이안이 몸을 돌렸다.
장인이 아직도 자고 있는 도제를 깨우는 소리가 들리는 가운데, 샬롯이 중얼댔다.
“무례하고 돈독 오른 땅딸보들….”
“걱정 마라. 내일 제대로 된 게 안 나오면, 저 반 토막은 반의반 토막이 될 테니까.”
“…그래. 그… 또 나 때문에 돈을 쓰게 된 건….”
샬롯이 문득 더듬댔다.
차마 뒷말이 떨어지지 않는 모양.
“알면 돈 값해라.”
이안이 덧붙인 말에, 샬롯이 머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안은 테사이아가 걸칠 옷까지 몇 벌 샀다.
테사이아가 입고 싶지 않다고 속삭였지만, 물론 그녀에게도 선택권 같은 건 없었다.
마지막으로 건조 식량까지 구매하고서야 비로소, 일행은 여관에 들어섰다.
“…….”
테사이아가 걸음을 멈춘 건 그때였다.
미간을 좁히며 고개를 돌린 이안은, 뒤늦게 그녀가 흡혈 일족이라는 사실을 떠올렸다.
‘이것들은 정말 사람 귀찮게 하는 데는 도가 텄군.’
샬롯과 테사이아 둘 다, 솔직히 말해 루시보다도 손이 많이 갔다.
테사이아는 이안이 여급을 불러 들어오라고 말하게 한 뒤에야, 비로소 건물 안으로 발을 들였다.
북부의 집은 죄다 벽돌로 지은 것들이라, 나무와 진흙으로 만든 판잣집보다 훨씬 따듯했다.
1층의 식당은 저녁이 되기도 전인데 이미 주정뱅이들로 북적였다.
난쟁이와 인간들이 뒤엉켜 독주를 마셔대는, 꽤 볼 만한 광경.
테사이아가 2층으로 옷을 갈아입으러 올라간 사이, 이안은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새로운 도시의 여관에 들르면 늘상 그렇듯, 이쪽을 힐끔대는 시선들이 느껴졌다.
적의가 담기진 않았기에, 이안은 신경 쓰지 않고 음식을 주문했다.
“여러분들이 그, 산맥 쪽으로 가신다는 용병분들이시죠?”
주문을 다 받은 여급이, 샬롯을 무서운 듯 힐끔대면서 물었다.
이안이 눈을 끔뻑였다.
“벌써 소문이 났다고?”
“돈을 뿌리고 다니셨다던데…. 실례가 안 된다면, 왜 거기로 가시는지 알 수 있을까요?”
“용병이 다른 일이 뭐가 있겠어? 마물 때려잡으러 가는 거지.”
이안이 피식대며 말했다.
여급이 반색했다.
“역시…! 그렇다면 진심으로 응원할게요. 여긴 저뿐만 아니라 위에서 이주해 온 사람들이 많거든요. 부디 한 마리의 마물이라도 더 줄여 주세요. 언젠가, 우리가 다시 고향을 되찾을 수 있게.”
꾸벅, 고개까지 숙인 여급이 금방 음식을 가져다주겠다며 달려갔다.
“별….”
이안은 쓴웃음을 지으며 왼손 손아귀를 내려다보았다.
안 그래도 머잖아 마물들과 박 터지게 싸울 운명이었기 때문이다.
이 문양이 어떤 방식으로 작동하는 건지, 슬슬 알 것 같았으니까.
이건 무작정 파장을 흩뿌리는 게 아니었다.
인근에 불러들일 수 있는 마물이 있을 때만 작동했다.
어쩌면 반대로 그것들이 공명을 이끌어내는 것일지도 몰랐다.
어느 쪽이 정답이건 달라질 건 없으리라.
‘이걸 해결하고 나면… 봄 전에는 트라벨가에 갈 수 있겠지.’
이안의 시선이 기억을 헤집었다.
이미 그가 기억하던 흐름과는 많은 부분이 달라졌지만.
그렇다 해서 큰 흐름이 뒤바뀌진 않았을 터였다.
필수적인 퀘스트는 여전히 그를 기다리고 있을 터.
북부에 발을 들였으니, 해야 할 것들은 끝내고 내려갈 생각이었다.
그때쯤이면 아마 변방의 전쟁도 절정에 이르렀으리라.
‘…말도 안 되는 변수만 없다면 말이지.’
“…불편해.”
그때, 가장 큰 변수 중 하나가 그의 옆자리에 앉았다.
후드를 깊이 눌러 쓴 테사이아는, 안에 받쳐 입은 옷이 어색한 듯 연신 몸을 꿈틀댔다.
‘…반드시 죽여야 하는 녀석인데.’
이안은 그녀를 가만히 응시했다.
애초에 이 동행 자체가, 게임에선 없던 상황인 것 같았기 때문이다.
퀘스트가 뜨지 않았으니까.
어쩌면 지금 그는, 아예 새로운 길을 나아가는 중인지도 몰랐다.
‘물론 이 녀석 하나가 전체의 흐름에 엄청난 영향을 끼칠 수는 없겠지만….’
혹시 모르니, 그냥 지금이라도 쳐 죽이는 게 합리적인 선택 아닐까.
“…왜 그렇게 무섭게 봐, 이안?”
테사이아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해가 지는지, 그녀의 눈동자가 조금씩 붉게 물들고 있었다.
“맛있게 드세요. 많이 담았어요.”
식사가 테이블 위에 놓였다.
“…아무것도 아니야. 불편하다고 옷 벗지 마라.”
태연하게 내뱉으며, 이안은 접시로 시선을 돌렸다.
더 지켜본 후에 결정해도 늦지 않으리라, 다시 한번 생각하면서.
***
딱딱한 침대 위.
“……!”
이안이 번쩍 눈을 떴다.
컴컴한 천장을 잠시 응시한 그의 미간이, 이윽고 구겨졌다.
미치지 않고서야 일어날 리 없다고 생각했던 일이, 아무래도 일어난 것 같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