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Dark Fantasy Villain RAW novel - Chapter 78
078화
다각- 다각-
마차가 닝글로슬의 북부 관문으로 가까워졌다.
“호오….”
경비대장의 입에서 나지막한 탄성이 스쳤다.
마차는 그가 기억하던 모습과 여러모로 달라져 있었기 때문이다.
살이 오른 두 마리 전마는 마갑 위로 털가죽을 덮어썼고, 마차의 네 바퀴에는 넓적하게 다듬은 사슬 띠가 감겨 있었다.
그보다 더 눈에 띄는 건 마부석에 앉은 수인. 이제는 닝글로슬에서 그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는 샬롯의 행색이었다.
사냥꾼들이나 쓰는 여우 털모자와 부츠, 장갑에 늑대 가죽으로 만든 망토까지 두르고 있었으니까.
온갖 짐승의 털가죽을 두른 수인은, 경비대장이 보기에도 꽤나 괴상했다.
“정말 오늘 떠나시나 보군.”
마차가 멈추자, 경비대장이 옆으로 다가서며 내뱉었다.
이안이 피식 웃음 지었다.
“닝글로슬의 관문은 댁이 다 지키나?”
“순환식 근무라서 말이오.”
경비대장의 시선이 이안이 머리에 쓴 검은색 털모자와 설표 털가죽을 이어 붙인 망토를 훑었다.
“얼어 죽을 일은 없으시겠소.”
“다들 그러더군. 검사할 게 남았나?”
“없소만. 차별을 둘 순 없어서 말이오.”
온갖 털가죽이 푹신하게 깔린 마차 내부. 빵빵하게 들어찬 짐 가방.
마지막으로 늑대의 머리 가죽을 고스란히 남겨 만든 로브를 눌러쓴 테사이아까지 눈으로 훑은 경비대장이 웃음 지었다.
“돈을 안 받는다기에 무슨 소린가 했는데. 남는 장사셨군.”
“강요한 적 없어. 다들 알아서 들고 온 거지.”
“알고 있소.”
이안의 방식은, 이 암흑시대의 인간들에겐 파격적인 것이었다.
보상만 마음에 들면 창고의 쥐 떼를 잡아 달란 식의 하찮은 의뢰도 마다하지 않았으니까.
심지어 게으름을 피우지도 않았다. 의뢰의 접수와 해결이 거의 즉각적으로 이루어졌다.
도시에 머무는 시간이 길지 않으니 이안에겐 당연했지만, 현지인들의 눈엔 아니었다.
거기다 폐가에 깃든 망령처럼 병사들조차 겁을 내거나, 갱도에 깃든 저주처럼 해결할 방법을 몰라 방치해 둔 문제들도 별반 다를 바 없이 뚝딱뚝딱 해결해 버렸다.
이튿날부턴, 소문을 들은 병사들까지 집에 보관 중이던 물건을 들고 찾아갔을 정도였다.
이안은 아예 의뢰 접수를 몰아서 받았고, 그 후엔 받은 의뢰를 기계적으로 해결해 나갔다.
그렇게 며칠을 반복했으니, 마차가 이런 호화로운 모습이 된 것도 놀랄 일은 아니었다.
“주민들이 아쉬워하겠군….”
“아닐 거야. 당분간은.”
“저 북쪽에서도 무사하시길 바라겠소.”
“댁들도 그러길 바라지.”
“뭐, 이 동네에 별일이야 있겠소?”
경비대장이 어깨를 으쓱였다.
이안은 웃지 않았다.
이윽고 경비대장의 미간이 좁아졌다.
“…별일이 있을 것 같소?”
“그건 나도 모르지. 하지만 뭐든 대비해서 나쁠 건 없으니까.”
“…….”
“나라면 이 북쪽 장벽의 수비를 더 강화할 거야.”
무책임한 말투였지만, 경비대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 자가 해낸 일들을 생각하면, 결코 흘려들을 수 없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이들이 북쪽으로 떠나는 지금은 더더욱.
“명심해 두겠소.”
내뱉은 경비대장이 턱짓했다.
병사들이 비켜서고, 마차가 느긋하게 관문을 지나쳤다.
마차 뒤로 늑대 머리 가죽을 뒤집어쓴 테사이아가 고개를 내밀어, 그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그녀는 이안이나 샬롯과는 달리 아름다운 외모와 괴상한 언행으로 입소문을 탔다.
마법사보다 괴상한 건 요정 마법사란 농담이 생겼을 정도였다.
“근무가 끝나면 곧바로 보고부터 올려야겠군….”
중얼거리며 성벽 위로 올라간 경비대장은, 가라앉은 눈으로 그들의 뒷모습을 좇았다.
마차가 완만하게 이어진 황량한 언덕을 지나, 이윽고 완전히 보이지 않게 될 때까지.
***
마차가 관도 위를 나아갔다.
중간에 다른 마을로 들어서는 갈림길이 있었지만, 일행은 진입하지 않고 나아갔다.
보급도 충분했고 경비대장의 조언을 잊지 않은 덕분이었다.
이안은 물론 샬롯도 말없이 육포만 씹어 댔다. 어느새 그녀도 먹을 수 있을 때 먹어 둬야 한다는 이안의 지론에 감화된 상태였다.
이어지던 차분한 적막을 깨뜨린 건, 널브러져 있던 테사이아였다.
“궁금한 게 있는데 말야.”
고개만 이안 쪽으로 돌린 채, 그녀가 말했다.
“산맥 쪽으로는 왜 가는 거야?”
“…….”
“…….”
이안과 샬롯이 동시에 그녀를 돌아보았다.
이윽고 샬롯이 내뱉었다.
“진심으로 묻는 거냐?”
“당연하지. 왜 아니겠어?”
“하… 누가 귀쟁이 아니랄까 봐, 제 일에만 관심이 있었던 거군.”
“그럴 거면 대답을 하지를 마, 야옹아.”
이안이 헛웃음을 흘렸다.
하긴. 그동안 테사이아의 관심사는 생존뿐이었을 터였다.
심판자는 물론이고, 이안과 샬롯도 여차하면 그녀를 죽일 기세였으니까.
문제들이 어느 정도는 해결된 지금에야 비로소, 다른 생각을 할 여유가 생긴 것이리라.
테사이아가 그를 바라보았다.
“그래서. 왜야, 이안?”
“…우린 지금 산맥이 아니라, 그 옆으로 이어진 숲으로 가고 있다.”
“숲? 거기 뭐가 있는데?”
“몰라.”
“모른다고…?”
테사이아가 되물었지만, 이안의 설명은 그게 끝이었다.
눈을 깜빡이던 테사이아가 이내 어깨를 으쓱였다.
“이안은 역시 불친절하네. 괜찮아, 그것도 매력적이니까. 야옹아, 네가 대신 알려 줄래?”
“그래. 알려 주지. 한 번만 더 그렇게 부르면 밤까지 혀가 없어질 거다.”
“알았으니 알려 줘, 샬롯.”
“나도 모른다. 궁금하지도 않고.”
“궁금하지 않다고?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가면 알게 될 테니까. 뭐가 있건, 난 싸울 수만 있으면 돼.”
“짐승다운 대답이네. 그래… 어쨌든… 위험한 뭔가가 있다는 거네. 너희 반응만 봐도 바로 알겠어.”
테사이아의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샬롯이 싸늘한 눈으로 그녀를 돌아보았다.
“살 만해지니 다른 생각이 드나 보지? 부디 행동으로도 옮겨 주면 좋겠군. 기다리고 있겠다.”
“그냥 난 위험한 게 싫을 뿐이야. 내가 딴생각이 없단 건 이안이 제일 잘 알걸? 같이 목숨 걸고 싸운 사이니까. 안 그래 이안?”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테사이아가 고개를 돌렸다.
“이안…? 알고 있지?”
“…….”
진심으로 묻는 건가.
이안은 다시 한번 생각했다.
눈을 깜빡인 테사이아가 말했다.
“왜 아무 대답이 없어?”
“테사.”
“응?”
“우리가 함께한 지 얼마나 됐지?”
“글쎄. 한… 열흘… 쯤?”
“네가 내 목숨을 노린 시간은?”
“…에이, 뭐야. 그래서 아직도 날 못 믿는단 얘기야?”
“아니.”
“역시 그렇지?”
“한 번도 믿은 적 없단 얘기다.”
“응…?”
“난 계약을 맺은 거지, 널 믿는 게 아니야.”
순간 벌어졌던 테사이아의 입이 다시 꾹 닫혔다.
상처받은 듯한 표정이었지만, 이안은 개의치 않았다.
그렇다 해서 없던 신뢰가 생기는 건 아니었으니까.
애초에 이 세계에서 그가 믿는 사람을 다 합쳐도, 고작해야 한 손으로 꼽을 수 있는 수준이었다.
“…그래. 계약이랑 믿음은 아무 상관도 없지. 네 말이 맞아.”
이윽고 읊조린 테사이아가 이안을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난 정말 널 배신할 생각이 없어, 이안. 늘 말했듯이.”
진심이 가득 담긴 목소리. 하지만 그녀를 돌아보는 이안의 눈빛은 여전히 무덤덤했다.
“말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 테사.”
“……!”
“내가 널 믿게 되길 바란다면, 스스로 증명해.”
“널 배신하지 않을 거라는 걸?”
“네가 다른 마족과는 다르다는 걸.”
냉정하게 들리겠지만, 이안이 해 줄 수 있는 최선의 조언이었다.
지금까지 그가 본 바로는 착한 마물은 죽은 마물뿐이었고, 그건 마족이나 타락자도 마찬가지였다.
거기다 애초에 필요에 의해 살려 두었을 뿐. 본래라면 테사이아는 보자마자 죽였어야 할 존재였고, 그 사실엔 지금도 변함이 없었다.
다른 뱀파이어들을 모두 죽이고 난 후엔 그녀의 차례이리라.
그전에 그녀가 배신한다 해도 마찬가지일 테고.
다른 뱀파이어의 진혈을 흡수하지 못한 테사이아는 결코 이안의 적수가 될 수 없을 터였다.
테사이아가 살아남을 길은, 그러는 게 그에게 도움이 되리라는 걸 스스로 증명하는 방법뿐이었다.
메브나 루시처럼, 게임에선 그에게 죽었던 많은 이들이 그랬듯이.
‘…이 녀석이 가능할 것 같진 않지만.’
어쨌거나, 아직 테사이아에겐 남은 시간이 제법 많았다.
이런 말을 해 준 것 자체가 이안의 입장에선 기회를 준 셈이었으니, 남은 건 그녀의 몫이었다.
“어려운 말이네…. 하지만….”
잠시 생각에 빠져 있던 테사이아가 이윽고 읊조렸다.
“…그래도 조금은 알 것 같아. 해 볼게, 이안.”
그보다 한밤중에 도망쳐 버리는 게 더 빠를지도.
생각하며, 이안은 다시 육포를 입에 물었다.
대답은 기대하지도 않은 듯 기대 있던 테사이아가, 이윽고 문득 덧붙였다.
“그런데, 나는 안 믿으면서 설마 샬롯은 믿는 건 아니겠지?”
“…말 같지도 않은 소릴 하는군. 이안과 나는 서로 목숨을 걸고 맞붙었던 사이다, 건방진 귀쟁아. 나한테 잡혀 온 너하고는 시작부터가 달라. 안 그런가, 이안?”
“…….”
샬롯이 눈을 치켜뜨며 이안을 돌아보았다.
“이안…?”
내 믿음이 왜들 그렇게 중요한 거야?
눈을 치켜뜬 샬롯과 재미있다는 듯 미소 짓는 테사이아를 번갈아 바라본 이안이, 이윽고 혀를 찼다.
“쓸데없는 집착들 하지 마라. 내가 뭐라 한들, 말은 아무런 의미도 없어.”
“…….”
샬롯이 충격받은 듯 입에 물고 있던 육포를 떨어뜨리는 가운데. 눈을 가늘게 뜬 테사이아가 미소 지었다.
“결국, 우린 같은 처지네. 샬롯.”
“…….”
***
그늘이 아닌 곳에도 눈이 덮이기 시작했다.
저 멀리, 만년설이 덮인 산봉우리들의 모습이 드러났다.
세상의 끝이라고도 불리는 아히고른 산맥이었다.
저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고, 물론 이안도 마찬가지였다.
‘난 관심도 없지만.’
이제 길어야 며칠이면 산맥 인근에 접어들 터였다.
지도대로라면, 저지대로 이어지는 계곡으로 들어서야 하리라.
날이 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일행은 버려진 마을로 들어서는 갈림길로 접어들었다.
폐허나 다름없겠지만, 야영지를 꾸리기에는 적당한 장소였다.
사람들의 말대로라면 눈이 덮인 지역부터는 마경이나 다름없을 테니, 야간에 이동을 욕심내는 건 의미가 없었다.
심지어 하늘에 점점 먹구름이 몰려들고 있었다.
혹시 모를 눈보라를 피할 공간이 필요했다.
다행히 마을은 본래의 형태가 어느 정도는 보존된 상태였다.
목책도 대부분 무사했고, 버려진 집들도 눈이 쌓이거나 일부 무너진 곳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본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물론 그렇다 해서 냉큼 안으로 들어서진 않았다.
이안과 샬롯이 먼저 폐허 내부로 진입했다.
이런 버려진 마을은 마물이 둥지를 틀기에 딱 좋은 환경이었다.
“…운이 좋군.”
“아쉽군. 아무것도 없다니.”
다행히 마을은 텅 비어 있었다.
어쩌면 북부의 마물은 소굴을 만들 필요 따위는 없는지도 몰랐다.
마을로 마차를 몰고 들어온 샬롯은, 한쪽 벽면이 무너진 집 안까지 마차를 들였다.
어차피 버려진 마을이니, 이왕이면 마차를 가장 안전한 위치에 보관하려는 생각이었다.
샬롯이 의뢰의 보수로 받은 말린 콩을 말들 앞에 던져 놓는 사이, 테사이아가 모닥불로 쓰기 위한 장작들을 주워 왔다.
자연스러운 역할 분담.
그 사이 이안은 모닥불에 구워 먹을 건조 식량이나 준비하고 있었다.
한결 능숙하게 모닥불을 피운 샬롯이 건물 앞의 공터로 나섰다.
한동안 제대로 된 전투가 없었으니, 미리 감각을 일깨워 두기 위해서였다.
아스콜드와의 전투 때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는 충격도, 그녀가 다시 수련을 시작하게 하는 계기로는 충분했다.
“또 하게? 열심이네, 야옹아.”
테사이아가 비웃듯 말했다.
샬롯은 신경도 쓰지 않고 허리춤의 쌍검을 뽑았다.
이내 그녀가 춤을 추듯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검은 느리다 빨라지기도 했고, 묘기를 부리듯 움직이거나 때로는 궁지에 몰린 것처럼 물러나기도 했다.
보이지 않는 적을 상대하듯이.
묘한 기시감에 이안의 눈이 가늘어졌다.
‘…저거, 나랑 싸우는 거 아닌가.’
그녀에게 패배를 안긴 유일한 상대이니 당연한 건지도 몰랐다.
눈이 하늘하늘 내리기 시작했음에도, 그녀는 개의치 않고 검무를 이어갔다.
“…오늘은 그쯤 해도 될 것 같다, 샬롯.”
그녀를 멈춰 세운 건 이안이었다.
고개를 갸웃하며 돌아본 샬롯이, 그의 눈빛을 확인하고는 미간을 좁혔다.
“혹시?”
“…그래.”
이안이 손을 펼쳤다.
“시작됐다.”
손아귀의 문양이 공명하고 있었다.
이전까지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선명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