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Dark Fantasy Villain RAW novel - Chapter 85
085화
‘뭐 이렇게 터프해?’
탄환처럼 날아가면서, 이안은 당황하지 않고 바람 칼날을 시전했다.
포물선을 그리던 그의 궤적에 다시 가속도가 붙었다.
“이안만 던지면 어쩔 건데! 우리는?”
테사이아의 외침이 이어졌다.
“우린 끝까지 싸운다!”
“야이, 미친-”
샬롯이 포효하는 가운데, 닫히고 있는 대문의 틈이 가까워졌다.
집중력이 최고조로 치닫고, 허공에서 비튼 이안이 그 사이를 통과했다.
촤아악-
마력 장막을 단숨에 통과한 이안이 바닥을 구르며 착지했다.
-비정한 결단이구나, 찬탈자여…! 네 야망의 크기를 알겠노라…!
웅웅, 온몸을 울리는 듯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안은 비늘 검을 고쳐 쥐며 고개를 들었다.
예상대로, 여왕의 알현실이었다.
높다란 단상 위. 벽면을 따라 천장까지 이어진 거대한 왕좌가 눈에 들어왔다.
잿빛 미라 같은 모습으로 그 위에 앉은 거인 여왕의 모습도.
머리에 얹은 상대적으로 작은 크기의 황금 왕관. 목에 건 목걸이에는 거대한 보라색 보석이 빛을 머금고 일렁이고 있었다.
이안의 눈앞에 퀘스트 완료 창이 떠올랐다. 또 다른 퀘스트 창이 이어진 건 그 직후였다.
찬탈자의 선택.
그 순간 목걸이의 보석에서 빛이 번졌다.
익숙한 속삭임이 이어졌다.
-여왕의 주문을 봉인하겠다, 맹약자여… 내 힘이 다하기 전에 왕좌를 찬탈하라….
보석의 빛이 잦아들었다.
여왕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건방지구나, 악마야. 불멸의 힘도 불사의 왕국도 오로지 짐을 위한 것인즉…!
“…지하에서도 심심할 틈은 없었겠군.”
퀘스트 창을 닫으며 이안이 읊조렸다.
쿵, 대문이 완전히 닫혔다.
단상 앞, 중무장한 채 도열한 친위병 조각상들이 대검을 늘어뜨렸다.
이안의 눈동자에 붉은 마력이 휘몰아치기 시작한 순간.
쿠웅- 쿠웅-
대검을 움켜쥔 친위병들이 돌진하기 시작했다.
아직은 둔탁한 움직임.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밖의 수호병들이 그랬듯 자연스럽고 기민해질 터였다.
콰르르-
물론 그렇게 될 때까지 가만히 기다려 줄 생각 같은 건 없었다.
돌진하는 친위병들의 한복판으로 화염 장벽이 치솟았다.
평소보다 훨씬 작은 크기.
증폭이 더해지지 않았음을 감안해도 그랬다.
‘적색은 잘 안 먹히는 공간이라 이거지.’
이안은 장벽을 뚫고 나온 친위병을 향해 몸을 날렸다.
화르르륵-
주위로 피어오른 춤추는 불꽃이 놈을 향해 뻗어 나갔다. 이어진 폭발. 그 사이를 뚫고 솟구친 이안이, 바람 칼날이 맺힌 비늘 검을 힘껏 내리쳤다.
카드드득-
친위병의 목덜미가 푹 파였다.
얼음 내부로 새카만 내골격이 설핏 드러났다.
‘일단 하나는, 확인.’
검을 뽑아 물러나면서, 이안이 눈을 빛냈다.
저놈들과 싸워야 한다는 걸 직감한 순간부터, 실험해 보고 싶은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헛된 발버둥을 치는구나, 찬탈자여…! 네놈은 끝내 죽음을 맞이할 것인즉. 왕좌를 탐낸 대가를 치를 것이다…!
여왕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난 네 왕좌에 전혀 관심 없거든?
생각하며, 이안은 다시 거인 친위병들의 한복판으로 몸을 날렸다.
떨어지는 대검들을 몸을 날려 피한 그가, 처음 자신이 공격했던 친위병을 향해 재차 솟구쳤다. 불길을 머금은 비늘 검이, 내골격이 드러난 목덜미를 향해 다시 한번 뻗어 나갔다.
카드득-
목을 단숨에 잘라낼 수는 없었다.
하지만 이안은 실망한 기색 없이, 검 자루를 양손으로 움켜쥔 채 친위병의 가슴팍에 매달렸다.
다음 순간 놈이 그를 떨쳐 내려는 듯 손을 휘저었다. 훌쩍 놈의 어깨로 뛰어오른 이안이, 손길이 지나치자 다시 검 자루를 붙잡고 매달렸다.
쒸에에엑-
그런 그를 향해 또 다른 친위병이 대검을 휘둘렀다. 화륵- 비늘 검에 불길이 치솟고, 이안이 친위병의 가슴을 박차며 검을 뽑았다.
콰지직-!
날아든 대검이 그대로 친위병의 가슴팍에 틀어박혔다. 두꺼운 얼음 갑옷에 균열이 가고, 주위로 얼음 가루가 흩날렸다. 균형을 잃은 친위병이 천천히 뒤로 쓰러졌다.
바닥을 굴러 착지하며 그 모습을 돌아본 이안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역시, 이게 공략법이었네.’
대회관을 가로지르면서도 느꼈지만, 이놈들은 방어력과 저항력이 지나치게 높았다. 등장 시기에 맞지 않는 수준이었다. 다른 공략법이 있으리란 생각이 든 건 당연한 수순. 게다가 이놈들은 지성이 있는 것 같지 않았다. 그저 기계적으로 맡은 임무를 수행하는 골렘에 가까웠다.
그래서 혹시나 싶었는데. 추측이 확신으로 변하는 순간이었다.
‘현실이 되고 나서도, 게임에서 있었던 공략 요소들이 완전히 사라지는 일은 없단 말이지.’
이어지는 둔탁한 공격을 이리저리 피하며, 이안은 쓰러진 친위병을 향해 달려갔다.
친위병들이 무감정한 움직임으로 그의 뒤를 쫓았다.
곧바로 왕좌로 달려가지는 않았다. 여왕이 위기에 처했다고 느끼면, 이 친위병들이 어떤 식으로 미쳐 날뛰기 시작할지는 그도 예상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어쩌면 여왕 본인이 움직이기 시작할지도 몰랐다.
당장 확실하게 전력을 줄일 방법을 앞에 두고, 또 다른 도박 수를 더할 필요는 없었다.
-짐을 방해하지 말라, 악마여. 네 방해는 찬탈자의 고통으로 돌아올 뿐이니. 그 후엔 네놈에게도 길고 긴 고통을 약속하리라.
그가 쉴 틈 없이 움직이는 동안에도, 여왕의 목소리는 이어지고 있었다.
앞에서 벌어지는 전투는 신경도 쓰지 않는 듯한 말투였다.
-시간이 많지 않다, 맹약자여…! 여왕이 주도권을 되찾는다면 대업이 수포로 돌아가고 말 것이니. 어서 저들을 뚫고 왕좌로 오라…!
반면 악마의 속삭임은 점점 더 다급해졌다.
말하는 걸 보니 아직 살만한 것 같은데.
속으로만 대꾸하며 쓰러진 친위병의 위로 올라탄 이안이 다른 친위병들을 돌아보았다.
대검들이 고요한 공기를 찢어발기며 떨어져 내렸다.
이안이 몸을 날렸다.
콰앙! 콰직!
쓰러진 친위병이 난자당했다. 갑옷이 전부 으스러진 놈은 뼈대를 거의 다 겉으로 드러낸 채였다.
친위병들이 대검을 회수하기 전에 되돌아온 이안이, 훤히 드러난 놈의 목을 향해 검을 내리쳤다.
바람 칼날. 예리한 바람에 불길이 뒤엉켰다.
콰드드득-
친위병 하나의 목이 몸에서 분리됐다. 머리를 잃은 놈의 몸이 잠시 꿈틀대다가, 이윽고 잦아들었다.
본능적으로 상태창을 확인한 이안의 눈이 순간 빛났다. 경험치가 올라 있었다.
‘보스전은 보스전이란 말이지…?’
그의 시선이, 대검을 회수 중인 다른 친위병에게 향했다.
두 번째를 처치하는 건 처음보다 더 쉬웠다. 친위병들이 공격을 준비하길 기다렸다가, 타이밍을 맞춰 돌진했다. 다른 친위병들의 대검이 이안이 매달려 있던 놈의 전신을 난도질했다. 이안은 갑주가 으스러진 채 쓰러진 놈의 위로 올라탔다. 곧 또 한 번 대검들이 쏟아졌다.
훤히 드러난 목덜미. 비늘 검의 주문을 사용한 건, 놈의 목을 썰어 내는 한순간으로 충분했다.
-제법 재주는 있다만, 네 야망은 불가능한 것이다, 찬탈자여. 이 악마는 짐의 조각난 영혼에서 짐의 야망과 광기를 먹고 태어난 존재인즉…! 끝내 짐을 거스를 수는 없을 것이며, 오로지 짐만이 이 악마를 다스릴 수 있느니라…!
-여왕의 기만에 흔들리지 말라, 맹약자여…! 고귀한 혈통을 타고난 그대는 나를 품을 수 있으며, 나 또한 그대 없이는 아무런 야망도 이룰 수 없음이니…!
번갈아 가며 더럽게 말 많네.
생각할 찰나, 문득 여왕의 목걸이에서 마력의 파장이 일었다.
-겁 먹었구나, 악마야. 네가 흔들리는 것이 느껴진다….
여왕의 웃음소리.
친위병들의 전신에서 냉기가 번지기 시작했다. 내딛는 걸음마다 얼음 가시가 치솟고, 휘두르는 검격에 서리 칼날이 흩날렸다.
‘2 페이즈인 건가.’
하지만 대응은 간단했다.
이안은 혼돈력을 섞어 화염 장벽을 펼쳤다.
날아들던 서리 칼날이 그의 몸에 닿기 전에 녹아 흩어지고, 얼음 가시도 빠른 속도로 녹아내렸다.
이안은 마력을 아끼지 않고 불을 지르며 같은 과정을 반복했다.
하나, 그리고 또 하나의 친위병의 목이 달아났다.
-멈추지 말라, 맹약자여…! 여왕의 주문은 다시 봉인하였으니, 우리의 승리가 머지 않았다…!
악마의 속삭임과 함께 목걸이의 마력이 잦아들었다.
친위병들을 감싼 냉기도 흩어졌다.
이안은 신경 쓰지 않고 전투를 이어 나갔다.
친위병의 숫자가 줄자 하나를 처치하는데 필요한 시간이 늘었다. 이안은 놈들의 사이를 오가며, 놈들이 서로에게 비슷한 타격을 입히도록 했다. 그 과정에서 또 하나의 목이 먼저 달아났다.
이제 남은 건 고작 둘이었다.
그사이, 여왕의 목걸이가 다시 일렁이기 시작했다.
-악마의 꼬임에 넘어가지 말라, 찬탈자여. 놈은 자유를 손에 넣고자 그대를 이용하는 것일 뿐…! 악마가 끝내 네 영혼을 삼키리라…!
여왕의 목소리에 위기감이 묻어났다. 악마의 속삭임이 기다렸다는 듯 이어졌다.
-듣지 말라, 맹약자여. 여왕이야말로 이 순간에도 용의 마력으로 내 영혼을 녹이고 있으니. 그대가 아니라면 나는 끝내 소멸하고, 불멸의 정복자가 다시 대륙을 피로 물들이리라…!
지들끼리 난리가 났네.
난도질 끝에 또 하나의 친위병을 처리한 이안이 숨을 헐떡이며 코웃음 쳤다.
누구의 말이 진실인지 따위는 중요하지도, 궁금하지도 않았다.
어느새 친위병이 단 한 마리만 남았다는 사실만이 중요할 뿐.
쾅!
마지막 친위병의 가슴팍에 폭발이 일었다. 이어, 이안은 놈의 발아래 일점 폭발을 시전했다. 폭발에 휩쓸린 친위병이 쓰러졌다. 놈의 머리로 춤추는 불꽃을 퍼부은 그가, 균열이 잔뜩 일어난 목을 연달아 후려쳐 끝내 잘라냈다.
비늘 검에 일렁이던 불길이 잦아들더니 이윽고 완전히 꺼졌다.
자루에 박힌 마석이 빛을 잃었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이제 서 있는 친위병은 단 하나도 없었으니까. 전부 난도질당하고 목이 잘린 얼음 조각이 되어 널브러졌다.
이안의 시선이 비로소 왕좌로 향했다.
남은 건 그 위에 걸터앉아 미동조차 하지 않는 여왕뿐이었다.
바싹 말라붙은 여왕의 얼굴에는 안광조차 맺혀 있지 않았다.
육신은 그저 영혼을 담아둔 껍데기에 불과하다는 듯이.
-끝내 비극이 일어나겠구나… 찬탈자여, 나의 병사들은 결코 네 즉위를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여왕의 목을 베어라, 맹약자여….
여왕의 탄식과 악마의 속삭임이 번갈아 이어졌다.
이안의 입가에 헛웃음이 스쳤다.
정말 왕위 찬탈자가 된 것 같은 묘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 지하 동굴에 발을 들이기 전까지만 해도, 상상도 해 본 적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 것 치곤, 정작 보스전은 별로 어렵지 않았지만.’
이안은 왕좌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여왕이 독백하듯 읊조렸다.
-왕국의 군단이 왕을 잃은 슬픔으로 눈을 뜰 것이다. 짐이 억눌러온 혼돈이 범람할 것이며, 짐의 반려가 죽음을 거슬러 돌아오리라. 끝내는 악마가 네 영혼을 삼켜 대륙을 피로 물들일지니….
저주나 다름 없는 말들.
단상을 올라 왕좌 앞에 선 이안이, 한쪽 입술을 말아 올렸다.
“이 안에 갇혀만 있어서 모르나 본데. 이미 다 일어나고 있는 일이야. 새삼스럽지도 않지. 게다가….”
비늘 검을 쥔 이안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넌 결국 모든 통제력을 잃게 됐을 거다, 여왕.”
-그게 무슨 의미지…?
“내가 이미 겪어 본 것들이 있단 얘기지.”
내뱉은 이안이 검을 떨치듯 휘둘렀다. 검신을 타고 번진 바람 칼날이 여왕의 목을 갈랐다.
허무할 정도로 단숨에 잘려나간 머리가 왕좌 아래로 떨어졌다.
원통함이 가득 담긴 귀곡성이 장내에 메아리치고.
퍼석-
단상에 떨어진 머리가 그대로 재가 되어 허물어졌다. 귀곡성이 순식간에 잦아들었다. 황금 왕관이 볼품없는 소리를 내며 단상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푸스스스-
여왕의 몸도 재가 되어 흩날렸다.
그녀가 걸치고 있던 목걸이가 떨어져, 이안의 발치로 굴러왔다.
팬던트 한복판에 박힌 주먹만 한 보석에서, 출렁이는 파장이 번졌다.
-휼륭하도다… 맹약자여…!
“그래. 너도 훌륭했다.”
이안이 덤덤하게 대꾸했다. 이놈 때문에 먼 길을 오게 되긴 했지만, 어쨌든 쏠쏠한 보상들을 손에 넣었기 때문이다.
친위병은 물론, 방금 죽인 여왕도 적지 않은 경험치를 줬다.
이 녀석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이렇게 편하게 해낼 수 없었으리라.
-불멸의 힘과 권능이 네 앞에 있노라. 이제 나를 들어 맹약의 증표를 내보이라…! 새로운 왕좌의 주인으로 거듭날지니…!
악마의 목소리는 아주 달콤하고, 동시에 강대한 마력을 머금고 있었다. 웬만한 자들은 듣는 것만으로도 홀리고 말았을 수준이었다.
“꼭 말해주고 싶었는데 말이지.”
이안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난 왕좌나 불멸의 힘 따위엔 관심도 없어. 네 약속을 믿은 적도 없고.”
-뭐라고…?
악마의 목소리가 의아해졌다.
-하지만, 맹약을 맺었지 않느냐?
“내가 널 찾아가겠다 했지. 그리고 그 맹약은 지켜졌다. 너와 나 사이엔, 이제 남은 약속 같은 건 없어.”
보석 표면의 광채가 휘청댔다.
믿을 수 없는 것이 당연했다. 고대 거인 왕국과 막대한 공허의 마력을 손에 넣을 기회를 거절할 자가 있으리라고는, 생각조차 한 적 없었을 테니까.
-그럼, 네가 원하는 것은 뭐지?
“경험치. 그리고 퀘스트 완료 보상.”
-퀘스트…? 그게 무슨…?
비늘 검을 떨어뜨린 이안이 허리춤으로 손을 가져갔다.
스르릉, 푸른 신성이 맺힌 검날이 서늘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단죄의 검을 양손으로 쥔 이안이 한 걸음 물러서며 내뱉었다.
“널 죽이면 얻게 될 것들이지.”
검에 담겨 있던 신성력이 한순간 눈부시게 타올랐다.
단죄의 일격. 티르 엔의 신성력이 응축된 푸른 호선이, 보라색 보석 한복판으로 떨어졌다.
-아- 아아아아악!
여왕의 그것보다 훨씬 더 커다란 비명이 터져 나왔다. 쩌저적, 보석 표면에 균열이 일고 다음 순간 완전히 박살 났다. 그 내부에 고여있던 오염된 마력이 신성력에 닿아 타들어 갔다. 그 안에 담긴 영혼도.
-아아아… 아아아아악-!
비명이 악에 받친 울부짖음으로 변한 건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잦아드는 푸른 섬광 사이.
푸화악-!
보석에서 폭발하듯 터져 나온 검은 마력이 그대로 이안을 덮쳤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