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Dark Fantasy Villain RAW novel - Chapter 86
086화
이안의 눈이 커졌다.
피할 틈도 없었다. 완전히 그를 집어삼킨 마력 덩어리가, 순식간에 그의 시야를 가리고 사지를 옭아맸다. 뒤이어 몸의 모든 구멍으로 오염된 마력이 스멀스멀 밀려들었다.
-감히 날 속이고 배신하기까지 하다니…!
이안의 뇌리로 악마의 절규가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나는 네놈과 함께할 생각이었다! 내 반려이자 그릇으로, 영원히…!
마력에 담긴 끈적한 광기와 탐욕. 불같은 분노와 배신감이 이안의 정신을 휩쓸었다. 평범한 인간이라면 곧바로 이성을 잃고 미쳐 버렸을 막대한 감정의 해일.
-이젠 내가 네놈을 사로잡을 것이다…! 네 영혼은 영원히 내게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니!
오염된 마력이 더 거세게 밀려들었다. 이안의 몸속을 가득 채우려는 모양이었다.
이안의 내면 어딘가에서 꿈틀대는 맥동이 번진 건 그때였다.
심상 가장 깊은 곳에 자리한 혼돈의 파편이 울부짖고 있었다.
-네놈의 육신은 이제 내… …?
악마의 절규가 순간 잦아들었다.
지금쯤 이안의 온몸에 오염된 마력이 넘쳐흘러야 하건만.
아무리 마력을 밀어 넣어도 넘쳐흐르긴커녕 가득 채울 수도 없었다.
무언가가 오염된 마력을 끝없이 집어삼키고 있었으니까.
혼돈의 파편이었다.
-이건…? 아니, 웃기지 마라…!
포효한 악마가, 마력과 함께 자신의 영혼을 이안의 육체로 밀어 넣었다.
폭포수를 역행하는듯한 저항력.
이안의 몸속에 들어오고 나서야, 그는 자신의 마력에 휩쓸리는 이안의 영혼이 조금도 오염되거나 물들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단단함을 넘어 이질적인 느낌마저 드는 영혼.
오염된 마력을 끝없이 빨아들이던 혼돈의 파편이 심장이 맥동하듯 울리기 시작한 건 그 직후였다.
작디작은 파편에서 혼돈력이 폭발하듯 뿜어져 나왔다.
오염된 마력은 물론 악마의 영혼마저도 저항조차 하지 못하고 휩쓸려 밀려났다.
악마를 놀라게 한 것은, 이안의 육체에서 튕겨 나갔다는 사실만이 아니었다.
-어떻게 이렇게 순수한 혼돈을…? 아무리 고귀한 혈통이라 하나, 한낱 필멸자가…?
“…나도 궁금해하던 부분이군.”
이안이 내뱉은 건 그때였다. 이안을 뒤덮은 마력이 당혹스럽게 출렁댔다.
악마의 마력은 이제 조금도 그의 육체를 침범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저 전신을 움켜쥔 채 버티는 것이 고작이었다.
“어쨌든….”
이안이 감고 있던 눈을 떴다.
흰자위 전체가 선명한 보랏빛으로 일렁였다. 그의 시선이 마력 덩어리 한복판, 악마의 영혼을 꿰뚫듯 응시했다.
“…네놈이 내 몸을 차지할 방법은 없는 것 같군.”
-네놈은 설마…. 혼돈, 혼돈의…?
악마가 더듬댔다. 그사이 이안은 전신에 넘실대는 혼돈력을 단죄의 검에 밀어 넣었다. 아직 남은 푸르스름한 신성력의 잔재가 짙은 남색으로 물들며 피어올랐다.
티르 엔이 이 사실을 알게 되면 분개하겠지만.
어차피 그녀의 시선은 마경의 이 깊은 지하까지는 닿지도 않았다.
투두두둑-
팔에 힘을 주자 팔을 옭아맨 마력이 떨어졌다. 머리 위로 치켜 올라간 단죄의 검이 그대로 떨어져 내렸다.
쉬학-
남색 호선이 오염된 마력을 가르고, 그 한복판의 영혼까지 꿰뚫고 지나갔다.
찰나의 적막.
세로고 길게 이어진 궤적이 폭발하듯 벌어졌다. 악마의 찢어지는 비명. 뭉쳐 있던 마력이 물풍선이 터지듯 흩어졌다.
-아, 안 돼…! 이렇게는…! 이렇게는…!
악마의 허망한 단말마가 허공에 메아리쳤다. 쩌적, 왕좌 옆의 허공에 균열이 일었다. 깨진 공간의 틈 너머로 보랏빛이 너울거렸다.
쉬하아아아-
사방에 자욱한 마력과, 타락자의 영혼에서 태어난 악마가 공허로 빨려 들어갔다.
한없이 멀어지던 비명이 한순간 칼로 자른 듯 끊어졌다.
공간의 균열이 사라졌다.
‘…여왕은 그냥 사라지던데, 왜 저놈만 공허로 빨려 들어간 거지.’
생각한 순간, 눈앞에 퀘스트 완료 창이 떠올랐다. 당연하게도 더는 이어지는 퀘스트가 없었다.
확인 창을 닫은 이안이 잠시 숨을 골랐다.
전신을 뒤덮었던 혼돈력이 파편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혼돈의 파편은 다시 고요해졌다.
아까 전, 파편이 오염된 마력을 빨아들인 건 이안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일어난 일이었다.
이안의 몸속에 다른 불순물이 끼어드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는 것처럼, 파편이 멋대로 작동했었다.
‘설마, 이 안에서 뭐가 태어나고 그러는 건 아니겠지.’
이안은 파편이 아주 조금 더 커진 것을 느끼며 생각했다.
사실 그는 이 파편에 대해 아는 것이 많지 않았다. 혼돈력도 마찬가지였다.
태초의 힘이며, 게임에서 캐릭터를 타락시키면 다룰 수 있게 되는 힘이라는 것. 다른 힘과 어떤 식으로든 섞일 수 있다는 것 정도가 지식의 전부였다.
혼돈의 파편을 계속 키우다 보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혼돈력을 다루다 보면 어떤 부작용이 생기는지 같은 건 전혀 알지 못했다.
딱히 관심을 두지 않은 건 타락 DLC도 마찬가지였으니까.
세계관이나 설정, 악역과 조연 캐릭터들의 뒷사정 같은 것들과 마찬가지로, 1회차 플레이에 신경 쓸 콘텐츠는 아니었다.
‘…어쨌든, 최악의 결말 같은 게 기다리진 않겠지. 그래도 엄연히 플레이어에게 주어진 힘인데.’
어차피 지금에 와서 확인할 방법은 없었다.
중요한 건 덕분에 예상치 못한 기습을 무사히 넘겼고, 경험치와 퀘스트 보상까지 손에 넣었다는 사실이었다.
대충 결론 내린 이안은 비로소 단죄의 검을 회수하며 시선을 돌렸다.
차가운 적막이 내려앉은 장내.
닫힌 대문 너머도 고요했다.
전투가 끝났거나, 둘 다 죽은 것이리라. 후자일 가능성은 거의 없지만.
“…….”
몸을 돌린 이안은, 단상 아래 떨어진 왕관을 집어 들었다.
묵직한 무게감.
여왕의 머리에 있을 땐 족두리처럼 보였건만.
그의 머리통 정도는 그냥 통과시키고도 남을 크기였다.
정보도 확인할 수 있었다.
특별한 능력은 없는, 전리품.
하지만 이안의 입가에는 희미한 미소가 스쳤다.
“…꽤 비싸게 팔 수 있겠군.”
이건 고대 거인 왕국이 북부의 지하에 아직까지 존재하고 있었으며, 그의 손에 의해 완전히 멸망했음을 증명하는 명백한 증거물이었다.
이만한 전리품이라면 자치령 사령부나 루 솔라 교단. 그도 아니라면 제국 황실에라도 비싼 값에 팔아넘길 수 있으리라.
게임에서도 공허나 고대 문명과 관련된 전리품은 그런 식으로 팔아먹을 수 있었으니까.
설사 그들을 통하지 않더라도 팔아 치울 길은 많았다.
딱 봐도 순금으로 만들었으니까.
중간중간 박힌 보석들도 전부 진짜일 터였다.
이 값만 받아 낸다 하더라도, 제국제 마법 무구를 몇 개는 살 수 있으리라.
“슬슬 장비 빨도 필요해지고 있으니까….”
왕관을 아공간에 넣은 이안이 다시 장내를 훑어보기 시작했다.
그의 시선이 측면의 벽 구석에 솟은 또 다른 대문에 멈춘 순간.
쿠… 구구구구….
알현실의 정문이 느릿느릿 열리기 시작했다.
수인과 흡혈 마족의 모습이 그 사이로 드러났다.
이안은 놀랍지도 않다는 듯 그들을 바라보았다.
샬롯이 먼저 장내로 들어섰다.
“호오… 대단하군….”
그녀의 모습은 대회관에서의 전투도 녹록지 않았음을 여실히 증명하고 있었다.
한쪽 볼에 가로로 길게 새겨진 새로운 상처. 쌍검 중 하나는 어디로 갔는지 검집만 남았고, 새로 맞춘 방어구도 곳곳에 구겨지고 찢겨 나갔다.
견갑과 팔목 보호대, 허벅지까지 이어진 각반이 특히 그랬다.
안에 받쳐 입은 누비옷조차 갈기갈기 찢긴 한쪽 팔에서는 아직도 피가 흐르고 있었다.
물론, 그녀는 자신의 부상 따위에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이 많은 것들을 전부 홀로 상대했다니….”
그저 널브러진 친위병들의 잔해를 눈에 담으며 감탄할 뿐.
그 옆을 한심하다는 듯 노려보며 지나친 테사이아가, 언제 그랬냐는 듯 입가에 미소를 머금으며 이안을 바라보았다.
“무사해서 다행이야, 이안.”
그녀의 행색 역시 남루해지긴 마찬가지였다.
늑대 로브는 곳곳이 찢어지고 구멍이 나서 너덜댔고. 안에 받쳐 입은 옷들은 죄다 찢어져서 새하얀 속살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그래. 너희도.”
이안이 걸음을 옮기며 담담하게 말했다. 테사이아가 코웃음을 쳤다.
“이게 무사해 보여? 몇 번이나 죽을 뻔했어. 몇 번이나.”
“엄살이 심하군. 그 정도론 죽지도 않는 주제에.”
샬롯의 핀잔에 테사이아의 미간이 좁아졌다.
“거의 다 너 때문에 그런 건데, 엄살? 이안, 쟨 그냥 광전사야. 도망칠 수 있는 상황에서도 죽으려고 작정한 것처럼 군다고. 내가 얼마나 고생했는 줄 알아?”
“잘들 하고 있군.”
“뭐라고…?”
이안은 귀를 의심하는 듯한 표정의 테사이아를 지나치며 덧붙였다.
“밖의 조각상들은 전부 해치웠나?”
“아쉽게도 그건 아니다. 갑자기 움직임이 느려지더니 멈춰 버리더군. 덕분에 네가 이겼다는 걸 알았다.”
그것들이 멈춘 건 여왕이 죽고 나서일까, 아니면 악마가 죽고 나서일까.
확인할 방법은 없었다.
테사이아의 첨언이 이어졌다.
“그전까진 난리도 아니었어. 갑자기 칼에서 고드름이 튀어나오질 않나 얼음 가시가 치솟질 않나. 저 미친 야옹이만 신났었지.”
여왕의 마법이, 대회관의 경호병들에게도 적용되었던 모양.
이안이 무심하게 고개를 주억거리는 사이, 샬롯이 덧붙였다.
“말은 결국 지키지 못했다. 적이 너무 많았다.”
“테사이아가 피를 빤 건 아니고?”
“그것도 맞다.”
“야, 그건 어쩔 수.”
“하지만 그땐 이미 죽은 상태였고, 귀쟁이도 부상을 당해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
끼어들었던 테사이아가 입을 뻐끔댔다. 샬롯이 자신의 입장까지 대변해 주리라곤 예상하지 못한 듯 조금 놀란 표정이었다.
이안이 어깨를 으쓱였다.
“예상하지 못 한 일은 아니야.”
“복수는 제대로 해 줬다. 그거면 그 녀석들에게도 위안이 되겠지.”
“그래서, 정말 여기 여왕이 잠들어 있기라도 했던 거야?”
테사이아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타락했더군. 그래서 죽였다.”
“대단한 업적이군. 왕 살해자라.”
샬롯이 탄성을 흘렸다.
이안의 입가에 헛웃음이 번졌다.
“오해를 사기 딱 좋은 말이군. 어디 가서 그런 말은 하지 마라.”
“그런데 어디 가, 이안?”
참 빨리도 묻는다.
알현실 측면의 문 앞에 멈춰 서며, 이안이 덤덤하게 대답했다.
“여기서 나가는 길을 찾아야 되거든.”
“뭐라고…?”
테사이아가 순간 헐떡댔다.
“영원히 여기 갇힐 수도 있단 말이야?”
이안은 대답 대신 문을 밀기 시작했다.
벽을 미는 것 같은 묵직함.
쩍, 쩌적….
오랜 시간 열린 적 없는 듯, 문틈 사이로 얼음 깨지는 듯한 소리가 번졌다.
이안은 양팔에 더 힘을 줬다.
여왕과 악마를 죽이고 나서도, 동굴 입구가 움직일 때 느껴지던 지진은 일어나지 않았다.
동굴 입구는 아직도 지하에 묻혀 있으리란 의미였다.
그러니 다른 통로를 찾아야 했다.
넓은 궁전이니, 샅샅이 뒤지다 보면 하나쯤은 더 있을지도 몰랐다.
‘최악의 경우엔 갈색을 찍을 수밖에. 지각 변동까지만 익히면, 어떻게든 해 볼 수 있을 테니까.’
쿠… 구구구….
다행히, 그런 최악의 상황은 일어나지 않았다.
천천히 벌어지기 시작한 문틈 너머로, 칠흑 같은 어둠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서늘한 한기가 흘러들었다.
‘…어디로 이어지는 거지?’
이안이 미간을 좁히는 사이, 잽싸게 달려온 테사이아가 물었다.
“길이네? 나갈 수 있는 거야?”
“그건 가 봐야 알겠지.”
내뱉은 이안이 다시 몸을 돌렸다.
테사이아가 눈을 끔뻑였다.
“길을 찾아 놓고, 또 어디 가?”
“궁전을 뒤질 거다.”
걸음을 옮기며 대답한 이안이 아공간에서 봉인함을 꺼냈다.
“너흰 쉬면서 상처를 치료해.”
샬롯이 혀로 입술을 핥았다.
“전리품을 찾으려는 거냐? 그렇다면 나도 같이 가고 싶은데.”
“뭐, 그럼 그러던가.”
테사이아가 의욕 없는 표정으로 읊조렸다.
“…여기 뭔가 대단한 보물이 묻혀 있지는 않을 것 같은데.”
“있길 바라는 게 좋을 거다.”
“왜?”
“여기서 얻은 전리품은 너희한테도 나눠 줄 거니까.”
“……!”
눈을 치켜뜬 테사이아가, 곧바로 은발을 펄럭이며 날아올랐다.
***
파라락-!
“이안, 저 안쪽 방에 이런 돌이 잔뜩 쌓여 있어.”
“마력이 다 빠져나간 마석이군.”
“…쓰레기란 뜻이야?”
“바로 그거다.”
파라락-
“이안, 저쪽엔 이런 뭔가 있어 보이는 책이… 어…?”
“다음부턴 들고 오는 동안 바스라 지는 건 그냥 버려라.”
“…….”
안에서부터 시작된 전리품 수색은 소득 없이 이어졌다. 지하 궁전은 정말 여왕의 연구를 위해 만들어진 공간인 모양이었다.
알현실 옆에 따로 위치한 침실은 말 그대로 텅 비어 있었고. 이어진 여왕을 섬기는 마법사들의 휴식 공간. 창고. 연구실. 서고 따위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기나긴 시간을 놓여 있던 물건들은, 썩지도 않고 그저 빛 바란 채 삭아버렸다.
서고의 수많은 양피지와 책들은, 대부분 건드리기만 해도 툭툭 바스러졌다.
그나마 멀쩡한 책들도 건질 건 없었다. 하나 같이 불길하게 생긴 원시 상형 문자와 이안도 알아볼 수 없는 어려운 고대 북부어, 기호와 도형 따위가 빼곡했다.
심지어 방패로 써도 될 만큼 컸다.
땔감으로 쓰기 위해 몇 권 챙긴 게 소득의 전부였다.
공허의 힘을 연구할 때 쓰인 것으로 보이는 실험 도구들도 상태는 마찬가지였고, 창고마다 산처럼 쌓인 마석들은 마력이 모두 흩어진 돌 더미에 불과했다.
이안은 딱히 실망하지 않고 수색을 이어나갔다.
이미 충분히 남는 장사였기 때문이다. 이건 그저 혹시 모를 추가적인 보상을 놓치지 않기 위한 절차였다. 이런 본격적인 던전에 발을 들인 건 정말 오랜만이었으니까.
“…흠.”
얼핏 보면 고문실 같은, 인간과 난쟁이를 대상으로 흑마법을 실험한 듯한 연구실과 불길한 주문 회로가 잔뜩 새겨진 용도를 알 수 없는 방 따위가 스쳐 지나갔다.
“북부 거인 왕국이 끔찍하게 타락했었다는 건 확실히 알겠군.”
샬롯이 혀를 차며 말했다.
이안이 덤덤하게 대꾸했다.
“저 조각상들이 이런 과정을 거쳐서 만들어진 건지도 모르지.”
“하지만 저들 중에 마법사는 없었던 것 같은데….”
“마법사는 다 죽였겠지.”
“……!”
“여왕은 힘에 대한 집착이 엄청났다. 공허의 비밀을 공유한 마법사들을 살려 둘 리가 없지. 다 죽였거나, 어쩌면 더 큰 힘을 얻기 위한 제물로 바쳐버렸을지도.”
“설득력 있는 말이군…. 역겨운 주문쟁이 다운 방식이기도 하고 말이야. …그렇다고 네가 역겹단 얘긴 아니다, 이안.”
“뭐, 틀린 말은 아니야. 나도 예외는 아니고.”
이안은 다른 부분에서 의문을 느끼고 있었다.
‘지금까진 공허의 힘을 끌어다 쓰면서 유지했다고 쳐도, 왜 아직도 어두워지질 않는 거지?’
궁전을 밝히는 광원이 아직도 유지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단죄의 검도 여전히 침묵했다.
여기가 엄청나게 깊은 땅속이라 그런 걸 수도 있지만. 마경이 아직 깨지지 않은 거라면, 여왕이나 악마가 아닌 다른 동력원이 있다는 얘기였다.
물론, 의문을 해소하기 위해 벽을 부수고 다닐 생각까진 없었다.
최악의 가정이지만, 이 지하 궁전 역시 마법으로 유지되고 있는 것일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호기심을 풀겠답시고 들쑤시다 궁전이 무너지기라도 하면, 그보다 더한 개죽음은 없으리라.
‘뭐, 용의 둥지였다니까. 용의 비전 같은 걸 수도 있겠지….’
파라락-
그때, 입구 근처의 통로들을 수색하러 간 테사이아가 돌아왔다.
이번엔 아예 빈손이었다.
“말도 안 돼. 이 넓은 공간에 쓰레기밖에 없다니….”
그녀가 허탈한 표정으로 중얼댔다.
샬롯이 콧방귀를 뀌었다.
“탐욕은 확실히 귀쟁이의 본성인 모양이군.”
“난 그냥 내 걸 가져보고 싶은 것뿐이거든? 내 소유물이라고 할 만한 게 이 누더기뿐이란 말야.”
샬롯이 뭐라 반격하려는 찰나, 이안이 입을 열었다.
“저 앞도 다 허탕인 거냐?”
“여기보다 더해. 거긴 병사나 하인들이 쓰던 공간 같아. 낡아빠진 고철덩이들이 놓인 방 같은 거나 몇 개 있는 게 전부야. 내가 볼 때 여긴-”
“…고철덩이들이 놓인 방이, 몇 개나 있다고?”
이안이 말을 잘랐다.
테사이아가 어깨를 으쓱였다.
“정확히는 세 개야. 둘은 거인들이 쓰던 걸 방 같고. 하나는 인간이나 난쟁이들이 쓰던 공간 같은데.”
“……!”
샬롯이 이안을 돌아보는 가운데, 테사이아가 해맑게 덧붙였다.
“거인들은 정말 인간이랑 난쟁이를 노예로 부렸나 봐. 큰 것들이랑 작은 것들을 완전히 분리해 뒀어. 큰 것들 방은 화려한데, 작은 것들 방은 초라하고.”
“그렇군. 그럼….”
고개를 끄덕인 이안이 테사이아를 마주 보았다.
“그 초라한 방으로 안내해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