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Dark Fantasy Villain RAW novel - Chapter 89
089화
사그라들던 안광이 폭발하듯 분출된 건, 바로 그 직후였다.
경련하며 축 늘어지던 군단장의 전신에 순식간에 힘이 되돌아왔다.
동시에 전해지는 심상치 않은 마력의 울림.
‘이런, 시발.’
인상을 구긴 이안이 놈의 가슴을 박차며 뒤로 몸을 날렸다.
“크… 오오오오-!”
콰아아아-
군단장의 전신에서 냉기의 폭풍이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카가가각-
냉기를 잠시 막아내던 휘몰아치는 방벽이 찢겨나갔다.
쩌저적, 튕겨 나가 바닥을 구르는 이안의 전신에 얼음꽃이 피어올랐다.
인상을 찌푸리는 와중에도, 이안은 포효하며 일어선 군단장을 바라보았다. 놈이 등에 멘 거대한 전투 망치를 뽑아 들고 있었다.
‘…결국 저걸 뽑는군.’
이안의 입가에 쓴웃음이 스쳤다.
게임에서 군단장의 전투 페이즈는 크게 3단계로 이루어져 있었다.
봉인에서 풀려난 직후의 맨손. 그리고 허리춤의 쌍검을 뽑아, 냉기 칼날과 충격파를 날려 대는 2단계.
마지막이 저 전투 망치였다.
전신에 냉기 폭풍을 두른 채로 접근하는 플레이어의 움직임을 둔화시키고, 망치로 후려치는 것이다.
단순하지만 파훼하기 쉽지 않은 강력한 패턴이었다.
저 망치에 정타를 얻어맞으면 즉사였으니까.
전투 망치의 크기로 미뤄 볼 때, 현실이 된 지금도 결과가 다를 것 같지는 않았다.
쿵.
군단장이 힘껏 한 걸음을 내디뎠다.
일어서려던 이안은 다리가 편하게 움직여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주위에 번진 서리가 전투화와 각반, 그리고 그가 땅에 딛고 있는 장갑 표면까지 뒤덮여 있었다.
시린 한기가 뒤늦게 전해졌다.
‘염병하네, 진짜.’
이안이 힘껏 팔다리에 맺힌 얼음을 떨쳐내는 그때, 군단장의 시선이 문득 옆으로 돌아갔다.
놈의 안광이 분노로 타올랐다.
타타타탓-!
샬롯이 돌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군단장의 시선을 자신에게 돌리려는 모양.
하지만 지금은 아까와는 상황이 달랐다.
“멈춰!”
이안이 소리쳤다. 하지만 샬롯의 귀에는 제대로 닿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그녀는 이미 군단장의 주위로 휘몰아치는 얼음 폭풍으로 접어든 후였으니까.
쩍, 쩌적-
샬롯의 돌진이 조금씩 느려졌다.
그녀의 전신이 얼어붙고 있었다.
갑옷의 표면뿐 아니라, 그녀의 검은 털 위로도 성에가 맺혔다.
“크- 아아아아-!”
샬롯이 포효하며 돌진을 이어 갔다.
그녀의 몸을 덮던 얼음이 깨져 나갔다.
‘죽고 싶은 것처럼 싸운다더니.’
생각하면서도, 이안은 쉴 틈 없이 빙하 장벽을 시전하고 있었다.
군단장이 머리 위로 전투 망치를 치켜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샬롯은 물러서거나 피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사실 이미 그게 가능하지 않다는 걸 본인도 알고 있으리라.
군단장이 저 망치를 내려치면, 다음 순간 남은 건 한때는 샬롯이라 불렸던 얼어붙은 고기 파편뿐일 터.
쩌저저적-
이안이 샬롯과 군단장의 사이로 손을 내뻗었다.
두꺼운 얼음 장벽이 순식간에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저 일격으로부터 샬롯을 완전히 보호할 만큼 솟아오르기엔 시간이 부족해 보였다.
파라라락-!
쏜살같이 뻗어나가는 출렁이는 은빛 덩어리가 시야에 들어온 건 그 직후였다.
이안은 그제야, 이대로면 샬롯이 죽으리라 생각한 것이 자신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콰지지직-!
힘껏 내리친 전투 망치가 아직도 솟구치는 중인 빙하 방벽을 깨부수며 떨어져 내렸다. 테사이아가 샬롯을 낚아채 집어 던진 건 거의 동시였다.
그 과정에서 일순간 느려진 테사이아의 몸을, 방벽을 깨부수며 떨어진 망치가 스치고 지나갔다.
쿠우웅-!
바닥을 친 망치에서 충격파가 터져 나왔다. 말려든 흡혈 요정을 바닥에 한차례 처박고, 벽면까지 단숨에 날려 버리기 충분하고도 남는 위력이었다.
콰드득-!
벽에 함몰된 것처럼 처박힌 테사이아에게서 끔찍한 소리가 터졌다.
“테사…?!”
똑같이 벽에 처박혔으나 별것 아닌 충격만을 받았던 샬롯이, 그제야 눈을 치켜떴다.
벽에 박혀 있던 테사이아가 너덜너덜해진 모습으로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녀가 입은 충격을 증명하듯 사방으로 튄 핏방울들이, 평소처럼 곧바로 그녀에게 모여들지 못하고 그저 흘러내렸다.
샬롯은 더 볼 것도 없이 테사이아를 향해 내달렸다.
방금 그녀가 자신을 살렸음을 모를 리 없는 그녀였다.
촤아악-
미끄러지듯 멈춰선 샬롯이 테사이아를 붙잡아 들었다.
온몸의 뼈가 다 으스러지고 살이 터진 끔찍한 몰골.
의식을 잃은 듯, 샬롯에게 붙잡히고도 잠깐 꿈틀댄 게 전부였다.
“제기랄….”
탄식한 샬롯이 허리춤에서 단검을 뽑아 들었다.
망설임 없이 자신의 손아귀를 그은 그녀가, 테사이아의 으깨진 입술 사이로 피를 흘려 넣었다.
그녀는 테사이아가 이런 상태에서도 죽지 않음을. 시간이 많이 필요할 뿐, 충분히 본 모습으로 돌아올 수 있음을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건 빚의 문제였다. 평생 마족 취급을 받으며 살아 온 수인에겐 그 무엇보다 혐오스러운 존재인 진짜 마족에, 심지어 원수나 다름없는 요정이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목숨까지 빚지고도 가만히 버려둘 수는 없었다.
테사이아의 으스러진 목덜미가 꿀렁댔다.
하지만 그건 무의식적인 본능의 발현일 뿐이었다.
그녀의 의식은 여전히 돌아오지 않았다. 의식이 있다 한들, 눈알이 다 터지고 온몸이 다 으스러진 상황에선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었겠지만.
콰아아-
번질 리 없는 후끈한 열기와 함께 등 뒤가 대낮처럼 밝아진 건 그때였다.
“……?!”
뒤를 돌아본 샬롯의 눈이 커졌다.
어느새 한 차례 더 망치를 내려친 군단장의 모습. 그리고 그 망치를 아슬아슬하게 피한 이안의 검에서 물결처럼 넘실대며 끝도 없이 뿜어져 나오고 있는 샛노란 화염.
화염 해일이 군단장의 냉기 폭풍과 맞부딪치면서, 오히려 화염 폭풍이 되어 휘몰아치고 있었다.
그 한복판에 선 이안의 얼굴은 평소처럼 무표정했지만, 군단장을 노려보는 눈빛만큼은 그 어느 때보다도 흉흉하게 번뜩였다.
콰르르르-
장내를 얼어붙게 하던 냉기가 어느새 완전히 열기로 바뀌었다.
“……!”
넘실대며 사방으로 번지는 불의 물결이 자신 쪽으로도 가까워지자, 눈을 치켜뜬 샬롯이 테사이아를 안아 들며 몸을 날렸다.
군단장과 이안으로부터 가장 먼 기둥 뒤에 몸을 가린 그녀가, 기둥 너머로 고개를 내밀어 전장을 돌아보았다.
지금부터는 그녀가 끼어들 영역이 아니었다.
콰아아아아-
화염 폭풍이 제멋대로 날뛰게 풀어 둔 채, 불길이 휘몰아치는 검을 움켜쥔 이안이 솟구쳤다.
***
‘이게 되네.’
무표정하게 군단장의 얼굴을 노려보는 것과 달리, 이안은 내심 놀라고 있었다.
냉기 폭풍을 상쇄하기 위해 임기응변으로 펼친 화염 해일이, 생각보다 더 큰 효과를 발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냉기를 중화시키는 정도로 끝나지 않고 오히려 화염 폭풍으로 승화될 줄이야.
그의 검에 휘몰아치는 불길도 마찬가지였다.
바람 칼날을 따라 넘실대면서, 불의 검을 움켜쥔 것처럼 변한 것이다.
‘전에 할 땐 잘 안 됐었는데.’
이안은 전에도 비슷한 시도를 했던 적이 있었다.
바람 칼날이나 휘몰아치는 방벽에 불길이 맺히게 만들 수 없을까 싶어, 화염구나 화염 방사를 더해 본 것이다.
물론 그때는 폭발에 바람이 흩어지거나 불길이 사그라들 뿐이어서, 더는 시도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화염 해일은 아니었다.
‘화력 부족이었나? 아니면 불길의 성질이 다른가?’
어쩌면 마법에 담긴 마력량의 차이 때문일지도.
어느 쪽이건, 사실 아무래도 상관없는 부분이었다.
“놀랐냐, 새꺄.”
코앞까지 다가온 군단장의 안광을 노려보며 내뱉은 이안이, 검을 놈의 드러난 눈구멍을 향해 내뻗었다.
콰르르르르-
검신에 맺힌 불길이 군단장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냉기를 잡아먹으며 타올랐다. 일렁이던 안광이 바스러지고, 검날이 군단장의 눈두덩이를 파고들었다.
놈의 저항력 따윈, 지금 신경 쓸 바가 아니었다.
전투 망치를 꺼내 들었다는 것 자체가, 놈의 생명력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증거였으니까.
“오오오오-”
군단장의 입에서 고통 섞인 비명이 터져 나왔다. 이안은 이번에는 방심하지 않았다.
놈의 눈두덩이에 깊숙이 박힌 검날이 붉게 달아올랐다.
콰아아아아-
뒤이어 샛노란 불길이 폭발하듯 터져 나왔다. 혼돈력을 머금은 화염 방사. 불길은 군단장의 뒤통수를 뚫고 뿜어져 나오지 않았다. 대신 놈의 몸속으로 뻗어나가, 내부를 산 채로 불살랐다.
콰르르르르-
비명조차 흘러나오지 않는 군단장의 벌어진 입에서 불길이 혓바닥처럼 넘실댔다.
놈의 전신에서 끊임없이 번져 나오던 냉기가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이안은 마지막 한 가닥의 불길까지 남김없이 쏟아부었다.
푸스스….
불길이 잦아들었다. 냉기 폭풍을 타고 휘몰아치던 불길이 사방으로 바스러지며 수많은 불똥을 허공에 흩뿌렸다.
남은 건 벌겋게 달아오른 단죄의 검과, 군단장의 모든 구멍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뿐.
철크렁-
구단장의 손아귀에서 전투 망치가 떨어졌다.
서 있던 군단장의 몸이, 이안이 매달린 앞쪽으로 통나무처럼 기울어졌다.
재빨리 뒤로 몸을 날린 이안이 바닥을 굴렀다.
쿠웅-
군단장이 쓰러졌다. 그대로 일어선 이안은, 아직 열기가 가시지 않은 단죄의 검을 움켜쥔 채 놈의 옆으로 다가섰다.
그가 양손으로 움켜쥔 검을 치켜들었다.
콰직! 콰직!
이안은 군단장의 목을 연달아 내리쳤다. 아름드리나무를 베어내는 듯한 감촉.
콰득-
마침내 군단장의 머리가 완전히 몸에서 분리됐다. 푸학, 놈의 전신에서 푸른 마력이 뿜어져 나와 허공에 넘실대는 불씨를 꺼뜨리며 증발했다. 오싹한 한기가 이안의 전신을 핥고는 흩어졌다.
“하아… 하아….”
참고 있던 숨을 몰아쉬며, 이안이 굽혔던 허리를 들었다.
불씨까지 모두 꺼지면서 상대적으로 더 어두워진 시야 한복판에, 퀘스트 완료 창이 떠올랐다.
뒤이어 레벨 업을 알리는 확인 창이 이어졌다.
이 세계에 떨어진 지 1년 반 가까이가 지난 지금, 비로소 레벨이 하나 오른 것이다.
동시에 그건 곧, 상위를 넘어 고위 마법을 익힐 수 있는 영역에 첫발을 들였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게임이었을 때는 끝내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영역.
하지만 이안은 큰 기쁨이나 희열에 휩싸이지 않았다.
“…….”
그저 숨을 고르며 눈을 감은 채, 청각에 온 정신을 집중할 뿐.
군단장의 죽음을 깨달은 거인 군단이 눈을 뜨지 않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이 빌어먹을 세상이라면 충분히 가능한 뒤통수였다.
다행히도 거인의 포효나 발소리 따위는 들려오지 않았다.
들리는 건 자신의 펄떡대는 심장 소리와, 기둥 뒤에 몸을 숨긴 수인의 숨결뿐.
“후….”
비로소 검을 회수한 이안이 비틀댔다.
집중력을 너무 오래 유지하고 마력을 소모한 여파가, 비로소 밀려들었다.
게임에선 레벨이 오르면 체력과 마력이 일정 비율로 회복되었었는데.
지금은 딱히 그런 징후를 느낄 수 없었다. 그저 지독한 피로감뿐.
“…끝났다. 나와라.”
비틀대며 걸음을 옮기던 이안이 내뱉었다.
기다렸다는 듯 샬롯의 길고 단단한 실루엣이 드러났다.
그녀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이안, 아까는-”
“날 구하려고 한 거지. 알고 있다. 테사는?”
“…회복되고 있는 것 같다. 아직 의식은 없지만.”
이안은 샬롯의 나지막한 목소리에 걱정이 묻어 있음을 느꼈다. 아주 희미했지만, 평소 테사이아를 대할 때의 냉랭한 말투와는 분명한 차이가 있었다.
미운 정이라도 든 건가.
“그래. 야영지를 꾸릴 거다. 그 녀석도 회복해야 하고… 나도 한계니까.”
내뱉으며, 이안은 아공간에 손을 넣었다.
내부를 거의 가득 채우고 있던 커다란 고서들이 우르르 떨어졌다. 아공간 구석, 땔감으로 쓰기 위해 미리 챙겨 둔 나뭇가지들도 전부 꺼냈다.
화륵-
이안이 던진 불덩이가 고서에 떨어졌다.
학자나 마법사에겐 하나하나가 대단한 가치를 지녔을 거인 여왕의 연구 기록들이, 불길에 휩싸여 타들어 갔다.
이어 아공간에서 봉인함을 꺼낸 이안이 모포와 붕대, 보존 식량을 대충 꺼내 샬롯에게 건넸다.
테사이아에게 모포를 덮어주며 샬롯이 말했다.
“혹시 모르니 내가 불침번을 서겠다. 쉬어라, 이안.”
“저 문이 열리거나, 뭔가 다가오는 소리가 나면 바로 깨워라.”
“그러지.”
생각할 것들이 잔뜩 남아 있었지만, 지금은 도저히 여력이 없었다.
깨우란 말이 무색하게, 이안은 눕자마자 정신을 잃었다.
심연으로 끝없이 추락하는 꿈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
이안은 소리 없이 눈을 떴다.
싸늘하고 칙칙한 공기와 흐릿한 어둠.
모닥불의 온기가 아직도 느껴졌다.
한나절은 기절할 줄 알았건만.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지나지 않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뜻밖에도 컨디션이 나쁘지 않았다.
정신이 맑았다. 몸도 푹 쉰 것처럼 상쾌하고, 마력 소모의 후유증도 느껴지지 않았다.
‘레벨 업 덕분인가…?’
게임일 땐 즉각적으로 회복되던 체력과 마력이, 이제는 어느 정도 시간을 두고 회복되는 것일지도 몰랐다.
어찌 됐건 나쁜 일은 아니었다.
아직 지하 유적 내부였으니 더더욱.
“…일어났군.”
그가 몸을 일으키자, 옆에서 샬롯의 잠긴 목소리가 번졌다.
놀랍게도 그녀는 아직 깨어 있었다. 물론, 주황색 눈동자에 피로가 덕지덕지 묻어 있긴 했지만.
“내가 얼마나 잤지?”
“몇 시간. …어쩌면 그 이상. 사실, 전혀 모르겠군.”
샬롯이 느릿느릿 대답했다. 피식한 이안은, 자신이 덮고 있던 모포를 그녀의 모포 위에 얹었다.
“자라. 반나절 뒤에 깨워 줄 테니.”
“알겠다….”
샬롯이 옆으로 쓰러지듯 누웠다.
그녀의 숨결이 곧바로 잦아들었다.
‘지금까지 버틴 게 용하군.’
이안은 잦아드는 모닥불에 나뭇가지와 책을 더 얹었다. 땔감이 거의 떨어져 가고 있었다.
지하에서 이렇게 불을 피워도 되는 건가 하는 생각이 뒤늦게 이어졌다.
하지만 숨 쉬는 데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었고, 여전히 공기가 싸늘한 걸 보니 모종의 환기 시설이 갖춰져 있는 모양이었다.
겉보기론 전혀 알 수 없었지만.
“…….”
이안은 여전히 미동도 없는 테사이아의 상태를 확인했다.
처음에는 가죽만 덮인 연체동물 같더니, 이제 거의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입가에 불그스름한 자국이 남은 걸 보니, 샬롯이 피를 더 먹인 모양이었다.
‘눈 뜨자마자 미쳐 날뛰는 걸 볼 일은 없겠네.’
고개를 끄덕이며, 이안에 바닥에 떨어져 있는 수통과 육포를 집어 들었다.
아무리 체력이 회복되었더라도 먹어 둬야 했다.
기계적으로 턱을 움직이면서, 이안은 저만치에 쓰러진 군단장의 시신을 돌아보았다.
오랜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죽음을 맞이한 고대 거인의 시신은, 다시 봐도 전혀 현실감이 없었다.
사실 지하 궁전에 발을 들인 이후의 기억이 전부 그랬다.
‘어떻게 예상할 수 있었겠냐고….’
생각해 보면 왕 살해자라는 샬롯의 말이 아예 틀린 건 아니었다.
고대 거인 왕국은, 이제 정말 완전히 멸망해 버린 셈이었으니까.
이안은 게임에서의 기억을 곱씹었다. 광기에 뒤덮인 망령들이 북부 장벽으로 몰려들던.
‘…여왕이 통제력을 잃어서 생긴 일이 아니었을지도 모르겠군.’
그때는 끝내 여왕이 악마를 흡수한 걸지도 몰랐다.
아니면 거꾸로, 그녀에게 봉인된 악마의 반란이 성공했던 걸지도.
어느 쪽이건 만약 그렇다면, 이안이 여왕과 악마를 모두 죽인 지금은 그때와 같은 대규모 전투는 일어나지 않을지도 몰랐다.
북부가 맞이하게 될 미래 역시 달라질지도 모른다는 의미였다.
‘시간이 지나면 알게 되겠지.’
식사를 끝낸 이안이 일어섰다.
이제 미뤄 뒀던 일들을 처리할 시간이었다.